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돈황 가는 길
돈황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사막풍경
1995년 8월 1일. 우루무치를 떠나는 날이었다. 무엇인가 식구들에게 줄 기념품을 사고 싶어 상설시장인 ‘자유시장’에 들려 보았지만 값싸고 실용적이거나, 기념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아직 후진국이라 품질면에서 떨어지고, 또 비싼 것들을 사다 줄 형편도 아니었다. 집아이들에게 줄 중국 모자(위구르인 전통 모자)를 사고 그 다음에는 과일중 청건포도, 호도를 각각 1kg씩 샀다. 짐이 많지 않다면 더 사고 싶었지만, 우린 옷가지만으로도 짐이 너무 많았다.
기차표를 구하기가 힘들다고 하여 시베족인 중국인에게 미리 부탁해 놓았다. 그런데 그 중국인들은 자기들도 같이 가겠다는 것이다. 남편이 시베어를 배우던 사람은 스물 여덟 살, 막내동생은 열여덟 살의 고1이었다. 고1 남학생을 보니 우리반 아이들이 생각나 더 친근감이 갔다. 영어로 말을 걸어 보았으나 못 알아듣는다. 중학교에서 영어를 안 배운다고 한다. 중학교 교육과정이 통일되어 있지 않나 보다.
4인승 침대표를 사달라고 했는데 6인승을 끊어왔다. 중국에선 기차표가 3일전부터 예매되는데 4인승 침대차표 및 6인승 침대차표 구하기가 무척 힘들다.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제 시간에 기차를 타지 못하는 것이 중국의 실정이다. 6인용 침대차는 양쪽이 ‘상중하’로 되어 있다. 6인용은 하가 제일 비싸다. 하쪽은 사람들이 자주 다니고, 또 잠을 자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들도 앉게 되어 불편한 점이 있지만, 앉아서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할 수 있도록 작은 붙박이 식탁도 있어 다른 침대보다 비싸다. 잠자기는 가운데(중)가 좋아보인다. 창문이 없어서 ‘상’은 좀 덥다.
오후 3시 40분. 기차는 우루무치를 떠나 유원을 향해 달린다. 멀리 천산 산맥의 만년설이 아득히 보이고 시꺼먼 흙과 자갈의 불모지가 끝없이 펼쳐진다. 때때로 보이는 도로와 전신주가 20~30미터의 간격으로 서 있을 뿐, 그리고 가끔씩 풍력발전소의 풍차가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황량한 광야에서 유일한 볼거리처럼 느껴졌다. 이육사의 시 ‘광야’가 생각나기도 했다. 한 두 시간씩 기차가 달리다가 나무가 보이고 물이 보이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나타난다. 인간은 물과 나무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가 보다.
사막속의 기찻길
‘투르판’은 우루무치에서 3~4시간 거리에 있다. 비단길 중 트루판은 옛날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주요 오아시스 국가의 하나이다. 이곳은 옛날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이 활약했던 곳이기도 하고, 고국을 떠난 수많은 우리의 스님들이 지나간 곳이기도 하다. 『왕오천축국전』의 저자인 신라승 혜초가 바닷길로 천축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이곳을 지나갔다. 투르판은 해발 -154미터의 중국 전역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도시라 ‘투르판 분지’라고 불린다.
투르판은 위구르말로 ‘파인 땅’이라는 뜻이다. -154미터의 투르판 분지는 아주 오랜 옛날 바다였으나 지각운동으로 육지안의 바다보다 낮은 분지가 됐다고 한다. 중국에서 표고가 가장 낮은 지역이며 가장 더운 곳이기도 하다. 6~8월의 평균기온은 섭씨 33도이며 7월 이후에는 40도를 넘는 날만도 40일 이상 계속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곳을 ‘화로 도시’라고도 한다. 바람조차 후끈후끈하다. 또 봄가을엔 바람이 많이 불어 투르판은 ‘바람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곳 길가에는 백양나무가 늘어서 있으며 천산산맥의 눈녹은 물이 흘러 모이는 곳이라 중국내에선 비교적 물이 풍부한 곳이다. 햇살이 따갑고 물이 많은 이곳의 기후적 특성으로 인하여 과일들이 많이 나고 또 무척 달다. 포도, 수박, 멜론 등의 과일이 풍부하다. 여름철이면 투르판 시가지는 온통 포도덩굴 가로수로 뒤덮이며 이곳만의 또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다. 투르판은 포도주가 유명하여 ‘포도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교외로 나가면 흙으로 지은 포도 건조장이 많다고 한다.
