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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논문.평설

이청준 소설의 중층 구조

by 시조시인 김민정 2009. 8. 22.

                             

                            이청준 소설의 중층구조

 

                        宇玄 김민정 


1. 이청준 작가론


  작가 이청준은 1939년 전라남도 장흥 출신이며 1965년 <사상계>지를 통해 등단한 이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여 현재 120편이 넘는 작품을 쓰고 있다. 35여년의 창작활동을 통하여 독자적인 작가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으며 60년대의 지적인 작가로 이청준의 문학세계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작품의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작품마다 새로운 말을 발견하게 하고 새로운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가 또한 이청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작품창작을 하기 위해 문학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고민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의 문학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작가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이청준은


   “작가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개인의 욕망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으되, 그는 그 개인의 삶의 욕망과 독자의 삶을 다같이 배반할 수 없다 ― 그는 자신의 욕망과 독자와의 창조적인 화해관계에 놓일 수 있는 지배 방식을 통해 그 독자에 대한 작가로서의 책임을 수행해 나가야 하는데, 그들은 원래 이율배반의 관계처럼 보일 수도 있다 ― 그러나 작가는 독자의 삶을 현실적으로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가 그의 독자를 지배해 나가는 이념의 수단은 우리의  삶의 진실에 가장 크게 관계된 자유의 질서라는 점에서 양자의 갈등은 해소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지배와 해방」


  말이 제 가치를 잃고 의미의 인플레이션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과 , 말이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사회 구조를 뒤엉키게 만드는 폭력을 자행한다는 점을 작품 쓰기의 과정에서 절감했기 때문에 작가는 「떠도는 말들」「자서전들 쓰십시다」「지배와 해방」등의 언어사회학 시리즈의 작품을 통해 말에 기만당하고 말 때문에 의식이 황폐해지는 언어사회적 제양상에 대해 면밀한 고찰을 시도했다. 그리고 「지배와 해방」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이정훈이라는 젊은 소설가의 강연의 결론부분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작가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개인의 욕망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으되’,란 첫대목은 이청준을 참 건방진 작가라고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작가가 대체 무엇이기에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개인적’으로 품을 수 있는가? 세계를 개인이 지배하겠다는 발상부터가 일종의 영웅주의가 아닌가? ‘지배’라는 말 자체가 지배와 피지배를 연상시키는 봉건주의적 논리의 잔재가 아닌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되고 이에 대한 이청준의 대응은 소설을 쓴다는 것은 현실적인 지배력이라든가 복수의 감행보다는 글을 통해서 자기를 패배시킨 사회에 복수하고 이념적으로 지배하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처입은 존재가 작가이기 때문에 상처를 준 이 세계에 대해서 복수를 감행하고 그 세계를 지배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작가는 글로써 그 과업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사회적으로 패배한 존재라는 전제는 작가의 궁극적인 이상은 끝내 실현할 수 없다는 루카치적인 소설의 명제와 상통한다. ‘문제적 자아’로서의 작중 인물은 훼손된 가치 체계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다가 패배하고 만다는 것이 루카치 소설론의 요체이다.

  작가는 현실의 제국면에서 실패한 사람이다. 또는 작가는 궁극적으로 패배하고 만다 라는 명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작가(또는 예술가)처럼 정신의 고귀한 영역을 개발하는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세속적으로 또는 사회현실적으로 성공을 거두어서는 곤란하다는 자본주의적 편견이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작품 생산 과정이 정신과 영혼의 참담한 혹사의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들의 이상이 워낙 높게 설정되어 있어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이 예외적인 현상으로 인식되지만, 실패나 패배를 애초부터 전제로 한다는 것은 다시 생각할 문제이다.

  그에 의하면 글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는 작가는 마땅히 독자를 지배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의 지배는 독재자의 일방적 통치와는 달라서 ‘창조적인 화해관계에 놓일 수 있는 지배 방식’을 통한 다스림이다. 자유의 질서를 구현하는 지배 방식이 창조적 화해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작가와 독자의 갈등은 해소될 수 있다.    

