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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은하철도 999 - 정석주시인 추모글

by 시조시인 김민정 2009. 4. 22.

 

<정석주시인 추모글>

은하철도 999

 -정석주님을 추모하며 


                                    宇玄  김민정


                        새재바람/ 맞으며/ 당신을 찾던 날은

                        첫눈이 내렸던가요/ 설레이던 마음 가득

                        육회에/ 막걸리에다/ 밤 가득히 채웠더니


                        잠깐 가는/ 세월인 걸/ 더 잠깐의 인생인 걸

                       「나래」에 꿈을 싣고/ 은빛 찾아 떠나신 후

                        푸르른/ 『산하』빛에도/ 가슴 외려 쓰립니다. 

                                      「은빛 찾아 떠나신 후 - 정석주님 추모시」



   

   위 작품은 나의 첫시조집 『나, 여기에 눈을 뜨네』라는 시집에 들어있는 「나래」와 관련된 3편 시조 중의 한 작품이며 석주님이 돌아가시고 그 다음해 추모1주년 기념으로 썼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나래」는 정석주님이 만든 시조문학회 이름이고 『산하』는 정석주님의 시집 이름이다.

    문경 점촌에 한 번 놀러오라는 계속적인 성화에 못 이겨 서울에서 조금 친하게 지내던 남전희, 양선희 동인과 함께 점촌에 가게 되었다. 그 날 서울을 출발하는데 마침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문경 점촌에 도착할 때쯤에는 제법 많은 눈들이 산과 들에 쌓여 있었다. 산에 들에 쌓인 눈들을 즐겁게 감상하며 점촌에 도착하니 정류장에 미리 와서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던 석주님은 단골 술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셨다.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고 육회도 시키고 막걸리도 시키고 하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밤늦도록 끝이 나지 않았다. 술이 약하면서도 계속 마시던 남전희 시인은 급기야 토하기 시작하여 밤새 웩웩거리며 괴로워하는 바람에, 양선희 시인과 나는 등을 두드려 주고 대야를 갖다 주며 난리를 치는 바람에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웠다. 석주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그 날의 감회가 새삼 새롭게 다가와 쓰게 된 작품이다. 

    1981년 여성동아 4월호에 「봄비」라는 나의 시조가 게재되었다. 그때는 박경용 선생님이 작품선을 하고 간략히 평을 실어주셨는데, 난생 처음으로 써 본 시조를 퇴고도 없이 보냈는데 독자란 첫머리에 실어주셨다.

    며칠간 마음이 들떠 있었는데, 그때 석주님의 편지가 왔다. 나래 동인 활동을 함께 해 보지 않겠느냐고…. 시조에 대해 별로 알지도 못했지만, 석주님의 편지에 찬성하는 내용의 글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하여 석주님과 함께 동인활동을 시작한 것이, 시조작품을 꾸준히 써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도 한가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동안 동구여상을 나와 포기하고 있던 대학진학을 위해 1981년 5월부터 공부를 시작해 낮에는 종합반 강의를 듣고, 아침저녁에는 영, 수 단과반을 들었기 때문에 솔직히 작품에 신경 쓸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일 년에 네 번 계간으로 내는 동인지 원고 청탁을 받고 나면 그때부터 작품을 보내게 되는 날까지 끙끙대기 시작했고 미처 쓰지 못해 못 보낼 때도 많았다.

    그때 석주님은 문경 점촌에서 아마 동네 이장역을 맡아 하신 걸로 기억한다. 체구가 큰 편이었는데, 얼굴도 크고, 손도 크고, 배는 남산만하여 임신 8개월은 된 듯하고…. 그런데 가끔씩 보내오는 편지 글씨는 어찌나 부드러운 달필인지. 붓글씨를 잘 쓰시어 자주 붓글씨 편지를 보내오곤 하셨는데 육중한 몸매와 호탕한 웃음과는 달리 아주 섬세한 필체였다. 나는 그 글씨체를 참 좋아했고, 지금 다시 봐도 참 마음에 드는 글씨체다. 정석주님은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누구보다 먼저 축하엽서를 보내 주셨다.

 

    축하엽서는 주셨지만, 물론 입학식에도 못 오셨고, 동해 푸른 물살을 함께 보러 가지도 못했다. 정석주님은 서울 뿐 아니라 전국을 누비고 다니며 동인들을 모았는데, 잡지든 신문이든 시조가 실린 것이 눈에 띄면 그 시인에게 연락하여 나래동인을 하지 않겠냐고 채근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꽤 많은 시조시인의 모임으로 나래가 성장하게 되었다. 서울에도 자주 오시고 서울팀들을 모아 술을 먹기 시작했는데…. 한 번 시작하면 좀처럼 끝냄이 없고 차표를 끊어놓은 시간, 즉 차를 타러 가야할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서기가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면 다행이었다. 서울팀들이 헤어져 지하도를 건너고, 육교를 건너 와서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하고 나면, 다시 이쪽을 향해 손짓을 하며 ‘어이, 이리와 봐!’하며 부르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급한 일이 있는가 싶어 다시 가면 이대로 헤어지기가 섭섭하다며 2차를 가는 것이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자정이 다 되어서야 겨우 동인들은 헤어져 돌아오고, 석주님은 여관방에서 주무시고…. 이것이 나래동인들 만남의 일과였다. 

