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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일본, 가깝고도 먼 이웃 - 일본 기행문

by 시조시인 김민정 2009. 5. 1.

                                                                 일본, 가깝고도 먼 이웃 

                                                                                                                                            

                                                                                                                              宇玄  김민정

    일본은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이웃이다. 가까이 살면서 언제나 우리에게 도움보다는 피해를 많이 주는 나라라서 그렇게 생각이 되는 것이다.

    2008년 7월 25일~28일 3박4일 동안 해외문화탐방을 위해 학생들을 인솔하여 일본을 갈 때만 해도 그렇다.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우겨 여기저기 외국에서까지 독도를 일본의 섬으로 표기하게 하는 일을 저질러 우리나라로선 분통 터지는 순간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가깝게는 일제36년을 통해 그들에게 쌓인 우리의 감정이 아직 남아 있고, 지금도 독도문제와 동해바다 표기문제로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우리를 여러 면에서 힘들게 하고 있다. 우리의 한국전쟁으로 인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때 패망했던 일본이 눈부시게 발전을 해 온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할 텐데도 말이다.  

    일본학교 방문까지 준비를 해 왔지만, 막상 가려고 할 즈음엔 독도 문제로 나라 안이 온통 시끄러웠다. 일본에 가는 것조차 염려스러워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좋지 않다고 여겨 예정대로 일본문화체험을 진행하기로 하다. 그 대신 방문하기로 했던 일본 학교에는 가지 않기로 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을 한다고 했다. 나는 일본에 대해, 일본의 교육에 대해, 일본의 문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보여주고, 그들을 알게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바로 알고, 우리의 처지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느껴져서 독도에 관한 정보를 여러 곳에서 수집하고 복사를 하여 충분한 자료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미리 집에서 읽어오도록 했다. 나의 정체성을, 우리 자신을 아는 의미에서 그것은 필요한 교육이었다.

 

    학교에서 7시 출발이었다. 우리는 6시 이전에 학교에 도착하여 점검을 하였다. 이번 여행에는 주형동 교감선생님, 손미나 선생님, 나 이렇게 세 명이 인솔자였다. 학생은 39명이었다. 관광회사에서 보낸 버스를 타고 우리는 제 시간에 출발을 하였고, 몇 몇 학부모님들이 나와서 우리를 전송해 주셨다. 우리는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밟고 예정시간에 출발하여 2시간 후엔 간사이공항에 도착하였다.

    간사이공항은 오사카만에 떠 있는 인공섬에 만들어진 공항이다. 바다위 인공섬에 지어졌다는 장점 때문에 소음공해로부터 자유로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24시간 운영이 가능하다. 공항 건물은 완벽한 좌우대칭이며, 모든 벽을 유리로 만들어 자연광을 넉넉히 얻을 수 있고 엘리베이터도 유리로 된 벽에 쌓여 시각적으로도 훨씬 넓고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시설도 많고 편리하나 공항의 이용요금은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고 한다. 

    공항을 빠져나가 준비된 버스를 탔고, 예약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은 처음 본 일본음식들을 신기해하며 뷔페식 식당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서 먹기 시작했다. 식사 후엔 사천왕사라는 곳에 가서 일본의 절을 둘러보았다. 일본에는 종교가 거의 불교인 듯, 우리나라에 수없이 많은 교회탑들이 그곳에서는 보기 드물어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저녁에는 난바위 워싱턴 호텔에서 짐을 풀고 일본의 번화가라는 도톤보리와 신사이바시를 구경하러 갔다. 도톤보리는 우리나라의 명동거리 같은 곳인데 음식점이 많다. 옛날부터 번화했던 지역으로 밤이면 더욱 활기를 띈다고 한다. 개성 있는 레스토랑, 술집 등이 많아 식도락가 유흥가다운 면모가 드러나는 곳이다. 신사이바시는 지하철 신사이바시역 주변으로 아메리카촌, 유럽촌 등 젊은이들이 많이 보이는 거리와 신사이바시스지 상가 등이 유명하다. 1970년대 중반에 미국 직수입의 옷이나 잡화를 취급하는 상점들의 오픈과 함께 발전해 온 곳이다. 유럽촌은 대환(다이마루)백화점 근처 지역으로 멋있는 뷰티크, 오래된 레스토랑, 패션 빌딩들이 늘어서 있어 유럽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지역이다. 


