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화의 서정을 통해 긍정과 화해의 자아의식 표출
1. 동일화의 서정을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길
서정시의 가장 큰 장르적 특성은 동일화의 원리를 추구하는데 있다. 동일화에는 ‘투사’와 ‘동화’가 있는데 투사는 자아가 세계 속으로 투영되는 것이고 동화는 자아 밖의 세계가 자아로 들어오는 것이다. 때문에 동일화는 자아와 세계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자아 밖의 세계를 대결과 긴장으로 인식하지 않고 화해를 추구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기에 따뜻한 시선을 지닌 작품이 되는 것이다. 아래에 인용하는 두 작품도 그렇다. 인용한 위 두 작품들은 동일화의 원리를 잘 수용하고 있다. 사물 속으로 들어가 나도 구절초가 되고 있다. 사물을 좋아하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그것과 동일화가 되어 간다. 첫 수에서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다가 둘째 수에 오면 ‘마음이 달려 나가서 들꽃으로 피더라’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자연과 내가 동일화가 된다.
공원길 길게 돌아 물안개 피는 언덕
한 잎 한 잎 사랑으로 가을편지 쓰고 있네
바람이 실어갈 안부 향기롭게 순결하게
별을 세듯 꽃을 세며 추억을 엮다가
가슴에 안겨드는 그리움 수만 떨기
마음이 달려 나가서 들꽃으로 피더라
-「나도 구절초 되어」 전문
「나도 구절초 되어」에서는 동일화의 방법 중 ‘동화’의 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즉 이 작품에서는 나의 삶이 구절초에 동화되어 있다. ‘별을 세듯 꽃을 세며 추억을 엮다가/ 가슴에 안겨드는 그리움 수만 떨기/ 마음이 달려 나가서 들꽃으로 피더라’라는 표현 속에 이미 내 마음은 달려나가서 들꽃인 구절초로 피고 있는 것이다. 구절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동일화의 원리가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는 구절초처럼 향기롭게 순결하게 살고 싶은 화자의 마음이 구절초에 투사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탑 돌며 기도하며 얼마나 울었길래
불갑사 앞 꽃바다가 붉은 눈물 이더라
애틋한 선홍빛 사랑 너무 고와 슬펐네
마주 보며 숨 쉬고파 고운 얼굴 보고 싶어
상사병 타는 가슴 불씨 되어 심어진 곳
그 사랑 머문 자리에 영혼 닮은 붉은 꽃
향기마저 버렸는데 순정이야 어찌할까
참으로 어여뻐서 꽃잎 속에 나도 녹아
꽃밭에 빠진 내 마음 건져오지 못했네
- 「꽃무릇의 붉은 기도」 전문
「꽃무릇의 붉은 기도」에서는 ‘참으로 어여뻐서 꽃잎 속에 나도 녹아/꽃밭에 빠진 내 마음 건져오지 못했네’에서 나의 마음은 이미 꽃무릇 꽃밭 속에 빠졌고 꽃무릇과 일체, 즉 동일화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영광 불갑사에 핀 꽃무릇이 소재가 되고 있다. 고창 선운사, 정읍 내장사에도 꽃무릇이 많고 구미에도 꽃무릇 단지를 넓게 조성하고 있다. 꽃무릇은 석산이라고도 하는데 상사화와 비슷하다. 상사화는 여름에 피고, 꽃무릇은 가을에 피는데 둘 다 꽃과 잎이 따로 피어 꽃과 잎이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사화는 사찰 근처에 많이 심는데 그 이유는 이 식물에서 추출한 녹말로 불경을 제본하고, 탱화를 만들 때도 사용하며, 고승들의 진영을 붙일 때도 썼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붉은 꽃잎을 붉은 눈물로 비유하고 있다. 꽃과 잎이 따로따로 피어 절대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애틋한 선홍빛 사랑 너무 고와 슬펐다고 한다. 꽃과 잎이 함께 피지 못하는 데서 ‘마주 보며 숨 쉬고파 고운 얼굴 보고 싶어’라며 시인은 꽃을 대변한다. 그리하여 ‘상사병 타는 가슴 불씨 되어 심어진 곳’이 바로 여기이며 ‘그 사랑 머문 자리에 영혼 닮은 붉은 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꽃과 잎의 애절함을 전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따로따로 피어 서로를 그리워하며 ‘향기마저 버렸는데 순정이야 어찔할까’라며 꽃무릇의 꽃말인 참사랑을 생각해 보며 꽃빛깔과 그 순정이 ‘참으로 어여뻐서 꽃잎 속에 나도 녹아/ 꽃밭에 빠진 내 마음 건져오지 못했네’라고 한다. 자신의 마음이 사물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꽃무릇과 자신이 동일화 된다.
시간을 잘 보내자 놀이 삼아 써본 글에
가끔씩 속마음이 푸념처럼 흘러나와
서툴고 어설픈 얘기
꿈이 되어 기쁩니다
돌아본 길목마다 피어나는 이야기들
가슴에 시를 품은 넉넉한 그대에게
심심한 마음 한 가닥
안부처럼 전합니다
-「시인의 말」 전문
시인의 말에서 정현숙 시인의 시 창작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위대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도 아니고 유명한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는 것도 아니다. 조금은 가치있게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고, 그러다가 속마음이 푸념처럼 흘러나오기도 하고 돌아보는 삶의 길목에서 이야기들이 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시집을 전하는 이유는 시를 품은 그대에게 안부 한 가닥을 전하고자 함이라고 한다.
정현숙 시인은 이렇게 겸손한 시작(詩作) 태도와 함께 시어를 잘 골라 쓸 줄 아는,
언어감각이 뛰어난 시인이다.
거울 속 아는 여자 세월이 쓰다듬네
바람결 표시겠지 선글라스 쓰고 볼걸
눈치도 없는 거울아 있는 대로 비추냐
빡빡 닦은 유리 속 익숙한 하얀 웃음
누가 세월 이기겠나 스무 살이 어제 같네
철없이 마음만 젊어 거울 탓을 했구나
가슴으로 꾸는 꿈 버릴 곳 어디인지
조그만 저 거울 속 너무 맑아 다 보이네
스스로 지켜낸 세월 내 안에다 품으리
- 「거울의 진실」 전문
거울을 들여다보는 시인은 자신의 늙음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을 원망한다. 그러다 누가 세울 이기겠냐면서 철없는 자기자신을 탓한다. 그리고 스스로 지켜낸 세월 내 안에다 품으리라며 자신의 현재를 긍정한다.
표현들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신선하고 진솔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거울 속 아는 여자 세월이 쓰다듬네’라고 한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팽팽하고 곱던 얼굴에 주름을 지게 한다. 그것을 세월이 쓰다듬고 간다고 표현한다. 세상을 긍정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시어에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늙어가는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은 나타난다. 애써 주름이 나타나는 자신의 얼굴을 ‘바람결 표시겠지 선글라스 쓰고 볼걸’이라며 아쉬워한다. 자신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바람결 표시’라고 표현한 것도 신선한 시각이다. 정작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세월임을 알면서도 눈치도 없는 거울이 있는 대로 비춘다고 거울을 원망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철없이 마음만 젊어 거울 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스스로 지켜낸 세월 내 안에다 품으리’라며 살아온 세월을 ‘스스로 지켜낸 세월’이라고 감사하며 내 안에다 품겠다고 한다. 세월 속에 늙어가는 삶조차 내 안에 고스란히 품겠다는 넉넉한 마음은 세상에 대한 사랑과 긍정의 마음이라 하겠다.
