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비단길
(Silk Road)
宇玄 김민정
비단길(Silk Road)은 중앙아시아를 횡단하여 중국과 유럽을 잇는 고대의 대상로(隊商路)이름이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인 상품이 중국산 비단이었던 데에서 유래하는데 물론 서방으로부터도 보석, 옥, 직물 등의 산물과 불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도 이 길을 통하여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 그의 저서 「지나」에서 이름을 붙인 후, 고고학자 스타인이 실크로드로 영역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가 쓰려는 것은 비단길 중에서도 중국 내의 길이다. 서안(옛 장안)은 비단길이 시작되는 곳인데, 나는 비행기로 북경에서 우루무치라는 곳부터 가서 기차, 혹은 버스를 타고 서안까지 오며 답사를 했던 것이다. 즉, 우루무치, 트루판, 돈황, 서안까지의 비단길을 보고, 그 외에 옛 도읍이었던 낙양과 현재의 수도인 북경을 구경했다.
1. 북경공항에서
1995년 7월 29일. 중국어도 영어도 잘 못하는 상태에서 안내자도 없이 실크로드를 간다는 것에서 약간의 흥분과 긴장감을 느꼈다. 안내자의 선입견이 아닌 나의 눈과 마음으로 그곳 사람들의 실생활과 모습을 보고 싶었고, 또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여행 계획은 15박 16일의 우루무치(신강)-트르판-돈황- 서안 등의 중국내의 실크로드와 낙양-북경 등이었다.
서울에서 두 시간을 날아 북경 공항에 도착했고, 우리나라와의 시차는 한 시간이다. 심하리라 예상했던 세관 검사는 아예 없었지만, 관리들이 아주 느리게 일을 처리하여 공항을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국에서 북경까지의 비행기는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는데도 만나서 비행기표를 끊어주기로 한 한인 안내자는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고 걱정을 하던 중에 그녀는 나타났고 우루무치행 비행기는 오후 7시 15분 것이 있었다. 비행기삯을 내국인은 중국화로 1300원, 외국인에게는 2550원을 받는다. 중국화로 1원은, 우리돈 100원이다. 비행기삯, 기차삯은 물론, 모든 공공요금이 외국인에게는 2배이고 심지어 북경의 천단공원 같은 곳에서는 60배까지 받기도 하여 일관성이 없다.
비행기를 타려면 다섯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기에 엽서를 사고 싶어 공항내의 백화점을 구경하기로 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아 아는 영어 단어를 사용해 보았지만 역시 못 알아듣는 눈치다. 돌아다니다가 겨우 엽서를 몇 장 샀는데 안 사고 지나가면 ‘디스카운트’를 외치며 손님을 부른다. 물건에 따라 그곳에서 부르는 가격의 50%까지도 깎을 수 있었다. 적극적인 그들의 모습에서 자유경제를 도입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여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사랑하는 딸들에게, 제자에게, 친구에게 엽서를 몇 장 쓰기는 했지만 중국 여행을 하는 동안 단 한통의 우체통도 발견하지 못했고, 또 우체국에 들를 시간이 없어 결국 한 통의 엽서도 부치지 못했다.
2. 북경에서 우루무치로
만리장성
밤 8시가 넘어 시작된 우루무치행 비행기 탑승은 사람들이 빨리 들어가려고 밀치고 뛰고 야단이다. 나는 왜 이럴까 의아했지만 비행기를 타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중국의 국내선은 좌석이 따로 지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입석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남들이 뛰니까 괜히 불안해지는 심리 때문인가 보다. 300석이 넘는 큰 비행기였고, 저녁식사로 밥과 반찬을 주었는데 밥은 질고, 반찬은 느끼했지만 배가 고팠기에 참고 먹었다. 한국의 승무원 아가씨들이 옷도 미모도 세련되었다면, 중국의 승무원들은 수수한 편이었다.
우루무치는 천산 산맥 북쪽 기슭, 우루무치 강변의 해발 915미터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다. 남쪽으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에 닿아있고 북쪽으로 중가리아 분지, 서쪽으론 구 소련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동인구까지 포함해 인구 130만 정도의 사막속의 도시이다. 13개의 소수 민족으로 이루어졌으며 위구르인들의 자치구이다. 우루무치는 원래 ‘광대한 목초지’ 또는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름철 평균기온은 섭씨 20도 정도로 별로 덥지 않아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휴양지로 유명하다. 햇살은 따갑지만 습기가 적고 건조하다. 이곳의 특산품은 ‘옥돌’이며, 특산주는 ‘이리곡’이라는 55도 정도의 독한 술이다. 그리고 양들이 많아 그 숫자가 신강성 인구보다도 많다고 한다.