    여행사에서 학생들에게 1,000엔씩을 주고 먹고 싶은 데로 골라서 저녁을 먹도록 하고 7시까지는 호텔로 돌아오라고 가르쳐 주었다. 도톤보리와 신사이바시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단조로운 거리라서 호텔로 찾아오기는 쉬웠다. 아이들은 자기가 구경하고 싶은 것을 구경하고,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을 수 있어 좋아했고, 일본의 유명한 라면 "금"라면을 많이 사 먹는 것 같았다.

    우리도 라면을 사 먹어 보았다. 우리나라만큼 얼큰한 맛이 없어, 약간 느끼하게 느껴졌지만 아주 많이 느끼하던 중국라면과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어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교감선생님과 손미나 선생님과 나는 번화가인 신사이바시를 구경했지만 우리나라의 시장들보다 특별히 멋있다거니 번화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일단 아이들이 다 잘 돌아왔는지 점검하기 위해 시간을 맞추어 호텔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몇 명씩 모여 다녔으므로 무사히 호텔까지 찾아왔고, 아직 잠자기엔 이른 시간이라 끼리끼리 모여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우리는 점검을 마친 후 시내구경을 다시 나갔다. 저녁때 갔던 도톤보리 거리를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신사이바시 거리까지 나가보았다. 갑자기 노랫소리가 들리고 구경꾼들이 많이 모여들어 무엇인가 보러갔더니 신사이바시의 개천으로 배가 내려오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배가 뜰 정도로 물이 꽤 깊어 보였다. 배에는 50여 명 이상 건장한 남녀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해운조합이라는 플랭카드가 있었다. 그런 배가 2대가 지나갔고, 마이크를 들고 무슨 말인가를 하면서 그들은  행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일본어를 몰라 알아듣지 못했다.


    맥주 한 잔 마시며 목을 축일 공간을 찾았으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고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어 한 두 곳 들여다보다가 다시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우리와 동행한 가이드 한 분이 시내를 걷고 있었다.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싶다고 했더니 그가 마땅한 곳을 소개해 주어 우리는 함께 맥주를 마시고 일본 요리도 먹게 되었다. 빈대떡 비슷한 것이었는데 치즈도 들어가고 해물도 들어가서 맛이 있었다. 그곳에서 음식을 파는 사람은 일본 사람이 아닌 중국인이었다. 우리는 꽤 긴 거리를 걸으며 일본의 밤거리 풍경을 맛보았다. 12시가 가까워서 사람들도 많지 않았고 차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다음날은 일찍 일어나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오사카과학관에 별자리관측을 위해 갔다. 오사카는 주로 상인들에 의해 개척된 도시라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정신이 강하게 남아있는 도시이다. 오사카과학관은 넓은 공간이었고 의자들이 모두 뒤로 젖혀져 있어 천정을 쳐다보며 밤하늘의 별자리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잘 꾸며놓아 설명은 쉽게 느껴졌지만 일본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아쉬웠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크기규모의 별자리관측과학관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는 귀무덤에 가기로 하였다. 쿄토 이총(耳塚, 미미즈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흔적이다. 일본군은 전과를 보고하기 위해 조선인의 목을 베어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목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점차 보내야 할 짐도 늘어났고, 이런 일이 번거로워진 일본군이 귀나 코만 잘라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했다고 한다. 이렇게 헌상한 것들이 뒷날 지금의 귀무덤이다. 당시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코와 귀를 잘라간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야만적인 행태가 다시 한 번 생각되어 너무나 화가 난다. 더구나 그 앞에는 귀무덤을 더 초라하게 보이도록, 거대하게 꾸민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가 있어 더욱 기분이 나쁘다. 못된 놈들! 지진이나 많이 나거라!

