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시와 비정형시
宇玄 김민정
1. 머리말
본고는 고려 말엽에 이미 완성된 시조의 형식이 있었다고 보아 그 발생연대를 고려 중엽쯤으로 본다면 지금껏 천년 이상을 정형시로 창작되어온 시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작성된 것이다.
우리의 시조가 고려말엽에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에 그 발생은 고려중엽쯤으로 잡고 있다. 그렇다면 못 잡아도 시조가 정형시로 이어내려온 기간은 천년이 넘는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식에 알맞은 형태의 문학이 발생하고, 발전하고, 사라지는 데 한 문학 장르가 천년이 넘도록 창작되고 나라이름이 바뀌고 역사가 바뀌는 가운데서 우리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오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창작되고 있음은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건, 그 만의 장점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먼저 시조가 이렇게 오랜동안 우리 곁에 머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첫 번째 이유로는 우리말의 어절이 거의 3음절, 4음절이라는 데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가장 자연스럽게 부담없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시조가 짧은 단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부담없이 다른 사람의 작품을 암기하여 외울 수 있고, 지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의 사설시조를 외우기보다는 단형 평시조를 외우는 것이 훨씬 시간이 덜 들고 기억도 오래 간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이유를 든다면 시조의 형식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3장 6구 45자 내외, 이것이 평시조에 대해 우리가 현재 내리고 있는 정의이다. 물론 이것을 정의내린 것도 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내려온 시조 그 형태는 초, 중, 종장의 3장으로 이루어지고, 각 장은 4개의 음보를 지니고 있으며 또 이것은 앞 두 음보가 한 구를 이루어 의미단위로 끊어지고, 뒤 두 음보가 다시 한 구를 이루는 의미 단위로 끊어지고 있다.
초장: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3 4 4 4)
중장: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2 4 4 4)
종장: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3 5 4 3) 1)
우리가 알고 있는 시조의 자수율은 3,4,3,4/ 3,4,3,4/ 3,5,4,3이다. 물론 초장, 중장의 3, 4음수율은 조금 자유로워서 3이 와도 4가 와도 무방하다. 지켜져야 하는 것이 종장의 3음수과 그 뒤에 오는 5음수이다. 5음수는 5음수이상에서 8음수까지 가 어색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간단한 정해진 형식이 있음으로 해서 그것을 쉽게 향유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2. 오늘날의 시조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창작하는 시조에는 시조라는 이름하에 그 형식을 파괴하려 드는 일군의 작품들이 보인다. 예를 든다면 이종문의 ‘고백’ 같은 작품이다. 그것이 똑같은 형식에 얽매인 시조에 대한 독자들의 식상을 의식하여 독자에게 신선감을 주기 위한 ‘낯설게 하기’란 의미에서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평범한 상식을 가진 독자일 경우 그것을 시조로 보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이 논의는 전개될 것이다. 시조작품인 줄 알고 읽으면서도 작품을 한참을 들여다 보고서야 여기서 여기까지가 초장이고, 여기서 여기까지가 중장이고, 여기서 여기까지가 종장인가 보다 하고 이해할 수 있다. 당장 중고등학교의 교육 현장에서 ‘이것이 지금까지 천년 이상을 우리 민족이 지어온 정형시인 시조이다.’라고 선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작품을 인용해 보면
봄마다
내 몸 속에
죄가 꿈틀, 거린다네.
티 없는 눈길로는 피는 꽃도 차마 못 볼,
들키면 알몸이 되는
죄가 꿈
틀, 거린다네.
죄가 꿈
틀, 거린다네
들키면 알몸이 될,
망치로 후려치고 때릴수록 일어서는 두더지 대가리 같은,
피는 꽃도
차마
못
볼, 2)
이것을 행별로 보면 3/4/8/15/8/3/5, 3/5/7/21/4/2/1/1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음보별로 본다고 해도 첫 연을 3/4/2,6/3,4,4,4/3,5/3/5라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마지막 두 행을 의미단위로 끊어 4/4로 보아야할지 의문이다.
둘째 연도3/1,4/3,4/3,4,4,4,3,5/4/2/1/1이다.
이 작품은 음보별 표기와, 구별 표기, 장의 표기, 장과 구의 결합 표기 등 복합적인 모습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도 있다. 반복을 통한 강조와 역동적 근육감각의 이미지 표출이 부각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홍성란은 이것을 서우석의 이론을 말하면서 3박에 강세가 오기 때문에 시조의 율독적 질서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봄마다 내 몸 속에 죄가 꿈틀, 거린다네.
