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기행문>
통일의 기적소리여!
-그리운 금강산을 가다
宇玄 김민정
1. 솔밭 사이로 바다는 출렁이고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문구처럼 갑자기, 그동안 가 보고 싶었는데 별로 기회가 닿지 않았던 금강산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다. 2005년 12월 28일 방학식이 끝나고 교직원 연수가 있던 날, 갑자기 교육청의 공문이 있었다. 국어과, 사회과, 도덕과의 모든 선생님께 한 사람씩 의사를 물은 결과 쉽게 우리학교 배당인 4명 선생님을 선정할 수 있었고, 그날 오후에 교육청에 보고가 이루어졌다.
2006년 1월 9일 월요일 아침 7시 30분에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앞에서 출발 예정이었다. 가까이 사는 김정해 선생님과 함께 가자고 약속을 하여 6시 40분에 만나기로 하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토요일 밤부터 치아가 아파오기 시작하여 일요일날은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식구들이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휴일이라 치과에는 갈 수가 없어서 약을 사다 먹고 비상약까지 준비를 하고 잤는데도 새벽 4시쯤에 이가 아파 잠깐 잠을 깨었다. 다시 눈을 붙인 사이 핸드폰 벨이 울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보니 6시 50분이다. ‘아차! 늦었다.’ 다행이 전날 짐을 다 챙겨놓은 상태라서 부랴부랴 세수만 하고 집을 나섰다. 큰길까지 나가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려 마음이 조급하기만 하였다. 더구나 함께 가기로 한 선생님 핸드폰이 고장난 상태여서, 변경된 약속장소까지 가느라 힘들었지만, 다행히 택시기사님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 주어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늦지 않고 7시 25분쯤 현대백화점에 도착하여 지정된 버스를 탔지만, 나 같은 사람들이 또 있어서인지 출발은 8시가 넘어서 하게 되었다.
날씨는 따뜻하여 겨울날씨 같지 않았다. 식구들이 춥지 않겠냐고 옷을 두껍게 준비하라고 하여 많이 준비하였는데, 기우였다. 우리나라 제일명산 금강산을 간다는 설렘에 기분은 들떠 있었다. 고성의 ‘금강산 휴게소’에 들려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금강산 휴게소’라 하여 북한에 있는 것인 줄 알았다며 마주보고 웃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관광증을 받고 주의사항 등을 들었다. 그때부터는 조금의 긴장과 함께 외국에 가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그곳을 출발하여 비무장지대를 지나면서 푸르게 펼쳐진 동해바다가 보였다. 여의도 면적의 117배에 해당된다는 비무장지대, 50년 이상 분단되어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우리의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비무장지대는 생태계의 보고(寶庫)라고 하여 다행이란 느낌도 들었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이 원해서 만든 곳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통일을 모색하고 화해를 하려고 노력하면서, 아직도 총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는 휴전상태인 긴장된 조국의 현실이 한없이 아려왔다.
평화통일이 되어 한반도가 하나의 국가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우리 세대는 바라지만,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나 필요성을 과연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갈수록 통일에 대한 염원은 희석될지도 모른다. 나뉘어 사는 것이 편하고 당연하다는 생각이 자리잡기 전에 우리민족의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그들, 그리고 전쟁의 고통이나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그들에게 통일의 필요성과 신념을 심어주기엔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푸른 바다와 하얀 백사장과 너울너울 춤추는 갈매기는 아주아주 평화로와 보였다.