    불행했던 우리 선조들을 위해서,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우리는 묵념을 했다. 우리는 꽃다발을 준비하려고 했었지만 미처 준비하지 못해 미안했다. 개인도, 민족도 다른 이나 다른 민족의 지배나 서러움을 안 받으려면 스스로 실력을 기르고 강해져야 한다. 

 

 

    다음으로는 쿄토국립박물관에 갔다. 쿄토는 794년부터 1868년까지 약 1,100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곳이다. 다른 도시보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16세기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쿄토를 새로이 재건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그 문화적 가치로 인해 폭격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쿄토 국립 박물관은 메이지 시대 초기의 서양화, 근대화의 풍조로 인해 일본의 전통적 문화가 가벼이 여겨지고 문화재들이 훼손되자 1947년 문화재 보호의 목적으로 토쿄, 쿄토, 나라에 국립박물관의 설립이 결정되었다. ‘제국쿄토박물관’으로 개관했으나, 후에 ‘쿄토국립박물관’으로 개칭되었다. 총 16개의 전시실이 있는 박물관은 12,000점 전시물을 갖고 있으며 일본의 역사와 문화의 핵심 시설이라고 한다. 둘러보고 나왔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일본의 기온(祇園)거리를 보러 갔다. 쿄토의 전통적인 게이샤 거리의 하나로 잘 보존되어 오랜 목조 가옥들이 많다. 전성기 시절 700채가 넘는 기방과 3,000여명이 넘는 마이코(舞妓)나 게이샤(藝者)들이 있었던 곳으로 일반적으로 기온쵸(祇園町)라 한다. 처음에는 신사 앞에 만들어진 마을이었으나 이 일대가 화류가로 자리잡게 된 것은 에도시대였으며, 당시 신사에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로 크게 붐비자, 이들을 상대로 하는 음식점들이 사찰 부근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것이 차츰 요정으로 발전하면서 급기야 화류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기온 거리의 고급요정의 일류 게이샤와 한 잔하기 위해서는 돈과 그에 맞는 지덕을 겸비해야 한다고 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간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테라)는 수세기 동안 쿄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문지 중의 하나이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올라 가야하는데 양쪽으로는 상가들이 즐비했고 많은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다. 날씨가 어찌나 더운지 자꾸 그늘을 찾게 되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게 되었다.

    이곳 청수사는 서기 780년에 나라에서 온 승려 엔친(延鎭)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청수(淸水)란 순수한 물을 의미한다. 본당에서 아래로 계단을 내려가면 ‘오타와 폭포’라고 3줄기의 물이 떨어지는데, 각각 부귀, 명예, 건강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 청수사 물은 오른쪽 물을 먹으면 연인을 만나고, 가운데 물을 마시면 훌륭한 자식을 두게 되고, 왼쪽 물을 마시면 장수한다고 한다. 소원이 과연 이루어지는지 나도 물을 먹어보고 싶었는데, 학생  한 명이 배가 아프다고 하는 바람에 그 학생을 데리고 버스가 있는 데까지 내려와야 했다.

    청수사는 여러 번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대웅전을 포함해 163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재건되었는데 경내의 산주노토와 경당(經堂) 등은 국보로 지정되었다. 절벽에서 10여 미터 튀어나온 부타라 불리는 본당의 마루는 139개의 나무 기둥이 받치고 있고 여기서는 쿄토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데, 이 본당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학생들이 다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오는데 에어컨도 약하게 나오더니만, 급기야 버스가 제대로 가지 않아 중간에서 버스를 교체하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여행사의 빠른 조치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저녁에는 일본의 전통여관인 이시쵸라는 곳에 가서 짐을 풀었다. 하루종일 더위에 지쳐 있어서 우리는 쉴 수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일본의 '유카타'라는 간편복장으로 갈아입으라고 하여, 일본 문화 체험이고 일본을 경험하기 위하여 왔으며 또한 일부러 전통여관을 택했던 만큼 거부감 없이 갈아입었다. 한 번에 걸치고 허리띠만 매면 되니까, 일단 시간이 걸리지 않아 합리적이다. 그러나 자칫 허리띠를 제대로 묶지 않을 경우 실수하기 쉬워 조심스러운 옷이다. 유카타는 헤이안(平安)시대 귀족들이 목욕할 때 입던 마로 된 홑옷이 그 유래로, 강호(江戶)시대 이후 여름에 입는 평상복으로 이용되어 오다가 현재의 형태로 자리잡았다 한다. 지금은 목욕 후에 입는 가운이라는 느낌보다는 여름용 외출복으로 불꽃놀이나 기타 축제에서 많이 입는다고 한다.

