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기의 시조와 국난 극복 의지
김민정(한국문협 시조분과회장, 문학박사)
우리의 시조는 시절가조(時節歌調)라는 말에서 온 말이다. 시절가조란 그때 그때의 시류에 맞는 시가라는 뜻이었고, 현대에 오면서 노래보다는 문학이라는 뜻으로 이어졌다. 순간을 노래하는 시조이기에 역사적인 순간의 격변기 속에서 우리는 시조로서 그 감정을 읊었고, 또한 그러한 격변기의 국난 극복 의지를 시조작품에 피력했다.
시조의 완성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고려말,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작품들은 고려라는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고려 충신들과 조선을 건국하고자 했던 이성계 사이의 격변기에서 탄생된 작품들이 많다. 포은 정몽주는 이성계의 계략을 눈치채면서도 그의 병문안을 가게 되고 이방원은 그에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라는 「하여가」를 지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고, 정몽주는 이에 다음과 같은 화답시조로 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포은 정몽주, 「단심가」 전문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는 고려말의 성리학자이며 충신이다. 조선을 건국하려는 이성계의 야망을 알고 있었기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격변기에도 고려의 신하로서 자신의 주장과 신념은 변함이 없음을 알림으로써 몸은 죽어도 자신의 신념은 죽지 않겠다는 결의로써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귀가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철퇴를 맞고 죽게 되지만 그의 뜻은 아직도 살아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턴고
굽힐 절개라면 눈 속에 푸를 소냐
아마도 세한고절은 너 뿐이가 하노라
-운곡 원천석, 「눈 맞아 휘어진 대를」 전문
원천석(1330~?)은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이자 문인이다. 그는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출세를 단념한 채 한 번도 관계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은사로 지냈다. 이 작품에서 눈은 시련과 고난의 상징으로 새 왕조에 협력을 강요하는 세력이라고 볼 수 있으며 대는 절개를 지키는 고려 유신을 비유한 말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세한고절은 한 겨울에 절개를 지키는 것을 의미하며 ‘너’는 자신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대나무를 높은 절개를 지닌 존재로 형상화하여 자신과 동일시하였다. 즉 자신도 대나무와 같이 끝까지 절개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냄으로써 현실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야은 길재, 「회고가」 전문
야은 길재(1353~1419)는 이색의 제자로서 태종 이방원이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고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선비이다. 이 시조는 고려의 옛도읍지인 개성을 돌아보면서 망국의 한과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어 「회고가」라고 한다. 초장에선 고려의 옛 서울에 신분이 낮고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돌아온 화자의 모습을 그렸고, 중장에서는 유구한 자연과 무상한 인간의 삶을 대비하고 있으며, 종장에는 고려 왕조의 번성했던 시절이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허무함을 표현하고 있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는 것으로, 절개 있는 선비의 모습으로 격변기를 건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는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 목은 이색 「백설이 잦아진 골에」 전문
이 작품은 고려 유신인 이색(1328~1396)의 작품이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색은 자신이 충성을 다했던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신진 세력인 이성계 일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이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을 우의적, 풍자적으로 드러냈다. 이색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여말 3은 중의 한 사람이다.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후 여러 차례 출사를 종용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가슴에 궁글 둥시러케 고 왼기를 눈길게 너슷너슷 와
그 궁게 그 너코 두 놈이 두 긋 마조자바 이리로 훌근 져리로 훌젹 훌근훌젹 저귀 나남즉 대되 그 아모로나 견듸려니와
아마도 님 외오 살라 면 그 그리 못리라.
- 김천택, 《진본 청구영언》, 대은 변안렬의 「불굴가」 전문
내 가슴 구멍 뚫어 동아줄 길게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이 한 몸 가루 된들
님 향한 그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랴.
- 변안렬, 「불굴가」를 그의 22대손 변우택이 정격시조로 고친 전문
황패강에 의해 명명된 「불굴가」의 국문노래가 진본청구영언의 만횡청류 549번째로 실려 있다. 청구영언은 18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만횡청류 사설시조 118수가 실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문으로 된 여러 자료에 의해 고려말의 무신이며 충신이었던 대은(大隱) 변안렬(1334~1390)의 작품 「불굴가」로 알려지면서 고려말 격변기 무인의 지조를 나타낸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음으로는 조선의 6대 왕이었던 어린 단종(1441~1457)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세조, 1417~1468)에 반항하며 단종복위를 꿈꾸었던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들의 시조를 살펴 보자.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 하리라
– 성삼문(1418~1456), 「이 몸이 죽어가서」 전문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夜光) 명월(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변(變)할 줄이 이시랴
- 박팽년(1417~1456), 「가마귀 눈비 맞아」 전문
방 안에 켰는 촛불 뉘와 이별 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촛불 나와 같아서 속 타는 줄 모르도다
- 이개(1417~1456), 「촉루가」 전문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 터니
문전의 수성어적이 잠든 나를 깨와다
- 유성원(미상~1456), 「초당에 일이 없어」 전문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엇 하리오.
