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진시황의 병마용 - 내가 본 비단길 5

by 시조시인 김민정 2009. 8. 3.

10. 진시황릉의 병마용

 

                                                                         宇玄  김민정

 

 

 

진시황릉의 병마용

   

 

    1995년 8월 7일, 서안의 아침이 밝았다. 이 날은 아침도 굶은 채 관광을 시작했다. 역전에 나가 식사를 할 예정이었지만,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달려드는 관광버스(투어) 소개인들 때문에 아침 먹을 시간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진시황릉의 병마용, 진시황의 아방궁터, 양귀비의 화청지 등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진시황릉을 보기 위해 서안으로 가는데 길 옆에는 빨갛게 익어가는 석류가 많이 있었다. 석류는 이곳 서안을 상징하는 과일이기도 하다. 석류를 몇 개 사려다가 비싼 것 같아 사지 않았다.

    지금의 서안은 당대의 장안으로 100만이 거주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장안은 페르시아 상인의 활동무대이기도 했으며 실크로드의 종착역이기도 했다. 당대에는 페르시아의 종교와 음악, 무용이 유행하고 환락가에서는 서역 계통의 여자가 차를 날랐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듣고 보는 중국문화에도 페르시아적인 요소가 짙게 배어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릉 가는 길에 한․진․당의 기념관에 들르니 이집트의 피라밋을 모방한 현대판 피라미드를 철근으로 골격을 세워 만들고 있었고, 그 피라밋을 지키는 반인반수의 얼굴까지 그대로 모방하고 있어 웃음을 자아냈다. 무슨 속셈일까? 늘 느긋한 중국인의 표정 속에서, 그들의 속셈은 알 수가 없다. 또 중국 전통음악을 연주하여 관광객의 눈길을 끌기도 했는데, 사진을 찍으려고 몰려드는 중국인이 많아 소란스러워 얼른 자리를 피해 나왔다.

 

    1974년 봄, 역사 속에 기나긴 잠을 자던 진시황릉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고고학 발굴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진시황릉 박물관을 둘러보기 전에 그는 참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되었다. 살아 중국을 통일하고 통치하며 만리장성 축조, 진시황릉 축조, 아방궁 축조 등의 역사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원망을 사기도 했겠지만, 그는 죽어서도 또 한 번 중국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렇게 외국 관광객을 많이 끌어들여 관광수입을 올려주고 있으니 중국인을 위한 현대판 영웅이 아닌가.

    진시황릉터에 도착하여 우리는 진시황릉이 발굴되고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역시 어마어마하다. 진시황릉은 무덤이라기보다 작은 산 하나의 크기였다. 진시황릉이라 짐작되는 앞건물 지하에는 유명한 병마용이 아직 다 발굴되지 않은 채 발굴도중에 있었다. 발굴되지 않은 곳은 흙으로 덮여 있고 발굴된 것은 그대로 보게 해 두었다. 병마용은 실제 사람크기와 거의 비슷하거나 아니면 더 크다.1.8m 정도씩 되니까 말이다. 실물 크기의 말도 군데군데 있었다. 그들은 죽은 진시황을 지키는 병사와 말인 셈이다. 그 수도 많거니와 4명씩 열을 지어 있었는데, 발굴도중 파손된 부분도 많았고, 아직 발굴이 다 되지 않아 덮어 놓은 것도 있었다. 전시관은 1,2,3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궁금한 것은 어느 쪽이 전시황릉인가였다. 병마용이 열을 지은 곳이 진시황무덤 앞이라면 진시황릉 위에 지금 박물관 건물이 있다고 보아야 했는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갔다. 아무튼 그 병마용을 만든 중국인들이 대단해 보였다. 한 사람, 한 사람 무척 정교하고 생김이 다 다르다. 진시황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한다.   

 

 

 

    진시황릉은 진나라의 최초 황제인 진시황제의 능이다. 진시황제(秦始皇帝,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면 음력 9월 10일)는 진나라의 제31대 왕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이름은 영정(嬴政)이며, 조나라에서 출생하였기에 조정(趙政)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사건을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영정은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공자 영자초와 그 부인 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다. 여불위는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영자초는 조희를 아내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원래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영자초에게 바쳤다는 설도 있다. 어쨌건, 영정은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나,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기원전 250년, 영정의 증조부인 소양왕 영직이 동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소양왕은 얼마 후,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효문왕 영주가 즉위했다. 이에 영자초는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효문왕은 즉위한 지 1년 뒤에 사망하고, 태자 영자초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이다.

