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촌의 삶
宇玄 김민정(시조시인, 문학박사)
1. 탄광촌의 시작
사진 출처: 이희탁
「영동선의 긴 봄날 21~40」까지는 탄광촌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동선은 원래 삼척탄전의 석탄을 나르기 위해 만들어졌다. 1933년 5월에는 삼척~북평간 23Km가 개통되었고, 1940년 8월에 묵호~도계간, 1951년 10월 도계~철암 간이 개통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인 1960년대 탄광촌의 붐이 일어 사람들이 타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물론 그 이전 일제시대부터 탄광이 있어 왔지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이고, 60~70년대 탄광붐이 일었던 때의 일이다.
막장 깊이/ 묻혀 있는/ 꿈을 캐어 내느라고//
화약속 불꽃같은/ 청춘을 바쳐가며//
흥건히/ 삶을 퍼내던/ 통리, 도계 그 사잇길//
은사시/ 한 그루가/ 나뭇잎을 반짝일 때//
진폐증도 마다않은/ 오십천의 물굽이엔//
굴뚝새/ 울음만 같은/ 안개소리, 빗소리//
「탄광촌의 삶 - 영동선의 긴 봄날 24」전문
삼척시립박물관의 김태수 연구원은, “‘삼척’하면 으레 ‘탄광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점점 잊혀져가는 것 같습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되어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석탄산업, 그러나 1980년 후반에 석탄산업합리화의 태풍으로 탄광촌은 그야말로 폐허가 되었고, 그로부터 약 15년이 지난 지금은 석탄가루의 흔적을 찾기 힘들 만큼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탄광촌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그 구체적인 생활모습을 기록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석탄산업사의 측면에서 여러 자료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석탄산업의 주인공들인 광부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은 찾을 수 없습니다. 석탄산업사 못지않게 탄광촌 사람들의 생활사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라는 말처럼 탄광사람들의 생활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그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역사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것이 된다.
2. 탄광촌의 전성기
1930년대에 들어오면, 1936년에 삼척개발주식회사에서 도계리의 삼척탄광 개발에 착수하였다. 또 이와 동시에 석탄을 운발할 묵호~철암간 철도 부설 공사도 시작하여 1939년에 묵호~도계 구간을 개통하였고 나머지 도계~철암 구간은 1940년에 개통하였다. 이로써 소달면의 탄광 개발도 점차 증가하여 1950년대 전반에는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도계리), 삼척무연탄 심포광업소(심포리), 북삼화학공사 마차원석산(마차리)등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1950년대 후반에는 탄광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아울러 탄광 관련 기업체도 점차 설립되었다. 1960년대 이후 석탄산업이 국가기간산업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호황을 누리자 도계 지역의 경제도 역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윤기 내며 달려가는
반세기의 역사 앞에
뜨거운 불꽃, 불꽃
가득 실은 화물차는
긴 장화
질척이던 갱도
그 어둠을 사르고
고적한 사막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는
투사의 눈빛 같은
캡램프 불빛 속엔
선인장
꽃보다 강인한
광부들의 숨소리 「탄광촌의 숨소리 - 영동선의 긴 봄날 25」전문
태백산맥 깊숙이 퍼져있는 석탄을 캐기 위해 도계광업소로, 심포광업소로 외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산골은 북적이게 되었다. 주로 밭농사나 짓고 있던 이 동네 사람들도 하루 3교대 갑, 을, 병반으로 나누어 8시간의 작업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도시락과 반찬을 삽 끝, 또는 곡괭이 끝에 매어달고, 카바이트로 불을 켜는 간드레를 들고, 물론 성냥이나 담배는 주머니에 넣고, 긴 장화를 신고, 허름한 작업복들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탄광의 갱을 향해서 출근들을 하곤 하였다. 그들이 작업에서 돌아올 때는 늘 탄가루가 묻어 숯검댕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집에 와서 씻고서야 외출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주급으로 타든가 아니면 한 달에 한 번씩의 월급날을 맞아 쌀도 사고, 시장도 가고, 그 동안의 외상값도 갚곤 하여 조금은 풍족하게 돈을 썼다. 월급 때가 되면 가끔씩 도계나 통리서 밀린 술값을 받으러 예쁜 술집색시들이 심포리까지 오기도 하여 어린 우리들에게는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눈 덮힌 오두막집/ 등불처럼 외로운 밤
탄맥 찾아 유영하는/ 태백산 긴 줄기 속
눅눅한/ 인생을 캐며/ 동발처럼 괴던 청춘
자연(紫煙)속 피어나던/ 깃털보다 가벼운 꿈
고생대의 고비처럼/ 퇴적되며 연명해 온
탄광촌/ 희로애락도/ 은유처럼 깊었네
「탄광촌의 밤 - 영동선의 긴 봄날 34」전문
사람들은 늘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것이 아니고 갑, 을, 병반을 돌아가며 번갈아서 가곤 하였다. 도계~흥전에는 석탄을 실어나르던 케이블카인 석탄삭도가 있었으며 석탄생산량이 무척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끔은 그 삭도가 고장이 나서 석탄이 쏟아지는 경우도 있었고, 그럴 때면 사람들은 떨어진 석탄들을 집으로 날라다가 연료로 때곤 하였다. 물론 그곳 사람들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였다. 탄이 많이 나는 곳에 가서 돌과 석탄이 섞인 갈탄 같은 것을 주워다가 주먹탄으로 때든가, 아니면 가루석탄을 얻어다가 19공탄을 만들어 연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얻어다 때기가 미안하면, 돈을 약간씩 주고 탄을 사다가 때기도 하였다.