물들인 검은 머리에 쑥 돋은 하얀 뿌리
모든 것 다 예쁘다 그래서 좋은 나이
늦은 꿈 꺼내들고서 그려볼까 엮어볼까
주머니 속 서툰 글 꺼내 읽다 목이 메고
선생님 작은 칭찬 그렇게 설렙디다
가슴에 새겨둔 글자 녹이 슬어 까만데
마음이 앉은 자리 보라색 시 한 송이
살며시 만져보다 향기를 입혀보네
스무 살 그댈 만난 듯 두근두근 하던 날
-「문예반 첫날」 전문
이 작품에서는 자신을 잊고 살다가 비로소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결혼하고 아내로서, 엄마로서만 살다가 늦게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글쓰기를 생각하고 문예반에 등록하여 그 설레임을 작품화했다. ‘늦은 꿈 꺼내들고서 그려볼까 엮어볼까’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내는 모습, ‘선생님 작은 칭찬 그렇게 설렙디다’에 설레는 마음, ‘살며시 만져보다 향기를 입혀보네’라며 시조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무 살 그댈 만난 듯 두근두근 하던 날’이라며 시조를 창작하려는 설레는 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인형의 집 주인공 로라처럼 자신을 찾아가는 첫걸음, 자유를 찾아가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기에 당연히 설렘이 함께 오는 것이다.
늦으막 써본 글을 책으로 엮으려니
구구절절 털어놓은 알량한 글솜씨에
수십 번 망설이다가 자신 없어 포기하다
마지막 위로라며 괜찮다고 저지르고
어여쁜 내 책 하나 설레며 기다리네
또다시 수줍은 용기 시조 한 수 써보려
-「시조집」 전문
그렇게 설렘으로 시작한 공부가 책으로 엮어지고 있다. 또 하나의 성취를 맛봄으로써 그녀의 작품은 더욱 성숙해 갈 것이다. 망설이며 포기하다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위로하며 만드는 첫 시조집, 정현숙 시인의 설렘만큼이나 그녀의 섬세하고 배려 깊고 아름다운 마음만큼 아름답기를, 그리고 시인으로서 한 단계 성숙하는 발걸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갈길 포장길 지나오니 한 길이야
육십 살 팔십 살 이제는 친구라며
저마다 주름진 세월 다독이고 펴주네
너와 나 어우러져 백년이나 살아볼까
맷돌체조 웰리스체조 건강댄스 열심이다
박자가 틀려도 좋지 봄바람이 춤바람
창밖에서 구경하는 꽃가지도 살랑살랑
세상거울 덮어두자 건강하게 살아가자
오늘도 즐거운 웃음 햇살타고 하하하
-「복지관 댄스파티」 전문
그녀는 시조쓰기에만 열심인 것이 아니다. 「복지관 댄스파티」에서는 노년의 인생을 즐기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모든 것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나이이기도 하지만, 시인은 ‘자갈길 포장길 지나오니 한 길이야’라며 살아오니 잘 살았든 못 살았든 같은 길에 이렀다는 깨달음도 되고,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이 평등하다는 의미도 된다. 주름진 세월을 다독여 주고 펴주는 좋은 시간, 잠시라도 세상거울 덮어두자 건강하게 살아가자며 즐겁고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이렇게 시인은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주변도 마음의 여유와 배려로 더불어 평화롭기를 바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지녔다.
삼천 계단 오르다가 삼천 살을 먹어봤던
그대 손 잡고 걸은 빗길 눈길 눈부셨네
숨소리 세며 걷던 길 걸음걸음 인생길
「비우면 걷는 길」 부분
그녀의 삶의 자세, 삶의 길은 언제나 조용하며 욕심을 내려놓고 걷는 길이다. 이미 세상에 대해 득도를 한 듯 웬만한 것은 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큰언니 같이 이해심 많고 포근함을 지닌 시인이며 어느 시를 읽어도 그런 느낌이다. 「비우면 걷는 길」 도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 특히 함께 걸어온 남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이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잘 나타나고 있어, 그녀의 삶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언젠가는 죽을 거라 남은 세월 믿었는데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진실을 배웠네
본향에 돌아간다며 이별 또한 희망이래
잘 죽는다는 의미보다 잘 살자는 큰 의미
날마다 마지막 축제 재밌게 살라하네
일순위 하고 싶은 말 사랑해요 감사해요
죽음은, 어둠을 걷어내는 삶의 놀이
세상의 끝에 서서 저세상 손을 잡고
겸손한 기도를 끝낸 아름다운 마무리
-「웰다잉 교육」 전문
그녀는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웰다잉 교육」 에서는 ‘잘 죽는다는 의미보다 잘 살자는 큰 의미/ 날마다 마지막 축제 재밌게 살라하네/ 일순위 하고 싶은 말 사랑해요 감사해요’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마음으로 남은 날들은 산다면, 어느 순간인들 고맙고 사랑스럽지 않은 순간이 있겠는가. 주변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과 모든 순간이 고맙고 그들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긍정적 태도가 삶에 자리잡혀 있는 것이다. 웰다잉 교육은 그녀의 시조에서처럼 웰빙 교육이다. 현재에 만족하며 잘 사는 것이 바로 좋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2. 남편과 가족에 관한 애틋한 사랑
정현숙의 이번 시조집 『행복 하나』에는 사랑과 겸손, 배려와 평화가 충만하다. 자신이 지닌 사랑과 겸손으로 주변 사물에 친근하게 다가가기와 사람과 사물에 대한 배려를 통해 사람들의 속마음과 사물의 이면을 읽고 천착하는 모습은 화해를 넘어 세상과 주변을 평화롭게 만드는 기술까지 보여준다. 정현숙의 작품은 따스하고 부드럽고 자애가 넘친다.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작품들은 대체로 밝고 긍정적이다. 서정시의 가장 큰 장르적 특성은 동일화의 원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일화에는 ‘투사’와 ‘동화’가 있는데 투사는 자아가 세계 속으로 투영되는 것이고 동화는 자아 밖의 세계가 자아로 들어오는 것이다. 때문에 동일화는 자아와 세계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자아 밖의 세계를 대결과 긴장으로 인식하지 않고 화해를 추구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기에 따뜻한 시선을 지닌 작품이 되는 것이다. 정현숙시인의 작품에서 그러한 모습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은 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작품 「행복 하나」이다.