이곳은 소설‘서유기’에 등장하는 ‘화염산’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높이 800미터 둘레는 40킬로미터의 붉은 황토의 화염산이 투르판 분지안에 우뚝 솟아 있다. 투르판분지는 여름이면 40도가 넘는데 이 ‘불타는 듯한 산’은 2, 3도가 더 높다고 하니 그 더위를 알만 하다. 한 번도 비나 눈이 내린 적이 없는 붉은 산. 바람이 많은 이곳의 흙먼지는 봄철, 타클라마칸과 고비사막의 모래먼지와 함께 우리나라에까지 날아와 황사현상을 일으키는 장본인이다.
화염산 기슭 남쪽 계곡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있다. 이곳은 서역으로 가던 수맣은 스님들이 지니가던 곳이고, 현장스님도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일본의 오타니탐험대가 이곳의 20호굴과 27호 굴에서 벽화를 떼어가 총독부에 보관했다가 본국으로 가져가려 했으나 해방이 되는 바람에 미처 못 가져가고 지금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베제크리크 천불동 입구에는 소설‘서유기’에 나오는 현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의 입상이 있다. 이곳에서 영화 ‘서유기’를 촬영했다고 한다.
사막속의 건조천
7. 돈황의 명사산과 월아천
기차는 계속 돈황(유원역)을 향해 달린다. 서서히 찾아오는 황혼. 차창으로 바라보니 열차 뒤쪽으로 초승달이 지고 있다. 옛날 천축(인도)을 가기 위해 말을 타고 타박타박 걷던 사막의 서역만리를 나는 지금 기차를 타고 달리고 있다. 긴긴 평원을 열차가 달린다. 우리나라처럼 꼬불꼬불 산길도 아니고, 굴도 없다. 그저 평평하고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삭막한 사막일 뿐이다.
중국의 기차는 창문을 아래로 열게 되어 있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쳐다보아도 조금도 위험하지가 않다. 침대차는 통로가 한쪽 가장자리에 있으며 통로쪽 창가에는 접의자가 있다. 앉을 때는 펴면 되고, 서면 저절로 접힌다. 참으로 합리적이다.
밤이 되니 하늘엔 별이 초롱초롱 빛난다. 건조하고 맑은 사막의 밤하늘엔 은하수도 길게 흐른다. 이렇게 많은 별을 바라보기란 실로 오랜만이다. 어렸을 때 고향 강원도 산골에서 여름밤이면 쑥을 꺾어 모깃불을 피워놓고 돗자리 위에 또는 가마니 위에 누워 어머니께는 옛날 얘기를 해 달라고 졸랐고 어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별을 쳐다본곤 했었다. 아니면 언니들과 ‘별 하나, 나 하나……’하며 별을 헤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또 고등학교 시절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열심히 외우기도 했었다.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북두칠성도 보이고 북극성도 보인다. 별자리를 잘 모르는 나지만 그냥 그 빛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알퐁스 도데의 ‘별’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프로방스 지방의 아름다운 산의 모습과 목동의 아가씨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목동이 아가씨에게 들려주는 별에 관한 이야기. 사랑은 순수할 때만 아름다운 것이겠지. 이렇게 별빛이 찬란한 밤이면 사랑하는 그 누구에게 긴긴 편지도 쓰고 싶다. 내가 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연을 담아 별빛처럼 영원히 반짝일 수 있는 사랑을 쓰고 싶다. 사막 지대에서 천문학이 발달한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 안개가 끼는 날도, 흐린 날도 거의 없기 때문에 별이 잘 보여 관측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모래가 곱기로 유명한 명사산 앞의 필자
1995년 8월 2일. 돈황을 가기 위해 유원역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7시 40분. 차안에서 세수를 하고 화장도 했다. 역에 도착하여, 서안으로 가는 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9시 30분까지 기다려 중국인이 안다는 사람까지 만나 보았으나 표를 사는 건 실패했다. 포기하고 9시 30분, 드디어 돈황행 버스를 탔다.
