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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강삭철도 - 시조로 쓰는 영동선 철길 따라 제4회

by 시조시인 김민정 2009. 8. 11.

<시조로 쓰는 영동선 철길 따라 제4회>

 

 

강삭철도(鋼索鐵道, Cable-Railway)

 

                                                           宇玄 김민정(시조시인, 문학박사)  출처: 한국철도공사                강삭철도(아래쪽이 심포리, 윗쪽이 통리) 

   

 

 

 

 

 

1. 통리 고개

 

    태백산맥 굽이마다/ 흐르는 바람결도//

    심포리서 통리고개/ 통리에서 심포리길//     도도한/ 태백준령을/ 다시 한 번 만났다//

 

 

    삼척, 도계, 심포리를/ 거쳐 온 숨찬 기차//

    급경사 통리고개/ 더 이상은 가지 못해//     아득한/ 산기슭에선/ 주저앉고 싶어했다                       「통리 고개 - 영동선의 긴 봄날 51」전문 

 

 

 

 

 

 

 

 

 

   ‘영동선의 긴 봄날 51~60’은 강삭철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심포리․통리 구간에는 국내 유일의 강삭철도(鋼索鐵道, Cable-Railway)였던 로프형철도가 있었다. 스위치백 철로보다도 더 경사가 많이 진 경우에 만든 것이다. 강삭철도(鋼索鐵道;Cable Railway)는 레일 위에 설치된 차량을 밧줄을 통해 견인하여 운행하는 철도를 의미한다. 즉 물체가 매우 큰 경우 차량을 운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로프에 차량을 팽팽하게 연결하고 권양기를 이용하여 화차를 쇠줄로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종종 인클라인 철도(Incline Railway) 또는 케이블카(Cable Car)로 불리기도 한다. 이 케이블 철도를 인크라인(Incline)이라 불렀는데, 당시 사람들은 '강색선' 또는 '마끼'라고 불렀다. 이런 시설은 1877년 스위스에서 처음 건설돼 등산이나 관광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심포리와 통리 1.1Km 구간은 1940년에 강삭철도가 설치되어 1963년 5월 20일까지 운행되었다. 

 

 

    강삭철도는 두레박식과 순환식이 있는데, 통리~심포리 구간에는 두레박식이 이용됐다. 통리와 심포리에 소규모의 조차장이 조성되어, 도착한 화물 열차를 한 량씩 분할하여, 전용의 강삭차에 한 량씩 연결하여 올려보내거나 내려보내고, 이를 다시 조성하여 운행하였다고 한다. 인크라인은 450마력과 750마력의 전동기 2대로서 강삭차(鋼索車) 를 이용하여 화차 1량씩 수송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복선에 15도 45분의 구배선(265/1000)에다 강삭을 감아 오르내리는 것이며 최대로 감아 올리는 중량이 56톤인데 이중 강삭차가 11톤 공차자중 12톤 와이어로프 중량12톤으로 그것을 제외하면 최대화물 적재중량은 21톤이 된다. 최대 감아내리는 중량은 83톤인데 자중을 제외하면 화물은 40톤이 된다. 이로 인해 하루에 취급하는 화물 처리량은 최대 745톤으로 수송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고 한다.

    

    강삭속도는 최대 250M/min, 평균 240M/min이었고, 운전시간은 780초(기동시간 60초, 전속시간 480초, 감속시간 60초, 정지시간 180초), 운전구간은 약 1,080m였고, 최극구배는 265/1000(15도 45분)이었다고 한다. (철도동호회 자료에 의한 것임)

 

    1963년 5월 20일 10시에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통리역(해발700m)에서 주로 터널로 이루어진 8.5Km의 황지본선(심포리~통리)이 개통되면서 강삭철도는 사라졌다. 당시 황지본선 공사비는 378,310,000원, 화약은 81톤을 사용, 레일 725톤, 시멘트251,000포, 공사기간은 1961년 8월 8일부터 1963년 5월 15일까지라고 한다.