  문학적인 이상의 구현이 억압적 현실에서 해방되는 강력한 방법임을 강조하는 작가가 이청준이라는 사실을 그의 논리적 발언에서 볼 수 있다.


  둘째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산출할 수 있을 것인가인데 이에 대해 이청준은

   “문학이 정치하고 다른 것은 어떤 이념이 있으면 정치는 같은 구호를 계속해서 읽고, 신념을 가지고 그 구호를 구현하는 것인데, 문학은 신념도 중요하고 태도도 중요하지만 같은 신념, 같은 태도, 같은 방법으로는 문학이 하나의 호소이기 때문에 허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제면에서의 변용 내지는 변주를 해야 하고 이야기를 하는 방법에도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남의 모방을 해서도 안되지만 더욱 어려운 것은 자기 모방의 경향에 빠지지 않는  것이지요. 자기 모방에서 탈피하려면 주제가 다른 얼굴처럼 보이면서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일관되게 유지해야 합니다. 독자가 작품을 읽으면서 ‘그 사람 이야기는 전번하고 같네.’하게 되면 그 사람 소설은 다시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소재도 같은 것을 되풀이 이야기하면 구호가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제일 깊이 들어 있는 것은 작가의 경우 한두 마디 말이겠지만, 독자가 계속해서 그 한 마디를 이해하게 하    기 위해서는 자기 변화를 주제에서나 소재 또는 이야기 방법에서 변주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의 문학, 나의 소설 작법, ’84>


  이것을 요약하면 첫째, 문학은 구호를 실천하려는 단순한 정치와는 구별된다는 것, 둘째, 문학의 고유성을 확보하려면 남을 모방해서는 안되고 자기 모방은 더욱 주의가 요청된다는 것, 셋째, 자기 모방을 피하기 위해서는 주제나 소재의 변주를 통하여 자기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청준의 소설에서 정치적 상황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주제나 소재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작가의 정치에 대한 경멸적인 관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들의 천국」같은 작품은 권력의 본질을 해부하고 기만적 통치술을 폭로하고 있는 뛰어난 정치적 작품이다. 어떤 현상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것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더 큰 힘을 기울이는 논리가 이청준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정치를 경멸하기에 정치적 현상의 이면을 꿰뚫는 진실을 발견하는 험난한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의 소설이기 때문이다.1)

  타인의 모방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한 모방까지 부정하며, 이것을 피하기 위해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작품군을 구상하고 작품이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말 한두 마디’를 작품에 선보인다. 「언어사회학」시리즈와 「남도 사람」연작이 그러한 작품군이며, 미리 계획한 작품군이기는 하지만, 작가 자신도 사건에 어떠한 말이 새롭게 구사될지 모른다. 새로운 작품을 쓸 때마다 작가 스스로도 놀라게 될 ‘새로운 말 한두 마디’를 발견하겠다는 자세로 쓰여진 것이 위의 두 연작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낯익으면서도 낯설게 보이는 것은 작가 자신에게 친숙하면서도 처음 대하는 것 같은 주제와 소재를 계속적으로 발굴했기 때문이다. 문학적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작가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기에 그의 문학이 막힘없이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청준은 60년대 문학의 대표로 분류되며 그의 문학은 지적인 문학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가 대학초년급 때 4.19와 5.16을 체험했으며 이 세대의 의식의 분열증은 이청준에게 소금물과 허기라는 상징물로 표현된다든가 전짓불이라는 상징물로 표현되고 있고 그의 주요 작품인 「쓰여지지 않는 자서전, 1968」에서 보듯 가능성과 좌절을 동시에 느끼며 용기를 가졌다가도 금방 회의하고 끝내 선택을 보류해 버리는 망설임의 인간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소문의 벽, 1971」의 작품에서는 글쓰는 행위의 근원을 묻고 있다. 글쓰는 행위는 그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전짓불 앞에서 일방적으로 <나>의 진술만을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고문관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한 인간이 자기의 내면세계를 끊임없이 고문당해아 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이청준의 문학 행위라면 그에 있어 문학을 한다는 것은 불빛 뒤에 정체를 감춘 교활하기 이를데 없는 고문관 앞에 알몸으로 노출되어 자백을 강요당하는 한갓 피고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그 피고가 자기의 무죄를 증명하고 자기를 구출하기 위해 가능한 방법은 고문관과의 끊임없는 싸움뿐이다. 즉 고문관보다 일층 교활하지 않고는 자기를 지킬 수 없다. 이 싸움이 치열하면 할수록 그 작품은 밀도 높은 긴장감을 얻거니와 작가의 자기 지킴으로서의 교활함은 고도의 지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닫힌 소설이 아니라 열린 소설, 추리소설 모양 독자도 작가도 함께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소설 방식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소설은 카프카나 조이스에서 보여준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는 이청준에 와서 그 모습을 드러내며 김승옥,박태순에게서도 특징이 드러나긴 하지만 60년대 문학을 지적인 측면으로 끌어올린 것은 이청준이라고 볼 수 있다.2)