당시 노다지를 꿈꾸면서 전국에서 모여들던 젊은이도 있었고, 돈 벌어 떠나야지 떠나야지 하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탄광촌의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석탄공사 몰래 도탄도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탄을 하러 오기도 하였다. 우리 동네 땅은 거의 대한석탄공사의 땅이었으므로 함부로 땅을 파서 석탄을 채굴하게 되면 법에 저촉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석탄이 나올 만한 곳을 골라 굴진을 하고 갱을 파 들어가기도 하여 석탄을 발견하게 되면 낮에는 쉬고 밤에만 몰래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잘 되면 하룻밤에도 몇 톤씩 탄을 퍼내기도 하였지만, 남모르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주 감시를 하러 오고, 소문이 나면 도계광업소 사람들이 와서 사람들은 연행하고 도탄굴을 폭파시키고 가기 때문이다.
몸 안의 실핏줄처럼/ 가닥가닥 퍼져있는
석탄광맥 찾아내어/ 도탄굴을 시작하며
노다지/ 한 탕을 바라/ 삶의 모험 펼치고
어쩌다 찾게 되는/ 그 신나는 행운에도
낮과 밤 바뀌어진/ 고단한 삶의 여정
올빼미/ 생활 속에도/ 활기 살짝 넘치던
(광맥찾기 - 영동선의 긴 봄날 27 전문)
탄광촌의 사람들은 늘 위험이 도사리는 갱 속으로 일을 하러 들어간다. 때로는 갱이 무너져 사람들이 매몰되기도 하고, 크고 작은 사고들이 많이 나기도 하는 곳이다. 위험이 도사리는 줄 알면서도, 그 막장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다른 직업을 찾다가 마땅치 않아 마지막 살 길을 찾아 온 사람들이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갱 속에는 여자들을 못 들어가게 했다. 부정을 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을 하러 가다가 부정탄다고 생각되는 것이 앞을 가로질러 가거나 하면 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탄을 캐면서 석탄가루를 많이 마셔 진폐증에 걸려 고생을 하기도 하고, 더운 날 외부의 공기도 안 통하는 깊은 땅속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석탄을 캐내기도 했던 광부들이다. 그들이 있어 이 땅의 경제는 살아났고, 연탄을 때면서 사람들은 따뜻하게 생활했지만, 광부들의 삶은, 목숨은 늘 고단한 것이었다.
