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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화원과 서태후 - 내가 본 비단길 9

by 시조시인 김민정 2009. 8. 3.

14. 이화원과 서태후

 

    다음으로 우리는 이화원을 구경하러 갔다. 이화원은 서태후의 여름별장이었다. 인공호수를 파고 그 흙으로 산을 만들어 만수산으로 이름 붙였다. 그리고 서태후의 칠순잔치를 그 호수위에서 했다고 한다. 많은 중국인들이 기아로 허덕일 때도 서태후는 청의원을 화려하게 재단장한 이화원에서 호위호식하며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해군의 군비를 떼내어 이화원을 확장하였으며, 수많은 국고를 사치로 낭비하였다. 이러한 국고낭비는 청일전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청일전쟁시 청나라의 해군은 일본에게 대패할 수 밖에 없었다. 해군 증강에 쓸 막대한 자금을 서태후가 이화원 개축에 대부분에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별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청나라의 멸망이 30년 앞당겨졌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후세들이 이 별장을 관광지로 만들어서 소득을 올리고 있으니... 이화원의 긴 회랑을 걸으면서 새삼 역사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이화원의 넓은 호수에서는 보트를 타도록 되어 있는데 보트는 타지 않고, 이화원 누각에 올라 안개가 짙게 낀 호수를 내려다보며 서태후의 화려한 생애와 그녀의 막강했던 권력과 현재의 중국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안개 낀 중국 이화원 호수

 

    서태후, 그녀는 중국의 황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중국 근대사 시기의 그 어느 황제보다도 권력이 막강하였고, 거의 50년 동안 실권을 잡고 중국을 좌지우지한 실제적인 최고 권력자였다. 서태후는 1908년 10월 23일 74세를 일기로 이질에 걸려 사망하기까지 50여 년의 섭정을 하며, 4대 황제를 거쳐 간 중국근대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중국 근대사의 큰 사건인 변법운동, 양무운동, 의화단 운동 그 어디에서든 서태후가 중심이거나 배후 인물로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서태후는 함풍제, 동치제, 광서제, 마지막 황제인 부의까지 모두 4명의 황제를 거친 여인이다.

    서태후의 정식 칭호는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이다. 자희황태후에서 자희의 뜻은 “사랑스럽고 복스럽다”, “사랑스럽고 곱다” 또는 “복스러운 어머니”이란 뜻으로 풀어볼 수 있는데, 사실 서태후의 일생은 사랑스럽고 복스럽다기보다는 잔혹하고, 사치스러우며, 권력에 빠져 자상스런 어머니의 모습보다는 권력자의 모습을 더 많이 보이고 있다. 그녀는 함풍제 때부터 총애를 받으며, 1856년 함풍제의 하나뿐인 아들인 재순(載淳)을 낳았다. 당시 황후는 딸 하나만을 낳고, 아들을 하나 낳기는 하였으나, 이름도 짓기 전에 죽어버렸기 때문에 황제의 아들을 낳은 서태후는 권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함풍제 사후 6살 난 그녀의 아들, 동치제가 즉위 후 수렴첨정을 하였다. 당시 실권은 선제의 신임을 받으며 내각을 구성하던 숙순 일당이 쥐고 있었다. 서태후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후에 부각된 이흥장, 중국번 등을 요직에 임명하여 정치를 안정시켜 나갔다. 그런데 이때 등용한 이홍장, 중국번은 후대에 가서 중국 근대사에 안 좋은 쪽으로 크게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어린 광서제가 즉위 후 서태후는 쉽게 정권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움직였다. 양무운동에서 해군의 군비를 떼내어 이화원을 확장하였으며, 수많은 국고를 사치로 낭비하였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건립한 나라였고, 만주족은 8기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상3기, 하5기로 나누는데 서태후의 가정은 상3기에 속했다. 서태후는 만주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전란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황궁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고대하였다. 17살에 황궁에 들어간 서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일 년 동안 노력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황제의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산보를 하던 황제가 은은한 노래소리를 따라 찾아가보니 웬 이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사색에 잠겨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부터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황궁에 궁녀, 황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황제의 눈에 들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왕자를 출산했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황태후로 된 후부터 매일 경극을 보았고 중국의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역사에 의하면 함풍황제 생전에 서태후는 그렇게 총애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태후가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서태후가 함풍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주었기 때문이다. 서태후는 제7대 함풍황제의 황귀비가 되었고 제8대 동치황제의 생모로 되었고 제9대 광서황제의 이모로 되었던 것이다. 제7대 함풍황제는 아들이 하나 밖에 없었는데 바로 서태후가 낳은 아들이다. 함풍황제가 죽은 후 서태후가 낳은 6살 난 아들이 황제로 되면서 서태후는 황비에서 황태후로 되었다. 이후 48년 동안 중국을 통치한다.

