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공존하는 시인
김민정(문학박사, 시조시인)
“시인이란 언어와의 사랑놀이를 평생토록 지속하는 사람이다. 그때그때의 낱말 선택에서 딴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유일자를 찾아내야 하는 시인은 개개 낱말에 대한 낭만적 사랑을 평생 고질로 앓고 있는 충직한 사람이기도 하다.”고 유종호는 『시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고 있다. 결국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자유자재로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낱말로 어떻게 낱말을 얽고, 짜고, 꿰매고, 홀치는가로 그 작품이 여러 사람에게 공감되는 좋은 작품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다. 그런 언어, 그런 낱말들을 공짜로 마음껏 가져다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고 문득 생각해 본다. 우리가 낱말을 많이 알면 알수록 사상이나 감정의 폭이 넓어질 수 있고, 그만큼 시를 쓸 때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낱말을 많이 안다고 다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많은 언어를 알고 있어도, 언어학자가 시인이 아닌 것처럼 누구나 시인이 될 수는 없다. 그 언어를 조합하여 시적으로 표현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능력을 지녀야만 비로소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시와 함께》 2021년 가을호에는 여섯 시인의 작품 2편씩, 12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한 작품씩만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움 길어져서
스칠 듯 손 내민 풀
맞닿은 어깨로 기도하는 소리들
푸름의 경건한 유흥
바람은 비밀 지켜
우아한 야성은
칼에서 꽃을 읽고
만물에 정중하며 시시콜콜 섬세해
풍경은 그대로 문법
시를 탐내지 않지
- 한분순 「이 시는 너무 멋부렸어」 전문
한분순 시인의 「이 시는 너무 멋부렸어」란 작품을 읽으며 요즘 시들을 생각한다. 시는 시인이 낱말을 가지고 구성하는 언어의 조립이다. 시인들은 남이 안 쓴 멋진 표현을 하고 싶어 ‘낯설게 하기’ 표현기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을 읽다가 보면 표현은 멋있는데 이미지나 주제가 잡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작품을 읽고 가슴을 탁 치는, 진솔하게 와 닿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들이 많다.
첫수에서는 “그리움 길어져서/ 스칠 듯 손 내민 풀// 맞닿은 어깨로 기도하는 소리들// 푸름의 경건한 유흥/ 바람은 비밀 지켜”라며 풀이 길어진 건 그리움 때문이며 길게 손을 뻗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소리로 풀들은 수런대고, 맞닿은 풀들이 흔들리는 푸름 그 자체를 경건한 유흥이라 표현한다. 첫째 수에서는 멋을 별로 부리지 않았다. 둘째 수에 오면 초장과 중장에서 약간 멋을 부렸다. “우아한 야성은/ 칼에서 꽃을 읽고”라며 결코 우아하다고 보기 어려운 야성에 ‘우아한’을 접목시키고, 꽃과는 어울리지 않는 칼인데도 ‘칼에서 꽃을 읽고’라고 했으며, “물에 정중하며 시시콜콜 섬세해”라고 대조적인 면을 서로 결합시키고 있다. 그렇게 시는 멋을 부리다가, 종장에서는 “풍경은 그대로 문법/ 시를 탐내지 않지”라며 정색한다. 시를 쓰며 언어유희를 하는 것은 인간들이고, 자연은 뒤틀림 없이, 휘둘림 없이 그대로의 진솔한 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진솔성은 여기에 있고 바로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이다. 지나친 언어유희보다 진솔한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단한 봄날 오후 물오른 정을 담아
감숭하게 여문 꽃봉 볕뉘 담은 그리움은
촉 세운 시인의 손길 붓 한 자루 보냅니다.
찻잔에 어린 무늬
사람 향이 배어나는
메마른 삶의 길에 내 마음이 전이되어
혀끝에 감도는 미감 우리고 또 우립니다.
물관이 섶을 열어 하얀 등을 밝혀놓고
혼자 하는 고해마냥 촉촉하게 젖은 눈매
목필화 선명한 그림 시화 한 폭 새깁니다.