    1층에서 전통요리로 저녁을 먹었는데 깔끔하고 맛도 괜찮았다. 우리 학교 외에도 서울 강남의 대왕중학교 학생들이 68명 정도가 와서 그 여관에서 묵고 있었다. 한국의 학생들이 여행을 오면 많이 들리는 일본의 전통여관인 것 같았다. 내부도 깨끗하고, 사람들은 친절하고 싹싹하다. 버스가 떠날 때는 종업원들이 여관 앞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 주는 친절도 베푼다. 

    저녁을 먹고 학생들의 잠자리 등을 점검하고 난 후에 우리는 다시 시내구경을 나갔다. 이번에는 가이드 두 사람도 함께 나가게 되었다. 그들이 추천하는 곳으로 갔는데 주로 젊은이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우리는  생맥주와 안주를 시켜먹었다.   

 

 

 

    다음날 오전에는 금각사에 갔다. 금박을 입혀 만든 금각사라는 절은 호수 가운데 있다. 건물은 금빛으로 빛나며 섬세하고 아름답다. 작은 호수 가운데 있어 사람들로부터 격리 효과와 보호 효과가 있다. 금각사는 3층 구조의 누각으로 1층은 해이안 시대의 귀족주의 건축 양식, 2층은 무사들의 취향 양식, 3층은 선실처럼 비어 있으며 꼭대기에 청동 봉황상이 세워져 있다.

    1397년부터 10년에 걸쳐 제3대 아시카가 요시미츠 쇼군이 세운 것으로 1950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였다. 1987년에 기부금으로 금박이 보수되어 옛날의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황금빛이 바래지 않고 누각이 새 것처럼 빛나는 것은 매년 쿄토 시민의 세금으로 금박을 덧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로카이 막부시대의 문화는 금각사로 대표되는 북산문화, 은각사로 대표되는 동산문화로 나뉘어지는데, 북산문화는 금각사에서 보듯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일본의 절에서는 어디를 가나 부적을 많이 팔고, 점괘가 나오는 기계들을 설치하여 학생들이 호기심으로 많이 뽑아본다. 그러나 점괘는 뽑을 때마다 다르게 나온다. 

  

 

    다음으로는 쿄토의 니조성을 보러 갔다. 쿄토의 니조성은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축성하여 3대 쇼군인 이에미츠가 완성한 성이라고 한다. 정사각형인 니조성은 사방 100미터 내외로 성밑과 궁전 사이에 해자를 만들어 외부에서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궁전내부의 마루바닥에 우구이수바리(꾀꼬리소리)라고 사람이 밟으면 새소리가 나게 만들었는데 자객이 침투했을 때의 안전장치라고 한다. 니노마루 고덴 앞의 가라문(唐門)에는 금박을 만든 장식이 호화롭다.

    고등학교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대하소설 ‘대망’속에 등장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생각났다. 고등학교 시절 아주 열심히 읽었지만, 지금은 거의 잊어서 내용도 잘 생각이 나지 않고, 다만 주인공 도쿠가와 이에야스만 생각날 뿐이다. 

