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로 쓰는 영동선 철길 따라 제1호>
영동선 철로변에
우현 김민정
1) 영동선의 긴 봄날
무심히 피었다 지는/ 풀꽃보다 더 무심히
모두가 떠나버린/ 영동선 철로변에
당신은/ 당신의 무덤/ 홀로 지켜 왔습니다
살아서 못 떠나던/ 철로변의 인생이라
죽어서도 지키시는/ 당신의 자리인 걸
진달래/ 그걸 알아서/ 서럽도록 핀답니다
시대가 변하고/ 강산도 변했지요
그러나 여전히/ 당신의 무덤가엔
봄이면/ 제비꽃, 할미꽃이/ 활짝활짝 핍니다
세월이 좀 더 가면/ 당신이 계신 자리
우리들의 자리도/ 그 자리가 아닐까요
열차가/ 사람만 바꿔 태워/ 같은 길을 달리듯이
「철로변 인생 - 영동선의 긴 봄날1」 전문
올해는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0주년 되는 해이다. 유난히 참꽃이 붉던 해였는데…꼭히 40주기를 기념하기 위하여 맞추지는 않았지만, 쓰다가 보니 40주기에『영동선의 긴 봄날』을 출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님 무덤가의 단상을 몇 편 써 보았는데, 『좋은문학』이란 잡지에 연작시를 연재하게 되면서 시집으로 묶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한 권의 서정서사시조집이 탄생되었다.
「영동선의 긴 봄날 1」의 작품은 ‘영동선 철로변에’란 제목으로, 1988년 봄에 『시조문학』에 발표하여 서벌선생님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기도 했고, 마지막 작품인 「영동선의 긴 봄날 77」은 2008년 2월에 완성되었으므로 결국 이 시집은 20년에 걸쳐 완성된 셈이다. 물론 처음에는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러한 결심을 하기 시작한 2004년부터 본다면 4년 만에 완성된 시집이라 볼 수도 있다.
인간의 삶이란 무구한 시간의 역사에서 보면 대단히 짧다. 70~80년을 살면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희로애락을 만나고 때로는 절망적일 때도, 때로는 희망적일 때도 있다. 권력을 지니며 사는 삶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삶도 있다. 부자로 살 수도 있고,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 인간에겐 타고난 시대가 있고, 타고난 운명이 있다. 인간의 힘으로 선택할 수 없고,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 우리는 운명을 믿고, 신을 찾는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의 힘든 부분을 살다 가신 분 중의 한 사람이 나의 어버이시다. 특별히 위대할 것도, 존경받을 것도 없는 평범한 분들이다. 그러나 강원도 산골의 한 순박한 무명인으로서 당신들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성실하고, 정직하게 영동선 철로변에서 살다 가신 나의 부모님께 나는 한없는 존경과 애정을 보낸다. 그러면서 인간 누구의 삶이나 특별히 잘난 것도, 특별히 못난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때문에 나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가난한 부모님의 과거와 나의 과거도 작품으로 소개할 수 있다. 가감 없이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될 뿐, 생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경험한 모든 사실을 다 나열할 수는 없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이야기는 전개되었다. 영동선 철길 따라 자연스럽게 꽃이 피고 지듯이.
윗조상들의 묘소에 제단이나 비석이 없어 아버님 산소에도 세우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제단이 없음.