 

    그때는 마장동에 시외터미널이 있었는데, 주로 석주님은 점촌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마장동에 오시면 그 주변의 단골 여관을 잡아놓고 동인들을 그리로 불러모았다. 그 때 양선희, 전향란, 유윤희, 나 모두 처녀 시절이었는데, 아무 거리낌 없이 여관방에도 잘 찾아갔다. 석주님은 그것을 늘 고맙게 생각했다. 여관에서 만나면 그 순간부터 술 파티가 시작되었다. 그 때 모이던 동인들을 보면 주로 감충효, 강세화, 김필곤, 김철진, 남전희, 민병찬, 박명진, 양선희, 방성운, 신순애, 윤신근, 김말영, 최광순, 이상섭, 신진식, 김인숙, 리강룡, 전향란, 차정미, 남궁영, 박영식, 박필상, 신후식, 허민홍, 최상남, 허성욱, 유윤희, 이상진(무순, 시인명칭생략) 등이었다. 물론 서울 사람들만 모일 때도 있고, 지방 사람들이 함께 할 때도 있었다. 나는 술도 못 마시면서도 분위기에 취해서 얘기를 들으며 ‘하하, 호호’ 웃고 앉아 있던 시절이었다.

    인간의 삶이란 다 제 잘난 맛에 사는지라, 세 사람만 모여도 의견이 달라지는데, 전국의 많은 시인들을 모아 동인활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관계든, 일이든 간에 시간과 돈과 열정과 자기희생이 따라야 관계가 유지되고, 명맥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 번은 서울, 한 번은 부산, 한 번은 대구 이런 식으로 전국에서 모임을 가지며 돌아다니려니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고…. 가끔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시인들에 대한 울분도 털어 놓고, 또 사정에 따라 동인활동을 그만두겠다고 하는 동인이 있으면 그 동인을 달래 계속 활동을 하게 하려는 노력도 기울여야 하고….

    그래서 가끔은 그러한 고충을 털어놓으시며 힘들어 하시기도 했다. 고충을 듣고 도와드릴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며 그러한 동인들에게 연락을 해서 계속 동인활동을 함께 하자고 전해달라는 말씀도 하시곤 했다.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며 썼던 작품이 아래의 작품이다. 모든 영광과 열매는 밖으로 자라지만 한 인간의 고독과 고뇌는 안으로 자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의아해 하는 것이

                        육중한 그 몸 어디/ 저리 고운 필체하며

                        호탕한/ 웃음과 달리/ 다정은 섬세코나


                        땀띠 나는 고통 속에/ 잠 못 든 나날들은

                        서 푼짜리 인심조차/ 풍년으로 가꾸는 일

                        고독은/ 안으로 자라고/ 열매는 밖으로만 커 간다 

                                             「뜨거운 날의 고독 - 정석주님」 전문

  

    내가 결혼을 하던 85년에 석주님은 문경에서 동인시화전을 열었다. 동인들의 작품 1점씩을 본인이 자기의 글씨로 써서 만들든가, 아니면 정석주님이 글씨를 써서 표구를 맡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 시조계의 원로이신 정완영, 리태극, 박재삼 선생님 등 유명한 시조시인들을 모시고 행사는 크게 진행되었다. 그 때 나의 시화작품은 정석주님의 글씨와 다른 분의 그림으로 되어 있었는데, ‘사랑’이란 작품이었다. 나는 그 작품이 마음에 들어 사진으로 찍어 그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녔는데, 나중에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나는 그 시화작품을 지금 갖고 있지 않다. 이유는 작품을 찾아가라고 한 날 바빠서 작품을 가지러 나가지 못했다. 처음에 신진식 시인이 보관하고 있다고 했으나 나중에 물으니까 이사를 다니느라 없어져서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지금 누가 어디에서 보관하는지 알 수가 없다. 무척 마음에 드는 시화였는데 아쉽다.

    만학의 나는 동인전을 열 당시 대학 4학년이었고, 집에서 서른 전에 결혼하라고 재촉하여 4학년 2학기에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고 결혼 날짜를 잡아놓은 상태였고, 지금의 남편과 문경의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함께 갔었다. 그리고 그 해 4월, 시조문학창간25주년기념 지상백일장에서 ‘예송리 해변에서’로 등단을 한 상태였다. 다음의 석주님 편지는 내가 등단을 하고 나서 얼마 후의 편지라 기억한다.

 

 

 

 

  

 

  

    시화전 행사를 성황리에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완영 선생님과 한 버스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휴게소에 와서도 정완영 선생님께 식사는 고사하고 차 한 잔 대접하지 못했다. 가난한 대학원생인 남편과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나는 서울에 올 고속버스표만 겨우 끊어놓고, 남아있던 비상금 1만원으로 택시를 불러 문경새재를 한 바퀴 돌며 제1관문, 제2관문, 제3관문 구경을 하느라 주머니에는 집에 갈 토큰 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등단작품 심사위원이시기도 했던 정완영 선생님을 뵐 면목이 없어 뒷좌석에 앉은 우리는 모르는 척, 휴게소에서 내리지도 않고 앉아만 있었다. 속으로 얼마나 인사성 없고 버릇없는 젊은이들이라고 흉보실까 싶어 마음이 아주 많이 불편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드릴 수도 없고…. 몇 년 전에야 겨우 그 이야기를 드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지 않고는 그 사람을 비난하지 말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되뇌어 보는 순간이었다.