옛부터 이 지방의 옥토인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유목민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한다. 특히 중가리아족과 회족이 서로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곳으로도 유명하고 또 후에는 몽고나 투르크계 등 여러 유목민들이 이곳을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이기도 한 곳이다. 장개석의 민국시대엔 ‘적화현’이라고 부르다가 1948년 중공 정권이 수립된 후 우루무치 시로 개칭되면서 신강성의 성도로 자리잡는다. 요즘 이곳은 시멘트 화학, 주철, 강철, 자동차 공업의 발달과 함께 전통적인 산업을 이어받은 피혁과 면방직, 제분 공업까지 발달해 신강성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또 우루무치는 신강성의 성도이기 때문에 신강성의 교통중심지가 되고 있다. 우루무치-북경선 외에도 중국 각지로 가는 항공노선이 개설돼 있고 난신철로(蘭新鐵路) 등 철도망과 도로망도 잘 발달돼 있다. 우루무치에서 북경까지 기차로 횡단하려면 3박4일이 걸린다고 한다.
네 시간 이상을 비행기로 날아 우루무치 공항에 내리니 남편이 중국인 시베족 한 사람을 데리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남편은 몽고 울란바트로 국립대학에 1년간 파견되어 두 학기 동안의 한국어 강의를 끝내고 중국으로 나와 시베어(만주어와 비슷)를 배우려고 한 달째 그 시베족의 집에서 기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작은 마을버스 크기의 버스를 탔는 데 차가 너무 지저분하여 앉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중국에 왔으니 중국법을 따라야지. 버스 종점에서 이번엔 택시를 타야만 했는데, 작고 빨간 택시다. 기사가 나를 앞에 타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곧 강도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운전석과 뒷손님석 사이에는 두꺼운 플라스틱으로 차단되어 있었고 돈 주고 받는 곳엔 작은 구멍을 내 놓고 있어 삭막한 느낌이 들었다. 시내는 한산했고 교통 질서가 잘 지켜지지 않는 듯 했다. 횡단보도도 많지 않고, 사람들은 아무데로나 건너 다니고 있었다.
밤 1시가 넘어 산장 호텔이라는 곳에 들어가니 향내음이 짙게 진동하고 있었고 입구 정면벽에 커다란 돌부처 입상이 암각되어 있다. 저절로 경건해지는 느낌이 들어 나는 고개를 숙이고 집아이들과 우리반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3. 자유시장, 공원, 위구르 박물관 관람
우루무치에서의 필자 김민정
1995년 7월 30일. 시계를 보니 오전 아홉 시가 넘었는데도 밖은 우리 나라의 일곱 시 정도로 밝아 있었다. 북경과 두 시간 이상의 시차가 있으나 중국의 그 넓은 땅에서는 북경시간을 기준으로 한다고 한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주는 데 아침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기그릇은 모두 이가 빠져 있고, 숭늉 비슷한 것을 한 그릇씩 주고 만두 두세 개와 간장에 찐 달걀 1개, 땅콩 몇 알이 전부였다.
오전에는 ‘자유시장’을 구경했는데 개인 상점들로 개방 후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가 반영되고 있었다. 자유시장에서는 위구르족의 전통 모자와 의상, 칼 등의 장식구와 그 밖의 실용품을 팔고 있었다. 그리고 과일이 많은 데 포도, 건포도, 호도, 살구 말린 것, 능금, 멜론, 긴수박 등이며, 꼭 약과같이 생긴 과일이 있어 무슨 과일인지 궁금하여 1kg을 사서 먹어 보았더니 우리나라 시골의 재래종 복숭아였고, 생김새만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과일은 저울로 달아서 그 그램수만큼의 돈을 받고 팔고 있어 우리나라보다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일이 잘 되는 더운 지방이라 과일은 싼 편이었다. 무게에 따라 멜론 하나에 2원,3원씩 하고,수박도 3,4원씩 한다. 우리나라 돈으로 200원, 300원이다.