(1박=1음보) (2박=2음보) (3박=3음보) (4박=4음보)
라는 예를 보이고 ‘모든 시조는 초․중․종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은 네 박으로 되어 있으며 그 셋째 박은 항상 강박이 된다는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된다. 이 구조는 <약약강약>의 구조이다.’라는 서우석의 주장을 근거로 삼고 있는데 서우석의 이론 자체를 수긍할 수 없다. 시조창작인 중에 몇 명이나 이 이론에 맞춰 시조를 창작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이론을 적용했을 경우 둘째연에서는 전혀 맞지 않는다. 위의 이론대로라면 둘째연 초장은 ‘들키면’이 강박이 되어야 하고, 중장은 ‘때릴수록’이 강박이 되어야 하며, 종장은 ‘피는 꽃도’가 강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둘째연 같은 경우는 오히려 초장에서는 ‘알몸이 될’에, 중장에서는 ‘일어서는’에, 종장에서는 ‘차마 못 볼’에 의미상 강세가 주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조의 둘째 수 종장에서는 의미가 이어지지 않고 모호하다. ‘두더지 대가리 같은,/ 피는 꽃도/ 차마/ 못/ 볼,’이라고 하여 다시 초장으로 돌아가는 도치의의미로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기서 쉼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매하다. 요즘 자유시가 마침표 안찍기, 쉼표 등을 사용하며 의미상의 난해시를 쓰는 경우처럼 시조에서의 ‘낯설게 하기’를 시도했지만, 구태여 이렇게까지 형식을 파괴해 가면서 시조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엄연히 자유시라는 자유롭게 표현해도 좋은 형태가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과연 이것을 정형시인 시조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가이다. 그들은 장을 구별로 배행한 시조조차도 현대의 자유시라고 생각하는 데 말이다. 또 다른 시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絶景이다!
흰 사발 속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이 질펀한
짜장들이 질척하게 깔린 뻘에
눈부신 靑玉 서너 알
알몸으로
나뒹구는, 3)
이 시조를 임종찬은 노산시조를 논하면서 노산시조의 시조다움에 비해, 이 작품의 미흡함을 논하면서, ‘「이 시인을 주목한다」란 제하에 특집으로 다룬 작품 중 하나인데, 이 작품에 대한 평도 수작이라고 평하였다. 과연 수작인가. 아니 이것이 시조라고 할 수 있는가. 앞에서 열거해 온 논리에 따라 살펴보면 일단 3장 6구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句가 장의 중간에서 배분되지도 않고 여섯 토막의 의미형태가 되지도 않는다. 시조 종장은 대체로 시적화자의 자기판단, 결심, 의지 등을 확연히 드러냄으로써 더 이상 논의를 계속할 수 없도록 마감해 버리는 기능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아도 이 시조는 종장처리가 미흡하다.’4)
아직 내 삶을 절망이라 말하지 않겠다
칼과 못, 사금파리, 유년기의 주머니 속 같은
아, 찔러 아픈 나날의 피 흘리던 흰 손이여.
우리는 때로 “나는 누구인가?” 소리치며 되묻기를
숨가쁘게 뛰어가다 마주친 한 노인의
가리킨 지팡이 끝이 세상 끝, 혹 아닐런지.
그렇다, 흔들리는 지상의 모든 것들
흔들림이 더할수록 하늘 한쪽 마냥 기울고
그 무게 누구든 지고 갈 긴 생애의 테마처럼5)
임종찬은 이 시조에 대해 ‘작중화자의 생에 대한 회의가 주제인 셈인데 피흘리던 흰 손은 누구의 손인지, 한 노인은 누구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리키는 지팡이 끝의 지향점은 무엇인지, 그 무게 누구든 지고 간다는 말은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지.’(위의 책)라고 의미의 모호함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시조의 절제미라든가 맺고 끊는 맛이 전혀 나지 않는다.
시조도 독자를 향한 의사표시요 전달수단임에 틀림없다. 고시조가 단순히 전달을 향한 적정적 거리 즉 축어적 관념이 명료화되어 있는 시조라는 데에 문제삼아 현대시조가 비유적 관념을 지나치게 나타내어 의미파악을 어렵게 한다면 시조의 바른 길이 아님에 틀림없다. 창작자 혼자만의 의미 이해, 또는 시조를 일부러 모호하고 난해하게 만들어 현대적 감각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시조 발전의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임종찬의 말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사이가 멀지 않아야 성공적인 은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하이꾸나 단가를 정형시로서 전세계문단에 당당히 내세움을 볼 때, 그 형식과 문학성에서 이들보다 못할 것이 없는 우리의 시조문학은 반드시 우리가 되살려내야 할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며 문학장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대시조는 담당작가층이나 내용 면에서 고시조와는 다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대시조는 고시조에서 물려받은 형식과 율격을 살려 그 틀 위에서 심상을 압축하고 긴장된 시조특유의 절제미를 가진 서정시로서 자유시와 변별되어야 한다. 위 시에서 보인 형태이완, 율격파괴 움직임을 우리는 경계하며 시조의 형식을 올바로 지켜 정형 서정시로서 현대시의 한 축을 견지해 나가야 할 것이다.
더구나 김학성 교수님의 ‘한국고시가의 거시적 탐구’에서 보여주듯이
① 원시민요 → ② 주술적 서정가요 → ③ 민요격 향가 → ④ 사뇌가 →
⑤ 속요 → ⑥ 시조 → ⑦ 자유시(근대시․현대시) → ⑧현대시조(?)