우리나라 제일 명산 금강산 가는 길은
해안선 솔밭 사이로 푸른 바다 출렁이고
한겨울 나목 위로는 햇살이 참 따스했다
공존의 화해와 긴장 긴 도로를 달릴 때도
철책선 너머 이는 물결소린 평화롭고
갈매기 이착륙들은 보란 듯이 자유롭다
깊은 적막 끌어안고 쓸쓸하게 갈대 누운
저리도록 아름다운 또 하루의 석양 속에
여의도 백십칠 배의 비무장지대 아려온다
「솔밭 사이로 바다는 출렁이고 - 금강시편 1」 전문
날씨가 겨울날씨답지 않게 따뜻하여 이번 여행의 포근함과 행복감을 더해 주었다. 금강산 육로관광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우리는 분명 ‘행운아’들이었다. 그동안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던 금강산, 그곳에 대한 많은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인명사들이 금강산을 보고 감상을 읊었으리라. ‘이번에 금강산을 보면 나도 멋진,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시 한 편쯤 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아니 ‘꼭 쓸 거야’다짐하며 비무장지대의 남측한계선을 지나 북측도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남측출입국사무소부터 북측출입국사무소를 통과하는 사이 추운 겨울인데도 진지한 얼굴로 근무하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에서 든든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곧 이어지는 북측군인들의 왜소한 몸집, 우리와 다른 군복 색깔과 모양, 경직된 얼굴 표정…. 같은 말을 하는 우리의 동포임에도 낯설음이 느껴지는 건 분단된 56년의 세월 탓이리라.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안 된다는 안내양의 말에 눈으로 멀리의 금강산을 보기만 했다. 북한의 주민들이 지나다니는 모습과 집들을 볼 수 있었다. 같은 민족인데도 신비한 외국인을 보듯, 외계인을 보듯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분명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56년 분단의 세월 속에서 우리는 사는 방법도, 사고방식도 이질화되어 있다. 이 간격을 좁히는 일이 통일 전에 우리 교육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버스로 장전항까지 구경하고, 다시 온정리까지 돌아와 금강호텔에 짐을 풀었다. 워낙 인원이 많다보니 한 호텔에 묵을 수가 없어 세 곳으로 숙박 장소를 나눈 곳 중 하나였다. 우리가 묵은 금강호텔은 예전의 금강여관을 리모델링한 건물이었는데 겉도, 안도 아주 깔끔하였다. 이번 여행을 동부교육청에서 주관한 관계로 우리가 묵은 곳에 교육청 최고책임자이신 이기성 학무국장님과 정진석 장학사 등이 함께 묵었다.
식사는 현대에서 경영하는 온정각 동편과 서편이 있었고, 그 밖에 옥류관 (평양냉면 분점) 등이 있었다. 온정각 서편은 뷔페식이었는데 무공해 야채가 많아 인기가 있었다. 온정각 동편은 탕종류였다. 옥류관에서는 냉면류를 팔았는데 15불(만 오천 원)이었고, 그곳 벽면의 금강산화가 멋있었다. 꼭 실물처럼 느껴졌는데 북한의 유명한 여러 화가들이 금강산 사계를 함께 그렸다고 한다. 벽면전체를 화폭으로 생각하고 그린 그들의 큰 스케일이 마음에 들었다. 식당 및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북한 사람들이었다. 저녁을 먹기 전 온천탕을 다녀왔다. 시간이 많지 않아 잠깐 다녀왔지만 온천물은 깨끗하고 매끄러워 피부에는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조선 시대 세조는 피부병이 있어 이곳에 온천을 하러 자주 왔다고 한다.
통행금지 시간이 8시로 정해져서 다른 곳은 갈 수도 없었고, 갈 데도 없었다. 때문에 저녁 식사 후엔 금강호텔 내에서 하는 노래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1층 커피숍과, 2층 ‘포장마차’라는 곳에서 담소를 나누며 북한맥주인 봉학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팀 4명도 봉학맥주 2병을 마시고 2명씩 배정된 숙소로 올라왔다.
2. 구룡폭포
다음 날은 구룡폭포와 상팔담 등산이 있었다. 날씨는 따뜻하여 두껍게 입고간 옷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삼록수 약수터는 산삼과 녹용 섞인 물이 흘러내린다고 하여 삼록수 약수터라 한다. 오르면서 한 모금을 마시면 10년이 젊어지고 내려오면서 한 모금 마시면 10년이 더 젊어진다고 안내판에 쓰였지만, 겨울이라 꽁꽁 언 얼음이 있을 뿐이었다. 오호통재라! 20년 젊어질 기회를 놓치다니….
