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한글과 시조
김민정(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
가을은 유난히 고마움이 많은 계절이다. 우리의 명절 중에는 추석이 있고, 서양의 명절 중에는 추수감사절이 있다. 잘 익은 곡식과 과일들에 감사하고, 우리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 조상님과 부모님께 감사하고, 푸르고 맑고 아름다운 계절과 시원한 바람과 따가운 가을볕과 아름답게 단풍든 산천에 감사한다.
10월이면 고마운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라고 일컬어지는 한글, 그것을 만드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께 감사한다. 우리나라가 문맹률이 낮은 이유는 읽기 쉽고 쓰기 쉽고 익히기 쉬운 한글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면 한글로 인해 고마운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우리가 만약 지금도 한자를 쓴다면 한자를 익혀야 하는 데 드는 시간 때문에 많은 노력을 낭비해야 하고, 경제력에 쏟아야 할 시간이 부족하여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또한 예전에 양반들만 공부하듯이 부자들만 공부하게 되어 빈부의 격차, 사회계급의 격차가 지금보다 훨씬 심해졌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한글은 모든 사람이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평등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그 뿐인가. 세계에서 가장 IQ가 높다는 한국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글 때문이 아닐까? 보고 듣고 생각하는 속도는 우리가 평소에 쓰는 언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언어를 빨리 눈으로 읽어 받아들이고 생각하여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식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속도 또한 빠르기 때문이다.
우리 한글의 가치를 가장 먼저 서구에 알린 사람은 조선 최초의 근대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에 교사로 와 있던 미국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다. 그는 한글을 사용하면 조선의 근대화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글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한글체 교과서를 처음 펴내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문화를 서양에 알리는 영문 잡지를 창간하고, “이보다 더 간략하게, 이보다 더 과학적으로 발명된 문자는 없다.”고 한글을 극찬하는 논문을 실어 서양에 한글을 학술적으로 처음 소개하였다. 서재필은 한글의 가치를 깨닫고 한글체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국민 계몽에 나섰고, 그의 제자 주시경은 국어와 국사를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주시경의 제자들은 조선어 학회를 결성하고 한글날을 제정하였다. 또한 그들은 1929년부터 조선어대사전의 편찬을 시작하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같은 어문 규정을 만드는 등 우리말과 우리글의 연구, 정리, 보급을 위해 노력해 왔다.
현재 한국어는 쓰는 인구가 8천만이 넘어 세계 15위권의 언어가 되었다. 또한 한글은 정보화 시대에 컴퓨터, 휴대전화 등 소프트웨어 산업에도 유리해 다시금 그 우수성과 과학성이 입증되고 있다. IT강국으로 발전하는데 한글의 공헌이 컸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해서 IT강국으로 발전해 갈 것이며 그 밑바탕에는 한글의 우수성이 있다. 유네스코는 1989년 ‘세종대왕상’을 제정해 1990년부터 문맹 퇴치 운동에 힘쓴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하고 있고, 1997년에는 한글의 가치를 인정하여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하였다.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글자라서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은 한글을 공용문자로 채택하여 쓰고 있다. 그 외 많은 나라에서 한글을 배우는 열풍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이렇게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 체계적, 경제적인 글자를 가지고 우리의 전통시인 시조를 쓰는 것이 자랑스럽다. 일본에 ‘하이쿠’가 있고, 중국에 ‘율시’가 있다면 한국에는 ‘시조가 있다. 시조는 3장 6구 12음보 45자 내외라는 짧은 글이라 외우기 편하고 기억하기 좋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한글이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라 배우고 익히기 쉽듯 시조도 그렇다. 기본 글자수만 알면 우리의 언어를 그것에 맞추어 얼마든지 활용 가능하다.
시조는 신라의 향가에 그 뿌리를 두고, 고려중엽에 생겨나 고려말 역동 우탁에 의해 완성되었다. 시조 작품을 쓰는 시조시인만의 자랑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우리만의 말, 우리만의 글, 우리만의 문학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정서에 딱 맞는 문학양식이 있어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는 것에 긍지를 느낀다.
한국의 문학인이라면 누구나 시조를 알고 시조를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시조는 한국에서 문학을 하는 문학인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간단한 양식이다. 우리는 시조의 정서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왔고 어려서부터 시조를 알고 배워왔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친숙한 문학이다. 세 글자, 네 글자로 의미 단위들이 끊어지는 것들이 우리말에는 많고, 그러한 우리말 음절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생활 속에 배어 있음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처음에 자수 익힐 때까지가 어렵고 그 다음은 오히려 형식이 풀어져 있는 자유시보다 쓰기가 쉽다.
자기가 말하고 싶은 주제를 가장 짧은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시조,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렇게 좋은 우리의 문학인 시조가 있는데도 그 시조 한 수조차 제대로 창작하지 못하고, 시조를 무시하면서 한국의 문학을 논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문학인이라고 세계에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무릇 생명에는 존재의 어머니가 있듯, 한국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문학의 어머니격인 시조를 외면할 수는 없다. 시조가 일본의 하이쿠나 중국의 율시처럼 우리의 브랜드 문학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시조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자존심과 자존감이 있는 한국문학인들이 해야할 일이다.
한글이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에 문화재로 등록되었듯이 한글을 가지고 쓰는 우리 한국의 독특한 문학인 시조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재로 등재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국문학인으로서 576돌 한글날을 맞이하는 이 가을, 멋진 시조 작품 한 수 써 보는 것은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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