<김일열 시조 해설>
시서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시조집
김민정(시조시인, 문학박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벽파 김일영시인은 시서화 3가지 능력을 다 갖춘 시인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갖추기는 쉽지 않은데 그런 시인 중의 한 사람이라 재주가 많은 시인임이 분명하다. 시와 그림이 어울리고 거기에다가 자신의 필체까지 곁들인 이번 시조집은 그래서 더 의미 있고 멋진 시조집이 되리라 확신한다.
예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시서화를 곁들인 것을 족자나 액자로 많이 간직하기도 했다. 지난 봄 출간된 필자의 시조집인 『펄펄펄, 꽃잎』에는 김일영 시인이 그린 그림과 필자의 시조가 콜라보레이션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평하면서 유종인 시인은 시화(詩畵)의 친연성 (親緣性)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번 김일영의 시조집에도 그대로 해당된다고 본다.
“일찍이 송대(宋代) 동파(東破) 소식(蘇軾)은 시와 그림의 친연적인 어울림을 갈파한 적이 있다. 이른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깃들었네[詩中畵 畵中詩]’라고 읊었던 바 그 태생적인 근친성은 작금의 시류(詩類/時流)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이번 시조와 그림이 어울린 시조화집(時調畵集)은 그런 시화의 친연성을 구성진 화필의 그림과 어울린 시조를 통해 새뜻하게 구현해 내고 있다. 시조와 그림의 이런 콜라보레이션(collabaration)은 인접 예술 장르 간의 격절이나 격조(隔阻)를 해소 완화하고 그 어울림을 통해 상호 심미적 영향을 한층 완숙한 지경으로 이끄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자신의 시조 시편에 그림을 어울려 놓는 구성을 이룬 것은 단순한 기호(嗜好) 이상의 예술 장르 간의 친연성(親緣性)을 본보기로 드리운 나름 실험적이고 전향적인 발상이지 싶다. 보는 시조와 읽는 그림이라는 이 입체화된 시조집의 구성은 그 자체로 시조 읽기의 독법(讀法)을 다양화하고 장르 간의 단절을 장르 간의 호흡으로 완충하고 결속하는 우호적인 측면이 두드러진다. 근자에 디카시라는 시와 사진의 장르적 친화 장르가 개척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게 시와 그림의 어우러짐은 이 시조화집(時調畵集)의 당연한 특색이면서 시인의 분방하고 의연한 시적 개성을 낙락하니 관람하는 새뜻함이 여실하다. 시조가 가진 언어적 수사(修辭)의 뉘앙스와 그 활달한 시적 의장(意匠)을 회화적 미감(aesthetic sense)으로 도드라져 보태는 이 시조와 그림의 어울림은 오래된 동양 회화의 구성과도 그 맥(脈)이 닿아있다 할 수 있다.”
김일영 시인은 감수성이 아주 풍부한 편이다. 그가 시서화에 능하고 이미지즘 처리가 뛰어나는 것은 그의 그림에 대한 소질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한 재능이 그의 감각적 시조에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특히 계절을 노래한 작품이 많다. 시조가 시절가조라는 말에서 유래했듯이 그의 작품들이 거의 시절가조에 속한 것들이 많다. 그때그때의 시절에 맞는 작품을 쓴다는 뜻이다.
1. 봄이 물든
남에서 부는 바람 꽃물 든 노랑나비
나의 뜰 그대의 뜰 이 봄은 물이 든다
바람이 지나간 길목 유채꽃이 앉았네.