시조를 쓴다 해도 어디 보자 한 적 없어
그거 해서 뭘 한다고 체조나 하라 하네
못하게 말리지 않고 그 정도니 다행이지
날 위해 산다는 말 입에 달고 사는 사람
해준 게 뭐 있냐고 콧방귀 뀌면서도
고맙다 맞장구치며 웃다보니 괜찮네
안 굶고 등 따시면 바랄 게 없다시던
할머니 간절한 꿈 이루어진 좋은 세상
내 곁에 만만한 친구 하나 있어 족하네
-「행복 하나」 전문
남편을 친구처럼 대하는 사이라면, 참 편한 가정의 모습, 가장 행복한 아내가 아닐까? 정현숙 시인은 늘 겸손과 감사가 몸에 배어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다. 이 작품을 읽다가 보면 그러한 겸손과 감사와 배려가 가정의 편안함에서부터 오는 것이라 짐작된다.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있는데, 가정에서의 불화가 생기면 마음이 편치 않고, 그 마음은 바깥세상인 사회생활에서도 문제가 있는 법이다.
남편은 아내가 시조를 쓴다고 해도 그것에 큰 기대를 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관심하지는 않다. 아내의 건강에 좋은 체조나 하라고 조언하면서도 아내가 하고 싶어하는 걸 못하게 말리지 않는 남편, 그것에 대해 아내는 “못하게 말리지 않고 그 정도니 다행이지”라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둘째 수에 오면 남편의 사랑이 더 깊게 다가온다. “날 위해 산다는 말 입에 달고 사는 사람/ 해준 게 뭐 있냐고 콧방귀 뀌면서도/ 고맙다 맞장구치며 웃다보니 괜찮네”라는 꾸밈없는 진술의 표현 속에서 부부의 다정한 모습이 잘 드러난다. 그러한 작품을 몇 작품 더 살펴 보자.
은하수 흘러넘쳐 오작교 홍수 나도
별꽃등 켜들고서 나만은 지켜주리
장롱 속 숨겨진 꿈도 찾아주라 우겼네
날 먹여 살린다고 한평생 일한 사람
우리 둘 가난한 꿈 서로 기대 여물었네
밥상에 데워 얹은 말 고생했소 고마워요
나 먼저 죽으라네 뒷정리 해준다고
배려인가 사랑인가 마음 한쪽 휑해져서
좋다가 서운하다가 익은 마음 터질라
-「그대 곁에서」 전문
작품에서 남편이나 아내의 이야기를 잘 안 쓰지만, 정현숙 시인의 작품에서는 유난히 남편에 대한 진솔한 사랑의 마음을 만날 수 있다. 남편에 대한 시인의 사랑 뿐 아니라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각별함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 ‘은하수 흘러넘쳐 오작교 홍수 나도/ 별꽃등 켜들곳 나만은 지켜주리’라는 신뢰감, 그리고 ‘장롱 속 숨겨진 꿈도 찾아주라 우기’는 그 애교…, 어쩌면 가장 바람직한 부부관계가 아닐까. 시인의 남편에 대한 신뢰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둘째 수에 오면 남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들어 있다. ‘날 먹여 살린다고 한평생 일한 사람/ 우리 둘 가난한 꿈 서로 기대 여물었네/ 밥상에 데워 얹은 말 고생했고 고마워요’라고 한다. 설명이 필요 없다. 고마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거기다가 ‘나 먼저 죽으라네 뒷정리 해준다고’란 표현 속에 드러나는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진솔하게 전해진다. 보통의 남편들은 자신이 아내보다 먼저 죽고, 그 뒷정리를 아내가 해주기를 바라는데, 여기서는 그 반대현상을 보인다.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진정 깊음을 알 수 있다. 그 말을 듣는 시인은 ‘좋다가 서운하다가 익은 마음 터질라’라며 역시 남편의 그러한 배려에 대한 고마움으로 마음이 익고 있다. 행여 그 익은 마음이 터질까 걱정하면서…….
저녁 식탁 막걸리 한 병 남편의 즐거움
술 한 잔 세월 한잔 잘 살았다 긴 숨 한잔
술잔 속 비친 얼굴이 나라 구한 애국자
카이스트 석사학위 정보통신기술사
팔십까지 일하리라 날마다 자화자찬
고맙소 그대 덕분에 비단길을 걷겠네
고움 한 켜 미움 한 켜 켜켜이 쌓인 자리
지지고 볶은 나날 사십 년이 꿈같네
아무렴 임자가 최고 아프지나 맙시다
-「남편은 요즘은」 전문
정현숙 시인의 「사랑의 굴레」에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난 인연으로 ‘세상에 친구라고 나밖에 없다 하고/ 한평생 일을 해서 날 위해 산다하니/ 언제나 꽃등불 들고 나를 지켜 주겠지’라며 평생을 신뢰 속에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고 있는 모습이며, 「어느 부부」도 ‘그대의 묵묵한 사랑 하늘만큼 컸다오/ 따뜻한 웃음소리 풍요로운 가을날/ 손잡고 걷는 노을길 남은 꿈이 곱구려’라며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보고 앞으로 곱게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고 있다. 다정히 늙어갈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서로가 배려하며 걱정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기도 하면서 친구처럼 함께 늙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인간이 부부로서 살아간다면 이런 관계가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가장 모범적인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식들도 자 자라 결혼시키고 두 부부만 남아 서로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사랑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정현숙의 시에서 발견한다. 이런 삶이, 이런 사랑이 좋다고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진솔한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표현했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행복한 결혼생활이란, 행복한 가정이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서로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지며 서로를 보살펴주는 애뜻한 마음가짐으로 생활해 가는 것이다.
정현숙의 시조에는 할머니에 관한 작품이 많다. 아버지가 한 살 때 돌아가시고 어린 손녀를 키운 할머니 얘기가 이번 시조집에는 많이 들어 있다. 그래서 할머니에 대한 시편들은 모두가 애틋하고 할머니에 대한 두터운 정이 나타난다.
