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지하궁전인 명13능
1995년 8월 12일, 지하궁전인 명13능과 만리장성을 보러 가다. AD 15세기초 쿠테타를 일으켜 황권을 빼앗은 중국의 한 황제가 그 때의 도읍이었던 남경(南京, Nanjing)에서 북상해 베이징(北京, Beijing)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고 북경의 북쪽에서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자신의 묘지도 함께 만들었다. 그 뒤로 200년 동안 그의 후손들도 이곳에 자신의 묘지를 만들어 오늘날 이 곳에는 13개의 제왕능이 생겨났는데 이 거대한 능을 후세의 사람들은 명13능(明十三陵)이라고 부른다.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에 등재된 명 13능 중 장능(長陵)과 정능(定陵)이 대표적이다.
연산(燕山) 산맥에 자리잡은 명 13능에는 13명의 황제와 23명의 황후, 1명의 황귀비, 순장된 수십명의 황비가 묻혀 있다. 금빛으로 찬란한 황제능은 산세를 따라 건설되었는데 능침(陵寢)건물이 자연경관과 하나로 접목되어 중국 황제능 건축의 모범으로 꼽힌다. 베이징 다운타운에서 50km 떨어진 명 13능은 연산지맥의 한 가운데 형성된 분지에 자리잡았는데 동과 서쪽, 북쪽 세면이 산에 둘러싸이고 남쪽으로 트인 길이 북경까지 직통한다. 13능은 장능을 중심으로 기타 12개 능이 동쪽과 서쪽에 줄지어 선 구도이다.
장능의 주인은 주태(Zhudi)인데 이 황제가 바로 처음으로 이곳에 자신의 능을 판 사람이다. 주태황제는 큰 꿈을 가진 황제로 북경으로 천도(遷都)한 주요 목적은 베이징의 지정학적 우위를 이용해 북쪽 침략자의 남침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북경에 북경성, 자금성, 만리장성을 함께 건설했다. 주태가 판 장능은 명 13능 최초의 능이고 이 능원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지상 건물이 가장 잘 보전된 능이기도 하다.
장능의 건축물은 자금성의 구조를 모방해 붉은 담에 노란 기와를 사용했고 건물과 누각이 어울려 황제로서 주태의 지고무상한 지위를 잘 보여준다. 능의 중심건물은 능은전(陵恩殿)인데 과거 황실의 제사를 모두 이 건물에서 가졌다고 한다. 목조건물인 능은전은 높이 12m, 지름 1m의 녹나무 기둥 60개에 받들려 있다. 녹나무는 아주 진귀한 수종으로 이런 목재는 쉽게 부패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이한 향까지 난다. 이런 녹나무는 중국 서남부의 운남(云南, Yunnan)과 사천(四川, Sichuan)의 깊은 산속에서만 자란다. 그래서 베이징까지의 수송이 엄청난 일이었는데, 먼저 높이 십여 미터, 지름 한 미터 이상의 나무를 벤 다음 여름 큰 물이 질 때를 기다렸다가 목재로 뗏목을 만들어 강물을 통해 베이징까지 수송했다. 과거 중국의 남방으로부터 베이징까지 인공으로 판 운하(運河)가 있어서 물에 의한 수송이 가능했고, 베이징에서 명 13능까지는 수로가 없기 때문에 겨울을 기다렸다가 몇 미터에 하나씩 우물을 파서 그 물을 길에 뿌려 두터운 얼음을 만든 다음 그 얼음위로 목재를 밀면서 수송했다. 이렇게 녹나무 기둥 1개를 운남으로부터 베이징까지 수송하는데 소요된 시간은 3~4년이었고 동원된 인력은 2만 명 이상이었다는 통계이다. 그로부터 명 13능을 만들기 위해 소모된 인력과 재력, 시간은 상상이 안 될 정도임을 알 수 있다.
능은전의 뒤에는 높은 네모난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명루(明樓)이다. 명루는 명조 황능의 대표적 건물로 이 건물에는 능 주인의 묘비가 있다. 그리고 명루의 왼쪽과 오른쪽 양옆으로 담이 원형을 이루며 흙더미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 흙더미가 보정(寶頂)이고 보정아래는 황제와 황후의 관이 모tu진 지하궁전이다. 명루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능 전체가 한 눈에 안겨오고 앞쪽은 네모나고 뒷쪽은 둥근 형태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생각하여 이런 건축구도는 황제가 사후 천국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1950년대, 고고학자들이 장능의 지하궁전을 발굴하려 시도했지만 아무리 해도 지하궁전의 입구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먼저 다른 능을 선택해 시험적으로 지하궁전을 발굴해 최대의 능인 장능에 대한 파괴를 최소화하려 했다. 그렇게 선택된 능이 13능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정능이다. 정능에는 명 만력(萬歷, Wanli)황제와 두 황후가 묻혀 있는데 건축구조가 장능과 아주 유사하다.