오후에는 시내에 있는 홍산 공원, 인민 공원, 수목 공원, 신장 위구르 자치구 박물관을 관람했다. 홍산(紅山) 공원은 붉은 양산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케이불카를 타고 올라갔는데 그곳에서는 우루무치 시내가 잘 내려다 보인다. 사막 속의 오아시스 도시인 우루무치, 날씨는 우리나라 가을 날씨처럼 청명하지만, 비가 잘 오지 않아 먼지가 많은 편이다. 또 습기가 없어 우리나라 여름처럼 땀이 많이 흐르거나 불쾌지수는 높지 않으나 햇볕에 노출되면 얼굴이 많이 탄다. 구릉이 별로 없고 평평하여 멀리까지 보였으나, 사방을 둘러 보아도 나무가 있는 산은 없고 그저 거무스름한 흙과 암석으로 된 것이다. 또한 건물들은 거의 모양없이 사각으로 지어졌으며 오래되어 많이 낡아 있고, 새로운 건축 공사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곳을 돌아보던 중 갑자기 ‘도라지’ 음악이 들려와 급히 가 보니 공원 가설 무대에서 몇 명의 아가씨들이 각국의 민속춤을 추고 있다. 중국어로 번역된 '도라지' 노래였고, 빨간 치마에 흰 저고리의 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복장도, 춤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으나 먼 이국땅인 중국의 오지에서 듣는 우리 민요와 복장은 반가움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중국인이 추는 한국 도라지춤
인민 공원이라는 곳에서는 호수가에 앉아 커피를 한잔씩 마셨는데, 커피 한잔에 6원씩이나 하고 자리값은 한사람당 3원씩 따로 받는다. 커다란 멜론 하나에 2원 정도니까 굉장히 비싼 커피이다. 이후 나는 중국에서 한번도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그만큼 커피가 보급되어 있지 않다. 그 많은 인구가 커피를 좋아한다면 보급량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연못가에는 커다란 연꽃을 들고 인자하게 웃고 있는 보살 입상이 있었고, 또 커다랗게 장식된 용이 인상적이었다. 중국인은 용을 무척 좋아하나 보다. 용의 모습이 여기저기 많이 장식되어 있고, 붉은 색을 많이 쓰고 있다.
배가 고파 식당을 찾다 보니 공원 가장 자리에 양고기를 구워 파는 곳이 있었다. 양고기를 잘게 썰어 쇠꼬챙이에 꿰어서 고추가루, 후추 및 향료를 뿌린 후 숯불이나 연탄불에 구워서 판다. 구우면서 양념을 뿌리는데, 향료 냄새가 특이하고, 지저분해 보여 먹기가 꺼려졌지만 배도 고프고, 호기심도 나서 먹어보았더니 먹을 만했다. 이것을 ‘카바’라고 하는데 위구르인들이 무척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 다음에는 위구르 자치구 박물관을 관람했는데, 이곳에서의 인상적이었던 것은 유리관속의 10구가 넘는 남녀노소의 미이라였다. 일부러 방부제를 쓴 것도 아닐 텐데, 뼈뿐 아니라 말라붙은 살가죽까지 그대로 보존이 된 상태로 있다. 이곳이 고온 건조한 사막 지대이고 비가 잘 오지 않아서 시체가 썩지 않고 이렇게 생생히 보존이 되었나 보다. 사람들의 생활이 지저분해도 병에 잘 걸리지 않는 것은 건조해서 병균이 번식하기 힘들기 때문이리라. 이름없는 평민들의 시체였다. 왕후장상이라한들 결국은 저렇게 남겨지든가,아니면 뼈채 썩어 흙이 되겠지! 생명없이 천 년을 산다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장자편에 나오는 <예미어도중>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어느 날 복수(황하)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장자에게 초왕의 신하가 국정을 살펴달라고 모시러 왔다. 그때 장자는 진흙탕속에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가르키며 죽어서 삼천 년을 귀하게 모셔지는 사당의 거북이 뼈보다 비록 진흙탕속에 꼬리를 끌고 다닐망정 살아 있는 것이 좋다는 뜻을 말함으로써 정치 생명의 짧음과 권력의 허무함을 말하고 벼슬에의 권유를 마다했던 것이다. 그는 현명했던 것일까?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莊子釣於濮水. 楚王使大夫二人往先焉. 曰, 「願以竟內累矣.」莊子持竿不顧曰, 「吾聞, 楚有神龜, 死已三千歲矣. 王巾笥而藏之廟堂之上. 此龜者, 寧其死爲留骨而貴乎, 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二大夫曰, 「寧生而曳尾於塗中.」 莊子曰, 「往矣. 吾將曳尾於塗中.」
저녁에는 위구르인들의 고급 술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남녀 가수 2명과 연주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불러 주고, 무희는 그들의 전통무용을 보여준다. 양 옆으로 식탁이 놓여 있고 가운데에 나와서 춤을 추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가족 단위로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대가족이다. 그들은 가수가 부르는 노래에 맞추어 쌍쌍이 부르스를 추는데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춤을 가르친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월급이 적은 데 비해 외식을 자주 하는 것 같다. 집도, 식량도 나라에서 배급하는 상태이니 월급을 받으면 특별히 돈 쓸데가 없는지도 모른다. 위구르 여인들은 콧날이 오똑하고 눈이 큰 미인형이 많았다. 양고기 등 4~5가지의 고급요리를 시켜 먹고 맥주도 마셨는데, 음식값은 280원(2만 8천원) 정도 나왔다. 중국사람들은 양고기를 좋아하며 돼지고기를 좋아한다. 돼지고기는 보통 한 접시 12원(우리나라돈 1200원) 정도이고, 소고기도 12~16원(우리나라돈 1200~1600원) 정도였다. 물론 관광지나 고급요리집은 조금 더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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