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현대시]향 수/정지용
- 2014. 05. 18 17:54 입력 | 2014. 05. 18 19:48 수정
향 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후략)
이 시는 1930년대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정지용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27년 ‘조선지광’ 65호에 실렸으며, 1995년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인 서울대 박인수 교수가 노래로 불러 더 많이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아 온 작품이다. 고향은 모든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원초적 그리움의 대상인데, 정지용은 이 작품에서 그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감성과 원초성을 감각화시킴으로써 정서의 진폭을 크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정서를 깊이 자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연의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은 시각적 심상이지만, 짚벼개에서 오는 ‘풀석거리는’ 소리의 청각적 심상과 성기고 거친 촉각적 심상까지 동원돼 우리의 감각적 정서를 더욱 자극했다. 또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과 같은 시각의 청각적 표현,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에서 보여주는 시각의 촉각화 같은 생동감 있는 감각적 표현이 이 작품을 우리들 가슴에 각인돼 오래 남게 하고, 또한 모든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고향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우리의 심연 속으로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이 작품은 5연으로 돼 있지만, 고향의 여러 모습이 영화적 요소, 또는 몽타주적인 모습으로 각 연마다 독립된 장면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모더니즘의 한 기법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의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각 연의 마지막에 있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반복구 때문이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심리적 조화감을 심어주고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정서를 새록새록 일깨워 주는 강조의 역할도 하고 있다.
정지용(鄭芝溶·1902~1950)은 충북 옥천 출생으로 아명은 지룡(池龍)이다. 1926년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30년 순수문학파 박용철·김영랑·이하윤 등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을 발간했으며, 1933년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9인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1939년부터 ‘문장(文章)’의 시 부문 추천위원이 돼 조지훈·박두진·박목월 등을 등단시켰다. 광복 후 이대교수를 역임했고, 1950년 납북되다가 미아리 근처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시문학사·1935), 백록담(문장사·1941), 지용시선(을유문화사·1946)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문학독본(박문서관·1948)과 산문(동지사·1949), 정지용 전집 2권(민음사·1988)이 있다. 1995년에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향수’가 가요로 만들어져 발표됐고, 1996년에는 그의 생가가 복원됐으며, 2005년에는 옥천에 정지용문학관이 건립됐다.
<김민정 문학박사·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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