 

출처: 한국철도공사                        황지본선 개통 1963. 05. 20.(심포리-통리)  출처: 한국철도공사 황지본선 개통식

 

 

 

 

출처: 한국철도공사   황지본선 개통식

 

출처: 한국철도공사   황지본선 개통식

 

    국내 유일 로프형인/ 강삭철도 설치되어//

    두레박식 쇠줄로써/ 끌어 올린 화물열차//

    수직의/ 가파른 길을/ 사람들은 걸어갔다//


    지정석도 없었기에/ 사람들은 서둘렀다//

    뜀박질로 가야지만/ 좌석이 확보되던//  

    거기도/ 자리쟁탈전/ 늘 생존은 치열했다//

                      「강삭철도 - 영동선의 긴 봄날 52」전문  

 

 처:철도동호인카페    강삭철도(인크라인) 심포리-통리 구간을 사람들이 걸어 오르고 있다                    

           

출처: 한국철도공사                                 강삭철도

 

 

    화물열차는 인크라인에 의해 한 번에 한 차량씩 끌어올렸지만 여객열차는 무거워 끌어올릴 수 없었다. 때문에 영주 쪽에서 오는 영동선 여객열차는 통리역이 종착역이었고, 북평(현재는 동해) 쪽에서 오는 여객열차는 심포리역이 종착역이 되었다. 승객들은 통리역이나 심포리역에 내려서 다음역인 심포리역이나 통리역까지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 오르고 걸어 내려서 대기하고 있던 열차를 타야했다. 지정석이 없었기 때문에 여객열차가 정차하자마자 내려 다음 역을 향해 가파른 언덕길을 내달려야만 했다. 이들을 위해 짐꾼들인 지게꾼이 등장하게 되었고, 한창때 150 여명의 짐꾼이 승객들과 함께 고개 오르내리기를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짐꾼들은 짐삯 받고/ 무거운 짐을 지고//

    때로는 어린애도,/ 허약한 노인들도//     지게에/ 얹어져 가는/ 진풍경도 있었다//

 

 

    통리서 짐 받아 싣고/ 심포리로 내렸다가//

    다시 또 짐 받아서/ 통리 고개 올라가는//

    하루의/ 두 번 왕래길/ 뻐근했던 삶이었다//                         「강삭철도 짐꾼들 - 영동선의 긴 봄날 53」전문 

 

 

출처: 이희탁(삼척문화위원)                  인크라인 옛터

                        

  겨울철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고, 걸어내려 오려면 눈이라도 오는 날은 아주 미끄러웠다. 그럴 경우에는 신발 밑창에 네 개의 징을 박아 만든 지금의 아이젠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신발인, 싸카를 역전에서 대여해 주곤 하였다. 그리고 그 손님들과 함께 올라가서 그것을 회수하여 가지고 다시 그 역전에서 기차를 기다렸다가 손님에게 대여해 주고 함께 내려와서 회수하는 방법을 썼다. 이것도 빌릴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신발에 새끼줄 등을 감아 덜 미끄럽게 하여 언덕길을 오르거나 내렸다. 

 

    철판을 구해다가/ 신발 크기로 자르고//

    뾰족한 징 네 개 박고/ 좌우에는 끈을 달아//

    신발의/ 밑창에 대어/ 좌우끈을 묶었다//                        「싸카 - 영동선의 긴 봄날 56」첫째 수


    기차를 바꿔 타며/ 기다리는 한, 두 시간//

    야바위에 빠진 사람/ 색시에게 홀린 사람//

    몇 차례/ 탑승 방송에도/ 아랑곳이 없었다//                         「강삭철도 주변 - 영동선의 긴 봄날 55」둘째 수

 