-「봄은 어디에」 전문
이 작품에서는 봄이 보이는 풍경을 말하고 있다. 봄이란 계절이 가져다주는 감각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바람은 살갗을 스쳐가는 촉각적 이미지가 강하다. 그 바람으로 노랗게 물든 나비가 등장한다. 바람탓은 아니겠지만, 마치 바람에 물든 것처럼 표현되어 있어 공감각적 이미지가 나타난다. 봄바람은 나비뿐만 아니라 나의 뜰과 그대의 뜰까지 물들인다. 갖가지 꽃을 피우고 새싹을 피우니 색색들로 물이 드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바람이 지나간 길목엔 유채꽃도 피어 노랗게 앉았다고 한다. 유채꽃, 개나리꽃. 산수유꽃, 생강꽃 등 봄의 대표적 색상 중의 하나이기도 한 노랑색이 이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화사한 봄이 머무는 자리는 노랑나비, 나의 뜰과 그대의 뜰, 유채꽃 등으로 바로 그곳에 봄이 있다. 다정다감하고 밝은 색채로 나타나는 봄의 모습이 시각적으로 잘 표현된 작품이다.
봄 가뭄 타던 가슴 뜨락이 흥건하고
목마른 꽃잎마저 촉촉이 적시던 날
새하얀 수선화 꽃잎 함박 웃는 이 아침.
-「봄비 내리는 아침」 전문
이 작품은 봄비가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비로 하여 즐거운 뜨락과 꽃잎들과 수선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가뭄을 타던 가슴을 적시는 봄비, 뜨락뿐 아니라 내 가슴도 흥건히 적시고 있다. 가뭄 타는 뜨락의 나무와 꽃들. 그것을 바라보며 그들만큼이나 타들어 가던 화자의 가슴이었을 것이다. 비를 바라보며 그 사물들의 같은 마음이 되어 함께 기뻐하는 화자를 만날 수 있다. 감정이입에 의한 동질감. 사물과 하나로 동화되는 것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목말라 축축 처지던 꽃잎마저 봄비는 촉촉이 적셔 생기있게 살아나게 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인 수선화 꽃잎이 함박 웃음을 머금고 있는 아침이다. 그 봄비로 하여 마냥 싱그러운 아침의 모습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의 마음도 마냥 싱그럽게 피고 있는 상황이다.
가슴에 띄우고픈 무지개 피던 하루
기도로 끼워 넣을 애틋한 흔적 하나
땡그랑 울리는 소리 떨어지는 그리움
-「풍경소리」 전문
무지개는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어렸을 그때처럼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꿈에 부풀게 한다. 위즈위드의 시가 아니라도 무지개를 보면 동심에 젖게 된다. 무지개끝은 물이 펄펄 끓는다고 하여 그 끝을 찾으러 가고 싶어했던 어린 날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슴에 띄우고픈 무지개가 피던 하루라면 그 설레임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무언가 꿈에 부풀거나 즐겁거나 행복한 하루, 화자의 기분을 들뜨게 한 하루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화자는 중장에 오면 '기도로 끼워 넣을 애틋한 흔적 하나'라고 한다. 그만큼 화자에게 보호하고 아껴야 할 소중하고 애틋한 흔적으로 남는 것이리라. 그리고 종장에 오면 '땡그랑 울리는 소리 떨어지는 그리움'이라고 한다. 결국 가슴을 울리는 그 종소리는 그리운 이에 대한 그리움이며 사랑의 감정일 것이다. 그렇게 가슴에 풍경소리가 울리는 그리움의 시간을 이 작품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2. 여름 소나기 같은
삼복도 다 지난 골 말매미 목이 쉬고
거칠은 산길 따라 묵정밭 언저리엔
등 굽은 청솔 아래서 선산 지킨 아버지
-「등 굽은 청솔」 전문
이 작품에서는 삼복도 다 지난 골이라 하여 여름이 지난 계절이다. 한여름이 지난 계절인 늦여름 말매미가 목이 쉬도록 우는 묵정밭 언저리 풍경이다. 화자는 등이 굽은 청솔처럼 그렇게 묵정밭 언저리에서 선산 지킨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다. 못난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좋은 나무들은 그 쓰임새를 생각하고 모두 잘려 나가니 남는 것은 못생기고 쓸모없는 나무만 남아 그것들이 선산을 지킨다는데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 작품의 화자도 그렇게 등 굽은 청솔 아래서 선산을 지켜왔다며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며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못나서였든 본인의 선택이었든 그렇게 선산을 지키고 있는 아버지를 마치 등 굽은 소나무처럼 표현하며 안쓰러워하는 아들의 마음이 드러난다. 아버지의 삶은 ‘거칠은 산길 따라 묵정밭 언저리’라고 하여 등 굽은 소나무가 서 있는 장소의 척박함을 말하는 한 편 아버지의 삶의 모습의 표현이기도 하다. 등 굽은 청솔과 아버지를 동일시 하고 있는 작품이다.