- 유응부(미상~1456), 「간밤에 불던 바람」 전문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 왕방연(미상~미상), 「천만리 머나먼 길에」 전문
위의 다섯 작품은 사육신이 쓴 작품이며 마지막 작품은 단종을 영월에 유배시키고 돌아오며 왕방연이 쓴 작품이다. 사육신이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은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신임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종 복위를 주장하다가 실패하여 처형을 당한 사람들이다. 사육신은 모두 학식이 깊고 청빈했다. 이들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모두 절개를 지켰고, 세조와 추국관인 신숙주를 꾸짖었다. 이개는 고려 말 대학자였던 이색의 증손자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한 인물이다. 꿋꿋한 절개로써 정치적 격변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다음으로 임진왜란으로 힘든 시기 이순신 장군이 읊은 국난 극복의 시조를 살펴보자.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 이순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전문
임진왜란에서 적을 막기 위해 싸우던 이순신(1545~1598)이 한산섬에서 읊은 시조이다. 화자는 초장에서 밝은 달밤에 적을 살피는 망루에 홀로 앉아 있다. 중장에서는 긴 칼을 옆에 차고 있으면서도 싸움은 하지 못하고 깊은 시름에 잠겨 있다. 종장에서는 전장에서 잔치를 하고 있는 명나라군의 ‘일성호가’가 들려와 장군의 애를 끊는다.
왜군과 싸우는 것만도 힘든데, 우리를 도우러 왔다는 명나라 이여송(1459~1598) 군대 때문에 시름이 더 커지게 된 듯하다. 적과의 싸움보다 국내 정치와 국제적인 외교문제까지 신경을 써야하는 장군의 고뇌가 잘 드러나는 시조로 전쟁이라는 민족 고난의 시기에 썼으며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세월이 하 수상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
- 김상헌(1570~1652), 「가노라 삼각산아」
청 태종은 1636년 12월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직접 조선을 침략했다. 청나라 군대가 한양에 이르자, 인조는 늦은 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는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르게 된다.
끝까지 청나라에 대항해 싸울 것을 주장한 척화파 김상헌은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는데, 이 때 비분강개한 심정을 시조로 읊었다. 초장에 나오는 ‘삼각산’과 ‘한강수’는 고국을 상징하며, 조국애와 충정의 의미가 들어 있다. 중장에는 한에 찬 볼모의 길을 떠나는 작가의 모습이 나타나 있으며, 종장에는 돌아올 기약 없이 조국을 떠나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다음으로는 현대시조의 효시라고 알려진 「혈죽가」에 대해 알아보자. 대구여사가 지었다는 「혈죽가」는 충정공 민영환의 ‘위국충절’을 노래한 시조다.
협실에 솟은 대는 충정공 혈적이라
우로를 불식하고 방중에 푸른 뜻은
지금의 우극 충심을 온 세계에 알리고자
충정의 굳은 절개 피를 맺어 대가 되어
누상에 홀로 솟아 만민을 경동키는
인생의 비여 잡초키로 독야청청 하리라
충정공 푸른 절개 포은 선생 위에 있다
석교에 솟은 대도 선죽이라 유전커든
하물며 방 중에 난 대야 일러 무엇 하리오
- 대구여사(미상~미상), 「혈죽가」 전문(대한매일신보 제276호 1906.7.21)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우리나라 외교권이 박탈당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종로 상인들은 가게문을 닫았고 각 학교도 모조리 문을 닫았다.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1905년, 고종 42년 11월 20일자 단장의 논설「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했다. 시종무관장 민영환(1861-1905, 44세)은 그해 11월 30일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순국 후 피묻은 옷과 칼을 상청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의 문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바닥과 피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다. 그의 충정이 혈죽으로 나타났다고 사람들은 이 나무를 절죽(節竹)이라 했다. 선비정신의 기개와 민족정신을 이 시조는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 백성들에게 민족정신의 귀감이 되었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본보기가 되었다. 그 후에도 이와 유사한 제목과 내용으로 이루어진 작가 불상의 시들이 3·1운동 전후해서 나타날 정도로 파장이 컸으며, 민족정신을 고취하기에 충분했다.