쌀가루 눈물반죽 검은콩 듬성듬성
한숨으로 쥐어 만든 주먹떡에 손자국
할머니 마음이 찍힌 작은 송편 그립다
소원이 무엇이냐 큰소리로 말해보렴
색동옷 꽃고무신 사달라고 말할 걸
달만큼 커다란 송편 만들자고 보챘네
아버지 차례 상에 온달송편 올려놓고
할매 소원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할머니 빨간 눈물에 주먹떡만 먹었다
「내가 만든 온달송편」 전문
할머니와 송편을 빚을 때를 그리워하며 쓴 작품이다. 아들을 먼저 보낸 할머니의 슬픔이 명절이나 차례상을 지낼 음식을 장만할 때면 더 진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떡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할 때도 예외는 아니라서 눈물반죽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아쉬운 한숨마저 섞어 만들고 있는 할머니의 그 마음이 손가락 자국으로 찍힌 송편이 된다. 그 아들이 남기고 간 어린 손녀를 구김없이 키우고 싶은 할머니는 손녀딸에게 소원이 무엇이냐 큰소리로 말해보라고 한다. 손녀의 슬픔을 없애주려는 마음, 자신의 슬픔을 희석하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눈치빠른 어린 손녀는 마음속으로는 색동옷이나 꽃고무신을 사달라고 조르고 싶었겠지만 달만큼 커다란 송편을 만들자고 제의한다. ‘아버지 차례 상에 온달송편 올려놓고/ 할매 소원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할머니 빨간 눈물에 주먹떡만 먹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내게 소원을 물었으니 나도 할매 소원을 묻고 싶었지만, 아들의 차례상을 올리는 할머니의 아픈 마음을 ‘빨간 눈물’이라고 표현한 손녀는 할머니의 슬픔을 더 크게 만들까봐 차마 묻지 못하고 조용히 주먹떡, 즉 온달처럼 만든 송편만 먹고 있던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할머니 치마잡고 진외가 가던 길에
제각(祭閣)의 진분홍 꽃 하도고와 했던 말
이다음 할매 죽으면 배롱나무 심어줄게
철없는 어린손녀 쓰다듬던 따뜻한 손
갑자기 서러워져 훌쩍훌쩍 울면서도
할머니 하얀 치마에 꽃이 피면 좋겠다
산소의 잔디밭이 그늘질까 못 심었네
그 고운 꽃색 치마 사드리지 못했는데
배롱꽃 화사한 날에 일곱 살이 짠하다
- 「배롱꽃 추억」 전문
배롱꽃을 보며 할머니를 생각한다. 예전 할머니와 진외가 가던 길에 보았던 제각의 배롱꽃이 하도 고와서 “이다음 할매 죽으면 배롱나무 심어줄게”하고 말을 뱉고, 손녀딸을 쓰다듬는 할머니의 따뜻한 손을 느끼며, 자신이 한 말이 서러워 훌쩍훌쩍 울면서도 ‘할머니 하얀 치마에 꽃이 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손녀의 마음은 할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작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산소에 그늘이 드리울까 염려되어 심지 못했는데, 그 고운 꽃색 치마 사드리지 못해 화사한 배롱꽃을 보며 일곱 살이 짠하다며 일곱 살 때 가졌던 생각을 회상하고 있다.
자식 잠든 밭 언덕 오동나무 보라색 꽃
가지 끝에 앉은 오월 너무 고와 야속타
애끓는 통곡소리가 꽃잎으로 날아가네
잡초 속에 숙인 머리 호미 끝엔 피눈물
온종일 흙을 파도 가슴속은 돌덩이
둥근 등 어루만지는 신의 사랑 무심하지
칠보단장 고운 꿈 펴보지도 못하고
이랑에 흐른 눈물 호미로 노를 저어
할머니 꽃배를 타고 자식 찾아 가셨네
- 「보라색 오월」 전문
이 작품에서도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나타난다. 아마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쓴 작품으로 보인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가장 큰 불효라고 한다. 부모는 자식의 죽음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고 한다. 할머니의 평생 슬픈 마음을 잘도 읽어내는 손녀다. ‘가지 끝에 앉은 오월 너무 고와 야속타’며 죽은 아들을 생각하고 ‘온종일 흙을 파도 가슴속은 돌덩이’라며 힘들게 일하는 순간에도 그 아들 생각으로 마음은 가볍지가 않다. 모든 것을 굽어살피는 신의 사랑이 무심하다고 한다. 그렇게 살다가 ‘칠보단자 고움 꿈 펴보지도 못하고/ 이랑에 흐른 눈물 호미로 노를 저어/ 할머니 꽃배를 타고 자식 찾아 가셨네’라는 표현 속에는 그렇게 힘들게 사시다가 호강 한 번 못하시고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드러난다. 시인은 할머니에 대한 작품을 쓰면서 애틋한 정을 쏟아낸다.
찬바람 함께 잠든 머리맡에 시린 무릎
침을 발라 모시 삼던 할머니 긴긴 밤아
어쩌지 모시베 짜서 나를 시집 보내면
저마다 속 이야기 한 줄로 어찌 쓰랴
커다란 보따리 수다처럼 풀어 봐도
정작에 서러운 사연 차마 쓰지 못하네
-「마음 속에는」 둘째 수와 셋째 수
이 작품에서 보면 할머니 낮에는 밭일 등을 하시고 밤에는 모시를 삼으셨는데, 그 어린 손녀는 자라서 시집갈 때가 되어 할머니가 자신마저 결혼시키면 외로워서 어쩔까를 걱정한다. ‘정작에 서러운 사연 차마 쓰지 못하네’라며 시인은 자신의 아팠던 마음을 차마 다 표현하지 못함을 고백하고 있다. 이 작품 외에서 「슬픈 할머니 마음」 「추억 속의 호박」에서도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표현이 잘 나타난다.
엄마가 시집온 날 함께 따라 내렸다네
면사포 너울대며 순결하고 아름답게
새댁님 잘 사시라는 혼수이불 선물인 듯
가끔은 내 생일에 함박눈이 펑펑 왔네
금이야 옥이야 딸이면 어떠냐고
세상의 덕담소리가 진실인 줄 알았다오
한 돌이 되기 전에 첫눈인지 끝눈인지
국화꽃잎 같은 눈 아버지의 무덤이불
울 엄마 부서져버린 새하얀 마음가루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울 엄마 시집가고
그 새댁 잘 산다고 첫눈 내려 수군대면
가슴에 묻어둔 얘기 전설처럼 들린다오
- 「엄마의 첫눈」 전문
정현숙 시인의 시에서는 엄마보다는 할머니가 많이 등장한다. 엄마에 관한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다. 이 작품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시집오던 날 눈이 함께 따라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화자의 생일날도 때때로 눈이 펑펑 내렸다 한다. 결혼도 겨울에 했고, 화자가 겨울에 태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딸이면 어떠냐고 금이야 옥이야 키우다가 한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울 엄마 부서져버린 새하얀 마음가루’처럼 어머니는 그렇게 남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울 엄마 시집가고’라는 표현은 엄마가 재혼을 했다는 의미로 남는다. 그래서 시인은 할머니 손에 자라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새댁 잘 산다고 첫눈 내려 수군대면/ 가슴에 묻어둔 얘기 전설처럼 들린다오’라며 어머니가 재혼해서 잘 산다는 말을 전설처럼 듣고 자라는 시인을 만나게 된다.
줄줄이 손을 잡은 섬들을 띄워 안고
낚싯대 우럭 광어 세월을 건져내는
푸른 등 하늘고래가 꿈을 물고 지키는 곳
비단조개 칼국수에 바다 향 취해보고
송전탑 뜨거운 희망 알알이 꽃등 켜는
씩씩한 내 딸의 일터 발전소가 있는 곳
날 잡아봐라 뛰노는 쌍둥이들 고함소리
모래밭 두꺼비집에 인어공주 숨었다며
예쁜 꿈 쑥쑥 자라는 손주들의 놀이터
-「영흥도에 크는 희망」 전문
이 작품에는 시인의 딸과 손녀들이 소재가 되고 있다. 그들이 살고있는 영흥도라는 섬을 소개한다.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우럭, 광어, 세월을 건져내는 곳이기도 하고 푸른 등 하늘고래가 꿈을 물고 지키는 곳이기도 하다. 그 곳 송전탑에 불을 키는 발전소가 딸의 일터라고 한다. 그런 곳에서 씩씩하게 뛰어놀고 있는 쌍둥이들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예쁜 꿈 쑥쑥 자라는 손주들의 놀이터’라고 한다. 씩씩하고 건강한 꿈을 꾸며 손주들이 잘 자라기를 바라는 기원의 마음이 깃든 작품이다.