조릿대 이는 바람 고요를 흔들다가
단청 끝 청동붕어 비늘을 훑고 가네
적막을 깨우는 소리 법문 한 줄 읊는 소리
-「산사의 풍경소리」 전문
조릿대란 볏과에 속하는 대의 하나로 화살대 재료로 알맞은 가는 대를 말한다. 그 대에 바람이 일고 있는데 고요를 흔들고 있다고 한다. 고요한 가운데 바람이 일어 조릿대를 흔들고 그 바람은 연속적으로 단청 끝 청동붕어조차 흔들고 있다. 바람의 모습을 청동붕어 비늘을 훑으며 가고 있고 있는 것 표현하고 있어 사물이 살아 움직이는 활유법을 쓰고 있다. 산사의 풍경이 울리고 그 풍경 소리는 산중의 적막을 깨우는 소리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바람이 산사의 풍경을 울리고 산사 주위로 퍼지는 풍경소리를 산사가 마치 법문 한 줄 읊는 소리로 표현함으로써 화자의 불심의 깊이를 알게 하고, 사물에 대한 천착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조릿대가 있는 산사에 바람이 불어 조릿대가 흔들리고 풍경이 우는 모습이 독자에게 연상되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청각과 시각의 공감각의 이미지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떠오르게 하는 수작이다.
징검돌 안부 문자 먼동 트면 함께 온다
못 다한 소곤거림 둘 사이 징검다리
또 하루 여울목 인연 이어주는 돌다리
-「사랑의 징검돌」 전문
요즘은 카톡과 문자가 우리의 생활일부를 차지하며, 하루를 정신없게 하기도 한다. 수없는 문자, 카톡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든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하는 중에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데 한 몫을 단단히 하기도 하고 때로 실수를 하게도 한다. 이런 경우는 문자나 카톡의 역기능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랑의 문자나 카톡일 때는 두 사람에게는 순기능의 역할이 강하다.
연인들 사이의 사랑의 문자라면 얼마나 기다려지는 문자인가. 수시로 들여다보며 사랑하는 사람의 문자가 왔는가를 확인하는 일은 어쩌면 삶의 기쁨을 알게 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들을 설레게 하는 일이 틀림없다. 이 작품에서는 징검돌 안부 문자, 즉 사랑의 문자가 먼동이 트면 함께 온다고 한다. 어제 못한 사랑의 소근거림이, 둘 사이의 징검다리가 되어 또 하루 여울목을 건너도록 이어주는 사랑의 돌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문자를 매개로 하는 화자의 따뜻한 마음과 정감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작은 사물을 통해서도 인간다운 정의 모습을 확대해가는 김일영 시인의 섬세한 마음과 사물에 대한 천착의 태도, 사유의 깊이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3. 가을 담은 쑥부쟁이
밤하늘 별빛 먹고 고샅길 누운 몸은
무서리 하얗게 쓴 노숙의 일상이다
남보라 연서를 품고 웃음빛이 환하다
-「쑥부쟁이」 전문
가을이면 보라색 꽃을 피우는 쑥부쟁이, 그것을 소재로 쓴 작품이다. 고샅길에서 밤하늘의 별빛을 먹고 누워 있는 쑥부쟁이, 무서리를 쓴 노숙의 일상이지만 예쁜 보라색 꽃을 피우고 길가에 환하게 피어 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피어 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이거나 남을 위해서가 아니며 남에게 위안을 주거나 남에게 예쁘다는 평가를 받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한 생명으로 그렇게 피어 있을 뿐이며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렇게 의연하게 어여쁘게 피어 있는 그 아름다움을 화자는 ‘남보라 연서를 품고 웃음빛이 환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산중의 고샅길이지만 쑥부쟁이 꽃이 있음으로 하여 그 길은 그만큼 밝고 환하고 아름다운 길이 되는 것이다. 