    통리역전은 늘 시끌벅적했는데 직접 농사지은 것들과 삼척, 묵호에서 올라온 생선을 팔기 위한 임시장이 서곤 했고, 소매치기(쓰리꾼)들도 있었는데 대바우촌이란 사창가의 폭력조직이었던 흰장갑과 빨간마후라 등이 유명했으며 이들이 마을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고 한다. 또 기차가 정차했다가 출발하기까지는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는데, 그 동안 사람들은 통리에서 심포리로, 심포리에서 통리로 옮겨서 기차를 타고 시간이 남으면 술도 한 잔씩 하다가 계속 마시든가, 아니면 노름의 일종인 야바위에 빠져 그것을 계속 하느라 기차시간을 놓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출처: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안심포리(심포리 4반)

 

 

    올라가는 통리선과/ 내려오는 심포선이//

    햇빛과 바람 속을/ 통과하고 있을 때//

    양편엔/ 식당과 술집/ 한 시대를 풍미했다//


    몇 개의 긴 터널로/ 사라져간 강삭철도//

    그 한 때 화려하던/ 까마득한 언덕길엔//

    추억만/ 잡풀로 자라/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풍경 - 영동선의 긴 봄날 60」전문

 

    1963년 강삭철도가 사라지면서 주변의 여러 풍경도 함께 사라졌다. 식당과 술집도 없어지고, 짐꾼들도 사라지고, 싸카를 빌려주던 풍경도 사라졌다. 지금은 강삭철도가 운행되던 공간만 남아 잡풀들이 자라고 있어, 역사의 현장을 희미하게 알려줄 뿐이다.  

 

 

2. 심포고개와 너와집

 

 

    산들이 여미며 여미며/ 틔워놓은 가장자리//

    골짝마다 내려앉은/ 하늘빛이 발끝에 채고//     어룽진/ 어머님 모습 위에/ 나지막한 한숨소리//

 

 

    보득솔 가지 위로/ 햇살이 졸다 가면//

    하릴없이 밤 재촉는/ 부엉이 울음소리//

    포근히/ 감싸 안으며/ 달로 떠서 웃는 고개//                       「심포고개 - 영동선의 긴 봄날 62」전문

 

 

    나한정에서 심포리로 오르자면 인적 없는 고갯길이 있다. 수시로 도계장을 다녀오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때로 그 산길을 밤에 걸어오다가 도깨비불처럼 보이는 산짐승의 사나운 눈빛도 만나고, 때로는 험한 산길 위에서 돌을 굴려 내리기도 하던 이상한 불빛에 놀라 혼비백산 땀에 흠뻑 젖어 집에 도착한 적도 몇 번 있었다. 도계장을 자주 가시던 어머니는 이 고개로 걸어올 때가 많았는데, 나는 자주 이 고개에서 어머니 마중을 하기도 하였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어머니가 기찻길로 힘들게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오실 때쯤에는 언제나 마중을 가곤 하였다. 

 

 출처: 태백사진연구회                                                          신리의 너와집

 

 

 

    너와집 코클에서/ 관솔불이 타던 밤은//

    웅성이던 겨울바람/ 그도 잠시 물러나고//

    가만히/ 숨죽인 산골/ 함박눈만 쏟아졌다//

 

 

    하루, 이틀, 사흘/ 눈은 내려 쌓이고//

    영동선 기적소리만/ 간혹 길게 울릴 때//

    아버지/ 헛기침 속엔/ 한겨울이 깊어갔다// 

                       「눈은 내려 쌓이고 - 영동선의 긴 봄날 64」전문

  

