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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논문.평설

형식과 내용의 조화미, 시조 (시와함께, 2022 봄호, 시조평)

by 시조시인 김민정 2022. 2. 20.

형식과 내용의 조화미, 시조

 

김민정(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회장, 문학박삼)

 

신경림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워즈워스(W . Word sworth)와 코울리지 ( S. T. Coleridge)가 공동으로 낸 [성정담시집] (Lyrical Ballads)의 제2판 서문에서 시인이란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보다 쉽게, 보다 힘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시인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점은 뛰어난 감수성과 상상력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철학자나 과학자에게도 필수적인 것이다. 다만 비상히 발달한 언어능력이라는 점에 있어 시인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 가령 앞의 정의에서 "쉽게"라는 말속에 '정확하게, 분명하게'라는 뉘앙스가 있다고 했을 때 그 뜻은 더 명료해진다. 시인이란 결국 남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시도 일종의 대화라는 뜻이다. 설명이 아니라 표현을 가지고 하는 대화니까 정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요즘 읽는 시들 중에 말장난의 시가 많고, 많은 것은 비록 말장난의 시라고 말할 수 없는 것까지도, 표현이라는 개념도 대화라는 개념도 없다. 중언부언 도대체 요령부득인, 그래서 안이하고 탄력 없는 시가 새로움이란 가면을 쓰고 난무한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데 그 말이 어찌 힘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 "힘있게""감동적으로" 를 뜻한다면 이런 유의 시가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최근의 시들이 울림을 주지 못하는 것은 시를 너무 '만들어서' 그런 것 같다. 문제는, 만들어도 억지로 만든다는 데 있다. 자연스러운 데가 없다는 뜻이다. 처음 읽을 때는 눈에 쉽게 띄지 않다가도 다시 읽으면 억지가 확연히 눈에 드러나고 또 다시 읽으면 바느질자국까지 보인다. 처음 읽을 때는 참 근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다시 읽으니 싫증이 나고 또 다시 읽으니 지겨워졌던 근래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 이것은 오늘의 우리 시에 거의 공통되는 것 같다. 젊은 시인이나 중견이나 마찬가지로, 세상의 흐름이 튀는 쪽으로 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겠으나, 이는 요즈음 시인들이 정말 좋은 우리 시를 제대로 읽지 않은 결과라는 한 평자의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다.

말장난으로 시를 쓰는 경우에도 말은 경험의 축적이요 그 구체화로, 말장난에도 삶의 무게가 실려야 한다. 한대 요즈음 시들의 말장난에서는 그것을 찾아 보기가 힘들다. 삶과는 아무 관계 없는 말들을 이리저리 뒤바꾸고 돌리고 비틀고 해서 말의 난장판을 만들어놓을 뿐이다.”

 

신경림의 시란 무엇인가에서 인용해 본 내용이다. 여기서는 시의 내용만을 말하고 있다. 20년쯤 전에 쓴 글인데 요즘의 시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글이라 공감하고 있다. 시조의 형식을 파괴하는 것을 새로움인양 착각하는 젊은 시조시인들이 있다. 전통적인 정형시는 이미 율격이 정해져 있고, 그 율격 안에서 형식과 내용을 조화롭고 신선하게 표현해 내느냐가 좋은 시조 창작의 관건인데도, 형식을 파괴하고 형식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바에는 좀더 자유롭게 자유시를 쓸 것이지, 왜 구태여 시조를 쓰면서 시조의 형식을 파괴하고 싶어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시조는 3612음보 43자 내외라는 형식이 있다. 3장을 제대로 쓰려면, 각 장별로 의미가 완성되어야 하고, 6구별로도 의미가 끊어져야 하며, 12음보도 제대로 지켜지고, 글자수도 초장 3/4/3(4)/4, 중장 3/4/3(4)/4, 종장 3/5/4/3으로 맞아떨어져야 한다. 정 맞추기 힘들 때 한 두 글자가 더 들어가거나 빼도 된다는 뜻이지, 두 세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여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종장도 3/5/4/3으로 잘 맞아야 긴장감이 있는, 시조다운 시조가 창작된다. 종장 끝구에서 3/4가 되면 작품의 맥이 빠진다. 즉 안정감은 있는데 긴장감이 없어진다.