- 김복근 「목련차」 전문
김복근 시인의 「목련차」이다. 목련차는 목련꽃이 피기 전에 꽃봉오리를 따서 우려내는 차다. 화자는 “찻잔에 어린 무늬/ 사람 향이 배어나는// 메마른 삶의 길에 내 마음이 전이 되어/ 혀끝에 감도는 미감 우리고 또 우립니다.”라고 목련차에서 사람의 정이 배어난다고 보고 있다. 어쩌면 목련꽃으로 차를 만들어 준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고 한편 보기만 해도 우아한, 활짝 피기 전의 목련꽃봉오리가 떠 있는 차 자체에 대한 애틋한 정의 표현일 수도 있다. “우리고 또 우린다”고 하니 그 정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셋째 수에 오면 화자는 목련차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얀 목련꽃송이가 떠 있고, 그 향이 배어있는 찻잔을 보며 화자는 “물관이 섶을 열어 하얀 등을 밝혀놓고/ 혼자 하는 고해마냥 촉촉하게 젖은 눈매/ 목필화 선명한 그림 시화 한 폭 새깁니다.”라며 그 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표현하고 있다. 한 잔의 목련차를 “고해하는 사람의 촉촉하게 젖은 눈매”라며 뛰어난 메타포와 의인법을 함께 쓰고 있다. 잔잔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화염에 몸부림치다
잠이 든 학 한 마리
불가마 열려지면
깜짝 놀라 날아갈 듯
먼 창공 바라보면서
첫울음을 울 것 같다.
- 진길자 「청자 꽃병」 전문
진길자 시인의 「청자 꽃병」이다. 단시조인 이 작품은 마치 학이 살아 있는 듯한 감각적 표현을 통해 작품에다 생동감을 불어 넣고 있다. 초장부터 “화염에 몸부림치다/ 잠이 든 학 한 마리”라며 청자를 굽기 위한 뜨거운 화염에 학은 몸부림을 치다가 잠이 들었다고 활유법을 써서 표현하고 있다. 도자기를 굽기 위한 그 뜨거운 온도를 학이 다 견뎌온 것처럼 표현한다. 중장에선 “불가마 열려지면/ 깜짝 놀라 날아갈 듯” 뜨거움에 몸부림치다 잠이 들었던 학이 청자가 다 구워져 불가마가 열리면 화들짝 정신이 들어 놀라 날아갈 듯하다고 한다. 청자 꽃병에 새겨진 학의 문양에서 화자는 곧 날아갈 듯 날개를 활짝 펼친 학의 모습을 보며 마치 학이 금방이라도 움직이며 날아갈 듯하다고 묘사하여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종장에서는 “먼 창공 바라보면서/ 첫울음을 울 것 같다.”며 초장과 중장에선 시각적 이미지를 종장에서는 청각적 이미지를 쓰고 있다. 짧은 단시조 작품 안에 명징한 이미지즘을 나타낸다. 적절한 감각적 표현과 활유와 직유법을 잘 활용한 작품이다.
넌 섬이 아니더라, 너붓이 가슴 젖혀
새 떼들 젖 물리는 천륜의 모정이더라
갈대밭 마른 속울음 남모르게 다독이는
세상의 상처들은 하구로 모여들어
지친 여
정을 풀고 네게 안착한다
한동안 삶에 쫓겼던 내 언 발을 녹이며
그 누구 넋두리일까 갈숲이 들썩인다
낡은 시간을 깨고 눈 뜨는 푸른 생명
분주한 숨소리들이 겨울 강을 밀어낸다
- 윤경희 「을숙도 화첩」 전문
「을숙도 화첩」은 을숙도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에 담듯 표현하고 있다. 을숙도는 새가 많이 살고 물이 맑은 섬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때 동양 제1의 철새도래지로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었고, 겨울철 철새가 군무를 이루며 비상하는 모습이 일대장관이었던 을숙도였다.