고고학자들은 발굴과정에 역시 지하궁전 입구를 찾지 못하다가 우연하게 신비한 작은 돌 비석을 발견했는데 그 돌비석이 지하궁전을 여는 키였고 돌비석에는 정능 지하궁전 입구의 위치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작은 돌비석의 인도를 따라 순조롭게 지하궁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능을 판 사람들이 왜 작은 돌비석을 남겨 후세의 사람들이 지하궁전을 찾도록 했을까? 만력황제는 22살부터 이 능을 파기 시작했고 6년 뒤인 28살 때 능을 완공했다. 하지만 만력황제는 58세 때 세상을 하직하여 능이 완공되어서부터 만력황제가 하직하기까지 30년 동안은 먼저 빈 채로 능을 봉하고 황제가 세상을 뜬 다음 다시 문을 열어 황제를 안치해야 하는데 그 때 입구를 찾지 못할까 우려해 이런 돌비석을 만들었던 것이다.
정능의 지하궁전은 지하 27m 되는 곳에 있다. 이 높이는 9층 건물의 높이와 비슷하다. 지하궁전은 앞(前), 중앙(中), 뒤(後), 왼쪽(左), 오른쪽(右)에 위치한 다섯 개의 천정이 높고 탁 트이게 넓은, 서로 연결된 궁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궁전은 모두 돌로 된 석실이다. 중앙의 건물에는 3개의 한 백옥 보좌가 있고 그 앞에는 큰 독이 있는데 그 독은 참기름이 담겨진, 장명등(長明燈)이다. 뒷쪽의 건물은 지하궁전의 핵심건물로 이곳에는 만력황제와 두 황후의 관이 놓여 있다.
정능 지하궁전에서는 귀중한 문화재 3,000여점이 발굴되었는데 색채가 다채로운 견직물, 의상과 장신구, 보기 드문 금기, 옥기, 도자기 등은 명조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둘도 없는 진품이다. 이런 문화재 중 금실로 짠 황관이 하나 있는데 무게가 800g 정도이고 금실의 지름이 0.2mm밖에 안되어 그 때의 높은 공법을 과시하면서 국보급 문화재로 되었다. 이밖에 황후가 행사에 참가할 때 사용했던 황관도 있는데 실크로 만들어진 모자에 금으로 된 용과 봉황이 새겨져 있고 루비 200여개, 진주 5,000여개가 박혀 있고 취조(翠鳥)의 푸른 깃으로 포인트를 줘서 이를 데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16. 만리장성(萬里長城)
만리장성
달나라에 가는 우주선에서 마지막까지 보인 것이 그 유명한 만리장성이었다고 한다. 만리장성 위에 서니 그 말이 생각나서 새삼 감개가 무량했다. 나는 그 만리장성의 일부, 즉 2.5리(1Km 정도)를 걸어보았다. 보통사람 12명 정도가 나란히 서서 걸을 수 있을 넓이였다. 이런 성을 만리나 쌓은 중국, 참 대단해 보였다. 물론 모든 것이 우리가 둘러본 팔달령 같은 넓이나 크기는 아니겠지만… 성을 쌓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까? 돌과 흙은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갖가지 상념에 젖으며 만리장성 위를 걸어 보았다. 구두를 신고 걸어도 아주 편안한 길이다. 자동차가 달려도 될 것 같은 길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돈대가 설치되어 있고, 도로가 교차하는 곳에는 출입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출입문 및 성벽의 곳곳에는 한글로 ‘소매치기를 조심하시오’라는 말이 있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가까운 나라이긴 하지만 한글을 보니 반갑다. 물론 영어, 일본어로도 씌어 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발해만[渤海灣]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약 6,400km (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다.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명대 특히 그 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동쪽은 발해만 연안의 산해관부터 중국 본토 북변을 서쪽으로 향하여 북경[北京]과 대동[大同]의 북방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황하강[黃河]을 건너며, 섬서성[陝西省]의 북단을 남서로 뚫고 나와 다시 황하강을 건너고, 실크로드 전구간의 북측을 북서쪽으로 뻗어 가곡관에 다다른다.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이다.