지붕에다 짐을 싣고 밧줄로 묶은 후, 사막을 달리는 마이크로 버스. 끝없는 지평선이 가물대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뜨거운 땅위를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다. 공동묘지도 보인다. 조금 흙을 돋우고 십자가를 하나씩 세워놓았을 뿐. 우리나라처럼 잔디라도 있다면 덜 삭막해 보였을 텐데……. 저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가끔씩 아주 약간의 풀도 보였고, 물이 흐른 흔적은 있지만 물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열려진 창문으로는 더운 바람이 훅훅 들어오고 햇살은 뜨겁다. 똑같은 풍경의 2시간 반이 지나자, 돈황에 다 왔단다. 우리는 가능한 싼 곳을 택해 숙소를 정하고 나서 여행사에 들러 서안행 기차표 6인승침대 상하(上下)를 예매할 수 있었다. 유원에서 서안까지는 기차로 40시간, 그 긴 시간을 서서 갈 수도 없어 180원(우리나라돈으로 18,000원 정도)이라는 웃돈을 주고 표를 구해야 했다. 차삯에 비한다면 그 돈은 큰 돈이었다. 우리는 가능한한 돈을 아껴쓰려 노력했다. 그것이야말로 작은 애국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선 자전거로 사람을 태워다 주는 풍경도 있다. 자전거 뒤에 마차처럼 두 사람이 탈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태워다 주고 돈을 번다. 타보니 햇볕을 가려주는 가리개도 있고 뜨거운 땅위를 걷지 않아 행복했다.
명사산에서의 필자
저녁에는 명사산(鳴沙山)과 월아천(月牙泉)을 구경하러 갔다. 명사산 입장표를 사고 입장 시간(낮엔 너무 모래가 뜨거워 해가 질 무렵에야 입장할 수 있다.)이 안 되어 기다리고 있을 때다. 화장실을 갔는데 아예 문이 없다. 남 녀 칸으로만 구분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자들은 한 칸에 몇 명이 함께 들어가 히히덕 거리면서 볼일을 보고 있다. 낯이 뜨거워, 기다렸다가 사람이 없을 때 혼자 들어갔다. 화장실을 우리 나라의 목욕탕쯤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문화의 차이를 다시 한 번 느꼈다.
명사산 앞에서
명사산은 고운 모래로 되어 있는 산이다. 그야말로 그림에서만 보던 진짜 아름다운 모래 사막이다. 사람이 모래산 위에서 밑으로 모래를 타고 내려올 때 나는 소리가 아름답다고 하여 명사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입구에선 입장권을 팔고, 낙타를 타고 모래산의 낮은 부분을 돌게 하려고, 많은 낙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운없어 보이는 그들을 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걸어서 모래산의 능선을 오르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순례자처럼 모래산의 능선을 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낮에는 너무 뜨거워 해가 질 무렵에야 오를 수 있다. 모래는 무척 아름답고 부드러웠다. 푹푹 빠지는 모래를 밟으면서 능선까지 오르면 아무도 밟지 않은 모래 능선이 참으로 곱다. 발자국을 내기조차 미안한 고운 모래능선은 아래서처럼 푹푹 빠지지도 않고 단단하다. 수많은 바람으로 다져져서일 것이다. 곱게 생긴 능선의 곡선은 뉘엿한 햇살을 받아 더욱 묘하고 아름답다. 2~3개의 능선을 오르는 사람도 있으나 사람들은 보통 하나를 오르고 나서는 중간쯤에서 모래를 타고 내려온다. 명사산 밑에는 정자가 있고, 월아천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초생달 모양의 연못이다. 명사산 월아천(月牙泉)은 길이 200m, 폭 30m 정도의 오아시스로서 수천 년 동안 한번도 마르지 않았으며 거대한 명사산의 모래바람에도 견디고 있는 샘이이라 연못 자체로는 신기할 것이 없지만 사막속의 연못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월아천 앞의 정자
8. 돈황 천불동의 막고굴
돈황 천불동의 막고굴
1995년 8월 3일.