   


2. 이청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


  이청준의 소설은 주제면에서는 <진실탐색>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소설은 기법에 있어 몇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1)열린 소설


  이청준은 독특한 관점으로 다각적인 작품 소재를 이끌어 오고 있지만 그의 작중 인물들은 한결같이 광기와 허기, 불안과 피곤, 외로움 등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현실에서 어떤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자들이다. 작중 인물들은 이질적인 가치관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그 어느 한 편의 질서 체계를 옹호하거나 선택하지 못하고 언제나 모순된 방황속에 분열을 일으킨다.

  이청준의 작품은<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물음이며, 문제만 던져놓고 소설속에서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고 끝나는 <열린 소설>이다.

  그의 소설속에 그려진 현실은 참으로 유동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하나의 판단은 언제나 그것에 머무는 법이 없이 그 판단이 내려지는 순간 그와 반대되는 판단으로 자리를 바꾼다. 이에 상응하여 그의 소설에서 하나의 문장은 그것이 언급되는 순간 금방 다시금 그 반대개념을 담은 문장으로 전이됨으로써 그 문장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시 말하면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표시될 수 있는 상호대립적 이중성이 이원적 대립의 관계로 정체하지 않고 일원적 모순의 관계로 한 곳에 존재함으로써 그 존재는 유동적이고 해체적이라는 것이다. 탈향의 갈망은 그것이 성취되는 순간 귀향의 갈망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잔혹함과 아름다움이라는 대립은 동시에 존재함으로써 판단은 늘 유보의 상태에 있을 뿐이다.

  남도창이나 소리가 말의 지배에서 놓여나 용서와 화해로 나아가는 한가지 길이듯, 중층구조는 소설과 독자가 작가의 지배에서 놓여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중층구조에서 화자가 전달하는 사건은 대부분이 모순으로서의 삶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이미 열려 있다. 그런데 작가는 다시 이 열림의 장을 그의 의견으로 규정짓지 않기 위해 이를 의심하고 그것에 스스로를 비추어 보는 바깥 시선, 즉 화자를 설정한다.3)    


  (2) 중층구조


  이청준의 소설은 “어떻게 씌어졌느냐”의 문제가 “무엇에 관한 것이냐”를 선행하고 있다. 유독 <나>라는 화자를 내세워 소설을 전개한다든지 그 화자가 어떤 사건을 전달하는 중층구조를 쓴다든지 탐정소설을 연상시키는 추구과정이라든지 우화적 수법이라든지 하는 것 등은 궁금함으로써 독자를 긴장시키다가 모호함 속에 독자를 풀어 놓는다. 사실주의 문학 애호가들이 일견 관념적이라고 비난을 내릴 수도 있는 이런 기법은 또 다른 안목을 가지고 그것을 들여다보면 지극히 관념적인 것을 비난하는 것이 그의 문학이라는 역설도 낳는다. 이런 역설의 가능성 속에서 끊임없이 화자가 객관화되고 있다는 인상은 다른 작가의 경우와 비교해 볼 만한 이청준 문학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중층구조(격자소설)의 소설이 많은데, 이러한 구조를 통하여 이청준이 거두려는 효과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먼저 작가의 발언을 살펴보면,