금강산의 5대 돌문 중 하나인 금강문을 지나게 되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문으로서 이 문을 통과하면 옥류동과 구룡연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옥처럼 고운 물이 흘러 옥류동 계곡이라 했던가. 맑은 물빛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겨울이라 얼음이 덮여있었다. 얼마나 물이 맑으면 얼음조차 옥빛일까 생각했다. 오르다가 목이 마르면 그냥 마셔도 된다고 하니 새삼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그리웠다. 얼음 밑에 흐르고 있을 물빛을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시조 한 편을 썼다.
맑은 하늘 우렸을까
푸른 산을 우렸을까
별빛도 눈부신 빛만
골라내어 우렸을까
헹궈갈
마음 한 장도
그 속에다 우려 본다.
「옥류동 물빛 속에 - 금강시편 2」 전문
마당바위 바로 앞이 금강산에서 가장 크고 맑다는 옥류담, 옥류담이란 이름은 그 색이 수정을 녹인 물처럼 맑고 푸르러 지상의 것이 아닌 듯 하고, 마치 구슬을 위에서부터 쏟아붓는 듯 흘러내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류담 가운데 무대바위라는 곳은 3~40명이 들어설 만큼 넓고 긴 바위인데 개울을 가로질러 누워있었다. 옥류담 위에는 온 계곡이 하나의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비스듬히 누워 쏟아지는 옥류폭포가 있다.
수정같이 맑아 깊은 바닥의 자갈까지 다 내려다보이는 이 못의 길이는 5~6m이고 넓이는 630m라고 하며, 숫돌처럼 잘 닦여진 너럭바위를 흰 비단 폭을 펼친 듯이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이 폭포의 높이는 58m라고 한다. 물과 돌이 맑고 희면서 그윽하기 이를 데 없는 옥류담과 옥류폭포는 옥류동을 대표하는 절경이라고 한다.
구슬 두 개를 꿰어놓은 듯하다는 연주담과 그 위에 쏟아져 내리는 연주폭포,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실수로 두 알의 구슬을 흘리고 갔다는 전설처럼 맑고 푸른 동그란 두 개의 못이 위 아래로 이어져 있는 곳이다. 연주담에서 50m정도 오르면 휴식장이 있다. 이곳에서 북한 안내원이 안내 설명을 해 준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금강산 4대 폭포 중 하나인 비봉폭포가 세존봉의 높은 중턱에서 층층으로 된 바위벽을 타고 쏟아진다. 층암절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마치 활짝 깃을 편 봉황새가 날아오르는 모양과 같다하여 비봉폭포라 불린다고 한다. 비봉폭포의 왼쪽으로 한참을 더 오르면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긴 쇠줄다리가 나오고,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긴 골짜기가 그 유명한 구룡동이다.
구룡폭포는 설악산의 대승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 가운데 하나이며, 금강산의 제일, 최대의 폭포라고 한다. 폭이 4m요, 길이가 82m나 되어 장마철 수량이 많을 때는 구룡각까지 물보라가 날려서 옷이 다 젖을 정도이고, 말도 주고받을 수 없을 만큼 소리가 요란하다고 한다. 폭포는 상하좌우 전체가 하나인 통 바위 위쪽에 말안장처럼 짤록한 목을 타고 넘으며 비단 폭을 드리운 듯 떨어지면서 중간의 바위벽에 부딛혀 싸락눈 같은 물방울을 공중으로 사방으로 흩뿌린다. 이렇게 떨어지는 폭포는 절구통같이 둥그렇게 패인 돌확으로 물방아를 찧듯이 들어갔다가 다시 솟구쳐 올라 기세 좋게 흐른다. 이 돌확이 ‘구룡연(?)’인데 몇 천만년이나 세찬 물줄기가 방아를 찧었는지 돌확의 깊이가 13m나 패였다고 한다.