아름답게 보아달라고 조르지 않더라도 꽃은 피어 있는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다운 것이다. 보는 이의 눈길과는 상관없이. 쑥부쟁의 삶이 비록 보잘것 없어 ‘무서리 하얗게 쓴 노숙의 일상’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살아가는 그의 일생은 가치없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가치있게 사는 것이다. 작은 풀꽃 한 송이도 예사로 핀 것이 아니고 나름 환한 가치가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꿈이지 살 꼬집다 아파라 생시인 걸
도톰한 입술 사이 질끈 깨문 사랑 하나
그 입술 뜨거운 연민 활화산이 터졌다
-「석류 터졌다」 전문
「석류 터졌다」는 작품을 보면 잘 익은 가을이 너무 익어 터진 느낌이 온다. 굳이 가을이란 어휘가 없어도 가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가을이 되어 석류가 터져 붉은 껍질 속의 붉은 석류알이 가지런히 다 보이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붉고 환하다. 그것을 홍보석으로 보는 시인도 있고, 빠개 젖힌 가슴으로 표현한 이도 있다.
김일영 시인은 ‘도톰한 입술 사이 질끈 깨문 사랑 하나’로 표현하고 있다. 석류알의 가지런한 모습을 입술 사이 ‘질끈 깨문 사랑 하나’로 표현한 것이다. 종장에서는 ‘그 입술 뜨거운 연민 활화산이 터졌다’며 석류 껍질이 터지며 붉은 열매를 보이고 있는 모습을, 입술을 벌리고 뜨거운 연민인 활화산이 터졌다며 쏟아내는 붉음을 보고 있다.
껍질도 붉고 안도 붉어 정열적인 모습이 생동적인 모습의 활화산으로 표현되어 있다. 작은 석류 한 알에서 커다란 화산의 폭발까지 연상하고 있는 김일영 시인의 상상력이 대단해 뵌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작은 사물을 크게도 보고 큰 사물을 작게도 보는 자유자재의 시각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시인의 자유와 낭만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의 삼라만상을 상상해 볼 수 있고, 재단해 볼 수 있는 그 무한한 자유가 바로 시인, 아니 문학인의 것이다.
베풀고 끌어안고 비워서 아름다운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날 줄 알고 있다
당신만 가슴에 품고 낙엽 따라 가는
-「인생은 낙엽이다」
이 작품 속의 화자는 인생은 낙엽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남에게 베풀 것은 베풀고 끌어안아야 할 것은 끌어안고, 또 비울 것은 비워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날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답듯이. 그러한 것을 알고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한 중에도 당신만 가슴에 품고 낙엽 따라 가는 것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살아 간다는 뜻일 것이다. 인생은 낙엽처럼 허무한 것이나 그 속에 품을 사랑이 있어 가치가 있는 것이고 살만한 것이리라. 이러한 것을 알고 그래서 소중한 그 사랑인 당신만 가슴에 품고 낙엽 따라 간다고 한다. 화자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인간의 삶에서 사랑을 뺀다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곧 시인의 생각이고 시인자신의 삶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낙엽처럼 살아가는 인생이기에 언제나 겸손하고 겸허하고 삶을 살면서 베출 것은 베풀고 용서도 하고 끌어안으며 때로 지나친 욕심 등응 비우면서 인간답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때가 되면 그러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할 줄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는 작품이다. 지천명을 지나고 이순을 지나온 나이, 삶의 모습이 보이는 나이다운 작품이다.
