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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현대시 100년

김민정의 한국현대시 100년 제18회 - 청포도 / 이육사 (국방일보, 2014. 05. 12)

by 시조시인 김민정 2014. 5. 13.

‘조국 광복의 실현’ 간절한 소망 담아

[현대시]청포도/이육사
2014. 05. 11 15:34 입력 | 2014. 05. 11 16:52 수정

기존 작품과 차별되는 서정적 작품 밝고 희망찬 느낌으로 고향 정경 표현


 

 1939년 ‘문장’(文章)에 발표된 시다. 이육사의 다른 작품이 남성적이고 의지적인 데 비해 이 작품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가진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색과 백색의 선명한 색채 대비를 통해 밝고 희망적인 느낌과 전통적인 소재를 사용해 고향의 정경을 정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청포도’를 통해 밝고 선명한 분위기를 형성해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이 회복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그의 입장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조국 광복으로 볼 수 있다.

오랫동안 기다린 그를 맞아 순수하고 고결한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과 더불어 청포도를 대접하고자 하는 작가의 모습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여는 그날’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가짐이 잘 드러난다.

 이 시의 배경은 경북 영일군 동해면 도구리다. 영일만과 동해의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야트막한 언덕이다. 이곳에 일본인 미쓰아가 경영하는 대규모 포도밭과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포도주 생산 공장이 들어서 있었고, 육사는 1940년 여름 항일운동과 구금 생활에 상한 고달픈 몸으로 이곳을 찾아왔다. 이곳의 애국청년 김영호(당시 35세. 작고), 정의호(당시 37세. 작고), 이석진(당시 40세. 작고) 씨 등과 만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육사는 몰래 포항에 잠입해 청년들을 만나고 떠난 1년 뒤 삼륜 포도원과 영일만이 청포도를 탄생시켰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이육사(1904~1944)는 경북 안동 출생이며 중국 북경에서 옥사했다. 본명은 원록(源祿). 이명은 원삼(源三), 뒤에 활(活)로 바꿨다. 이황(李滉)의 14대손으로 5형제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1921년 안일양과 결혼했다. 1925년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 그해 10월께 북경으로 건너갔다. 1926년 북경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수감됐었는데, 그때의 수감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1930년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하면서 등단,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자오선’을 발간해 청포도·교목·절정·광야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1941년에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하면서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돼 북경으로 압송, 이듬해 건강이 악화해 북경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이 그의 동생이자 문학평론가인 이원조에 의해 출간됐다. 그의 유해는 1960년에 고국에 돌아와 고향인 낙동강 변에 안장됐고, 1964년 경상북도 안동시에 시비가 세워졌다. 196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으며 그의 문학관도 안동에 건립됐다.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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