2) 철로변 아이의 꿈
자욱한 안개 속에/ 보슬비가 내리면
굴뚝 옆에 앉아서/ 생솔 연기 맡으며
십 리 밖 기적소리에도/ 마음은 그네를 타고
여덟 시 화물차가/ 덜컹대고 꼬릴 틀면
책보를 둘러메고/ 오릿길을 달음질쳐
단발의/ 어린 소녀가/ 나폴대며 가고 있다
철로변 아이의 꿈이/ 노을처럼 깔리던 곳
재잘대며 넘나들던/ 기찻굴 위 오솔길엔
마타리/ 꽃잎이 하나/ 추억처럼 피고 있다
「철로변 아이의 꿈 - 영동선의 긴 봄날3」 전문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집에서 기찻길을 따라 5리쯤 되는 안심포리라는 곳에 학교가 있어서 언니들을 따라서 다녔다. 그곳은 도계국민학교 심포분교였다. 시계가 없던 시골에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오로지 기차였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노래 제목처럼, 8시가 되면 나한정역이나, 흥전역에서 화물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우리 마을로 올라오는데, 그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서둘러 책보를 둘러메고 안심포리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어쩌다 짧은 단발머리를 언니께 묶어달라고 하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떼를 쓰며 몇 번씩 다시 묶는 날은 기차가 집 옆을 통과해 버린다. 그때부터는 마음이 급해져서 지각하지 않으려고 기차를 따라 달음박질치기 시작한다. 고집이 무척 세어 착한 언니들을 귀찮게 했지만, 내가 달리기를 잘 하는 건 순전히 그 덕분인지도 모른다. 운동회를 하는 날이면 상으로 주어지던 공책을 20권 이상씩 받아 1년내 쓰기도 하였다.
학교까지 가려면 세 가지 길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길은 기찻굴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기찻굴등을 따라 가서 다시 기찻길과 만났다가 가는 것이고, 셋째는 굴등으로 가다가 더 높은 언덕을 넘어서 학교 건물로 이어지는 길이다. 우리는 세 길 중에서 그때마다 하나를 골라 다녔다.
기찻굴로 가자면 빠르긴 한데 중간에서 기차를 만날까봐, 또 컴컴하고 무서워서 잘 안 다녔다. 기찻굴등으로 가는 길에는 어린애기 무덤이 참 많았다. 어른의 무덤같은 정식 무덤이 아니라 항아리에 애기를 넣어 묻고는 그 위에 돌을 얹어 돌무덤을 만든 것이다. 어쩌다 날이 흐리거나 비라도 추적거리는 날에는 우리는 무서워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더 많이, 더 크게 떠들면서 그 길을 오고 갔다. 또 하나의 길은 서낭당이 있는 길이다. 큰 엄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가끔 그곳에서 동네굿을 하기 때문에 헝겊쪼가리들이 많이 붙어 있었으며 그곳을 지나자면 귀신이 붙을 것 같아 어쩐지 조금 무서웠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면 등굣길, 하굣길에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 다녔다. 어쩌다가 친구들과 싸우거나, 청소를 하게 되어 늦을 때는 등하교길이 무서워서 빨리 통과하기 위해 뜀박질로 그곳을 오가곤 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오면서 기찻길가 아카시아 나무가 많은 곳에서 점심을 먹곤 하였다. 보리쌀을 많이 넣은 밥에다가 고추장이나 열무김치, 아니면 고추장에다가 풋고추 몇 개가 반찬의 전부였지만, 누구도 투덜대지 않았다. 도시락을 들고 흔들면 자연스럽게 비빔밥이 되어 우리는 둘러앉아 즐겁게 재잘대며 먹곤 하였다. 그리고는 아카시아 꽃을 따다가 끝부분의 꿀을 빨아먹기도 하고, 아카시아 줄기에서 잎을 훑어내고 줄기만 남겨가지고는 서로의 머리를 퍼머하기 시작한다. 친구의 어깨에 기대거나 다리를 베고 누우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아카시아 줄기로 그렇게 한참을 메어 두면, 신기하게도 머리들이 곱슬곱슬 퍼머머리가 되곤 하였다. 물론 머리를 감으면 금방 풀리기는 하지만 2~3일씩은 간다.
또 우리는 돌때(돌봉숭아)가 낀 돌을 찾아 물을 약간 축여서 작은 돌로 긁기 시작하면 돌때가 모아진다. 그것을 손톱에 대고 얼마동안 비닐로 감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손톱에는 붉은 물이 든다. 돌봉숭아를 들이는 것이다. 또 길가의 호박넝쿨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피지 않은 호박꽃 봉오리를 찾아 봉오리속 꽃술을 손톱에 문지른다. 그러면 또 금방 주황빛의 물이 손톱에 든다. 이렇게 꽃봉숭아가 아닌 것으로 손톱에 물을 들이기도 하였다.