    내가 어렸을 때 심포리에는 너와집이 꽤 있었다. 어머니가 주로 마실을 가던 집은 동네유지들 집인 너와집이었다. 너와집이란 소나무 널빤지를 기와처럼 잘라 지붕에 얹은 집인데, 너와의 크기는 보통 가로 20~30센티미터, 가로 40~50센티미터 정도이며, 너와를 기와처럼 지붕에 얹어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도록 무거운 돌이나 통나무로 지그시 눌러놓기도 한다. 너와의 수명은 10~20년이고 오래 되면 2~3년마다 낡은 너와를 바꾸기도 한다. 어머니가 바느질감이나 뜨개질감을 가지고 밤마실을 가면, 그곳 안방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벽난로와 비슷한 코클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난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내조명을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코클 주변에 모여 앉아 관솔에 불을 붙여서 코클 속에 넣어두고 그 불빛으로 일을 했다. 관솔은 소나무 장작 중에 나이테가 넓게 자라지 못하고 좁게 자란 곳이다. 소나무에서 나오는 기름인 송진이 많이 뭉쳐져 있어 나무 빛깔이 붉은색을 띄고 있으며 불이 빨리 붙고 오래 탄다. 몇 개의 관솔을 미리 준비하여 꺼지지 않도록 계속 관솔을 넣어주면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바느질을 하든가, 뜨개질을 할 때에는 그 곁에서 책을 읽든가, 고양이와 놀든가, 아니면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겨울이면 3~4일씩 폭설이 내리고 심하면 기차․자동차도 끊어져 고립되는 산간마을에서 식량걱정, 땔감걱정으로 아버지는 긴 겨울밤 잠 못 이루시고 헛기침으로 지새우곤 하셨다. 

 

3. 도계의 느티나무와 심포리의 미인폭포

 

    초등학교 시절, 하굣길에 아카시아 꽃그늘에 둘러앉아 꽁보리밥 도시락을 고추장에 비벼먹던 추억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낭만적이다. 아카시아 꽃향기 짙은 오월, 그 그늘에서 우리는 재잘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고, 도시락을 다 먹고는 캄캄한 기찻굴을 빠져오며 기차를 만날까 두려워했었다. 그러다가 가끔은 굴속에서 기차를 만나면 사람들이 피하게 만들어 놓은 움뿍하게 파인 곳에 피하든가, 아니면 기차가 다 지나갈 때까지 굴벽에 바짝 붙어 서 있곤 했다. 물론 평상시에는 조금 멀더라고 굴 등으로 걸어오곤 하였다.  

 

출처: 이희탁(삼척문화위원)        도계중학 느티나무


    이 산골 깊은 역사/ 누구보다 잘 아는 이//

    동네사람 사랑 받아/ 천여 년을 살아가며//

    봄이면/ 꽃보다 고운/ 속잎들을 틔우고//


    단오날엔 위령제로/ 영혼들을 위로하고//

    때로는 휴식 공간/ 우정이 쌓여 가던//     꿈처럼/ 커 가는 나무/ 추억 속의 긴잎느티//                        「도계중학 느티나무 - 영동선의 긴 봄날 66」전문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도계리 도계중학교에는 아름다운 긴잎느티나무(느릅나무과 식물)가 있었다. 그것은 천연기념물 제9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27m, 둘레는 8.9m, 밑둥둘레는 11.1m, 동서로는 32m, 남북으로는 23m로 퍼져있는 나이가 약 천 년이나 되는 긴잎느티나무이다.(안내판 참조) 

    긴잎 느티나무는 도계와 인근마을 사람들이 모두 애착을 갖고 사랑하는 수령  천 년이 넘는 나무였다. 어려서 600년이 넘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 시집에는 600년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 수필을 쓰면서 고쳤음을 밝혀둔다. 

    도계중학교에서 모범생이었으며 전교회장을 하던 오빠에게서 자주 긴잎느티나무 이야기를 들었다. 때로는 도계석탄공사에서 사고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고, 때로는 운동 후 더 없이 좋은 휴식 공간이기도 했다. 여름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이 자리를 내다 깔고 모여앉아 잡담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 IMAGE 4 =-

 출처: 이근덕 시인                   미인폭포(일명 심포폭포)

 

 

    파열도 때로는/ 이리 벅찬 감격일까//

    생의 한 뼘 둘레서도/ 자라나는 사랑이듯//

    물보라/ 흩날리느니/ 수정보다 눈부셔라//    

    신라적 유씨 가문/ 님 구하던 미녀는//

    세상의 짝 없는 미(美)/ 하늘을 원망하며//

    한 송이/ 붉은 꽃 되어/ 이 폭포를 덮었다지//

 