시조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추상성으로 흐르는 경향이 강하고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를 작품을 쓰는 시조시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위의 신경림의 말처럼 시는 대화이다. 작가와 독자가 소통하고 공감해야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이다. 설명이 아니라 표현을 가지고 하는 대화니까 정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시와함께2021년 겨울호에는 다섯 시인의 작품 2편씩 10편이 실려 있다. 이우걸의 추억의 마산항귀뚜라미 바다, 민병도의 임종게臨終偈, 문무학의 낙엽을 쓸다가인생의 주소, 박명숙의 대오적벽, 조경선의 기억을 걱정했다빈 의자의 오래된 생각이다. 그 중에서 한 작품씩만을 짧게 살펴보기로 한다.

 

가사 없는 가을노래가 객창에 쏟아진다

달 밝은 밤이라서 청승맞게 쏟아진다

누구라 할 수도 없이 떼창으로 쏟아진다

 

사변에 군인 나간 아들 걱정하면서

남의 나라 지키러 간 남편 걱정하면서

숨어서 울던 여인들의 신음 소리를 닮았다

 

울음은 울어서 그 울음을 이기려는 것

그래서 얼마쯤을 울고 나면 멈추지만

새벽이 지났는데도 그칠 줄을 모르네

- 이우걸, 귀뚜라미 바다전문

 

이우걸의 귀뚜라미 바다첫수에서는 귀뚜라미의 울음을 가사 없는 가을노래로 표현하고 있다. 가사없이 음으로만 부르는 노래, 그것이 외로운 객창에 쏟아지니 얼마나 더 마음 깊이 쓸쓸함과 외로움을 더해 줄 것인가. 더구나 밝은 달밤에 청승맞게 쏟아지는 노래를 듣는다니. 한 두 마리가 부르는 것도 아닌 떼창으로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귀뚜라미의 울음을 바다의 쓰나미처럼 몰려와 쏟아지는 가을노래로 비유한 것이다. 첫째 수는 각 장의 끝에 쏟아진다를 반복하는 각운을 써서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폭포처럼, 쓰나미처럼 쏟아지는 귀뚜라미 울음을 강조하기 위한 구성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수에서는 귀뚜라미 울음이 조금은 애처로운 소리로 들린다. 사변에 군인으로 나간 아들 걱정하는 어머니들의 신음, 남의 나라 지키러 외국에 간 남편 걱정하는 아내들의 신음소리를 닮았다며 귀뚜라미 소리를 여인들의 신음소리로 환치하고 있다. 셋째 수에 오면 울음은 울어서 그 울음을 이기려는 것이라고 한다. 운다는 것은 감정을 정화(카타르시스)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울고 나면 남아있던 감정의 찌꺼기가 사라져서 감정은 깨끗해지는 것이다. 새벽이 지났는데도 그칠 줄을 모르는 귀뚜라미의 끈질긴 울음, 가을을 온통 끌고 가려는 듯 하다.

 

날 저문 꽃그늘에서

전화번호를 지운다

 

한 때를 설레게 한

떠난 그대, 보낼 이름

 

놓아 준 이름이 가서

하늘 높이 반짝인다

- 민병도, 전문

 

민병도의 은 짧은 단시조이다. ‘날 저문 꽃그늘에서 전화번호를 지우는 것, 그것은 사랑의 아름다움이 지나간 자리에서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을 잊는 모습이다. 아니 잊으려는 노력다. 누구라도 사랑하던 한 때는 많이 설레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모습을 중장에서 보여준다. ‘한 때를 설레게 한/ 떠난 그대, 보낼 이름’, 그 속에는 사랑했던 순간들의 설레던 모습,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대가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대는 떠난 상태고, 그 이름까지도 보내주어야 할 나의 상황이다. 떠나간 그대를 깔끔하게 깨끗하게 정리하려는 모습, 그리고 그렇게 보내준 그 이름이 가서 하늘 높이 반짝인다고 한다.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고 세상에 우뚝 선 그 사람이 반짝이는 모습을 자신이 그것을 대견스럽게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일 수도 있고, 내가 놓아준 그 이름, 그러나 끝내는 보내지 못하는 이름이 되어 하늘 높이(내 마음 깊숙이) 반짝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사랑을 아름답게 갈무리하고픈 화자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나를 떠났다고 하여 미움의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예전 사랑하며 설레었을 그 때의 그 마음으로 여전히 그대를 지켜보고 사랑하고 있는 화자, 그 역시 아름다운 별이 아닐까. 알퐁스 도데의 아름다운 소설 처럼 말이다.

 

젊을 적 식탁에는 꽃병이 놓이더니

늙은 날 식탁에는 약병만 줄을 선다.