또 산길을 넘어오다가 도라지꽃을 발견하게 되면 달려가 꺾어왔다. 보라색 도라지꽃에다가 길가에 흔한 개미를 한 마리 잡아넣고 입구를 막고 한참 있으면 입구를 찾으려고 우왕좌왕하는 개미에서 나오는 페르몬 때문인지 도라지꽃은 울긋불긋 물이 들고, 우리는 그것을 보며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또 마타리 꽃도 산에 아주 많이 피었는데, 흰색과 노란색 두 가지가 있었으며, 심심하면 그것도 꺾어들고 집에 왔다.
철길가를 지나오다가 보면 작은 바위들이 있는 낮은 구릉이 있는데, 그곳에는 뱀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도 무서워서 돌을 던져 뱀을 쫓든가, 아니면 주변에 뱀이 있는가 살피면서 그곳을 뛰어서 통과하곤 하였다. 어떤 날은 몇 마리씩 떼지어 혀를 날름거리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어서 혼비백산 집으로 달려온 적도 있다. 원수 갚는 뱀의 동화를 많이 읽어 무서워서 뱀을 죽일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다.
철길가 둑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생명력이 강하고 뿌리가 질긴 아카시아 나무를 참 많이 심었는데, 그 꽃들은 향기가 진해 5월달 쯤이면 철길은 아주 향기롭다. 하교길이 심심한 우리들은 아카시아 잎줄기를 여러 장 따 가지고 가위바위보를 하여 이긴 사람이 아카시아 잎을 한 장씩 떼어 버리는 내기를 하면서 집까지 오곤 하였다. 또 기차가 어디쯤 오는가 하고 철로에다 귀를 대어 보기도 하고, 철로에서 떨어지지 않고 오래 걷기 내기를 하면서 걷기도 하였다. 중, 고등학교 때 체육시간에 평행봉을 걸으라고 하면 나는 자신 있게 잘 걸었는데 어렸을 때 철로를 걸으며 쌓은 실력 때문이었다.
3) 그리움은 수액처럼
기차가 지나가면/ 흔들리던 풀잎처럼
격변하는 세월 속을/ 절뚝이며 걸어온 당신
봄이면/ 산수유 피듯/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떠나던 기적을 향해/ 손 흔들고 손 흔들면
상행선 기적 소린/ 서울을 향해 달리고
애릿한/ 그리움들만/ 수액처럼 흐릅디다
「흔들리던 풀잎처럼-영동선의 긴 봄날 2」 첫째,둘째 수
영동선 철로에 대한 추억! 나와 친구들은 등굣길에 또는 하굣길에 사람을 태운 기차라도 만나면 참 많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멀리 서울을 향해 달리는 상행선 기차를 보면, 그때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오빠와 언니를 떠올리곤 아련한 그리움을 느끼곤 했다. 기차가 바람처럼 지나가고 나면 기차가 지나간 곳에는 그리움인양 얼마동안 풀잎들이 흔들렸다. 그렇게 흔들리는 풀잎과 가끔씩 들려오는 기적소리는 나에게 늘 애릿한 그리움, 어디론가 떠나고픈 마음을 남기곤 했다.
건널목 바로 맞은편 기찻길 옆에 살면서 기차가 시간마다 오르내려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나는 잠을 잘 잤다. “기찻길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라는 노래가 자주 떠오르는 건, 꼭 어린 날의 나를 위해 지은 동요 같아서다. 우리가 살던 오두막 집은 지금은 없어지고 신작로가의 밭이 되었다. 사람은 늘환경에 적응하며 살기 마련인가 보다. 지금 같으면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잘 텐데….
김민정의 고향 옛집
건널목 맞은편집임. 이 건물들 모두 사라짐.