뒤집기 되집기 응원소리 박수소리
한발로 쭉 밀고도 기특하게 기어가고
날마다 쑥쑥 커가는 손주들은 기적이다
옹알옹알 까꿍까꿍 눈 맞추며 사랑고백
저절로 흐르는 감동 너희들은 축복이다
고맙다 지금만큼만 건강하게 자라다오
둥근 지구 손발 짚고 엉덩이 쳐들고는
둘이 서로 엄마엄마 두발로 서다 앉다
위대한 사람연습이 눈물 나게 경이롭다
-「눈부신 사랑」 전문
손주들을 키우면 자신의 아이 키울 때와는 다른 감정이라고 한다. 더 귀엽고 애틋하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핏줄이 그만큼 이어져 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에 더 소중하게 생각될 것이다. 또 자신의 아이를 키울 때는 키우기에도 바빠 정신이 없다보니 거리를 두고 관찰할 기회가 없다. 그만큼 귀한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자신의 예전 경험이 있어 그것이 토대가 되고, 또 부모보다는 조금의 거리도 있다 보니 관찰력도 더 생기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은 신기하다. 시인은 자라는 그 과정을 나열하며 건강하게 자라는 손주들을 보면 ‘고맙다 지금만큼만 건강하게 자라다오’라며 그들을 축원한다. 또한 ‘위대한 사람연습이 눈물나게 경이롭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사람이 되기 위한 연습, 사람으로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인의 흐뭇하고 경이로운 감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3. 여행지에서 만나는 꿈과 맑은 영혼
정현숙 시조집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여행시조가 많다는 점이다. 국내는 물론, 외국의 유명한 관광지에서 보고 겪은 것들을 단순한 여행지의 모습이 아니라 내것으로 소화하여 육화시킨 작품들이다. 여행작품 속에 살아있는 사물의 핵심을 보아내는 시인의 올곧은 정신, 그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만날 수 있다.
루브르 한쪽 벽에 고귀한 여인으로
그 미소 신비롭다 온 세상 소문나서
살며시 훔쳐 와야지 설레임 가방 가득
리자마담 저기 있네 액자 앞 북적북적
마음도 보이려나 나이는 몇 살일까
어쩌나 작은 유리 속 갑갑해서 울겠네
웃음빛 향기로워 만인이 반하여도
기쁜지 서글픈지 내 눈엔 그림이네
다빈치 깊은 속마음 사람들은 어찌 알까
- 「그 모나리자」 전문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만난 모나리자 그림에 대해 쓴 작품이다. 그녀의 신비한 미소에 대해서, 우리는 배웠고, 그의 웃을 듯 말듯한 표정이 신비롭고 눈썹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도 신비로왔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소 중 하나이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중 하나다. 보통은 고상하고 우아한 여성의 미소로 알려져 있으나 그녀의 미소가 진실인지 가짜인지,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지 다양한 해석과 연구가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녀의 미소가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며 어떤 연구자들은 그녀의 미소가 행복을 표현하고 있다고도 주장한다. 어떤 연구자는 그녀의 미소가 그녀의 건강 상태와 관련이 있다고도 주장한다.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미소는 유명한 그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내면의 감정을 자극하고 다가갈 수 있는 신비롭고 매혹적인 이미지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실존인물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인 조콘다의 부인 리자이다. 부모와 함께 살다가 분가하면서 새 집에 걸어둘 생각으로 부인의 초상화를 주문했으며 당시 초상화는 부의 상징이이었다 한다. Monna lisa의 모나는 ‘마담, 부인’이란 뜻이고 리자는 부인 이름이다. 때문에 모나리자는 리자부인이란 뜻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라조콘다’로 불리고 그 외 나라에서는 모나리자로 불린다고 한다. 다빈치가 그림을 그릴 때 리자 부인은 무표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이 방문했을 때 얼굴에 숨겨진 미소를 보았고, 그 미소를 드러나지 않게 표현하기 위해 피렌체 병원을 찾아가서 안면해부학과 안부해부학을 공부해 가면서 입가의 미소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한다. 그림을 그려놓고 보니 본인이 봐도 감탄할 만한 그림이어서 그림 의뢰자에게 인도하지 않고 개인 소장품으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그림은 왼쪽 입꼬리가 오른쪽보다 낮게 표현이 되었다. 그런데 왼쪽 눈 뒤를 보면서 왼쪽 입꼬리를 보면 더 환하게 웃곳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한다. 이것이 홀겨보기 효과, 착시현상을 그림에 표현했으며, 웃을 때 양쪽 볼에 음영을 넣음으로 인해 은은한 숨겨진 미소를 볼 수 있다. ‘그 사람의 내면의 감정까지 담을 수 있어야 진정한 초상화라 할 수 있다.’고 한다. 다빈치가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혼을 넣어 그린 그림이 모나리자이다.
이 ‘모나리자의 미소’를 보고 시인은 어떠한 것을 느끼고 있는가. ‘루브르 한쪽 벽에 고귀한 여인으로/ 그 미소 신비롭다 온 세상 소문나서/ 살며시 훔쳐 와야지 설레임 가방 가득’라고 쓴 첫 수에서는 그림을 보러 가면서 시인이 가진 생각이다. 신비롭다고 세상에 소문이 난 모나리자의 그 미소를 훔쳐와야겠다고 결심한다. 막상 보러 가니 77센티*53센티의 작은 그림, 그 앞에 사람들이 북적북적, ‘마음도 보이려나 나이는 몇 살일까’라며 화자는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고 싶어 기대를 한다. 그러나 화자가 보는 건 작은 유리 속에 갇힌 그녀의 갑갑함이다. 그녀의 활달한 자유정신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웃음빛 향기로워 만인이 반하여도/ 기쁜지 서글픈지 내 눈엔 그림이네/ 다빈치 깊은 속마음 사람들은 어찌 알까’라며 기쁜지 서글픈지 모를 그 미소의 표현을,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다빈치의 속마음을 사람들은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화자도 그 미소에 대해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고 의문만 그곳에 남겨두고 온 것이다. 가방 가득 훔쳐 오겠다던 모나리자의 그 미소를 그곳에 그냥 그대로 두고 온 것이다. 그래서 제목도 ‘그 모나리자’라 표시했을 듯하다. 그곳에서 본 그대로 두고 왔기 때문에…….
