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낙양의 용문석굴과 백낙천
宇玄 김민정
중국의 3대 석굴중의 하나인 용강의 용문석굴
2005년 8월 8일. 아침 청진사라는 회교 사원을 구경하다. 무척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사원이었다. 주로 위그르족들이 다니는 곳이다. 이날은 낙양에 갈 예정으로 기차표를 구입하려 했으나 기차표 구입에 실패하고 버스로 낙양까지 가기로 하다. 오후 3시가 되어 서안역을 벗어나기 시작하여 다음 날 새벽 3시쯤 낙양에 도착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며 자주 눈을 감고 있었는데, 옆의 남편은 자꾸 깨운다. 다시 보기 힘든 풍경인데 왜 잠만 자냐고…. 다시 못 본다고 해도 그렇게 아쉬울 풍경 같지는 않았다. 군배대루라는 여관에서 묵다.
2005년 8월 9일. 아침식사 후 호텔에 짐을 맡기고 기차표를 구입하러 낙양역에 가다. 오후 8시 12분행 기차는 일반차표만 구할 수 있었다. 북경까지는 14시간 30분이 걸린다. 가격은 기차삯 32원과 대합실사용료 2원과 합쳐서 1인당 34원이라 싼 편이지만, 침대표를 사려던 우리는 돈을 버리는 셈치고 기차표를 일단 끊었다. 그리고 유명하다는 용문석굴을 찾아가다.
낙양의 용문석굴은 돈황의 막고굴, 대동의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이다. 용문 석굴 중 가장 큰 것은 봉선사동의 좌불상으로 당대에 만들어졌으며 17미터나 된다. 용문 석굴은 이하강의 양쪽 기슭과 운문산(서산)과 향산(동산)에 1,352개의 석굴이 있으며, 이 안에 크고 작은 약 10만 개의 불상이 있다고 하며 494년 북위의 도읍이 대동에서 낙양으로 옮겨졌을 때 운강석굴의 뒤를 이어 이 석굴의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약 40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한다.
용문석굴만 보고 오려다가 아쉬움이 남아 백거이(백낙천)의 묘를 찾았다. 백낙천의 묘는 백원(白園)이라는 정원 안에 있다. 백낙천은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고, 앞에서 양귀비와 당현종을 노래한 '장한가'에서도 보듯이 그의 작품들은 유명하다. 말 삼륜차를 타고 찾았더니 내국인은 3원, 외국인은 10원을 받는다. 입장료는 1원이이었는데, 10원을 냈더니 1원짜리로 달라고 하여 우린 한국말을 했고 눈치를 챈 아가씨가 1인당 10원이라고 한다. 물론 외국인에게 받는 요금이다. 우린 억울했지만 내는 수밖에. 백거이의 묘에 들어가니 비로소 매미소리가 들리고 지금까지의 삭막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백거이를 기리는 시도 많이 쓰고 비도 많이 세워 그들이 다녀간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 구석구석에도 어디에나 손을 뻗치고 있었다.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려는 듯. 백거이(772-846)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는데, 고등학교 때 교지에서 교장선생님이 소개해 주신 후에 나는 이 시를 참 좋아했다.
巧拙賢愚相是非(교졸현우상시비): 잘났다 못났다 영악하다 어리석다 서로 시비를 가리지만
何如一醉盡忘機(하여일취진망기): 흠뻑 취하여 속세의 간계 잊음이 어떠하리
君知天地中寬笮(군지천지중관책): 그대 아는가? 천지는 끝없이 넓으면서도 좁아
鵰鶚鸞皇各自飛(조악난황각자비): 사나운 보라매와 상스러운 봉황이 저마다 날 수 있다네.