숙소 가까운 곳에서 한 아침 식사는 숭늉 비슷한 것과 꽈배기 몇 개가 전부였다. 1원(한국돈으로 100원)이다. 무척 싼값에 식사를 할 수 있었지만, 아침을 먹었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보통 집에서도 아침 식사를 하지 않던 습관이 있어 견딜만은 했지만, 왠지 허전했다.
돈황은 비단길의 요충지로서 천산북로와 천산남로의 교차로에 있었던 곳이라 처음부터 이 여행의 가장 핵심으로 잡았던 곳이다. 우리는 돈황의 천불동(막고굴)을 가기 위해 투어를 이용했다. 즉석에서 팀이 이루어지는 마이크로관광버스였으며, 막고굴 관람외에도 몇 개의 코스가 더 들어 있었다. 막고굴 관람료는 갑과 을로 나누며, 갑은 75원에 동굴 30개를 관람할 수 있고, 을은 25원에 동굴 12개를 관람할 수 있다. 우리는 투어를 이용했기에 약속된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을’을 보기로 했다.
처음에 본 130호 석굴의 부처님은 길이가 30미터쯤 되었는데 발하나의 길이가 4~5미터쯤 되는 것 같다. 석굴의 겉은 사암으로 자갈과 모래로 되었으며, 부처님은 나무로 심을 만들고 겉은 진흙에다 짚을 섞어 이겨바른 것이었다. 벽면도 진흙과 짚을 이겨 바르고 평평히 다져 회칠을 한 다음 그림을 그렸다. 천장과 사면벽이 모두 벽화로 되어 있어 신기했다. 약 4세기경부터 1000여 년 동안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의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해당되나 외부와의 접촉이 없어서일까? 아직도 색상이 무척 선명하다. 아마도 19세기까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개발이 잘 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부처님의 형태와 표정도 가지 가지이다. 부처님의 입적하실 때의 모습인지, 와불(옆으로 누워있는 부처)도 무척 재미 있다. 우리 나라 석굴암의 부처님처럼 화강암을 깎아 만든 것도 아니고, 8등신의 섬세한 구성도 아니라서 만드는 데 힘은 덜 들었겠지만 대단한 집념으로 만들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천 여년을 내려오면서 계속 만들어졌기에 하나의 돌산에 이토록 많은 부처님동굴이 있는 것이다.
중국 돈황 130호 석굴
1000개의 부처님 동굴이 있다고 천불동이란 이름이 붙었으나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492개뿐이라고 한다. 이민족의 침략을 피해 이곳에 와 살면서 그들의 평화를 염원하느라 이토록 많은 부처님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곳은 우리의 신라승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인도여행기)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사막 가운데의 깎아세운 듯한 작은 절벽에 있는 동굴이라 문화의 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어두컴컴한 굴 속에 전등조차 설치되지 않아 어두워서 자세히 구경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사전지식이 없던 우리는 손전등조차 준비하지 않았기에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비치는 손전등을 따라가며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가이드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에게 일본말로 설명을 해 주고 있었지만 우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전등이 있으면 훼손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사막속이라 전기를 끌어오기 어려운지, 캄캄해서 구경을 잘 하기 힘들었지만 때문에 그림의 색상은 잘 보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곳 벽그림에서 보면 여자의 얼굴은 한결같이 둥굴다.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미인은 어른들이 복스럽게 생긴 얼굴이라고 말하는 둥근 얼굴인가 보다. 어떤 동굴에서는 벽화를 떼어간 모습도 보이고, 이교도들의 짓인지 부처님의 얼굴이 짓이겨지고 팔이 망가지기도 했지만, 부처님들은 대체로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내 종교가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하다는 걸 그들은 몰랐을까? 부처님 코를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이 중국인에게도 있는 것일까? 코가 갈려나간 부처님도 많다. 막고굴을 보고 난 후엔 고성(古城)에 들러 백야탑 등을 구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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