 

! 인생,

 

고작 꽃병과 약병

그 사이에 있던 것을…….

-문무학, 인생의 주소전문

 

문무학의 인생의 주소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숙연하게 한다. 다른 설명이 필요없이 간단 명료하다. 한 마디로 주제가 선명한 것이다. 시인이란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보다 쉽게, 보다 힘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시조시인은 가장 강렬하게,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을 때 시조의 본령인 단시조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쉽게"라는 말속에 '정확하게, 분명하게'라는 뉘앙스가 있을 때 그 뜻은 더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설명이 아니라 표현을 가지고 하는 대화이므로 상대방이 알아듣게 정확하고 분명해야 하는데 이 시조는 그런 면에서 정확하고 분명하다.

사실적인 표현의 초장과 중장을 통해 이 작품에 대한 공감을 얻고 있으며, 종장의 표현으로 , 그렇구나하고 독자도 무릎을 치게 된다. 누구의 삶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젊은 날은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 식탁에 꽃을 꽂기도 하지만, 나이 들면 약병만이 줄을 선다는 말, 그 말에 공감되며 인생은 별 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생이 거창할 것 같지만, ‘고작 꽃병과 약병 그 사이에 있던 것을.’이라는 표현을 통해 또 많은 상상력을 자아낸다. 화자가 말줄임표 속에 넣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사느냐고, 왜 그렇게 잘난척하며 사는냐고, 왜 그렇게 싸우며 사는냐고. 좀 더 여유있게 살면 안 되냐고, 아니 여유있게 살아야 한다고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짧지만 확실하고 강력한 주제를 지닌 작품이다.

 

성냥불 타들어가듯 물빛 홀로 꼬부라지는데

정강이 일으켜 세우고 적벽이 건너온다

징검돌 하나씩 버리면서 저벅저벅 건너온다

 

어둠살 들이치는 물결과 물결 사이로

금천강 저녁답 실핏줄을 터뜨리며

적벽이 물 건너온다 들소처럼 건너온다

 

해거름 물 소리는 솔기마다 굵어지는데

성미 급한 어둠을 한 걸음씩 들어올리며

핏물 밴 적벽 한 채가 철벅철벅 건너온다

-박명숙, 적벽

 

박명숙의 적벽에선 마치 적벽대전의 조조의 배들이 불타는 것을 연상시키듯 성냥불 타들어가듯 물빛 홀로 꼬부라지는데라며 삼국지연의 속의 적벽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변산반도의 적벽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적벽이란 절벽의 충청도 방언이다.

첫째 수에서는 강가의 아름다운 절벽의 그 풍경이 내게 말을 걸 듯이, 아는 척을 하듯이 저벅저벅 건너온다고 한다. 여기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적벽이 마치 동물처럼 살아서 움직이듯 활유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둘째 수에 오면 그 환치는 더욱 확연하다. ‘어둠살 들이치는 물결과 물결 사이로/ 금천강 저녁답 실핏줄을 터뜨리며/ 적벽이 물 건너온다 들소처럼 건너온다며 적벽을 환치한 동물이 바로 들소임을, 적벽을 들소로 환치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추상을 구체화시켜 독자로 하여금 조금 더 실감있게 느껴 공감을 돕는 부분이다. 어둠이 들이치는 금천강 저녁답에 실핏줄을 터뜨리는 건 아마도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의인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셋째 수에 오면 사변이 조용해지는 저녁답 물소리는 더 크게 들리고 용감한 들소처럼 힘있게 노을을 안은 적벽이 철벅철벅 건너오고 있음을 표현했다. 금방이라도 그 적벽이 눈앞에 다가와 설 듯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표현을 함으로써 활유법의 효과는 커지고 공감력도 커 지고 있다.

 

떠나간 발자국보다 돌아오는 발자국에

매일 팔다리가 자라는 산그늘 밑

 

수없이 돌고 돌아도 길을 잃지 않는다

- -조경선, 빈 의자의 오래된 생각첫째 수

 

조경선의 빈 의자의 오래된 생각은 추상성이 짙은 작품이라 난해한 작품이다. 첫째 수의 떠나간 발자국보다 돌아오는 발자국이란 지나간 날들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오리라는 기대 때문에 매일 팔다리가 자라는 산그늘 밑이라고 말하고 있다. 종장에서는 수없이 돌고 돌아도 길을 잃지 않는다며 실망하며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도 가야할 길, 목표를 잃지 않는 모습을 말함으로써,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놓지 않는 젊은이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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