4. 소금기 섞여오는 겨울바람
소금기 섞여오는 바닷가 겨울바람
끝없이 밀려들다 부서지는 하얀 갈기
조가비 모래 속에서 지난 추억 속삭임
-「겨울바닷가」 전문
바다는 여름에 주로 많이 찾는 곳이다. 겨울에는 여름날의 추억을 되새겨보는 곳이다. 소금기와 함께 오는 겨울의 바닷가는 여름과는 달리 조금은 을씨년스럽고 추울 것이다. 또한 여름에는 바다에 들어가 수영도 하고 바다와 함께 노느라 짭조름하게 불어오는 소금기 밴 바닷바람도 못 느꼇을 것이다. 우리들 삶도 그랬을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그렇게 인생을 흘러보내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좋은 지 어떤 지 느껴보지도 못하고 지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다와 거리를 두고 보는 겨울에는 바닷바람의 소금기와 비릿한 바닷내음까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나온 삶의 모습도 보일 것이고, 앞만 보고 달리느라 정신없었던, 미처 몰랐던 것들이 보일 것이다. 겨울의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며 파도는 하얗게 갈기처럼 날리다가 부서지곤 하는 바다처럼, 거리감을 가지고 보는 바다,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바다인 것이다. 인생의 바다도 그렇고.
바다에 대한 지난 날의 추억을 조가비가 대신한다. 조가비로 하여 지난 추억을 불러내는 것이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지난 날의 추억을 돌아보게 하고 그 속삭임을 조가비에게서 듣는다. 장꼭또의 시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처럼 말이다.
순백의 숲속 아래 그림 같은 고향 산천
울 넘은 칼바람은 잠든 마을 깨우네
봄 오는 길목어귀에 이정표를 세울까
-「순백의 고향」 전문
고향은 언제나 그리운 곳이다. 자기의 유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고향은 그래서 언제나 순결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고향의 숲속은 순백의 숲이 되는 곳이며 거기에 고향은 그림처럼 앉아 있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눈 덮인 고향의 깨끗한 마을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하다. 온통 눈이 덮고 있는 마을, 그 고요함 속에 울을 넘는 칼바람은 봄이 오기 직전 가장 추운 겨울의 바람을 맞을 것이다.
고요히 잠든 마을 같은 고향을 칼바람이 깨우고 있다고 한다. 바람이 붐으로 하여 윙윙 우는 바람소리로 하여 정적으로 고요한 고향마을이 움직이는 있는 마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은 정(靜)의 정서에서 동(動)의 정서로 옮아가게 된다. 매서운 칼바람 때문이지만, 그러나 그 칼바람 뒤에는 봄이 오고 있다. 그러나 그런 깊은 겨울 뒤애는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오는 골목 어귀에 봄이 어디쯤 오고 있다는 이정표를 세울까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봄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봄이 몇 킬로미터 앞에 와 있는지 궁금해하는 마음, 고향마을에 희망이 봄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그 숱한 바람소리 휘청이며 출렁이는
쉼 없이 흔들리다 갈숲에 누운 숨결
사는 게 흔들림인 걸 바람으로 알았네
-「달래강 갈대숲」
겨울을 노래하는 작품 중에는 바람이란 소재가 많이 들어가 있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그 숱한 겨울의 바람소리는 스스로 휘청이며 출렁이고 있다. 그러다가 그는 갈숲에 숨결을 뉘이고 있다. 화자는 사는 것이 끊임없이 흔들림이라는 걸 갈대숲을 보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늘 흔들리며 그렇게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인생이든 갈대든.
바람소리는 갈대밭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우리들의 삶에서도 그렇게 끊임없이 불고 있고, 그렇게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걸 시인은 말하고 있다. 갈대밭에서 갈대를 흔들고 있는 바람이 갈대밭에 와서 숨결을 뉘이는 것을 보며 인생도 그렇게 갈대처럼 끊임없이 흔들리며 살아가고, 바로 그 속에 인간이 존재함을 간파한다. 파스칼이 말한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처럼 늘 그렇게 흔들리며 휘청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있어 인생은 위대한 것처럼 그러한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세우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것이다.