이러한 형태가 정착되어 ⑧의 자리가 확고히 굳어지려면 현대시조가 현대자유시를 능가하는 질적 수준이 되어야 하며 그만큼 보급과 창작이 일반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식의 파괴보다는 시조의 형식을 제대로 지키면서 정형서정시로 폭넓게 발전해 국민 누구나가 시조를 지을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가야 할 것이다.
김학성 교수님은 이러한 거시적 안목을 가지면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전통시조는 노래로 불려졌다. 때문에 한 음절마다 의미의 긴장과 강화가, 혹은 그 해소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시조는 눈으로 읽혀지고 가슴으로 공감하는 시이기 때문에 음절이나 음보단위, 행이나 연의 단위가 바뀔 때마다 시어 자체의 구조화로서 의미의 긴장과 이완, 정서표출에 있어서 파동의 강화와 약화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제약이 따른다. 현대시조의 창조적 변용은 실로 이것을 얼마나 유연하게 감당해 내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하겠다.’
또한 ‘현대시조는 그 자체의 시대적 대응력에 운명이 달려 있지만, 그보다는 시조와 경쟁관계에 있는 자유시의 행방에 더 많이 상관됨은 말할 것도 없다고 하였다. 자유시가 우리의 전통과 접맥을 갖지 못하고 서구모방의 몰주체적 양태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율격이 파탄되고 한국적 미의식을 배반하는 수준에서 머물 때, 그에 대한 반동으로 현대시조는 활력을 얻어 ⑧의 자리를 굳히게 될 것이라’는 김학성 교수의 주장이다. 역사의 흐름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고 백년 후에, 또는 천년 후에 이 시대를 어떤 장르가 존재했던 시대라고 부를지는 모르겠지만, 시조를 쓰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는 시조가 중심장르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장르란 시대에 따라 탄생하기도 하고, 발전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조는 이미 기존해 있는 장르이다.
흰머리 다 살고도
갈피 잡지 못한 생각
서산에 노을 뜨면
질정없이 흔들린다
한 세월
길 떠날거나
그냥 지고 말거나.6)
정완영의 시조다. 백발의 모습에도 흔들리는 시인의 모습이다. 노을처럼 이미 절정을 넘어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이 생에 대한 미련이나 기대 때문에 “질정없이 흔들리”고 있다. 시조의 정형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언어구사이다.
가로수가 물든 거리로 코트를 입고 나섰더니
‘선생님 추우십니까?’ 젊은 시인이 내게 묻는다
코트는 꼭 추워서만 입는 옷이 아니라 했다.
세월이 지향없이 흘러가는 강물이라면
가을은 그 강물 위에 속절없이 실려가는 배
봄 바람 가을 비 한자락 걸쳐 입고 나왔다 했다. 7)
역시 정완영의 작품이다. 코트를 입는 단순하고도 짧은 행위가 우리네 인생살이의 덧없음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되었다. 정완영 시인의 작품은 꽃이나 우리네 삶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범상한 대상이 지닌 이미지에 자신의 정(情)을 투사시켜 삶의 본질을 새삼 인식하게 하는 작품을 주로 쓰는데 이것을 박영호는 ‘이는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온 시조의 기능(唱)을 사유의 기능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8)고 보고 있다.
이슬에 젖은 코스모스 하나의 목숨과
영혼의 상처 아물지 않는 나의 목숨은
무엇이 다른가 어느 쪽이 더 귀한가
(……)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코스모스 꽃씨여
땅을 인연으로 하여 너를 꽃피우고 싶다
저 생긴 대로 흐르는 것이 물의 法인데9)
이것은 이승하의 「물의 법」이란 자유시이다. 얼핏 보기에는 시조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의미 단위가 시조의 3장 6구로 끊어지지 않는다. 6행 2연의 자유시이다. 시조는 형식에서 뿐만 아니라 의미 단위에서도 3장 6구가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3. 맺음말
지금까지 오늘날의 시조의 양상을 조금 약간 보았다. 현대의 감각과 내용을 시조라는 그릇에 담는데 있어서 ‘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도입하는 시조들이 있는데 이는 바람직한 시조의 방향은 아니라고 본다. 단순히 독자에게 흥미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조라는 형식을 충분히 숙지하고, 그러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인생과 자연과 삼라만상을 노래하는 시조창작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깊이있게 다루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김민정 논문.평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시의 운율구조론 - 압운론을 중심으로 (0) | 2009.08.22 |
---|---|
이청준 소설의 중층 구조 (0) | 2009.08.22 |
현대시조 100주년 기념 좌담회<월간문학> (0) | 2009.08.22 |
현대시조의 고향성 - 김민정 논문집 (0) | 2009.08.15 |
현대시조에 나타나는 고향의식 - 김민정 평론 1 (0) | 2009.08.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