기다려도 안 내려온 하느님 보겠다고
믿음의 첨탑들을 하늘 높이 쌓아놓고
가우디 뜨거운 마음 성가족을 모셔왔네
새벽빛 탄생의 문 나팔소리 푸르르고
수난의 서쪽 문은 황금빛 천국이네
저 햇살 은혜로워라 구원이고 용서 같아
성전이 완공되는 영광의 날 기다리며
지하묘지 제대에는 촛불 하나 타고 있네
위대한 성가족 성당 주인이 된 가우디
- 「그곳 가우디의 집」 전문
「그곳 가우디의 집」란 작품은 스페인의 가우디 성당을 보고 쓴 작품이다. 가우디 성당은 다른 이름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882년 가우디의 스승이었던 비야르가 무보수로 맡았으나 부조건 싸게 지으려고만 하는 교구에 질려 1년만에 제자 가우디를 추천한다. 가우디는 31살에 공사를 맡아 43년간 이 공사에 남은 인생을 모두 바쳤다. 그는 1926년 불의의 사고로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해는 이 성당의 지하 남골묘에 안장되었다. 원래 이 납골묘에는 성인이나 왕족의 유해만 안치될 수 있는데, 로마 교황청에서 그의 신앙심과 업적을 높이 사서 허가해 준 것이라 한다. 그의 사후 스페인 내전 과정에서 설계 도면이 불타 힘들었지만 가우디의 제자들이 지금도 가우디 성당을 짓고 있으며 언제 완성될 지 모른다고 한다.
시인은 첫 수에서 그 성을 짓기 위해 노력한 가우디를 떠올린다. 그 성당을 비치는 햇살이 구원이고 용서 같다는 둘째 수에서는 모든 것이 은혜로와 보이는 감동을 표현하고 있다. 130년이나 걸려 짓고 있는 성당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느끼는 희열과 감탄이다. 셋째 수에 오면 성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고로 돌아간 가우디에 대해 쓰고 있다. 그 곳 지하에서 성당이 완성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간한다.
성당의 외부나 내부의 아름다움만을 보지 않고, 성당의 배경이 되고 성당을 짓기까지의 서사를 생각하면서 쓴 작품으로 즉물적 기행시의 위험을 극복하고 있다. 하나의 사물을 내 안으로 끌어와 그 사물의 내면을 파악하면서 육화시키는 힘이 그녀의 시조에서 발견된다. 시인은 사실만 보고 사실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화하여 자기방식대로 사물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있다.
백대명산 백두대간 발뒤꿈치 따라가다
취미가 등산이라며 히말라야 가보자
마음이 설레던 그날 카트만두 비행장
포카라 가는 하늘길 저 아래가 땅이던가
하늘보다 더 높은 산군들의 행렬이여
산 옆에 가기도 전에 에베레스트 먼저 봤네
웅장한 산별들이 세상을 비추던 곳
영혼들이 춤을 추는 경이로운 신의 정원
사람들 뜨거운 가슴 불태우고 싶다는
「안나푸르나-첫날」 전문
네 시의 새벽이슬 눈보다 차가운데
고소증에 시달려도 일출을 보라시네
태양님 타고 오시나 무지개 뜨는 소리
어깨를 걸고 일어난 히말라야 연봉들
버얼건 안나푸르나 황홀한 아침 밀어
이 세상 가장 높은 곳 뜨거운 첫 눈맞춤
흰 산 아래 붉은 아침 축복으로 채워지면
맑고 푸른 영혼들 자유롭게 날던 곳
곳곳이 신의 숨결로 마음마다 풍족했네
- 「푼힐 전망대 일출」 전문
두 작품이 모두 ‘안나푸르나’가 소재가 되고 있어 함께 거론해 보기로 한다. 안나푸르나 등산을 위해 갈 때 비행기에서 보이는 에베레스트산의 모습이 장관이라고 누군가 들려주던 이야기가 이 작품을 보는 순간 떠오른다. ‘포카라 가는 하늘길 저 아래가 땅이던가/ 하늘보다 더 높은 산군들의 행렬이여/ 산 옆에 가기도 전에 에베레스트 먼저 봤네’라고, 여기서도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에베레스트산의 얘기가 등장한다.
에베레스트산은 네팔과 티베트(중국) 사이의 국경에 있으며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세계 최고봉으로 높이는 8,848.86m이다. 웅장한 크기와 높이 때문에 티베트어로는 ‘세계의 어머니(초모랑마)’라고 부른다,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은 영국의 탐험가 조지 에버레스트의 이름에서 명명된 것으로, 1852년에 인도 측량국을 통해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확인되었다.
안나푸르나는 네팔의 히말라야 중부에 있다. 안나푸르나 제1봉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은 안나푸르나에 가서 그곳에 대한 시조를 쓰고 있다. 물론 시조는 그곳을 탐방하고 난 후에 창작되었겠지만, 시인은 세계의 등산가들이 꿈꾸는 안나푸르나를 향해 떠났고, 그곳에서의 모습을 작품에 담고 있다. ‘웅장한 산별들이 세상을 비추던 곳/ 영혼들이 춤을 추는 경이로운 신의 정원/ 사람들 뜨거운 가슴 불태우고 싶다는’는 셋째 수에서 웅장한 안나푸르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이곳을 ‘영혼들이 춤을 추는 경이로운 신의 정원’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사람들 뜨거운 가슴 불태우고 싶다는’는 표현 속에는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등산을 하고 싶어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인간에게 매력을 주는 산이라는 뜻이다.
안나푸르나의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직접 체험한 것을 시조로 담아내는 정현숙 시인만의 능력이다. 「푼힐 전망대 일출」은 또 어떤가. 그곳의 일출을 보기 위해 4시부터 준비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화자지만 일출을 꼭 보아야 한다는 말에 시인은 일출을 보게 된다. 그곳에서 시인은 또한 어깨를 걸고 일어나는 히말라야의 웅장한 연봉들을 보고 된다. 해가 뜨는 안나푸르나는 ‘버얼건 안나푸르나 황홀한 아침 밀어’라며 안나푸르나의 일출이 묘사된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의 뜨거운 첫 눈맞춤이다.
안나푸르나의 일출만큼이나 시인의 시어도 싱그럽다. ‘황홀한 아침 밀어’, ‘뜨거운 첫 눈맞춤’ 둘 다 아름답다. 자연의 풍경에 알맞는 시어를 선택할 줄 아는 정현숙 시인만의 능력이다.
하늘이 녹은 호수에 느긋한 뭉개구름
내 영혼 꽃잎 되어 한없이 떠다니던
넉넉한 평화로움이 나뒹굴고 있던 곳
하양 노랑 분홍 보라 꿈 따라 피어나서
달콤한 꽃들의 고백 행복하고 평화로워
내 작은 마음의 언덕 무지개가 뜨던 곳
강기슭 양치기교회 목동의 찬양소리
축복으로 쏟아지던 은하수 별꽃등불
기도로 바라본 하늘 살아있어 감사했네
-「루핀꽃 호수언덕」 전문
뉴질랜드의 데카포호숫가의 루핀꽃을 보고 감동하여 쓴 작품이다. 서두르지 않고 유유히 떠가는 하늘의 뭉개구름의 아름다움과 ‘내 영혼이 꽃잎 되어 한없이 떠다니고 평화로움이 나뒹굴고 있는 곳이다. 호박이 나뒹굴듯이 그렇게 넉넉한 평화로움이 나뒹군다는 표현이 신선하다. ‘내 작은 마음의 언덕’과 ‘기도로 바라본 하늘 살아 있어 감사했네’라는 표현 속에는 시인의 겸손하고 겸허한 마음이 잘 나타난다. 시어 곳곳에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화자의 마음과 생활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진솔한 그의 삶을 보여 주고 있다.