백거이(白居易)는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시호는 문(文). 하남성[河南省] 신정현[新鄭縣] 사람이다. 중당시대에는 과거제도가 효과를 거두어 그 시험에 통과한 진사 출신의 신관료집단이 진출하여 구문벌을 압도했는데, 백거이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학사(翰林學士)·좌습유(左拾遺) 등의 좋은 직위에 발탁되었다. 신악부(新樂府)·진중음(秦中吟) 같은 풍유시와 한림제고(翰林制誥)처럼 이상에 불타 정열을 쏟은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때이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811년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814년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나,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라는 한직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무원형(武元衡) 암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하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은 백거이가 관계에 입문한 이래 처음 겪은 좌절이었으며, 또한 그의 시심(詩心)을 '한적'·'감상'(感傷)으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820년 헌종(憲宗)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백거이는 낭중(郎中)이 되어 중앙으로 복귀했고,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직책에 올라 조칙(詔勅)제작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같은 천자의 배려에 감격하여 국가의 이념을 천명하는 데 진력했다. 낙양(洛陽)으로 돌아온 뒤에는 비서감·형부시랑·하남윤 등의 고위직과 태자빈객분사·태자소부분사와 같은 경로직(敬老職)을 거쳤으며, 842년 형부상서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한림학사 시절의 동료 5명은 모두 재상이 되었으나 백거이는 스스로 '어옹'(漁翁)이라 칭하며 만족해 했다. 이같은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인해 그는 정계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백거이는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고체시(古體詩)·금체시(今體詩:율시)·악부(樂府)·가행(歌行)·부(賦)의 시가에서부터, 지명(誌銘)·제문(祭文)·찬(贊)·기(記)·게(偈)·서(序)·제고(制誥)·조칙·주장(奏狀)·책(策)·판(判)·서간(書簡)의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했다. 또한 그는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들과 서로 주고 받은 시문에는 친애의 정이 물씬 배어 있다. 특히 원진(元稹) 및 유우석(劉禹錫)과의 사이에 오간 글을 모은 〈원백창화집 元白唱和集〉과 〈유백창화집 劉白唱和集〉은 중당시대의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우정의 결실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에는 정치이념을 주장한 것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는데, 모두 평담한 언어로 알기 쉽게 표현되었으며, 시에 봉급의 액수까지 언급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때문에 평이하고 속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비상한 노력과 식견에 의해서 달성된 것이었다. 그는 1편의 시가 완성될 때마다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퇴고를 열심히 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문에 일상어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한 것도 그의 표현을 간명하게 한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가 일상어를 사용한 것은 구어문학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언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구어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활용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또한 그는 어휘를 매우 신중하게 선택했다. 고금문학(古今文學)에 나타난 어휘를 천지(天地)·산천(山川)·인사(人事)·조수(鳥獸)·초목에 이르기까지 1,870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백씨육첩(白氏六帖) 30권을 펴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어휘를 선택하고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백(李白)·두보(杜甫)·한유(韓愈) 등 백거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의 작품에는 송대 이래 많은 주석서가 있는 데 반해, 백씨문집(白氏文集)에는 그러한 주석서가 없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종래의 주석서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의 작품에는 이러한 주석서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백거이는 문학을 2가지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는 초기에 왕자(王者)의 정치이념은 문학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위정자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이상에 불타던 젊은시절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신악부서(新樂府序)에서 "글은 임금·신하·백성·만물을 위해 짓는 것이지 글을 위해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본래 천하의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작품은 백성의 뜻을 군주에게 전달함과 동시에 정치의 옳고 그름을 풍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경(詩經)이야말로 