 

    그 후론 미인폭포라/ 이름 되어 남았으니//

    만 년을 살리자는/ 하늘의 속셈인 게지//

    치마폭/ 닮은 폭포가/ 오늘따라 유난하다//                        「미인폭포 - 영동선의 긴 봄날 71」전문

 

    미인폭포는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심포리에 있는 높이 30m인 아름다운 폭포이다. 일명 심포폭포(深浦暴布)라고도 하며, 태백시 통동(통리)에서 삼척시 가곡면(柯谷面)으로 넘어가는 곳의 오봉산과 백병산 사이에 있다. 폭포는 오십천(五十川) 상류에 해당하며, 하곡이 낮은 지대로 급격히 경사진 곳에 있다. 폭포가 흐르는 좁은 협곡에는 퇴적암 층리가 잘 발달해 있다. 한국판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미인 폭포 주변의 협곡은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역암층으로 신생대 초의 심한 단층 작용 속에서 강물에 침식돼 270미터 깊이로 패여 내려갔다.

 

    협곡의 전체적인 색조가 붉은색을 띠는데 이것은 퇴적암들이 강물 속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건조한 기후조건으로 공기 중에서 노출된 채 산화되었기 때문이다. 주로 굵은 자갈로 된 역암과 모래로 이루어진 사암, 진흙으로 굳은 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발 700m 안팎의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안개나 구름이 끼는 날이 많으며, 이때 경치가 더욱 아름답고 신비하다. 전설에 의하면 일몰 전과 일출 전에 이 폭포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면 풍년이요, 찬바람이 불면 흉년을 예측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들은 미인폭포의 유래는, 예전 신라시대에 높은터라는 곳에 유씨라는 성을 가진 미인이 살았는데, 무척 아름다웠으나 혼기를 지나도 마음에 맞는 짝을 찾을 수 없어 비관하여 이 폭포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연대를 알 수 없는 옛적에 폭포 옆 높은터에 사는 한 미녀가 남편을 사별한 후 재혼할 낭군을 찾았다. 그러나 사별한 남편만한 사람이 없어 재혼할 수 없었다.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자기 신세를 비관하여 투신자살했다고도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미인 폭포 주변에는 100년마다 미인이 태어나는데, 한 번은 미모가 빼어난 여자아이를 부모가 아이의 장래를 걱정하여 암매장 하였더니 폭포 속에서 용마(龍馬)가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통리에서 가까운 황지(黃池)는 황부자의 집터였다 한다. 지독한 구두쇠인 황영감은 시주 온 스님에게 쇠똥을 퍼담아 주었고, 옆에서 이것을 보던 며느리는 시아버지 몰래 스님에게 쇠똥을 털어내고 쌀을 담아 주었다한다. 스님이 벌을 내리어 이곳 집터자리를 연못으로 만들었기에 그 이름이 황지(黃池)이다. 이곳 연못을 들여다보면 집의 서까래 등 옛날 집의 흔적이 보인다고 어머니께 얘기 들었지만 내가 직접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또 며느리는 통리에서 신리로 들어가는 산등선 꼭대기에 돌이 되어 있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나 동네사람들이 그 길로 가면 멀리에 그 바위돌이 보인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주변의 나무들이 많이 자라는 바람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아기를 업고 있는 아낙네 모습의 바위이다. 황지는 일 천 삼백 리 낙동강의 시원,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출처: 김진수

 

 

 

 출처: 이희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출처: 김진수

 

출처: 김진수

 

 

                                 출처: 홍성조  

 

                                출처: 김진수

 

4. 영동선에 잠들다

 

    퇴직금이나 연금이 별로 없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철도건널목지기를 퇴직하고 나서는 별로 소득이 없어서 건널목 맞은편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밭농사를 조금하면서 연명했다. 그래도 육남매의 자식들을 키우기가 힘들어 봄이면 깊은 산골에서 산나물을 뜯어다가 말려서 나물죽과 나물밥을 해 먹었다. 가을에는 구황식물이었던 도토리를 주워다가 도토리묵도 해 먹고, 또 삶아서 말렸다가 도토리밥도 만들어 먹으면서 한겨울을 나곤 하였다.