파도가 출렁이는 언덕 위 하얀 지붕
그리움 덮인 채로 순결한 꿈을 꾸네
해 저문 카사블랑카 그 이름도 설레는
낙조에 흔들리다 떠밀려 간다 해도
그대 잔에 홍주 가득 내 잔에 붉은 노을
까마득 오래된 낭만 초라해도 좋으네
아틀라스 산맥 아래 드넓은 푸른 초원
미로의 골목 끝에 숨어있는 사하라가
수북한 달빛 속에서 또 오라고 유혹하네
- 「노을 뜨는 카사블랑카」 전문
예전 ‘카사블랑카’란 영화를 보고 오랫동안 그 애틋한 사랑의 영상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렌다. 「노을 뜨는 카사블랑카」라니! 제목만으로도 낭만적 서정이 느껴진다. 카사블랑카란 하얀집이란 뜻이다. 아름다운 카사블랑카와 사하라 사막까지 등장하여 또 오라며 유혹한다고 한다. 여행시조의 모습이 잘 나타나는 작품이다.
누가 다 세었을까 만 개가 넘는다니
둥글 뾰족 땅무덤은 생각도 만 가지라
저마다 품은 꿈들이 하늘가에 닿았구나
- 「그믐날의 만봉림」 셋째 수
세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가는 곳마다 시조작품을 창작하여 그녀의 시조로 세계 여행을 하는 느낌도 든다. 위 시조는 중국의 만봉림을 쓴 작품이다. 만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녀는 그 봉오리마다 생각도 만 가지로 각자의 꿈이 하늘가에 닿아 있다고 보고 있다. 인생 자체가 짧고 그 중 짧은 시간 동안 머물며 보고 간다는 아쉬움과 여운이 작품 가득 들어 있다. 다음에는 국내기행 작품 한 편 살펴보자.
꿈에도 그려보던 천지연 언저리에
만병초 하늘나리 들국화 반가워라
이곳은 민족의 영산 단군신이 사는 곳
와! 했는데 사라진 일렁이던 물의 감촉
구름 바람 짝이 되어 푸른 호수 창을 닫아
한순간 숨 막힌 풍경 주저앉아 울고 싶네
백운봉 천문봉 백두봉 장엄한데
천지 둘레 반 바퀴 중국길이 웬 말인가
마땅히 우리 땅인데 역사 한 편 슬프다
저 산도 말 못하고 속으로 흘린 눈물
긴 세월 굽이돌아 깊고 넓은 민족의 샘
바람이 휘몰아치며 천지마음 감추더라
-「천지연에 불던 바람」 전문
백두산 천지를 노래했으나 현재 대한민국 땅이 아니라서 국내작품이라 하기에는 그렇지만 우리나라를 노래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천지연을 ‘이곳은 민족의 영산 단군신이 사는 곳’이라며 우리민족의 영산임을 밝히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리는 천지의 날씨, 푸른 천지호수가 보여 ‘와’ 했는데, 금방 사라진 호수….
구름으로 가렸다가 다시 열었다고 하는 백두산 천지. 백두산은 북한에 있고, 중국땅을 통해서 올라가야 하고, 호수 둘레가 절반은 중국땅이라니 그것을 시인은 슬퍼한다. 반쪽이 중국땅임을 슬펴하며 시인이 느끼는 역사 인식과 민족 인식…. 그래서 마지막 넷째 수에서는 시인의 감정이입이 들어가 있다. ‘저 산도 말 못하고 속으로 흘린 눈물’이라며 산도 속으로 눈물을 흘린다고 산을 사람처럼 의인법을 써서 비유하고 있다. 그 슬픈 마음을 애써 들키지 않으려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천지마음 감추더라’고 한다. 「금강산의 겨울」 「내소사 대웅보전 앞에 서서」 「채석강의 일기」 「청산도 어느 봄날」 「물의 정원 꽃양귀비」 「비금도 명사십리」등의 기행시조들도 여행지에 대한 즉물적 기행시가 아니라 내면의 깊이까지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4. 고향, 그리운 유년 속으로의 여행
고향이란 어린 날의 추억과 꿈이 있고,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곳이다. 한 사람의 인격이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정현숙 시인의 고향을 노래한 작품들을 살펴보자.
선산의 묵정밭에 틈도 없이 피어나
뜨거운 자유로다 흐드러져 춤을 추면
아이고 망쪼들겠다 사정없이 뽑으셨지
기대고 어우러져 자장가 부르는지
할아버지 잠을 자고 햇살도 고요하네
생전에 화해를 했나 평화로운 하얀 꽃밭
망초야 개망초야 할아버지 보고 싶다
꽃잎 뒤 숨은 세월 날 보고 달아나도
그 여름 잔잔한 추억 남아있어 고맙다
-「개망초의 친구」 전문
정현숙의 「개망초의 친구」를 보면 어렸을 때 보던 선산의 개망초가 소재가 되고 있다. 가꾸지 않아 풀밭이 된 선산 앞의 묵정밭. 망초가 피면 나라가 망한다고...예전 구한말에 한일합방이 될 때 망초꽃이 많이 피었다고 하는 말이다. 외래식물인 이 망초는 주변식물에 피해가 많다고 한 때 학교에서도 학생들과 봉사활동을 하는 날이면 산책길가에 늘려진 망초꽃들을 뽑아버리던 일이 생각난다. 번식력이 무척 강한 개망초가 ‘뜨거운 자유로다 흐드러져 춤을 추면’이라며 묵정밭을 발 디딜 틈도 없이 메우고 있는 망초와 ‘아이고 망쪼들겠다’며 사정없이 뽑으시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서 산소에 누워 계시고 더 이상 개망초와 씨름하지 않고 햇살 속에 평화로워 보인다. 그것을 화자는 ‘생전에 화해를 하셨나 평화로운 하얀 꽃밭’이라고 표현한다. 기대고 어우러져 무더기로 핀 망초꽃을 화자는 이제 친근감으로 보고 있다. 어렸을 때 만났던 고향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고향에서 만나던 모든 것들이 몇 십 년이 지나고 고향을 찾을 때 얼마나 반가운 존재인지를 잔잔하게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개망초를 친구 대하듯 하는 화자의 태도에서 유년에 대한 그리움을 성숙한 인격으로 만나는 시인을 만날 수 있다.
