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 처연한 모습 ‘절절’
팔원 - 서행시초 3 / 백석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이 시는 1939년 11월 10일, ‘조선일보’에 발표된 작품이다. 백석은 평안북도 지방을 여행하면서 ‘서행시초(西行詩抄)’라는 제목 아래 시를 발표했고, 이 시는 그 세 번째 시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평안북도 영변군의 팔원면을 지나가다 보게 된 승합차 안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어느 추운 아침에 묘향산으로 가는 승합자동차 안에서 차에 오르는 소녀를 보게 된다. 이 소녀는 진한 초록색 ‘새 저고리’를 입었고, ‘손잔등’은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터진 ‘손잔등’은 나이어린 소녀가 몹시 힘든 일을 하면서 살아왔음을 알려 주고, ‘새 저고리’를 입었다는 것은 소녀가 먼 여행길에 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소녀는 지금 ‘팔원’에 살다가 ‘자성’으로 가려 한다. ‘자성’은 ‘묘향산’을 지나야 있는 먼 곳이며, 소녀는 먼저 ‘묘향산’까지 가서 그곳에서 ‘삼촌’을 만난 후 ‘자성’으로 갈 것이다.
소녀는 배웅을 받으면서 울고 있고,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 이 소녀를 바라보며 우는 또 한 사람이 있다. 그가 시인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그는 소녀가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왜 그곳을 떠나게 되었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시에서 대비를 이루는 것은 나이 어린 소녀와 내지인 주재소장이다. 이들 두 인물과 그들의 삶은 약자와 강자의 관계를 이룬다. 시인은 약자인 소녀의 모습에 눈길을 준다. 아직 보호받으며 공부해야 할 어린 소녀, 일본인 ‘주재소장 집’에서 하던 식모살이를 그만두고 멀리 떠나가는 소녀, 누구도 쉽게 도움을 줄 수 없는 현실에 처한 소녀, 시인은 이런 모습들을 보여 주며, 은연중에 시대를 비판한다.
시인의 구체적인 관찰, 절제된 표현을 통해서 어린 소녀의 모습은 아름답고도 슬픈 형상을 띠고 다가온다. 백석은 이렇게 지나치는 풍경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상황을 깊이 있게 포착하는 시선을 가지고 시를 썼던 것이며, 일제 강점기의 우리 민족의 처연한 모습을 표현했던 것이다.
백석(白石, 1912~1995)은 평북 정주 출생이며 본명은 백기행이다. 1929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고, 1930년 ‘조선일보’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그 모와 아들」이 당선되었다. 그 후 ‘조선일보’ 장학생으로 일본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수학 후‘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첫 시는 1935년 시집 『사슴』에 실린 33편이다. 백석은 고향의 풍물, 민속, 인물을 대상으로 주로 시를 썼으며, 감정과 정서는 철저하게 절제하여 묘사했다. 그의 유명 작품으로는 사슴, 통영, 고향, 여승, 팔원, 백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이 있다. (김민정 시조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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