1961년에 지었다는 구룡각은 폭포를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으로 관폭정이라고도 하는데 폭포 너머로 그 뒤쪽에 보이는 암벽이 미륵불이고, 폭포 양쪽의 암벽에도 자연적인 협시보살상이 있다고 하지만 잘 보아야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글자를 새겼는지, 해강 김규진이 썼다는 예서체의 미륵불 세 글자가 두드러지게 보인다. 세 글자의 길이가 19m나 되고, 글씨 폭이 3.6m, 마지막 佛자의 내리 그은 획의 길이만도 13m로서 구룡연의 깊이와 같다고 한다. 몇 억 년을 흘렀을까, 몇 만 년을 흘렀을까 알 수 없는 그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물이 흘렀을까. 조운의 구룡폭포라는 사설시조를 생각하며 구룡폭포라는 시조를 한 수 지었다.
이 협곡 흘러내린 몇 억 겁의 세월 동안
산을 업어 내렸을까 별을 업어 내렸을까
아득한 화엄 한 자락 그도 업어 내렸을까
크고 맑은 영혼 같은 높고 깊은 그 고요가
사리빛 물기둥으로 내 가슴에 서는 동안
눈과 귀 경계 너머론 산이 온통 흔들린다
금강 깊은 숨소리와 우주 넓은 속삭임과
달빛도 적막 한 짐 그 속에다 풀어 놓은
웅장한 산의 이야기 구룡폭이 들려 준다
「구룡폭포 - 금강시편 3」 전문
3. 상팔담
구룡폭포에서 내려오다가 왼쪽으로 다시 올라가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상팔담으로 가는 길이다. 구룡폭포까지는 가는 길이 평탄한 편이었으나, 상팔담을 오르는 길은 조금은 가파른 등산길이라 14개의 안전사다리로 이어진 500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구룡폭포 위 여덟 개의 아름다운 담을 팔담이라 하여 ‘상팔담’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제일 높은 전망대인 비룡대에서는 구룡폭포의 상류 상팔담 계곡의 전모가 보인다. 그리고 멀리 비로봉, 세존봉, 옥녀봉, 관음연봉 등을 모두 볼 수 있다. 비룡대에서 상팔담을 바라보며 그 옛날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사슴이 나뭇꾼에게 아이 셋을 나을 때까지 선녀옷을 돌려주지 말라고 했던 이유와 그리고 아이 둘을 안고 하늘나라로 돌아간 선녀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선녀와 나무꾼이 눈부시게 펼쳐놓은
그 사랑 남은 행간 고요 가득 출렁이며
이제 막 산새 한 쌍이 깃을 털고 있구나
천 년을 곰삭여도 사랑이란 늘 아픈 것
이 적막에 달이 뜨면 선녀는 다시 올까
개골산 긴 기다림에 수척하여 앉았는가
사랑이란 등불 하나 하늘 끝에 달아놓고
빛나는 별빛 모아 켜켜 쌓인 정을 모아
사랑빛 찾아서 가리 그대에게 이르리
「상팔담 연가 - 금강시편 4」 전문
그날은 오전 등산 후에 점심을 먹고 그 다음에는 금강산 연수 교육이 있었다. 우리에게 왜 통일이 필요한지, 그리고 우리 주변 국가들의 이해가 얽혀 있는 여러 가지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히 들었다. 더 이상 이질화되기 전에 우리는 통일하여 한 민족으로 살아갈 필요가 느껴졌다. 우리 주변의 어느 강대국이 우리가 통일하여 강한 국가가 되는 것을 바라겠는가?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뭉쳐야 할 우리 민족이 아니던가?