간데라 아슬한 불빛/ 산골 밤을 깊게 하고
카바이트 몇 점 불꽃/ 어둔 막장 수놓으면
곡괭이/ 삽 끈의 석탄/ 바지게에 얹혔었고
가랑잎이 쌓여가듯/ 석탄더미 쌓여가고
여덟 시간 삼교대로/ 하루해가 저물 때면
휘파람/ 불어도 좋을/ 막장 밖의 세상이여
(간데라 불빛 속에 - 영동선의 긴 봄날 31 전문)
나의 아버지는 탄광일은 직접 하지 않으셨다. 가끔씩 탄광사람들에게 필요한 물품(카바이트, 화약등)을 부탁받고 도계나 통리에서 구해다가 그들에게 전해주기도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나의 형부들이 탄광 일을 잠시 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3. 탄광촌의 폐광기
만주사변 발발되어 허덕이던 농민들을
만주이민 정책으로 탄광이주 정책으로
식민지 아픈 역사가 만들어 낸 막장인생
(식민지 탄광노동자 - 영동선의 긴 봄날 35, 첫째 수)
흥전일리 사택에도 공중폭격 맞아가며
피난가란 홍보에도 생산작업 계속하여
한 때는 한국 경제발전에 일등공신 되었던
(대한석탄공사, 영동선의 긴 봄날 38, 둘째 수)
원래 처음의 광부들은 그들이 원해서 광산촌에 몰려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제시대 농토를 빼앗기고 가난하고 살길 없었던 농민들을 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광산촌의 광부로 보내졌던 것이다. 그리고 행방 후 돈벌이가 좋아지자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했던 곳이다. 6. 25 때는 피난도 가지 않고 일을 계속하여 한국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기도 했던 광부들이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광부들의 생활 속에서, 그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던 탄광촌의 번성기도 어느 새 사라지고 있다. 번성기는 50여년도 채 안 되어, 폐광촌의 쓸쓸한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 한때는 개도 만원 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탄광촌의 경제가 있었으나, 북적이던 광산촌이 석탄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인구도 감소되고 사양길로 접어들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반복되는 역사의 흥망성쇠를 다시 한 번 느낀다.
이러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현재 탄전문화연구소장이며 태백문인협회장인 정연수는 한국탄광시를 정리하여 『한국탄광시전집』을 2007년에 발간하였다. 『한국탄광시전집』 발간으로 민중문학이니 노동문학이니 하는 담론이 핵심을 이루던 1980년대, 1990년대에도 논의 선상에 오르지 못한 탄광문학을 한국문학의 한 부분으로 새롭게 조명해 볼 수 있다는 데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그 책에 실린 시조 몇 편을 소개한다.
진폐증이/ 날아다니는 막장/ 그 막장 가 봤나//
허파를/ 갉아 먹는/ 검은 비가 내리고//
생활을/ 캐는 사람들/ 피를 쏟는 그 터전//
한증막/ 한증막 해도/ 여기 말고 또 있으랴//
땅 열이/ 치솟아/ 섭씨 삼십사오 도//
더위도/ 이쯤이 되면/ 귀신 잡아먹겠다//
김월준, 「막장 - 광부일기․2」 전문
폐광된 갱구는/ 진폐환자 몰골이다
단산(檀山) 냉골 한구석에 녹슨 광차 닳은 소리
목가래 끓는 소리
휘인 갱목만큼이나 인생 또한 휘어 살며
케이빙 쳐 탄을 빼 먹듯 젊은 세월 다 울궈먹고
기어이 선지피 한 웅큼 내리 쏟는다
참으로 인고의 세월 속에 답답한 가슴
숨 한 번 크게 못 내쉬고 이미 불씨 먹은
도화선은 갱구를 향해 타 들어가 일기장의
종지부는 심장부에 박힌다.
고요리(古堯里)/ 하늘 한 쪽을/무너뜨리는 상여 소리.
김진혁, 「고요리에서」 전문
이미 떠난 새들을 위해 아직도 도시는
상흔만 어루만질 뿐 시린 가슴 하고 있다
젖었던 어깨를 말릴 온기마저 식어가고
막장은 닫혀있고 갱목은 젖어들어
쓴물이 된 과거는 주름위로 묻혀간다
다시 또 퇴적되는 시대 내 영혼의 화석도시
이제와 푸른 맥이 아니어도 괜찮다
밤새워 불 밝히던 검붉은 열정으로
떠나간 새들을 위해 불사조가 되어다오.
김사계, 「화석도시를 위해」 전문
콩밭머리 앉은 햇살/ 건들마로 흔들리고
넘치는 청댓잎소리/ 산이 온통 흔들려도
심포리/ 탄광촌에 뜨는 별/ 미리내를 이룹디다
마른 갈대 훑고 가는/ 가을 짧은 햇살 아래
수수이삭 익어가듯/ 그리움도 익어가고
팽팽히 닻을 올리며/ 마을 한 척 떠갑디다
김민정,「탄광촌의 별 - 영동선의 긴 봄날 26」전문
2009년 8월 12일 최종 수정
흐르는 음악: Lotus Of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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