산해관부터 황하강에 이르는 부분은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외면은 구워서 만든 연한 회색의 기와로 덮여 있다. 이것을 전(塼)이라고 하는데 내부는 점토를 붙여 딱딱하게 만들었다. 팔달령 부근은 높이 약 9m, 너비는 윗부분이 약 4.5m, 아랫부분이 9m가량이며, 총안(銃眼)이 뚫려 있는 톱날 모양의 낮은 성벽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약 100m 간격으로 돈대(墩臺)가 설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황하강 서쪽 부분은 전을 사용하지 않고 햇빛에 말린 벽돌을 많이 사용해 매우 조잡하다. 청대에 들어와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곳도 있다.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전국시대의 장성은 북방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중원에 나라를 세운 제(齊)·중산(中山)·초(楚)·연(燕)·조(趙)·위(魏)·진(秦) 등의 여러 나라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구축했다. 조·연·진 3국이 쌓은 북변의 성벽은 문헌에도 기재되어 있으며, 최근 내몽고자치구의 적봉 부근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始皇帝)가 연과 조가 축성한 북변의 장성을 연결하여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는데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방은 감수성[甘肅省]의 민현[岷縣] 부근을 기점으로 하여 황하강의 북쪽을 감아돌아 조의 장성과 합쳐지는데, 그 동쪽 끝을 연의 장성과 연결하여 적봉부터 요양 부근에까지 증축했다. 원은 몽골과 중국땅 모두를 지배했기 때문에 장성이 필요 없었으며, 만리장성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다. 몇 번이나 만리장성을 넘었던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 Livre des merveilles du monde〉에 만리장성에 대해서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마도 축성 이후 수백 년이 지나 만리장성의 자태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리장성
현재의 만리장성은 거의 명대에 축조된 것이다. 명은 영락제시대(永樂帝時代)까지 북방민족에 대해 공격적이었으나 그 이후 서서히 방어적으로 되어 역대로 만리장성을 개축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장성이 거의 완성된 것은 16세기말이었다. 명은 만리장성을 북방의 제1선으로 삼아 거대한 주둔군을 배치하고 구역을 나누어 방위를 담당시켰는데 이것을 구변진(九邊鎭)이라고 불렀다. 명대에는 만리장성을 변장(邊牆)이라고 불렀다. 북변의 변장 이외에도 요동(遼東) 변장은 압록강 기슭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만주 및 몽골에서부터 신강[新疆]에 이르는 지역이 중국을 통일한 청의 지배하에 들어왔기 때문에 만리장성은 군사적 의미를 잃고 황량한 상태로 20세기 전반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과거의 만리장성은 오로지 판축공법(版築工法)을 써서 흙으로만 축조되었다. 황토를 건조시키면 단단한 점토가 되므로 판축은 간단한 공법이었으며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내구성을 갖고 있었다. 황토를 틀에다 넣어 건조시키면 햇빛에 말린 벽돌이 되는데 이것을 구운 것이 전이다. 전으로 장성의 외곽을 둘러싸는 공법은 명대 특히 16세기 후반 이후의 것으로서 지역적으로는 산시[山西] 동쪽 구간에 한정되어 있다. 산시 서쪽 구간에는 전 이외에도 햇빛에 말린 벽돌로 쌓은 부분도 있다.
만리장성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돈대가 설치되어 있고,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출입문이 설치되었으며 수비병이 주둔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만리장성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방위선으로서의 군사적 의미이다. 그러나 북방민족은 세력이 강력해지면 간단히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농경지대를 침입했고 화북의 농촌은 큰 피해를 입었다. 또 명대 말기에는 산해관 정도가 청군의 침공에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에는 돌파되고 말았다. 만리장성을 둘러싼 몽
골과 만주 간의 무역이 오래전부터 행해져왔다. 만리장성 부근의 촌락에서는 소규모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고, 대규모적인 것은 만리장성 안의 도시를 기지로 하여 대상을 짜서 오지에 들어가기도 했다. 명말 이래 귀화성(歸化城)과 같이 만리장성 밖에 있는 도시가 상업도시로 번영한 곳도 있다. 청대에는 중국의 상인들이 정부의 뜻과는 달리 귀화성부터 몽골 고원의 오지에까지 상업을 위해 들어가기도 했다. 만리장성 너머의 무역로는 열하(熱河)· 만주 방면으로 가는 것이 있다. 몽골 방면은 대동으로부터 북상하여 득승구(得勝口) 부근의 관구를 통하는 것이 주요경로였으나 명말부터는 귀화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한다.
1995년 8월 13일, 나는 15박 16일 동안 실크로드와 북경을 구경하고 북경공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중국의 사막지대를 경험하고, 옛 실크로드를 보면서 그들이 생활했던 모습과 그리고 현재의 북경 근처의 여러 가지 유명한 역사적인 이야기 등을 살펴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배웠다. 문화의 어느 단면을 보고 그것이 그들 생활의 전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여러 가지 문화를 보았고, 많은 생각을 하게된 여행이었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들이 누리고 싶어하는 부귀, 권력, 사랑 그리고 사후에까지도 영화롭고 싶어 만든 무덤들을 보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앞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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