그 후의 자유 시간에는 온천을 해도 좋다고 하여 우리는 온천탕에 들어가 쉬었다. 그 후의 자유시간에는 온천을 해도 좋다고 하여 우리는 온천탕에 들어가 쉬었다. 조선의 세조도 피부병을 낫게 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와 온천을 자주 하고 갔다고 하니, 이 온천물이 좋다는 것은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상태이다.
오후 4시에는 모란봉예술단의 서커스공연이 있었다. 그들은 세계급 서커스단으로, 직접 묘기를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을 것 같아 참석을 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온천탕을 더 즐기고 싶다고 하여 우리 4명 중에서 나 혼자 참석하기로 하다. 그리고 관람 후에는 참석하기를 너무 잘 했다고 생각했다. 다른 선생님들도 같이 오자고 강력하게 권유할 것을!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연기였다! 그들이 보여주는 묘기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것이었다. 한 치의 오차만 있어도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곡예(曲藝), 과연 일품이었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못 보여줄 것 같은 그들의 연기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며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들은 1급 연기자는 장관급의 대우, 2급 연기자는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저녁식사 후, 우리 4명은 금강산호텔 11층에 있는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가 보았다. 그곳에서 맥주와 마른안주를 시켜 먹고 있는데 이번 여행의 최고책임자 이기성 학무국장님과 정진석 장학사님 등이 다른 학교 교감선생님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불렀다. 평소에 잘 아는 분들이라 가서 잠깐 합석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북한 아가씨들을 불러 대화도 나누었는데 그곳의 아가씨들은 하나같이 미인이었다. 되바라지지 않은 순수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그곳의 아가씨들은 북한에서도 교양 있고, 좋은 집안의 아가씨들로 예쁜 아가씨들만 뽑혀온 것 같았다. 8시가 통행금지 시간이라 호텔 밖을 나갈 수가 없었는데 다행히 호텔 안에서나마 즐겁게 담소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다행이었다. 우리는 12시가 넘어서 각자의 숙소로 돌아왔다.
4. 만물상
다음날은 만물상 등산팀과 해금강 관광팀으로 나누어졌다. 만물상과 해금강 중 택일 하라는 것이었다. 두 군데 다 보고 싶었지만, 몸이 하나라 한 군데 밖에 볼 수가 없었다. 그곳 ‘현대직원’에게 “어느 쪽을 보는 것이 좋으냐?”고 물었더니 “금강산을 보러 오셨으니 당연히 만물상을 보셔야죠?”라는 우문현답이었다. 날씨가 전날보다 더 맑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해서 등산을 하기에는 아주 좋은 날이라서 마음도 쾌청이었다.
현대미로 쭉쭉뻗은 미인송숲 한참 지나
일흔일곱 굽이돌며 만물상에 가는 길은
에돌며 굽돌아가는 너와 나의 인생 같다
바람 한점 구름 한점 티끌 한점 없는 날에
따사로운 겨울햇살 온 산 가득 풀어 놓고
그 절경 다 보란 듯이 눈앞에다 펼친 금강
천지간의 기암괴석 잘 생기고 빼어나고
만물상 둘러보다 그 사이에 나도 끼어
오늘은 나도 봉우리 하,하,하,하 달뜬다
「만물상을 오르며 - 금강시편 5」 전문
만물상에 가는 길에는 삼선암도 있었다. 만물상 끝까지 가기 힘든 사람은 삼선암만 보고 가도 금강산의 70%는 본 것이라는 안내양의 설명이 있었지만 그것은 등산을 힘들어 하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위로의 말일뿐, 사실은 30%도 볼 수가 없다.
펼쳐 놓은 산천이야
접을 수가 없다지만
펼쳐 놓은 마음 또한
접을 수가 없다면은
매력도
아주 큰 매력
숨긴 것이 틀림없어
「천선대 - 금강시편 6」전문
만물상 가기 전에 천선대라는 곳에서 바라보는 금강산 능선은 웅장했다. 하늘의 신선들이 놀던 바위라고 해서 천선대라고 한다든가….