이같은 문학의 본질을 잘 나타낸 작품이며, 후세 특히 육조 이후의 문학은 기교만을 중시한 나머지 본래의 이념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809년에 완성된 통렬한 풍유시 〈신악부〉50편을 비롯하여 〈백씨문집〉에 수록된 100분야에 대한 '판'(判)과 75편의 '책'(策), 200편의 〈한림제고〉, 233편의 중서제고(中書制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백거이가 지은 '조'(詔)·'칙'(勅)·'제'(制)·'고'(誥) 등은 한림학사들에게 육전(六典)보다도 더 존중받았다. <육전>은 칙명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당대 관계에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글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천자 대신 천자의 세계관과 이념을 그에 걸맞는 전아(典雅)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고, 조·칙·제·고 등은 그 주요한 서술형식이었다. 칙명을 받아 그러한 글을 짓기 위해서는 정확한 식견과 웅장한 필치를 지녀야만 했다. 뛰어난 작가는 '대수필'(大手筆)이라 하여 커다란 영예를 부여받았는데, 백거이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815년 강주사마로의 좌천과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 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인생의 문학을 추구하게 되었다. 장경(長慶) 4년(824) 목종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 원진에 의해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50권이 편찬되었다. 당시 백거이의 나이는 53세였으며 '장경'은 목종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이 바뀐 연호였다. 따라서 〈백씨장경집〉은 죽은 천자의 후한 대접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835년 백거이는 60권본의 <백씨문집〉을 강주 동림사(東林寺)에 봉납했고, 이듬해 65권본을 낙양의 성선사(聖善寺)에, 3년 후 67권본을 쑤저우의 남선사(南禪寺)에 봉납했다. 842년 이전의 50권 이외에 '후집'(後集) 20권을 정리하고 이어서 845년 5권의 '속후집'(續後集)을 편찬함으로써 합계 75권의 '대집'(大集)을 완성했다.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밤 8시 12분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향했다. 개찰하기 전 기다리는 대합실에 들어가려면 2원짜리 티켓이 필요하다. 대합실은 에어컨도 나오고 의자도 있어 조금 편하긴 하다. 차번호가 나오고 개찰이 시작됨을 알려주어 우리도 줄을 서고 나갔다. 다행히 출발지역이라 좌석이 있었지만, 밤에 잠이 문제라 침대차를 알아보려 다녔지만 허사였다. 남편이 침대차를 알아보려고 승무원을 만나러 간 사이, 첫 번째 역에서 술이 조금 취하고 짐을 잔뜩 가진 남자가 타더니 내 옆자리가 비었음에 눈독을 들이고 자꾸 자리 있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중국어로 “요(있어요)”라고 대답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조금 가다가 또 묻는다. 나는 한국어로 “사람 있어요. 금방 올 거예요?”하며 약간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용문석굴의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30~40분이 지나도 남편은 오지 않고, 나는 그 사람에게 미안했다. 다시 뭐라고 말을 걸었다. 사람이 올 때까지만 앉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자리를 치워주며 앉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1시간이 지나도 남편은 나타나지 않았고, 이 남자는 자기가 가져온 수박을 자르더니 권한다. 중국 사람들도 처음엔 다 사양하기에 나도 사양하다가 받아먹었다. 한쪽을 먹었더니 또 권하여 세 쪽까지 받아먹다. 수박을 다 먹고도 한참 후에야 남편이 나타났고, 차장을 만났으나 모르겠다고 한단다. 다시 만나 봐야겠다고 갔고, 나는 심심하여 창밖을 내다보는데 앞에 앉은 사람이 말을 시키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워 한꼬런”이라고 했더니 나의 중국어 발음이 나빠서인지 못 알아듣는다. 나는 동구여상에서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배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중국어시간만 되면 졸려서 조느라고 제대로 기억나는 것들이 별로 없다. 만년필도 안 나와 나는 눈썹 그리는 펜슬로, “我 韓國人” 이라고 썼더니, 주변 사람들이 “你 韓國人?”이라며 다들 호기심을 갖는다. 나는 또 “我 韓國語 先生, 中學校.”라고 썼더니, 그러냐의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의사소통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이 나타났고, 승무원이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침대칸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앉아 가기로 하고 앞사람과 맥주나 마시자고 했다. 기차는 마침 정주라는 역에 도착했고 맥주를 물으니 1병에 2.5원. 10원에 4병이었다. 중국인들은 컵 없이 주로 병째로 들고 마신다. 그래서 처음에 잔으로 권하며 마시려고 3병을 샀다가 다시 1병을 더 시켰고 4명이서 1병씩 마셨다. 그랬더니 그들은 땅콩도 사고, 해바라기 씨 같은 것도 사서 권했다. 염치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말이 안 통하는 중국어를 한자를 섞어 써가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가난한 서민들이었지만 표정은 밝았고, 우리에게 많은 호기심을 가졌다.
나는 중국 여행중 세 번이나 기차를 탔는데, 처음에는 우루무치에서 돈황을 가기 위해 유원까지 16시간, 그리고 다음에서 유원에서 서안까지 42시간, 그리고 낙양에서 북경까지 14시간 30분이다. 72시간 30분을 기차안에서 보낸 셈이다. 덕분에 중국인들의 생활을 기차안에서 많이 관찰할 수 있었다. 그들은 늘 느긋한 표정이다. 우리나라처럼 '빨리빨리'라는 서두름이나 조바심이 별로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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