 

    우리는 나라로 이동하였다. 쿄토 남쪽 42Km 일본 역사 초기의 신화와 전설의 무대인 나라는 우리나라 3국(고구려, 백제, 신라)과도 맥이 통하는 역사 유적의 고장이다. 서기 710년 겐묘 천황이 나라를 영구적인 수도로 확정지으면서 열린 아스카(飛鳥)시대는 고대 일본의 최고 번성기였다. 결국 75년이란 짧은 기간의 수도로 끝났지만 이후 나라는 문화재의 손실이 거의 없어 현재까지 일본의 옛문화가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법륭사라는 절에 갔다. 법륭사(法隆寺 - 호류지)는 서기 607년 성덕(聖德)태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호류지는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그린 <사불정토도>라는 금당벽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절이다. 금당벽화는 담징(579~631)이 일본 호류사에 그린 그림으로 동양 3대 미술품의 하나로 꼽혔었다. 1949년 해체 수리 도중 아래층에서 발생한 화재로 <사불정토도>의 일부가 훼손되는 불운을 겪고 지금은 모사품이 전시되어 있을 뿐인데, 이것조차 벽화를 보호한다는 이유에서 내부조명을 거의 하지 않아 제대로 볼 수 없다.

    1989년에는 같은 호류사 5층탑 벽화에 덧그림 밑에서 그가 그린 화려한 <관음보살상>이 1300년 만에 발견, 컴퓨터로 재생되어 그의 솜씨를 다시 확인해 주었다. 법륭사는 백제양식을 그대로 답습한 전체적인 사원 배치양식과 금당에 있는 약사여래좌상, 석가삼존상, 백제관음상의 모습에서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동대사(東大寺)라는 절에 갔다. 동대사는 호류지와 함께 나라의 양대 사찰로 알려져 있다. 동대사의 본전인 대불전(大佛殿)은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로 원래 8세기 중엽에 세워졌으나, 화재로 소실된 후 1709년 재건되었다. 대불전(大佛殿) 안에는 일본최대의 청동불상(大佛)이 있다. 이 불상의 높이는 약 15m 무게는 452톤으로 두 차례의 화재 후 8세기 초에 복구된 것이다. 

 

   사슴공원은 1880년에 세워진 공원으로 동서 4Km, 남북 2Km이며 사슴을 천 마리 이상 방목하고 있는데, 여기저기 사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학생들은 사슴을 불러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사슴의 머리를 껴안기도 하는데 워낙 사람들에게 길들여져서인지 사슴은 얌전히 있다. 동대사라는 절 입구에도 사슴들이 많이 있었고, 사람들이 비스켓 등을 주면 잘 받아먹는다. 우리는 사슴공원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아스카문화의 발생지이고 일본 최초의 사찰인 비조사(飛鳥寺)에 들렸다. 백제와 고구려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7세기 전반 대표적인 사원으로, 당시의 불교문화를 잘 보여준다. 비조사는 588년 백제로부터 절 짓는 장인과 기와 굽는 장인을 초청하고, 고구려로부터 금전적인 도움을 받아 건설되었다고 한다. 소가 우마고는 자신의 권세와 재력을 기울여서 이 공사를 추진하여 596년에 탑이 완공되었으며, 609년에 금동석가상이 안치되었으므로, 비조사는 20년 동안 걸려서 완성되었다. 건립 후 고구려승 혜자와 백제승 혜초가 주지를 맡았다.

    여기에 있는 본존불은 백제인 안작조(鞍作鳥)가 주조했다. 비조사의 가람배치는 탑을 중심으로 3개의 금당이 서 있었다. 금당 주변으로 회랑이 돌아가고, 남쪽에는 중문이 있어 1탑 3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었으나 1196년 화재로 가람의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본존불만이 현재까지 전해온다.

  


    저녁에는 레이크프레스트 호텔로 옮겼다. 이곳은 주로 골프장이 있는 곳이었고, 산속이라 조용하고 경치도 아주 좋았다. 우리는 뷔페식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코피를 계속 흘리는 바람에 조금 긴장을 했는데, 얼마 후에 코피는 멈추었다. 너무 피곤해서 그랬던 것 같다.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는 숙소에 들려 방을 배정받고 다시 식사를 하던 곳으로 나와 온천욕을 하였다. 물은 특별이 좋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매끄러웠고, 낮에 땀을 많이 흘린 후라 기분이 상쾌했다. 저녁에 학생들은 이번 여행에 대한 소감문을 썼다.