5. 망양대
가지가지 모습의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만물상이다. 동해바다가 아스라히 내려다보이는 산능선에 오르니 그곳의 정상은 바다를 바라보는 곳, 망양대였다. 멀리로는 동해바다가 아스라이 내려다 보여 산과 바다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라 천하절경임에 틀림없었다. 쾌청한 날씨 속에 멀리까지 잘 보였으므로 금강산 기암괴석 바위들과 능선들의 아름다움, 바다의 모습까지 잘 볼 수 있어 마음도 쾌청이었다. 어서 빨리 통일이 와서 이 아름다움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만물상에 가기 전에 천선대라는 곳에서 바라보는 금강산 능선은 웅장했다. 하늘의 신선들이 놀던 바위라고 해서 천선대라고 한다든가… 다시 동해바다가 아스라히 내려다 보이는 만물상에 오르니 그곳의 정상은 망양대였다. 바다를 바라보는 곳이라고 하여 망양대라고 한다.
내 속에 숨겨 놓은 피리 하나 있다면
이쯤에 꺼내어서 신명나게 불어 가며
넉넉한 그대 품 기대 그렇게 살고 싶네
천하명산 만들어낸 그 옛날 신선님은
여기 기암 괴어놓고 저기 괴석 얹어놓아
만 이천 봉우리마다 일품 아닌 것이 없네
천하절경 기기묘묘 바위 둘러 앉히고도
멀리로는 푸른 바다 아스라이 펼치고 선
금강산 드러난 산세 트이고도 웅숭 깊네
산만 봐도 웅장하여 마음 가득 황홀한데
푸른 동해 넘실대니 마음조차 출렁이어
금강산 빼어난 줄을 여기 와서 알겠네
「망양대에 기대어 - 금강시편 7」 전문
만물상을 내려와 다시 온정각에 들려 점심을 먹고 기념품 가게에 들려 몇 개의 기념품을 샀다. 그곳은 현대아산에서 경영하는 곳이었는데, 열쇠고리, 손수건, 필통, 엽서 등 몇 개를 고른 후에 우리는 금강산을 뒤로하고 귀로에 올랐다. 치아가 아파 6시간마다 약을 먹으며 다닌 산행과 관광이었다. 2006년 1월 9일부터 1월 11일까지 2박 3일 동안 가는 데 하루, 오는 데 반나절 그래서 실질적인 관광은 하루 반 밖에 안 되었지만 그래도 교육부, 교육청의 배려와 날씨의 일조로 즐거운 여행이었으며 많이 보고 많이 느낀 여행이었다.
하루 빨리 평화통일이 되어 자유롭게,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며 금강산 구석구석을 구경할 날을 기대해 본다. 통일의 기적소리가 좀 더 가까이 들려오기를, 경의선이 복구되어 서울에서 의주까지 기차로 왕래하고 멀리 유라시아까지 기차로 여행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성산에서 문산까지 사십점 육 킬로미터
단선디젤 구간에서 복선전철 구간으로
고결한 숨결이 되어 신선하게 태어난다
유라시아 대륙으로 대동맥을 펼쳐 나갈
통일의 꿈 피어나는 가야할 길 시작이다
이제 막 심장으로부터 더운 피를 뿜는다
정점 향해 달려가는 순수의 네 행보는
아스라한 철로 위에 섬광처럼 반짝이고
너와 나, 함께할 내일 눈부시게 푸르다
칼날처럼 변화하는 디지털의 세상에서
판문점, 임진각아 너희들도 변해 보렴
경의선 기적소리여, 관통하라, 남과 북!
「경의선 기적소리여 - 경의선전철개통 축시」전문
출처: 노컷뉴스
La Reine De Saba (시바의 여왕)/Paul Mauriat(폴 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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