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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논문.평설

이용악 시에 나타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by 시조시인 김민정 2009. 8. 22.


이용악 시에 나타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宇玄 김민정

 

 

1. 머리말 


  이용악의 시를 처음 대한 건 96년 국민대에 교원일반연수를 받기 위해 열흘동안 다닐 때이다. 그곳 국문과 신대철교수가 시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이용악의 시를 여러 편 인용하며 좋은 시라고 소개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 시를 자세히 읽으면서 무엇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았을까 하고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모더니즘은 어떠한 것인가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이용악의 생애


  이용악은 1914년 11월 23일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면 수성동 45번지에서 이석준의 5남2녀중 3남으로 출생하여 함북 부령에서 보통학교 졸어후 경성농업학교에 입학하지만 곧 중퇴를 하고 도일하여 일본대학 및 상지대학에서 수학중 『신인문학』1935년 3월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오게 된다. 이 무렵 김종한과 동인지 『2인(二人)』을 5, 6회에 걸쳐 발간하였다. 1937년 제1시집, 『분수령』을 펴내고, 1938년 제2시집『낡은 집』을 펴낸다. 1939년 26세에 상지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최재서가 주관하던 잡지『인문평론』의 편집기자로 근무하다가 1941년 폐간과 함께 그만두게 된다. 1942년 고향 경성으로 낙향하였다가, 그 이듬해까지 청진일보 기자 및 주을읍 사무소 서기로 근무   하나 곧 사직 후 칩거하게 된다. 1945년 해방되자마자 귀경하여 ‘조선문화건설본부’ 일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11월경부터 약 1년간 당시 대표적 좌익지였던 중앙신문 기자로 근무한다. 46년 33세인 그는 ‘조선문학가동맹’ 회원으로 활약하며 이듬해에는 문화일보 편집국장으로 근무를 하고, 제3시집 『오량캐꽃』을 펴냈으며, 남로당에 입당하였다. 48년 농림신문 기자 생활을 하며, 49년에는 제4시집 『이용악집』을 펴내게 된다. 월북시인 배호등과 함께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서울시 지부 예술과의 핵심요원으로 선전․선동 활동에 종사하다 8월경에 검거되었다. 50년 2월 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10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6월 28일 인민군의 서울 점령시 풀려나와 월북하여 71년 58세로 지병인 폐병으로 사망한다. 88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李庸岳詩全集』을 펴냈다.


3. 이용악의 시에 나타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이용악시에는 모더니즘이 그렇게 강하게 나타난다고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더구나 모더니즘이 들어간 시는 거의 실패적인 작품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윤영천은 “용악시에 관한 우리의 논의가 결국은 오늘의 분단현실을 똑똑히 인식하는 문제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 기본 지향에 있어 그의 시는 반(反)분단주의에 토대한 ‘민족해방문학’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자기 시대 민족모순의 예각적인 시적 반영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이를 일정하게 제약하고 저해하는 모더니즘에의 유혹이 그의 시에는 지속적으로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용악의 경우, 이는 일종의 ‘계층적 불안’에 근사한 의식의 부동성의 소산으로 여겨지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작품으로 하여금 확고한 세계전망과 형식적 견고성을 확보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진정한 예술적 형상의 창조에 쐐기를 박는 인과적 고리로 강력히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2) 라고 하여 그의 모더니즘에의 지향이 그의 시에 있어 역기능을 하였다고 보고 있다. 모더니즘의 경향에 대해 백철은 ‘모더니즘의 후예들’속에 이용악을 위치시키면서도 ‘일종의 경향시인’이라고 덧붙이고 있다.3) 그의 시인적 좌표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시의 중간에 설정 해놓은 셈인데, 그것은 약간 표현을 달리하여 ‘현대파와 인생파의 중간’4) 또한 ‘회화적 경향과 윤리적 경향의 절충적 입장’5) 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의 우수성은 그 양면적 요소의 어정쩡한 절충에서 오는 것은 아니고, 후자의 현저한 우위에서 비롯된다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으로 되어 왔다. 즉 그의 시는 삶의 존재론적 의미를 천착하는 데 치중하는 ‘존재’의 시가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갈등적 삶을 선명하게 개괄해내는 투철한 현실인식을 강조하는 ‘생활의 거짓없는 기록’6)이라는 것이다. 최재서는 이용악시를 “침울한 패배적인 반면(半面)에 있어서만 우수하고, 일보 쾌활한 혹은 명랑한 건설과 미의 세계로 들어가면 약점을 폭로함은 수긍은 되면서도 저으기 섭섭한 일이다. 그리고 사색적 관념적 시도 시작(試作)하였으나 거개가 실패라고 본다. 작자는 이 유혹을 물리침이 좋을 듯하다.”7)