  이때 안쪽에 담겨진 이야기는 대개 평면적 스토리의 전개로 한 인간의 경험과 삶의 태도에 관한 유형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바라보고 그것과의 교유와 관찰 속에서 우리의 삶에 대한 종합적인 반성과 평가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는 시선을 또 하나 바깥에 마련한다. 바깥에 마련된 관찰자의 시선은 그러니까 그 안쪽에 진술된 일회적이고 평면적인 경험의 유형을 최종적 진실로 확정지으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의심하고 시험하며 반성하는 역할의 수행자로서 마련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선은 언제나 일회적 경험에 대해서는 불신과 의심을 일삼는 부정적 태도가 불가피해질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곧 그 작가의 일회적 경험을 작가 자신과 독자를 공유의 총체적 세계 안으로 귀속시키려는 노력으로서 그 자신의 최종적 판단을 겸손하게 유보해 버리는 자세를 취해 보인다.        

  -이청준,<작가의 작은 손>,열화당, 187쪽


이에 대한 평론가들의 언급을 살펴 보면


 그의 기술양식의 기본 패턴은 격자소설적 방법이다. 그의 소설에서는 한 인물이 자신의 사고질서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타인들에게 관찰당하고, 그 관찰의 결과가 종합됨으로써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는 한 인물에게 합당하다고 알려진 의식체계를 부여하는 대신에 그 인물을 둘러싼 관찰․보고를 종합함으로써 그를 존재하게 한다. 그의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런 의미에서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된다.  

  -김현, <장인의 고뇌>,《이청준》,우리시대의 작가연구총서, 은애, 144쪽

 

  그의 소설은 빈번히 격자 소설의 형식을 취하거나 그 속에서 소설론을 진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소설에 의한 소설의 반성을 개진한다. 그는 어떤 대상을 포착하는 데 일차적인 사고나 언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의 수단으로서 일차적으로 사용된 언어가 아무래도 미흡하기 때문에 이차적으로 계속되는 반성의 태도인데, 그것은 또한 작가 자신의 현실에 대한 인식태도가 굳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회의와 모색을 하고 있다는 점을 반증해 준다.

  -오생근, <갇혀 있는 者의 視線>, 같은 책, 33쪽


  그의 소설은 중첩구조를 갖는다. 이 말은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복수의 사건전개들이 실은 하나의 모티브를 풀어가고 있음을 지적한다......이 중첩구조는 복수의 모티브가 변증법적인 것이 아니라 복선적인 지향을 보여 준다. 이는 그의 소설이 그 안에서 충동하고 싸우며 지향하는 복합체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가 반추, 심사되고 탐구하는 단색적 세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병익, <왜 글을 쓰는가?>, 같은 책 124쪽.


  이청준 소설에서 무수하게 나타나고 있는 격자소설의 양식이란, 말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자기 점검의 수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치수, <소설에 대한 두 질문>, 같은 책, 203쪽



  중층구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첫째는 화자의 객관화라고 볼 수 있다. <나>를 화자로 삼는 일인칭 소설과 <나>를 화자로 삼는 중층구조 소설의 차이는 전자가 <나>의 시점으로 작품이 전개되는 단일무대임에 반해 후자는 <나>에 의해 전개되는 이중무대라는 차이일 것이다.