    문경에서 시화전을 마친 두 달 후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식 날에는 태풍으로 인한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 심한 우중에도 불구하고 고맙게도 나래동인 및 다른 시조시인들이 많이 참석을 해 주셨다. 정석주 회장님은 그날 축시를 낭송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회자가 “다음은 축시 낭송이 있겠습니다.”를 하는데도 석주님이 나오지 않아 식장에는 침묵이 흐르고 나는 긴장과 당황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친구와 김인숙 동인님의 재치로 위기가 모면되었다.

    나의 지갑에 들어있던 시화전시작품 사진을 친구에게 보여준 적이 있는데 마침 내 가방을 가지고 있던 그 친구가 그것을 기억하고 얼른 꺼내어 김인숙 선생님께 드렸고, 김인숙 선생님은 그 사진으로 즉석 낭송을 해 주셨다. 아래의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다.

 


    하객들은 그 재치에 감탄하면서 환호의 박수를 보냈고, 지금도 나는 김인숙 선생님과 고경효란 친구에게 그 순간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시화전 때의 ‘사랑’이란 작품이다. 덕분에 나는 자작시를 들으며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정석주 회장님은 그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참석을 못했다는 말씀과 함께 축시는 손수 붓으로 쓰셔서 보내셨기에 즉시 액자를 만들어 지금까지 우리집 거실에 걸어두고 있다.         

 

                    <민정시인의 결혼을 축하하며 - 글.글씨 정석주>


    1986년에는 서울에서 ‘나래시조 20주년’기념행사를 크게 했다. 동인지 창간호는 81년부터 나왔지만, 66년 처음 문학에 뜻을 두고 모였던 몇 분 초창기 동인님들의 모임부터 계산해서 그렇게 하신 것 같다. 나는 85년 결혼을 하고, 86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였지만 취직을 못한 상태로 집에서 다부지게 순위고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대학4학년 12월에 서울시에서 국어과 교사를 단 한 명도 뽑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2년이나 준비해온 순위고사 준비가 허사가 될 상태라 나는 난감했고,  고민 끝에 다시 1년을 더 공부하기로 하고 순위고사 공부에 전념하느라 동인 활동뿐 아니라 외부와의 접촉을 거의 단절한 상태로 하루 12시간 이상 책상에만 앉아있던 시절이었다. 

    정석주님은 그때도 여러 유명 시조시인들에게 축시를 의뢰하셨고, 많은 분들이 호응하여 축시를 써 주었고, 동인들도 자작축시, 또는 수필을 한 편씩 싣게 했다.

그리하여 아래의 축시를 쓰게 되었고, 『나래 二十年史』에 실리게 되었다. 


                              아지랑이 보다 먼저

                              봄을 찾는 나비, 나비


                              나래짓 후에라야

                              비로소 꽃은 피고


                              그윽한 향기로 익을

                              열매 또한 탐스럽다



                              한과 꿈이 어울려서

                              한 세대가 피는 곳에


                              담담히 쌓아올려

                              뜸을 들인 시어의 탑


                              층층이 감기어 서린

                              꽃물보다 깊은 정  「나래찬가」전문


 

 

    나래20년 행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나래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했다. 10월 달에 행사를 했고, 나는 12월에 순위고사를 보아야 했기 때문에 나래행사 이후 외부와의 소식을 거의 단절했으며, 나래의 동인활동도 거의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렇게 무심히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정석주님의 암소식이 전해졌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시더니…. 나래동인들의 안타까움과 나의 안타까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울근교 기도원에 와 계시다고 뵈러 가자고 동인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그러자고 약속을 해 놓았다. 그런데 막상 약속한 날에는 갈 수가 없었다. 나도 몸이 아파 약을 먹고 있는 상태였고, 남편은 볼거리를 심하게 하여 식사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어 환자를 혼자 두고 차마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그런데 얼마 후 돌아가셨다는 전갈이 왔다. 그 날 가 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해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나래시조를 사랑하셨고, 동인들을 좋아하셨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석주님이 보내준 80여 통의 장문 편지와 엽서를 지금도 나는 고이 간직하고 있다. 참으로 문학에 열정을 쏟고 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석주님이 남기고 간 《나래시조》가 이렇게 성장하여 벌써 41주년을 맞았다. 잠깐 가는 세월이다. 《나래시조》가 지금도 이렇게 건강하게 성장하여 발전하고 있는 걸 보면 아마 지하에서도 흐뭇하여 호탕하게 웃고 있지 않으실까 싶다. 

 



* 나래41주년기념 정석주 추모특집에 실렸던 원고 및 사진 수정보완함.

 

2009년 8월 15일 최종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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