5. 한 줄 안부에 가슴 뛰는
살면서 무엇인가 기다린 그 시간은
가슴은 조바심에 그 순간 안절부절
두 손은 기도로 젖어 땀을 쥐고 있었다
현황판 환자이름 뚫어져라 보고 있네
초침이 돌고 있는 이 순간 너무 길다
인생은 고치며 사는 황혼 길에 서있네
-「보호자 대기실에서」 전문
김일영 시인은 계절에 대한 작품도 많이 썼지만 다른 소재에 대한 작품도 많이 쓰고 있다. 위 작품은 가족이 아플 때 느끼는 초조함과 간절함이 닮긴 작품이다. 아마 아내가 아플 때의 모습을 쓰고 있는 듯하다. 가족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 순간의 초조함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사계절 삶을 지고 길 따라 고된 걸음
발자국 손금 닳듯 그 모습 세월뒤란
삼각지 모퉁이 돌아 관심밖에 앉았네
-「자화상」 전문
「자화상」이란 작품에서는 김일영 시인의 삶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김일영 시인은 늘 겸손하고 겸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인생을 알고 가는 이의 모습을 닮아 있다. ‘사계절 삶을 지고 길 따라 고된 걸음’이라고 한다. 소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며 고된 자신의 길을 가듯, 이 작품의 화자인 시인 자신도 삶이란 길을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해진 운명인 손금같은 길을 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그러한 삶의 뒤란, 그렇게 가는 길은 삼국지 모퉁이 돌아가건만 타인들은 관심을 하지 않아 언제나 관심 밖에 있는 듯한 자신을 느낀다.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살던 사람도 나이 들면 모두의 삶은 쓸쓸해진다. 시인 자신도 세상사람들의 관심밖에서 살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다.
특히 요즘은 개인적인 삶들이 너무 바빠 자신 외에 타인에 대해서는 점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세태다. 자신들의 삶이 너무 바쁜 탓으로 정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화자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짧은 글 한 토막에 애틋함 심어지고
좋은 글 한 줄마다 깊은 정 스며드네
때로는 한 줄 안부에 가슴 뛰는 그리움
-「우리는」 전문
이 작품에선 글 쓰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정을 말하고 있다. 서로가 주고받는 짧은 글 속에 애틋함이 심어지고 좋은 글 한 마디로 깊은 정을 스미게 하고 때로는 한 줄 안부에 가슴 뛰는 그리움도 가져보는…. 잔잔한 삶 속에서 글을 쓰고 글을 전하며 또한 때로 그리움을 가져보는 글 친구에 대한 감정을 토로하는 작품이다. 작은 글의 나눔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은 것 같지만 실은 큰 삶의 행복이 아닐까.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 주고 안부를 전해 주는 일은 실로 큰 것이다. 사람이 온다는 것, 안부가 온다는 것은 관심 밖이 아닌 관심 안에 있는 것이므로. 소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므로... 시인은 그런 삶이 진실로 행복한 삶이고 가슴 뛰는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김일영 시인은 언제나 우리가 사는 삶의 주변에서 소재를 찾고, 작은 풀꽃 하나에도 깊은 정을 느끼는 예리한 눈, 섬세한 감각, 따스한 맘을 가진 시인이다.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사물의 정물화를 아주 잘 그리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섬세한 감각들이 그대로 그의 시조에도 스며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어느 작품을 보아도 따스한 인간미가 흐른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듯이 거짓 없는 그의 삶 또한 소박하고 진솔하고 아름답다. 그러한 진솔한 삶이 펼쳐내는 시조가 그림과 그가 직접 쓴 필체와 어울려 이번에 아름다운 시조집으로 탄생되어 나온다. 아름다운 가을, 한 시인의 아름다운 결실이 아닐 수 없다.
이번 김일영 시인의 시서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시조집 『000』 출간을 축하하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시조집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또한 앞으로도 더욱 아름다운 시조작품과 그림으로 주변을 즐겁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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