    영정은 곧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이 훙서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왕에 즉위하였다. 영정은 왕위에 올랐으나,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기에, 아버지 때에 승상이 된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둘렀으며, 심지어는 영정의 모친 조태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한다. 이에 여불위는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처럼 꾸며 조씨의 처소로 보냈고, 조씨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에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38년에 영정은 성인식으로 잠시 함양을 비우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영정은 곧바로 군사를 파견하여 노애를 능지처참에 처하고 어머니 조씨를 감금하였다. 또한 노애와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2명을 환관에게 시켜 목을 졸라 살해하였다. 그리고 영정은 여불위를 승상의 자리에서 내치고, 자결을 강요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에 여불위는 결국 자결하였으며 영정은 비로소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230년부터 영정은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한 통일 사업을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진나라는 가장 세가 약했던 한나라부터 멸망시켰다. 기원전 228년에는 조나라까지 멸망시켰다. 그 때, 연나라의 태자 희단이 자객 형가를 시켜 잔치자리에서 영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 기원전 223년에는 진나라 다음으로 세가 가장 세었던 초나라, 기원전 222년에는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영정의 나이 39세에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하였다. 영정은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다. 그리고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였고, 자신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황제로 시작하여,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진시황제 영정은 승상 이사의 의견에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었다. 또한, 모든 결재는 자신이 직접 챙겼으며,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다. 시황제는 남쪽으로도 군사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증설시켰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중국을 위협하자, 대장군 몽염을 변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정벌, 내몽고의 땅 일부도 편입시켰다.

    기원전 213년, 어느 연회 때,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사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이 때,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을 올렸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수상한 학자가 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학자들은 모두 자기가 아니라며 잡아뗐으나 시황제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니, 그 수가 460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이다. 그리고 이를 모두 합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렀다. 이에 분개한 황태자 부소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부소는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이 있는 국경 근교로 쫓겨났다.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서쪽의 임도로부터 동쪽의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법을 매우 엄히 하여 백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친족을 몰살시켰고, 나아가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의 모든 가구들도 그에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죄인들의 행렬이 즐비했다한다.

    시황제는 자신이 무병장수 불로장생하길 간절히 빌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명산에 방사들을 보내 불로장생의 약을 얻으려 하였으나, 없었다. 그리하여 죽으면서까지 그 약에 매우 집착을 하였는데, 그 중 서복이라는 사람이 시황제에게 왜국에 그 약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시황제는 많은 돈을 서복에게 내주고 왜국으로 가 어서 그 약을 가져오라 명했다. 하지만, 몇 년이 다 되도록 그 약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시황제는 서복에게 독촉을 했고, 서복은 소년소녀 3000명을 데리고 왜국으로 건너가 다시는 진나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다섯 차례나 전국 곳곳을 순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때에 많은 협객이 폭군 시황제를 죽이려 하였다. 그리하여 시황제는 순행 시, 언제나 5개의 수레를 군사들이 호위토록 하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에 탔다. 시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협객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시황제는 길가에 자신의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번은 시황제가 금릉(金陵, 현재의 남경)에 왔을 때, 왕기가 일어났다. 이에 분개한 시황제는 근처에 소나무를 빽빽이 세워 왕기의 기운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금릉은 삼국 시대까지 말릉(枺陵)으로 불리었다. 이렇게 시황제는 거의 온 중국 대륙을 돌아다녀 자신이 성공한 군주임을 천하에 과시하였다.

    시황제의 사후, 환관 조고(趙高)가 태자 부소(太子扶蘇), 승상 이사와 시황제의 혈족자 등 권력자를 차례차례로 암살해, 어리석은 2세 황제를 허수아비 황제로앉혀 권력을 제멋대로하고 폭정을 하였다. 시황제의 사후 진나라는 혼란해져서 다음 해에는 진승, 오광의 반란이 발발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소란 상태가 되었다. 진 이세황제와 조고는 장한(章邯)을 장군으로 토벌군을 보낸다. 장한은 군사적 능력을 발휘해 진승군을 격파하고, 그 다음에는 초나라의 항량군도 격파했다. 그러나 항량의 조카 항우와의 결전에 깨져 장한은 포로가 된다. 항우는 함양으로 향하는 도중에 반역의 기색을 보인 진나라 병사 20만을 죽여 버렸다. 장한이 대패한 것을 들은 조고는 낭패했고, 2세 황제를 폭정의 오명을 씌운 다음 암살해, 자영을 세워 민의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지만, 자영 등에 의해서 주살당했다. 그 후, 유방이 함양에 들어가면서 자영은 항복했고, 진은 멸망 했다. 유방은 자영을 죽이지 않기로 하였지만, 나중에 함양에 들어온 항우는 자영을 죽여 함양의 미녀와 재보를 약탈하고 불을 놓아 함양은 폐허가 되었다.