  기존의 그의 모더니즘에 대한 평가가 그러하듯 그의 시에 보이는 몇몇 작품 예를 들어「임금원의 오후」는 이 작품에 나타나는 몇몇 감각적인 표현을 제외하면 그것은 상투적이고 관념적이고 농민적 정서와는 전혀 무관한 창백한 식민지 지식인의 그것에 다름아니다. 관념어의 빈발, 시어 표기의 철저한 한자 편향성8), 작품의 주제화를 되레 저해하는 율독적 구속력의 행사 등으로 그 예술적 형상의 창조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실패는 희망없는 도회적 삶의 권태 또는 그 허망함을 노래하는 경우, 가령 ‘흙냄새 잃은 포도에/ 백주의 침울이 그림자를 밟고 지나간다’9) ‘바다 없는 항해에 피곤한/ 무리들 모여드는 / 다방은 거리의 항구10)에서처럼 삶의 경험적 세부가 시인의 조급한 추상화에 짓눌리는 형국으로 나타난다고 윤영천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결국 이용악의 시에서 보이는 모더니즘적 성격은 20세기 자본주의하 시장경제 체제의 중심부에서 소외된 특정계층에 의해 생산되고 강화된 예술적 태도로서의 일반적 모더니즘과는 일정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 발전에 대한 낙관적 전망의 결여, 암단한 시대현실에 말미암은 사회적 절망감과 위기의식 등이 복합된 예술적 결과물로서의 모더니즘시가 갖는 사회적 및 미학적 제한성이 이용악의 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다. 

  이용악의 시에서는 모더니즘의 특징보다는 리얼리즘으로서의 구체적인 자기 삶에 굳건히 토대한 ‘이야기 시’에서 그 탁월성이 인정되고 있다. 식민지 시대 한국인의 삶을 긴박하는 정치경제적 강제를 그의 구체적인 경험적 세부에 긴밀히 관련시켜 하나의 분명한 예술적 형상 또는 문학적 전형을 창출해 보이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내 우시어

  하아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달 있는 제사」전편


  이 시인의 갼결하면서도 견고한 시적 형태가 잘 나타난 시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어린 아들의 시선 속에 잡힌 ‘달 있는 제사’의 휘휘하고도 애절한 정경이 잘 나타난 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른다     - 「북쪽」 전편 


  이용악의 시에 있어 고향은 단순한 시적 정조 또는 단순한 회고적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배경물이 아니라, 고통받는 삶과 역사의 시적 등가물로 치환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시름 많은 북쪽’ 등의 구절에서 이 점은 적절히 암시하고 있다. 또한 서정주에 의해 “망국민의 절망과 비애를 잘도 표현했다”는 절찬을 받은 「오랑캐꽃」역시 용악의 고향의식이 발전적으로 나타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11)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 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오랑캐꽃」전문


  오랜 동안 강대국들로부터의 끊임없는 정치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던, 항상 미개한 야만인으로 극심한 멸시와 천대만을 받아온 힘없고 가난한 백성의 형상이 1연에 나타나며, 2연의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의 연악한 형상이야말로 일제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는 그 시기 조선민중의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용악의 시는 모더니즘적인 요소가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현실인식이 강하고 민족의식이 강한 시를 썼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적 특징보다는 차라리 리얼리즘의 특징에 가까운 시를 썼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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