  작가가 중층구조 기법을 사용할 경우 그가 고용한 화자는 단순히 사건을 전달하는 화자에서 멈춤이 아니고, 혹은 저자 자신의 안목을 대변함에서만도, 독자의 관점을 짊어지게 함만도 아닌 그 이상의 어떤 독특한 역할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청준의 성공한 단편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중층구조를 사용하는데 그점은 우선 <나>라는 화자를 등장시켜, 전개될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독자의 호기심 수준으로 내리맞추어 소설의 시작부터 말미까지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아 <나>와 독자가 같이 문제를 풀어 나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하여 탐정소설과 비슷한 수법으로 한 계단 한 계단 의혹을 제기하고, 독자의 호기심을 환기시키고 충족시켜 가다가 결국에는 해답 없는 종국적인 삶의 문제를 던져 놓고 사라져 버리는 <열린 소설>의 특성을 갖는 것이다. 탐정 소설의 패러디와 같은 이런 기법은 화자의 관점이 곧 독자의 관점인 듯 느끼게 하여 독자를 문제의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친화력을 갖게도 하지만, 동시에 작가 자신의 관점이 화자로 대변되는 듯 느끼게 하여 작가의 음성을 독자의 순준에 내리맞추게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와 화자와 독자가 같은 수준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치고 있다는 환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층구조라는 기법이 주제의 전달에 어떻게 기여하는가를 그의 몇몇 작품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단편 「병신과 머저리, 1967」의 내용을 살펴보면,

  ‘의사인 형이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화가인 <나>는 형의 소설을 훔쳐보며 텅 빈 화판을 앞에 놓고 그 소설의 결말에 의해 자신의 그림이 완성되어질 것을 기대한다. 자신의 실수 탓만도 아닌 어느 소녀의 죽음이 형으로 하여금 6․25사변 당시 패잔병으로 겪은 아픈 상처를 더듬게 하고 그 결말을 초조히 기다리던 화자는 어느 날 형 대신 결말을 적어 놓는다.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악으로 버티어 내던 김일병이 부상을 당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굴복의 수모를 겪는다. 위생병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곁에서 이를 지켜보며 형은 그를 구출하지 못했다. 이런 형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는 동생은 <형>이 김일병을 죽이고 먼 길을 탈출할 수 있었다고 단순한 결말을 내린다. 동생의 결말을 북북 찢어 내며 형은 말한다 ― 자신은 병신이지만 너는 그만도 못한 머저리라고.    

  화자인 동생이 형의 방황과 그가 쓰는 소설내용을 추적하여 독자에게 전달하는 중층구조 형식을 지닌다. 그리하여 독자는 얼핏 동생의 관점에 편승하여 동반자적 입장에서 형의 고민과 그가 쓰는 소설의 내용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형이 보여 주는 어떤 징후에 대한 반응과, 형과 그 징후에 대해 동생이 보여 주는 반응이 비교․대조됨으로써 소설의 핵심은 형과 나의 대응으로 옮겨진다. 이것은 <나>와 혜인의 관계가 형과 형수의 관계에 대조됨으로써 좀더 확실해지고, 이보다도 김일병을 죽이는 <나>의 결말과 상사를 죽이는 형의 결말이 대조됨으로써 더욱 선명해진다.

  아픔이 오는 곳을 알기에 인내와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형은 “사실로서 오는 것에 보다 순종하여 관념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나, “아픔만이 있고 그 아픔이 오는 곳이 없는”동생은 <통증>으로부터 격리된 환부를 모르는 미감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동생이 갖는 한계요, 인간에 내재된 더 큰 보편적 아픔의 근원이 아닐까 여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단편의 주인공은 얼핏 전달자 역할을 맡는 것 같았던 화자라고 판명된다. 


  이런 수법이 「매잡이, 1969」에서는 겹겹의 구조로 나타난다.

  평생을 이곳저곳으로 자료수집을 하러 다녔을 뿐 단편 하나 제대로 발표한 적이 없던 민형이 취재노트를 남기고 죽는다. 소설가인 <나>는 민형의 생전에 민형의 귀띔으로 매잡이가 사는 마을에 내려가 중식이란 소년을 통해 꿩 잡는 얘기며 곽서방과 매에 관한 얘기를 취재하여 「매잡이」란 단편을 발표한다. 곽서방의 매에 대한 사랑 얘기와 꿩몰이에 대한 집념, 그리고 변해버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끝내 목숨을 버리려는 그의 단식 등을 엮은 것이다. 이제 <나>는 다시 그 마을에서 곽서방의 임종을 맞게 되는데 끝내 곽서방에게서 민형과의 교감 내역을 듣지 못한다. 궁금증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화자 앞에 민형의 자살이 기다리고 있었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펼쳐 본 민형의 유고는 바로 곽서방의 죽음을 예견한 「매잡이」란 단편이었다.