    1860년 영국군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함풍황제는 열하로 도망가 병들어 죽고 말았다. 서태후의 이름은 나라씨였는데 황제의 황후가 동쪽 채에 살았기에 동태후, 황비로 있던 나라씨가 서쪽 채에 살았기에 서태후라고 부르게 되었다. 동태후가 제1태후 서태후가 제2태후였다. 동태후는 동치황제의 양모였고 서태후는 동치황제의 생모였다. 즉위한 동치황제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기에 두 태후가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두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서태후는 야심가였으며 정치에 흥취를 가졌고 동태후는 정치에 흥미가 없고 인자하며 사리에 밝았다. 동태후 때문에 서태후는 대신들한테도 환심을 살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때부터 서태후는 동태후를 미워하게 되고, 6살에 즉위한 동치황제가 17살이 되자 결혼하고 두 태후의 수렴청정을 끝내기로 결정했지만, 동치황제 자신도 생모인 서태후의 성격을 닮아서인지 폭주가이고 성격도 날카로왔다. 그 후 생모인 서태후는 항상 정치만 관심하고 무슨 일이나 보고 받기를 원했고 아들의 주관대로 결정을 못하게 하다보니 충돌이 많았고 동태후는 조용했다. 그러니 동치황제는 차츰 생모인 서태후를 멀리하고 동태후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후를 택할 때도 동치황제는 양모인 동태후가 좋아하는 여인을 황후로 맞았고, 이런 일들로 서태후는 동태후 때문에 자기와 친아들사이의 관계도 벌어진다고 동태후를 눈에 든 가시처럼 생각했다.

 

 

중국 이화원 호수 

 

    결국 동태후는 서태후에 의해 살해된다. 어느 해 추석날 동태후, 서태후는 궁중에 사람들을 거느리고 함풍황제의 릉에 제사 지내러 갔다. 제사 지낼 때 동태후는 서태후더러 한 발자욱 뒤에 서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함풍황제 생전에 동태후는 중궁태후(제1황후)고 서태후는 황비였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한 서태후는 동태후를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황궁에 돌아온 서태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반면에 한 가지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함풍황제가 죽기 전에 동태후한테 준 밀서였다. 서태후의 됨됨이를 알고 있는 함풍황제는 서태후가 자기아들이 황제로 되었다 하여 동태후를 무시하면 이 밀서의 내용대로 서태후를 죽여 버리라는 것이었다.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마침 동태후가 감기로 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서태후는 한 가지 꾀가 생각났다. 동태후의 병이 나은 후 서태후는 동태후를 보러갔다. 동태후는 서태후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서태후는 나오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언니가 몸져눕자 너무 안타까워 점을 쳤더니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중약에 사람 피를 타서 먹으면 곧 나아질 거라고 해서 내피를 중약에 넣어 언니한테 대접했더니 과연 언니의 병이 나아졌다고 했다. 원래부터 마음이 약한 동태후는 이 말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동생이 이토록 나를 생각하는데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하면서 함풍황제가 준 밀서를 꺼내어 불에 태워 버렸다.

 

  그 후부터 서태후의 태도는 180도로 달라졌는데 동태후는 후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한번은 서태후가 몸져누웠다. 동태후는 서태후를 보러 몇 번 다녀왔는데 서태후의 태도는 웬 일인지 친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몸져누운 서태후가 동태후한데 전병을 보내왔는데 동태후는 그 전병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던 것이다. 동태후가 죽었다는 소식이 궁중에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소식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의심하였다. 동태후는 며칠 앓지도 않고 죽었기 때문이다.

    서태후는 그의 아들 동치황제가 황후를 택할 때 자기 의도대로 하지 않았다하여 황제와 황후의 접촉을 자주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동치황제의 황후를 핍박했다. 이에 너무나도 실망한 동치황제는 타락하기 시작했는데 밤이면 변복을 하고 몰래 기생집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얼마 후 병(天花)들어 죽고 말았다. 아들이 죽자 서태후는 자기가 계속 수렴청정하기 위하여 남편을 핍박해 죽였다는 죄명으로 동치황제의 황후를 죽인다. 그리고 또 3살 밖에 안 되는 광서황제를 자리에 올려놓고 수렴청정을 계속 한다(광서황제는 서태후의 여동생과 서태후의 시동생이 낳은 아들이다). 후에 광서황제가 19살이 되자 서태후와 정치상 충돌이 있었고 서태후는 보수파의 대표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광서황제는 유심파인 강유희, 양계초, 담사동 등 사람들의 지지하에 유심파에 의해 군정 실권을 잡으려 하였고 개혁을 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1898년에 "유심변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무술변법이라고 하였다. 허나 103일 만에 변법은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담사동 등 개혁파는 살해되었고 강유희, 양계초 등은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광서황제는 요즘의 가택연금으로 생활했다. 광서황제가 갇혀 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 광서황제는 10년간 갇혀 있었으며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에 서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

 

 

 

중국 이화원

 

    서태후는 극히 부와 타락한 생활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한 식탁은 먹는 것이고 한 테이블은 상상만 하는 것이었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짝은 빵)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그 당시 이 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 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 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는 사치꾼이었고, 또한 아주 거짓투성이었는데 자기의 존엄을 위하여 줄곧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서태후의 말에 의하면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녀,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했는데 광서황제의 아버지는 광서황제를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난다고 했다. (정상적 사람이 하루에 머리카락 50개 빠지는 건 정상) 그래서 이련영이라는 내시는 머리를 빗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태후는 아주 잔혹했는데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 한다. 서태후 자신은 매일 저녁 애기 엄마의 젖을 먹는데 매일 저녁 두 애기 엄마는 목욕을 한 후 몸에 붉은 천을 감는데 젖만 내놓고 다 감싸고 서태후가 침대에 눕고 젖먹이는 애기엄마는 무릎을 꿇고 젖을 먹도록 했다.

 

 

    이렇게 권력을 휘둘렀던 서태후의 생애에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의 중간문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서태후가 비록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했지만 황제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오문의 중간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으며 황제의 결혼식 날 황후의 가마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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