 

 

 

    돌아오는 날, 우리는 아베노방재센터에 들려 방재체험을 했다. 지진이 많은 일본에서 지진이 났을 때 대피하는 방법과 그리고 지진 났을 때 흔들리는 강도를 경험했다. 실감이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갑작스런 지진이 났을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하는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는 되었다. 다음 목적지인 오사카 성에 가기 위하여 아베노방재센터에서 걸어서 전철역까지 갔다.   

 

   일본 지하철을 경험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갔다. 우리나라와 별 차이는 없어 보였다. 일본인들이 지하철에서 책을 많이 읽는다고 했는데, 그렇게 많이 읽는 것 같지도 않았다. 몇 정류장을 거친 후 오사카성역에서 내렸다.

  

 

 

    전철역에서 약 10분 정도 걸었더니 성 입구가 나타나고 색무늬의 소 동상들을 세워놓았는데 인상적이었다. 오사카성 주변에 도착해서 성까지 걸어 올라가는데도 10분 이상이 걸렸다. 성 주변의 꽤 깊어 보이는 해자가 인상적이었고, 깊이 2미터가 넘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오사카성 전망대에 올랐더니 오사카 시내가 다 내려다 보였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3년간의 공사를 거쳐 완성한 오스카성은 오사카의 역사와 문화, 관광의 상징이며 1931년에 재건되어 1997년 봄 새롭게 정비한 일본식 성이다. 철근 건물로 높이는 46m이며, 5단까지는 엘리베이터가 운행되고 있다. 5층 8단의 덴슈카쿠(天守閣)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목상을 비롯해서, 무구, 의상, 병풍 등 귀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성인의 키를 넘는 거대한 바위로 성벽을 쌓은 점에서 그의 강력한 권력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히데요시 사후 17년 뒤인 1615년 오사카 성은 오사카 여름 전투로 인해 불타고, 1629년에 개축되나 36년 후 천둥번개로 덴슈카쿠(天守閣)가 불탄다. 현재의 모습은 1997년 개축공사에 의한 것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전철역 가까이로 내려오는데 바람이 불고 비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올라갈 때는 해가 쨍쨍하고 더워서 양산을 펴들기도 했는데,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로 변하였다. 섬나라의 특징인가 보다. 버스를 타고 출발하는데 비가 한 방울씩 내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퍼붓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선물을 사고 싶다고 하여 중간의 잡화점에 잠시 들렸는데 많은 소나기가 내렸다. 우리는 물건들을 사고 다시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간사이공항에 거의 도착하자 빗줄기는 가늘어졌는데, 그동안에 내린 비 때문에 비행기가 약 15분 정도 늦게 출발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공항면세점에서 몇 가지 선물들을 샀다.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하였고, 여행사의 버스를 통해 학교까지 와서 해산을 하였다. 그동안 학생들도 잘 적응해 주었고, 나도 비교적 적응을 잘한 편이지만, 이번 여행 동안 너무 더위에 지쳐  좀 더 많이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내가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일본과 내가 경험한 일본은 많이 달랐다. 예전에는 그들의 문화를 아기자기하고 왜소한 문화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가 둘러본 청수사, 금각사, 니조성, 법륭사 등은 일본에서도 유명한 사찰과 건물들이고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속하는 것들이라 더 웅장하긴 했겠지만, 예전에 내가 생각한 규모보다 컸다.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상냥하고 예의가 깍듯하면서도 그들의 실속을 철저히 챙기고 있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만 가지고 있을 뿐 그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한 적이 없다. 그들의 문화와 습성을 바로 알고 철저하게 대처하며, 그들보다 못한 면은 더 나아지도록 노력을 하여 그들보다 나은 국제적 위치에 서야 할 것이다.


   3박 4일의 여행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역시 여행이란 좋은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여행은 젊은 시절에 많이 해 둘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라도 많은 여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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