덩그랗게 큰집에 외로움 주렁주렁
고모 삼촌 작은 엄마 혼자씩 집을 보네
떠나온 고향하늘에 별이 그리 많더니
때때옷에 복주머니 어린 날 자식 모습
팔 벌리고 뛰어오는 손주 녀석 아른거려
하늘을 한 짐씩 지고 마중 나온 마당 끝
자식들 많다지만 저 살기 바쁜 세상
괜찮다 말은 해도 진짜 진짜 믿을까 봐
천장에, 숨은 마음이 더덕더덕 붙었더라
-「고향집에는」 전문
어렸을 때 살던 그 고향의 큰집에는 외로움이 주렁주렁 달렸다고 한다. 모두가 고향을 떠나 살기 때문에 때로는 고모가 때로는 삼촌이 때로는 작은 엄마가 집을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화자는 그러한 집에 대해 ‘떠나온 고향하늘에 별이 그리 많더니’라며 어렸을 적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시집가 떠나 살던 딸이, 손녀가 오면 때때옷에 복주머니 달아주던 어렸을 때를 상상하며 지금은 팔 벌리고 뛰어오는 손주 녀석 아른거려서 하늘을 한 짐씩 지고 마중 나온 마당 끝이라며 딸과 손주들을 기다리는 어른들의 마음을 표현한다.
겉으로는 바쁘니까 안 와도 된다고 하지만 자손들이 자주 오기를 기다리는 그 마음을 화자는 ‘천장에, 숨은 마음이 더덕더덕 붙었더라’며 익살스럽게 피력하고 있다.
진달래 봉올봉올 분홍햇살 타고 놀면
어린 꿈 실어 온 꽃구름이 사는 언덕
손잡고 뛰어놀던 곳 봄이 왔나 가 보자
쑥바구니 가득 채워 옆에 놓고 마주 앉아
해그림자 질 때까지 공기놀이 인형놀이
꽃물 든 정다운 얼굴 아롱아롱 피어나네
잎 없이 꽃만 왔나 바람결에 빨개지네
꽃시계 만들어서 세월일랑 잡아두고
동무야 고향 산천에 꿈도 폈나 보러 가자
-「꽃마중」 전문
고향의 봄 모습이 이 작품에선 잘 드러난다. 진달래 봉오리가 피어날 때쯤을 ‘진달래 봉올봉올 분홍햇살 타고 놀면’이란 표현으로 ‘봉올봉올’이나 ‘분홍햇살’이란 시어는 그 특징들을 잘 살려 시인이 새롭게 만들어 쓴 시어들이다. 정현숙 시인은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특징들이 잘 나타나고 있다.
첫수에서는 진달래 피던 고향 모습, 둘째 수에서는 친구들과 쑥 뜯으며 공기놀이 인형놀이 하던 꽃물든 정다운 얼굴을 떠올린다. 셋째 수에는 ‘꽃시계 만들어서 세월일랑 잡아두고’ 고향 산천에 꿈도 폈나 보러 가자고 한다. ‘꿈도 폈나 보러 가자’는 그 발상도 새롭다.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현재로 이어지게 만드는 요량도 가진 시인이다.
때때옷 사서 오마 우리엄마 가시던 길
목을 빼고 내다보면 달려오던 어스름
밤 되면 도깨비불이 줄을 지어 가던 곳
해지면 저길 따라 도망치고 싶었는데
작은 꿈 어디 가고 기다림도 희미해져
썰물에 쓸려간 세월 개펄 속에 녹았네
옛이야기 가득한 길 들국화 흐드러져
날 보러 몰래 왔나 여우별 꼬리 흔적
그리움 길게 늘이고 꽃향기만 남겼네
-「방죽길엔 그리움만」
방죽길을 걸으며 화자는 옛날을 회상한다. ‘때때옷 사서 오마 우리엄마 가시던 길’이다. 그리고 그 엄마를 기다리느라 ‘목을 빼고 내다보면 달려오던 어스름’이란다. 기다리는 엄마는 오지 않고 밤이 오던 그 길이다. 나이 들어 다시 찾은 고향의 그 길은 ‘작은 꿈 어디 가고 기다림도 희미해져/ 썰물에 쓸려간 세월 개펄 속에 녹았’고, ‘그리움 길게 늘이고 꽃향기만 남은’ 방죽이다. 고향의 방죽길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다. 정지용의 「고향」이란 작품에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란 시가 생각나는 구절이다. 고향도 세월 따라 늘 변하고 있고, 인간도 변하고 있다. 정현숙 시인의 고향에 관한 그리움이 시집 속에 드러난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리운 것이고 유년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곳임을 알게 한다.
바지락 꼬막잡고 밭매고 길쌈하고
우리 동네 일 많다고 시집오기 꺼렸다니
가뭄에 흉년들 때도 희망이던 고마운 곳
뻘냄새 땀냄새로 사람들 고단해도
짠물 젖어 퉁퉁분 손 살갑고 따뜻했지
지금도 찡한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아른아른 그리움에 고향길 달려가면
메꽃 핀 방천둑에 찰랑이는 순한 파도
날마다 붉은 이불에 저녁해를 재운다
「고향바다는」 전문
시인에게 고향바다는 낭만의 곳이 아니라 고향사람들의 생활터전이던 곳이다. 일이 많다고 시집오는 것을 꺼렸던 동네지만, 덕분에 가뭄으로 흉년들 때도 희망이 있던 곳이다. 그곳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태도와 순박한 인정은 ‘뻘냄새 땀냄새로 사람들 고단해도/ 짠물 젖어 퉁퉁분 손 살갑고 따뜻했지’라는 말로 대변된다. 고단한 그들의 삶을 생각하면 지금도 찡한 마음이 된다는 시인의 고운 마음이 잘 드러난다. 고향바다는 도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낭만의 바다가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서의 바다이며 고향 사람들의 힘든 노동이 들어 있고, 순박한 인정이 살아있는 그런 바다이며, 또 저녁이면 하루의 일과를 끝낸 마을 사람들 속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이는 바다다. 고향 사람들의 힘든 노동과 짠물에 젖어 퉁퉁 부은 손까지 살갑게 느끼며 사랑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이 나타나는 작품이다.
구름꽃 떠다니고 폭포수 흐르는 곳
동백꽃 자목련꽃 사철 피어 눈부셔라
세월이 그려놓았나 세상무늬 신비하다
새소리 바람소리 꽃비소리 가득한데
수많은 저들 생각 어찌 알고 답을 쓸까
가슴에 우주를 품은 무릉도원 소개하네
해와 달 지고서도 그림자 없는 선계
바위 속 천 년 풍경 누리며 사시는지
깊고도 아득한 전설 명주 짜듯 뽑으셨네
* 김민정 선생님의 수석壽石시조집
『함께 가는 길』을 읽고
-「수석(壽石) 시인」 전문
정현숙 시인이 나의 수석시조집을 읽고 나서 쓴 시조이다. 시인은 평소에도 늘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변을,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 마음가짐이 그녀의 모든 작품에 고소란히 투영되어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수석시조집을 열심히, 찬찬히 읽고 그것을 제대로 음미하고 있음이 보인다.
시인은 남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남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어야 하고, 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정현숙 시인은 이미 그러한 자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언어감각도 남달라 자신만의 시어를 많이 만들고 있고, 시조마다 그의 넓은 이해와 아량의 마음들이 드러나 보인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긍정과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어 하나하나는 섬세하고 여린 시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현숙 시인의 시조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언어의 선택과 사물에 대한 깊은 배려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그녀가 더욱 풍요롭고 성숙한 모습의 시조작품을 쓰기를 크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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