 

 

 

    시황제는 죽음에 대비해 50㎢에 달하는 무덤 부지와 그 속에 묻을 부장품들을 마련해두었다. 그 속에 든 보물들은 시황제의 사후 약 2,100년이 지나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처음으로 지하에 묻힌 방을 발견했다. 뒷날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6,000구가 넘는 실물 크기의 병사와 병마 도용(陶俑)을 찾아냈다. 이들 도용은 모양이 동일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실물을 모델로 했으리라고 추측된다. 실제의 마차, 철제 농기구, 청동 및 가죽 재갈, 비단·아마·옥·뼈 등으로 만든 물건들이 출토되었다. 또 활·화살·창·칼과 같은 무기들과 13가지 성분을 합금한 주형(鑄型)도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이 나고 날카롭다. 예전에는 광물성 안료로 밝게 칠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진흙상들이 당시의 군대 규율에 따라 독특한 군사 대형으로 늘어서 있다. 선두에 궁수(弓手)와 석궁(石弓) 사수가 배치되어 있고 그 바깥에는 사수 및 보병과 전차병 무리가, 후미에는 갑옷을 착용한 호위병이 줄지어 있다. 부근에서 3개의 방이 더 발굴되었는데, 그중 한 방에는 1,400개가 넘는 도용이 들어 있었고 이것은 전차와 기병을 보충하기 위한 것으로 더 작게 만들어져 있었다. 또 하나의 방에는 아마도 진군(秦軍)의 정예 지휘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68개의 상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빈방이었다. 이 4개의 방, 이른바 서안 유물은 고고학자들의 발굴작업이 진행될 때부터 지붕으로 덮여 보호되었으며, 현장에 세워진 진용박물관(秦俑博物館)에서 특별히 관리하고 있다.

    도기로 만들어져 매장된 호위병들은 무덤 바깥 벽으로부터 1.2㎞ 정도 떨어진 곳에서 전투태세를 한 채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진이 천하를 통일하기 이전에 동쪽에서 침입해온 강력한 적수로부터 시황제를 보호하는 형태인 것으로 짐작된다. 능 서쪽의 또 다른 장소에서는 중국에서 이제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청동기들이 발견되었다. 이 청동기는 머릿부분을 금·은으로 장식한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인데, 차일을 드리운 채 각기 행정관들을 태우고 있었으며 크기는 실물의 반 정도이다. 또 하나의 부속 동굴에서는 말의 뼈로 가득 찬 지하 마구간, 장군들의 묘지, 70개의 개인 매장지, 그밖에 공예품들이 출토되었다. 시황제의 무덤 자체는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4면으로 된 피라미드 형태의 흙둔덕 바로 아래, 내벽 안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피라미드형 흙둔덕은 원래는 낮고 숲이 우거진 산처럼 보이도록 조경된 것이다. 능 내부는 광대한 지하궁전으로, 각지에서 징발된 70만여 명의 일꾼들을 동원해 36년이 넘게 걸려 완성했다고 한다. 역사가 사마천(司馬遷:BC 145경~85경)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노동자들은 매우 깊은 지하까지 파들어갔다. 그들은 청동으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관을 안치했다. 그들은 궁전·누각·집무실의 본을 만들고 멋진 그릇, 값진 석재와 진귀한 물건들로 묘지를 가득 채웠다. 기술자들은 침입자가 나타나면 석궁이 자동적으로 발사되도록 장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중국의 여러 강, 예컨대 양쯔 강[揚子江]과 황허 강[黃河], 심지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까지 수은으로 만들어 흐르게 하고 기계적으로 순환되도록 장치했다. 반짝이는 진주로 천상의 성좌를 천장에 설치하고, 금·은으로 새를 만들었으며 옥을 쪼아 소나무를 만들었다. 마차는 바닥에 진열했다. 등불은 고래기름을 연료로 써서 영원히 탈 수 있도록 했다".

 

   병마용을 둘러보고 나니 진시황이 생전에 누린 권력을 알 만하다. 그가 생전에 만리장성을 만들고, 아방궁을 만들고, 자신의 무덤을 만들던 힘의 여력이 지금도 중국에 미치는 듯한 착각(?)에 빠지다. 

 

    다음으로 함양의 아방궁터를 보러 갔다. 서안의 서쪽에 위치하는 아방궁은 중국 진(秦)나라 때 세워졌던 호화로운 궁전이다. 진의 시황제(始皇帝)는 천하를 통일하면서 수도인 함양의 인구가 많아지고 궁전도 협소해지자, 위수[渭水]의 남쪽에 있는 상림원에다 새로운 궁성의 건설을 계획했다. 아방궁은 이 궁성의 전전(前殿)으로서 BC 212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규모는 동서 500보(680m), 남북 50장(113m)으로, 궁전 위층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는 5장(丈)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고 한다. 이 궁전 건설에 70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었으나, 시황제의 재위 중에 완성하지 못해 2세 황제 때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다. BC 206년 진을 정복한 항우(項羽)에 의해 전소되었는데, 3개월에 걸쳐 불탔다고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