다음으로는 육이오로 인한 남북분단의 시기에 대한 작품을 살펴보자. 주로 분단의 아픔과 통일에의 의지를 담아 현재의 민족고난을 극복하려 한 작품들이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 거리며/ 가야한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 이은상((1903~1982), 「고지가 바로 저긴데」 전문
우리의 강토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6.25 전쟁 이후 철조망을 치고 휴전선을 만든 후 왕래를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아픔을 노래하고 있고,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일월도 서먹한 채/ 그늘진 정은 흘러
핏자욱 길목마다/ 귀촉도 우는구나
건널목 숲으로 가름한/ 저 언덕과 이 강물!
진달래 피어들고/ 단풍잎 블타나고
부르며 바라보는/ 어배들의 보금자리
배리는 화사의 습성/ 굳어만 가는 마음벌!
얼룩진 수의이기/ 되씹는 회환인가
깁소매 접어 넣고/ 활짝 열자 닫힌 창을
섭리는 새 날의 기수/ 지켜 서는 내 강토.
오랜 역사의 장이/ 갈피갈피 어엿하다
한 핏줄 소용 돌아/ 가슴가슴 솟구친다
갈림은 만남의 정점/ 휘어잡은 내 손길.
- 리태극(1913~2003), 「내 산하에 서다」 전문
‘내 산하’는 고향이며, 조국을 의미한다.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핏자욱 길목마다 귀촉도가 운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건널목 숲으로 가름한 저 언덕과 이 강물’이란 숲을 사이로 하여 갈라진 남과 북을 상징한다. 한 핏줄을 나눈 형제이면서도 서로 대립적 관계에 놓여 적대시하는 남북분단의 현실을 지켜보며 그것을 극복하여 만남, 즉 통일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성산에서 문산까지 사십점육 킬로미터
단선디젤 구간에서 복선전철 구간으로
고결한 숨결이 되어 신선하게 태어난다
유라시아 대륙으로 대동맥을 펼쳐 나갈
통일의 꿈 피어나는 가야할 길 시작이다
이제 막 심장으로부터 더운 피를 뿜는다
정점 향해 달려가는 순수의 네 행보는
아스라한 철로 위에 섬광처럼 반짝이고
너와 나 함께 할 내일 눈부시게 푸르다
칼날처럼 변화하는 디지털의 세상에서
판문점, 임진각아 너희들도 변해 보렴
경의선 기적소리여, 관통하라 남과 북!
- 김민정, 「경의선 기적소리여」 전문
졸시조인 「경의선 기적소리여」는 서울에서 의주까지 가는 기찻길을 생각하며, 유라시아대륙까지 가기를 바라며, 남북을 관통하는 기찻길을 통해 남북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시조이다.
이외에도 송선영의 「설야」와 「휴전선」, 정완영의 「조국」, 북한이 고향인 우숙자의 「고향」, 김복근의 「잠자리 날개 사이로 내린 햇살」, 하순희 「대마리 전언」, 졸시조 「평화열차 DMZ」 등 남북분단의 현실과 그것을 극복하고 통일을 바라는 작품들은 수없이 많은데 다 소개하지 못해 아쉽다.
요즘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또 한 번의 격변기를 치루고 있는데, 그에 관한 시조도 살펴 보자.
내 평소/ 관심 없어/ 눈길도 주지 않다
네가 이리/ 귀한 줄/ 미처 몰라 발동동
코로나 공포에 질려/ 각자 도생/ 마스크
박성락, 「마스크」 전문
어둠이 밀려오다 주춤이며 물러선다
떠다니는 바이러스 총칼없는 전쟁이다
천사도 마스크 쓰고 우리들을 지켜섰다
김민정, 「마스크 천사」
「마스크」는 박성락의 작품이며 그는 코로나와 관련해 시조집 『코로나 19』 (한국문화사, 2020.10.30)도 간행한 바 있다. 「마스크 천사」는 본인의 수석시조집에 실린 본인의 수석시조인데 수석사진과 함께 미국의 세종문화회에서 만든 시조교과서 서문에 들어가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시조시인들이 코로나19와 관련된 작품을 썼으나 지면 관계상 소개할 수 없어 아쉽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민족의 고난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 작품이 시조에는 유난히 많다. 그만큼 시조가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문학이라는 의미도 되고, 시조가 순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편했다는 의미도 된다. 고난극복을 유난히 잘하는 지혜로운 민족이라고 알려진 우리 민족의 저력에는 시조라는 문학의 큰 힘이 존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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