    그 사이 4․19 혁명이 지나가고, 5․16 혁명이 일어나도 여전히 산골은 가난하고 힘들었다. 그렇게 <영동선>과 함께 사시다가 진달래가 곱게 피던 1968년 4월 19일에 57세를 일기로 아버지는 ‘영동선의 긴 기적’으로 영원히 누우셨다.

 

    긴 겨울    

    물소리가

    깨어나고 있을 무렵


    아버진 가랑가랑

    삶을 앓아 누우시며


    고단한 

    삶의 종착역

    다가가고 있었다



    봄날도      한창이던      사월도 중순 무렵


    간이역 불빛 같던

    희미한 한 생애가


    영동선 

    긴 철로 위에

    기적(汽笛)으로 누우셨다

                 「영동선에 잠들다 - 영동선의 긴 봄날 77」전문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일수록 겉으로 보이는 물면보다 안으로 더 많은 깊은 흐름을 간직하듯이, 일상의 잔잔한 이야기를 통해 행간을 흐르는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 내 고향 오십천 물굽이가 강을 이루고 마침내 바다로 흘러 동해 바다가 되듯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큰 이야기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영동선의 긴 봄날>이란 연작시를 썼다.

 

    적은 양이지만 만주이민의 이야기, 산골우체부의 이야기, 영동선의 이야기, 도탄굴의 이야기, 강삭철도 이야기 등 사실적인 경험을 토대로 시를 썼다. 훗날 역사의 자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심포리․통리 사이의 강삭철도는 이미 사라져 아주 약간의 흔적만 있고, 지그재그 철로인 스위치백 철도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아쉬운 풍경이다. 이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더라도 그 흔적과 유물들은 남아야 한다. 우리가 애써 보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쳐 온 길,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이곳과 이곳에 관련된 아버지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고향의 옛 추억이 잠겨있는 이곳이 영동선에서 제외된다고 하여 많이 아쉽고 안타까왔는데 강원도에서 이곳을 관광지로 추진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여겨진다. 반복되는 역사의 흥망성쇠를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을 테니까…….

 

 

                             

흐르는 음악: Lotus Of Heart

 

※『영동선의 긴 봄날』시집을 쓰는데 자료도움을 주신 김태수(삼척 박물관 학예연구사) 시인님께, 작품 및 수필을 꼼꼼히 읽어 잘못된 곳을 지적해 주시고, 또 한국철도공사 강원지사 간부들에게 강연을 하게 해 주신 박춘선 한국철도공사 광역철도사업본부장님께, 그리고 시집 서문을 써 주신 김진선 강원도지사님께, 시집 발문을 써 주신 유성호 교수님께 다시 한 번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또한 『영동선의 긴 봄날』시집과 詩<미인폭포>를 아껴주시는 전세영 삼척시의회의원님, 사진자료를 보내주신 이희탁 삼척문화위원님, 시집 내용을 바탕으로 수필을 써 주신 김남각 수필가님, 또 삼척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미인폭포와 유래담을 제 작품으로 소개해 주신 정영기 시인님께, 미인폭포 사진을 멋지게 찍어주신 이근덕 시인님께,『영동선의 긴 봄날』의 작품을 좋은 시조로 소개해 주신 정완영, 정순량, 리강룡 시인님께, 그 외 『영동선의 긴 봄날』시집을 사랑해 주시고 소개해 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09년 8월 14일 최종 수정 

 

   

 

 

동백산-도계 스위치백 그림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아래는 동백산역 그림인데,

하구배로 내려가면서 솔안터널로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솔안터널은 단선터널이고

중간에 신호장이 있어서 교행(하행열차와 상행열차가 서로 비켜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림: 청석엔지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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