(72년도 사진임)
김민정의 고향 옛집터
탄광촌의 붐이 일었는지, 3학년이 되던 해에는 심포분교에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바깥심포리 즉 심포리 2반인 우리 동네에다가 새 건물을 짓고 심포국민학교라 부르게 되었다. 그때부터 집에서 2~3분의 가까운 거리라서 나는 참 편하게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하교 후에도 심심하면 학교에 달려가서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도서실에 있는 어린이 잡지책을 많이 빌려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어깨동무’라는 잡지의 만화를 열심히 읽었고, 그 외의 잡지와 책도 많이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독서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내가 국어선생이 된 까닭도 거기에 있는 것 같아 지금도 연락이 닿는 초등학교 4학년 최종철 선생님께 감사한다. 우리에게 늘 짧은 시간에라도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말씀해 주신 선생님이다. 나는 그 선생님께 3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크리스마스 카드, 또는 연하장을 보내드린 걸로 기억한다. 선생님도 늘 답장을 해 주셨고…. 30년이 지나고는 내 생활이 더 바빠져서, 또 메일편지가 유행하면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카드를 보내지 않게 되었고 선생님께도 보내드리지 못했다.
나와 친구들은 학교의 쉬는 시간이나, 하교 후에도 모여서 술래잡기, 고무줄하기, 줄넘기, 공기하기, 땅따먹기, 공놀이, 자치기, 오재미놀이 등을 하였는데 계절마다 놀이가 달라졌고, 아이들은 계절에 맞는 놀이를 잘도 찾아내어 참 신나게 놀았었다. 한 팀이 하기 시작하면 곧 유행이 되었다. 저녁에도 우리는 어두워지기 전까지, 어른들이 잘 시간이라고 큰 소리로 부를 때까지도 동네에서 시끄럽게 놀았다. 건널목 주변에서도 놀고, 집 가까이 길가에 있는 산소에 가서 뒹굴고도 놀았는데, 산소에 대한 무서움도 없이 그냥 놀이터처럼 생각했다.
숨박꼭질을 할 때는 남의 집 보리밭, 콩밭, 옥수수 밭에도 숨었다. 자치기를 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맞추거나 남의 집 호박에 꽂히기도 하여 혼나기도 하고, 땅따먹기를 하다가 친구와 말다툼도 하고, 호박꽃에다가 개똥벌레를 잡아넣어 호롱불이라고 가지고 다니기도 하고, 개똥벌레를 잡아 반짝이는 부분을 눈에다가 붙이고 풀숲에 숨어 있다가 친구들이 개똥벌레인 줄 알고 잡으러 오면 놀래주기도 하였다. 여름저녁이면 모깃불을 피워놓고 돗자리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기도 하고 가을저녁이면 은하수 길게 흐르는 모습을 보면서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하였다.
나에겐 단짝 친구가 한 명 있었다. 한 학급이 계속 올라가므로 반이 바뀌는 일이 없어, 6년 동안 아침에도 저녁에도 우리는 붙어 다녔다. 때로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보를 던져 놓고 그 친구를 따라가서 하루 종일 놀다가 어두워질 때라야 집에 오기도 하였다. 내가 서울로 전학할 때 그 친구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기도 하였고, 우정 영원히 간직하자고 맹세도 하였다. 그 후 그 친구는 단짝을 잃고 무척 외로워했다고 한다. 내가 전학하고 나서 우리는 서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장문의 편지를 썼고,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 서로의 낙이었다. 그것이 중학교 3년 동안에도 계속 이어지고 고등학교에 2학년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나 고2때 연탄가스사고로 그 친구는 하늘나라로 가고 더 이상 다정한 편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동안 그 친구와 주고받은 수백 통의 편지를 상자에다가 간직하여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다니며 내 무덤에 함께 가져갈 목록1호라고 딸들에게 늘 말하곤 하였는데 며칠 전에는 스크랩북에 모두 정리하여 깨끗이 보관하기로 하였다. 적어도 내가 사는 날까지는. 그 친구와의 우정 잊지 않을 것이다. 그 친구의 편지뿐만 아니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받은 수 천 통의 편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며칠 전에 거의 정리를 했다. 6연째 연재중인 국방일보 시해설까지 합쳐 현재는 22권의 스크랩북이 되었다. 언젠가 고향에 내 문학관(희망사항)이 생긴다면 그곳에 전시할 예정이다. 늘 과거에 집착하는, 아직도 사춘기소녀 같은 여자라고 남편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나의 의지는 변하지 않고 있다.
흐르는 음악: Lotus Of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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