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고통 딛고 더 굳세게 일어나리라
- 현대시
- 2014. 05. 25 14:24 입력 | 2014. 05. 25 17:20 수정
초라한 모습·아픔 그대로 수용 괴로운 삶 속 반짝이는 시 탄생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이 시는 스물세 살 때인 1935년에 썼으며 ‘화사집(花蛇集·1941)’에 실려 있다. ‘애비는 종이었다’는 첫 구절의 솔직성으로 인해 떳떳하고 당당하며 도전적인 면마저 느껴진다. 그는 종의 자식이며 갑오년인가에 집을 나가 끝내 돌아오지 않은 외할아버지의 피를 받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김성수 일가의 머슴살이를 했고, 외할아버지는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1894년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음울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1연에서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는 표현으로 나타냈다.
스물세 해 동안 그의 생애를 지배한 것은 바람이었다고 한다. 즉, 끊임없는 방랑과 시달림과 흙먼지와 추위 등이었다. 부끄러운 속에서의 삶, 사람들은 그의 고통을 어떤 죗값이라 여기기도 하고 그를 비웃으며 천치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라며 결연함을 보인다. 그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나 아픔을 뉘우침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 삶의 시련과 고통이 그를 더욱 굳세게 일어나도록 한다. 그것은 찬란히 티워오는 아침에 그의 이마에 반짝이는 시의 이슬로 나타난다.
괴로운 삶 속에서 시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서정주는 1930년대 인간 원형의 탐구로 실존의 고뇌를 다룸으로써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생명파 시인으로 평가된다. 또한, 한국어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으로 고향 전라도의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해 우리말을 가장 잘 살려 쓴 시인,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 시인으로도 평가된다. 그러나 그는 일제 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 시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 행적, 광복 후의 친권력적 행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해 국정교과서에서 그의 작품이 배제됐으며, 검인정 교과서에서도 제한적으로 수록됐다.
서정주(1915~2000)의 호는 미당(未堂),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 그해 김광균·김달진·김동리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주간을 했다. 1941년 화사·자화상·문둥이 등 24편을 묶어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했으며, ‘귀촉도’(1948), ‘신라초’(1961), ‘동천’(1969), ‘국화 옆에서’(1975), ‘질마재 신화’(1975), ‘미당 서정주 시 전집’(1991) 등도 출간했다.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됐으며 이후 조선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교·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아세아자유문학상·자유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타계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김민정 시조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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