이러한 을숙도의 특징을 화자는 “넌 섬이 아니더라, 너붓이 가슴 젖혀/ 새 떼들 젖 물리는 천륜의 모정이더라/ 갈대밭 마른 속울음 남모르게 다독이는”라며 모정을 지닌 섬으로 표현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낙동강 하구를 잇는 하중도(河中島)로 낙동강이 운반해 온 토사의 퇴적에 의하여 형성된 모래섬인 을숙도의 모습을 “세상의 상처들이 모여 안착하며 언발을 녹이는 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든 세상의 상처를 받아들이고 치유하는 듯한 을숙도를 표현함으로써 첫째 수의 모정과 연계성을 지닌다. 셋째 수에서는 “그 누구 넋두리일까 갈숲이 들썩인다/ 낡은 시간을 깨고 눈 뜨는 푸른 생명”이라며 2005년 생태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난 을숙도의 희망적인 모습을 그렸다. 짜임새 있는 구도로 잘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유연한 네 몸은 쏟아지지 않는 액체
지붕을 올라가도 뒷말이 묻지 않고
쫙 펼친 수염으로는 이치를 읽고 있어
딴소리 흘리지 않는 살폿한 발자국은
깊은 눈밭 걸어도 흩어지지 않으며
나설 때 기다릴 때를 마름할 줄 다 알아
- 김양희 「검은 고양이」 전문
김양희 시인의 「검은 고양이」는 애완동물에 대한 예찬 시조이다. 1923년 이장희가 쓴 ‘봄은 고양이로다’란 작품은 “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며 봄과 고양이의 유사점을 찾아 고양이의 형상을 통해 봄의 감각을 미화했다면, 김양희 시인의 작품은 고양이 자체에 대해 예찬한 시조다.
첫수 초장에선 고양이의 유연함을 “쏟아지지 않는 액체”로, 중장에서는 잽싸고 날렵하여 중심을 잘 잡는 고양이의 몸동작을 “지붕을 올라가도 뒷말이 묻지 않고”라고, 종장에선 주변의 환경 변화를 감지하는 수염의 역할을 “쫙 펼친 수염으로는 이치를 읽고 있”다며 예찬한다. 둘째 수에서는 사뿐한 고양이 발걸음을 “딴소리 흘리지 않는 살폿한 발자국”으로 표현하며, 또한 그것은 “깊은 눈밭 걸어도 흩어지지 않”는 것으로 예찬했다. 종장에서는 ‘나설 때 기다릴 때를 마름할 줄 다 알아’라며 인지능력과 판단능력이 뛰어난 고양이에 대한 예찬을 하고 있다.
고양이란 사물에 대한 자세한 관찰로 탄생된 작품이다. 세상의 사물이란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면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시인은 누구보다 예리한 눈과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주변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귀족의 탄피 냄새
커피엔 둥근 꽃내
공기가 상냥해져
크림 맛 구원이다
반란은 멋진 바보짓
영리하게 키스를
달콤한 신, 낭만을
모든 것의 논리로
개념에 주술 걸어
얹힌 슬픔 거두면
광대가 그대 곁에서
은총 쏘며 지킨다
- 이봄 「나는 너를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어」 전문
이봄 시인의 「나는 너를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어」란 작품은 지금껏의 시조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는다. 낱말의 조합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익숙한 연결의 낱말이 아닌 색다른 낱말로 조합된 시조다. 문득 이상의 「오감도」가 생각난다. 당시 「오감도」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형태적 측면과 그로테스크한 내용으로 당대 한국 시의 관습에서 볼 때 파격적이었고 제목부터가 문제였다. 이봄 시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요즘 젊은 시조시인들의 작품에서 느끼는 생경함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낱말들의 조합으로 ‘낯설게 하기’를 하고 있어 신선한 면이 있지만, 언어의 조합이 만들어 내는 의미의 연결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의 화자는 커피잔을 앞에 놓고 있다. 제목이 「나는 너를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어」라고 해서 제목만 보면 ‘이성’에 대한 작품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내용에서 반전을 가져온다. 첫째 수에서는 “귀족의 탄피 냄새/ 커피엔 둥근 꽃내// 공기가 상냥해져/ 크림 맛 구원이다// 반란은 멋진 바보짓/영리하게 키스를”라며 커피의 냄새를 맡으며 그리고 키스하듯 커피잔에 입술을 대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둘째 수에서는 커피를 마시며 카페에서 취직공부를 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슬픔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광대가 그대 곁에서/ 은총 쏘며 지킨다”고 표현하여 화자를 포함한 젊은이들을 광대로 희화화(戲畫化)하면서 현실을 풍자한 면이 신선하고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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