  현대소설이 무엇을 쓰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에 더욱 고심하게 되었다면 바로 이 「매잡이」이야말로 기법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작품이다. 세 편의 「매잡이」란 단편이 나오게 된 경위를 <나>라는 화자가 밝히고 있는 이 작품은 곽서방, 민형, <나>라는 서술상의 중층구조가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내용상의 중층구조에 묘하게 접합되어 있다. 

  「병신과 머저리」에서 형은 6․25 당시 겪은 어떤 상황에 감응과 충전을 일으키지만 동생은 그렇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매잡이에 얽힌 어떤 상황에 감응과 충전을 일으키는 민형에 비해 <나>는 그렇지 못하다. 「병신과 머저리」에서 같은 상황에 대한 소설의 결말을 다르게 내림으로써 형과 동생의 차이를 드러내 보이듯, 곽서방에 대한 민형과 <나>의 소설의 차이는 두 사람을 대조시킨다. 「매잡이」는 「병신과 머저리」에 사용된 기법이 좀더 확산되고 발전되었으며 주제면에서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이어도」에서는

  천남석과 이어도라는 어떤 징후가 있고, 그것을 증거하는 양주호가 있고 이들을 취재하는 선우 중위가 있다. 자신이 속한 상황을 떠나고픈 갈망이 막상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에 되돌아오고픈 갈망으로 바뀌는 애증의 모순성, 이런 징후를 증거하는 양주호의 직관과 그가 선우 중위에게 보여 주려는 진실에 이르는 길, 이에 비하여 가시적 현상에 매달려 사실에만 집착하려는 선우 중위의 한계 (“사실에의 봉사는 언제나 중위를 즐겁게 했다.”)등, 얼핏 천남석을 주인공으로 보게되는 독자의 성급한 시선은 무대의 조명을 중층구조 사이로 비출때 어떤 사건을 취재하며 이에 대응하는 선우 중위의 인간적 한계에 머무르게 된다. 여기서 화자의 안목이 독자의 것이고 동시에 작가의 것이라는 환상에 의해 그의 인간적 한계는, 곧 현대에 사는 인간의 보편적 결함으로 확대된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어렵지 않다. 중층구조라는 기법은 이런방식으로 어떤 일회적 현상의 기술에만 멈추지 않고, 그것을 전달하는 화자를 등장시킴으로써 역동적인 대응관계를 통해 주제의 전달에 한 몫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중층구조의 두 번째 효과는 화자의 해체화라는 것이다.4)

  

  「이교도의 성가」에서 보면 납치범 구종태에 의해 자신의 아파트에 감금된 가수 백남희는 2주일 만에 탈출했다가 되돌아 온다. 돌아온 현관 앞, 집안에서는 음반에 실린 자신의 노래가 끝나고 한 방의 총소리가 울린다. 피흘린 주검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노래를 다시 틀어 놓은 뒤 발길을 돌린 그녀는 수원별장에 파묻혀있다가 보름만에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사건 후 그녀의 잠적, 옆머리를 쏘는 권총자살의 범례를 깨뜨리고 앞 이마에 드러난 자국, 그리고 무엇보다 탈출한 그녀가 되돌아와 피를 닦아 주고 노래까지 틀어놓고 나갔다는 석연치 않은 사실 앞에 오검사는 솔직한 자술서 작성과정과 마지막에 시행되는 현장검증이 장편「異敎徒의 聖歌」의 표면에 드러난 줄거리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추리소설로 지나쳐 버리기에는 이 작업에 함축된 의미는 너무 크다. 주제면에서는 장편「당신들의 천국」을 비롯한 그외의 중․단편에서 작가가 꾸준히 추구해 온 <진실탐색>의 연속이고, 기교면에서는 그가 즐겨 사용 하는 중충구조의 보다 함축적인 연속이고, 발전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피랍 경험>과 <진술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아 해체가 교차적으로 반복되며 해체의 단계가 조금씩 차원을 높여 간다. 말하자면 화자는 과거의 사건을 전달하면서 그것과의 내용 관계를 끊임없이 되돌아 봄으로써 과거가 현재의 자신의 인식과 욕망에 의해 굴절되고 있음을 독자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자의식의 장막을 헤치고 기억의 저편에 도사린 실체를 응시하려는 그녀의 안타까운 노력은, 진실이란 그렇게 밖에 전달될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이와 같은 진실탐색의 과정속에서 하나의 경험이 엮어져 나간다. 자유와 사랑과 용서의 의미를 음미케하는 화자 스스로의 마지막 해체를 향해서.

 「당신들의 천국」의 패턴은 도착과 떠남인데, 그게 두번 반복된다. 조백헌대령이 소록도병원원장으로서 섬에 오서 원생들에게 장래의 희망과 긍지를 심어주고자 노력하다가 전임발령을 받고 떠나며, 그 후 5년만에 다시 섬을 찾아와 이전의 노력을 계속하다가 또 떠나는데, 그 마지막 떠남은 發狂(제 정신의 이탈)이라는 충격적인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커다란 역설의 덩어리라고 해야 할 만큼 역설적인 상황과 발언으로 차 있다. 그 제목 가운데 <당신들의>라는 말부터가 매우 유혹적이면서 반발하듯 도전적인 말이며, <천국>이 지옥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한다. 아름다운 공원 같은 소록도는 실상 환자지대와 건강인지대가 나뉘어져 있고, 마스크를 한 간호원이 환자에게 핀센트로 약을 건네어주는 곳이며, 탈출자가 속출하는 사자의 섬이다. 원장의 부임연설에 대한 원생들의 음산한 침묵이 그들의 말이요 대답이다. 일본인 주정수원장의 동상은 그의 영광이자 파멸의 원인이었다. 이런 역설적 상황이 「당신들의 천국(소록도)」의 근원적 상황이며, 조백헌원장은 그런 내력에 대한 근원적 인식을 토대로 재출발하곤 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같은 근원적 상황은 다시 섬에 돌아온 조백헌이 이정태기자에게 보여준 특수병실의 처참한 불구환자의 존재에 기인하며, 유해원과 서미연의 결혼이 상징하는 환자와 건강인 사이의 장벽제거의 성공으르도 완전히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은 모델이 실재했다고 하는데, 모델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연보에 수록된 작가의 술회를 보면 모델의 성격이 강하면 소설적 상상의 공간을 그만큼 방해하고 간섭해 오기 쉽고, 거기다 그 모델의 실제의 삶을 소설이 영향 주고 간섭해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에 한 소설 작품의 사실성과 허구성의 문제, 또는 현실 질서에 대한 실제적인 책임의 문제를 숙고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백헌이라는 인물은 표면적으로 한번 마음 먹은 것이면 어떠한 일이 있든지 해 내야 한다는 불도저형의 인간으로 설정되었지만, 그 내면에는 투철한 자기 성찰의 의식과 세계관을 함양하고 있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소록도 나병원의 원장으로 부임하고 잇달아 사업을 벌이자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소록도에 ‘당신들의 천국’을 건설하고자 한다. 자기 자신의 업적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문둥이 환자를 위한 천국을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일을 밀어 붙인다. 70년대의 ‘하면 된다’라는 구호 아래 ‘백억 불 수출, 천 불 소득’의 사이비 천국을 구상했던 정치 지도자와 유사하면서도, 의식의 다면성과 권력의 행사라는 측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렇게 근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인물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그를 부정하기도 하면서 인물의 내부와 외부를 투시적 시각으로 보여주는 작가의 다채로운 시각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이청준이 자신의 정치철학을 소설로 다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현상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것의 정치를 밝히기 위해서 더 큰 힘을 기울이는 논리가 이 청준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4)   


  「서편제」「소리의 빛」「선학동 나그네」「새와 나무」는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전라도 장흥땅 둘레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

  「서편제」의 경우 일정한 직업없이 떠돌이하는 소리꾼과 그의 딸 이야기에서 소리에만 미쳐 살아가는 소리꾼이 그 딸 또한 소리장이로 묶어두기 위해서 두 눈을 멀게 하는 끔찍한 장면을 통해 조성된다. 딸이 잠자는 사이 두 눈에 청강수를 넣은 것인데, 그렇게 하면 눈으로 뻗칠 사람의 영기가 귀와 목청 쪽으로 옮겨가 목소리가 비상해 진다는 것이다. 좋은 소리를 위해서 일부러 눈을 멀게 한다! 여기에 사람의 눈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겨지는 소리의 중요성이 나타나고, 소리에 대한 우리의 전면적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청준이 즐겨 사용하는 소설구성, 즉 소설의 작중화자와 주인공이 이중, 삼중으로 겹쳐지는 방법을 통해서 진술되고 있는 이 소설의 즐거리는 이렇다. 전라도 보성읍 밖의 한적한 길목 주막이 소릿재 주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곳에 소리꾼 여인과 북장단을 치는 사내가 나온다. 여자는 혼자 사는 그 집의 주인이고 사내는 하룻 저녁 손님이다. 춘향가, 수궁가 등을 들으며 소리에 빠져들어간 손님의 재촉에 의해 여인은 그에 앞서 소리를 하다가 이제는 죽은 어느 남정네 소리꾼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 소리꾼은 어린 딸 하나와 더불어 동가숙 서가식하면서 소리를 하다가 죽어간다. 그가 죽고난 뒤 소리는 어린 딸에게 이어졌는데 그 딸의 소리에서 사람들은 애비 소리꾼의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한편 이야기의 진행은 애당초 소릿재 주막에 들른 손님이 원래 그 소리꾼의 의붓아들이었음을, 그리고 그의 딸 역시 의붓동생이었음을 밝혀간다. 소리꾼은 주막손님의 어머니가 관계했던 남자였고, 그 딸은 그 결과로 태어난 소생이었던 것이다. 주막 손님은 주막 여인의 전언을 통해 의붓아버지와 의붓동생의 비극을 알게 된 것인데, 아버지에 의한 여동생의 실명은 그 비극의 정점을 이룬다. 여기서 여동생의 실명 원인이 보다 구체적으로 진술된다. 즉 의붓아비와 의붓여동생, 그리고 그 손님 사이의 관계에는 일종의 긴장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아비가 그 손님의 친어미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오는 증오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실제로는 딸을 낳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그는 의붓아비에 대한 살의를 갖게 되고, 그 살의는 현실적으로 그를 의붓아비에게서 떠나게 한다.

  의붓아들은 그렇게 의붓아비 곁을 떠났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 딸 역시 아비곁을 떠날까 두려워 아비가 딸의 눈을 빼앗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생긴다. 그 추정은 첫째 좋은 소리를 위해서라는 추정, 둘째 가슴에다 말못할 한을 심어줘야 했을 것이라는 추정보다 한결 큰 가능성으로 소설 결구를 이끈다.5)         

  

  이청준은 「이교도의 성가」후기에서 소설가의 행위를 “더 정확한 눈길로 그 두꺼운 삶의 껍질 속의 상처를 짚어 내고 그 아픔을 드러내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소설을 <자기 구제의 한 몸짓>이라거나 <자기 부끄러움의 고백>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단지 자기반성의 몸짓일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누구나의 부끄러움을 보이고자 했던 게 아니었나 싶다.6) 

  결국 이청준이 택한 소설의 기법인 중층구조는 화자와 독자와 작가의 거리를 없애주어 독자에게 친밀한 감정을 갖게 하는 구실을 하며, 그가 주제와 소재면에서 늘 새로움을 추구하기에 막힘없이 그의 소설을 계속 써 올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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