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그리운 날엔 기차를 타라
1. 심포리 기찻길 (1)
김민정(시조시인, 한국문인협회부이사장)
심포리 기찻길 겨울풍경 (건널목 부근) 사진: 김보현
『영동선의 긴 봄날』이란 시조집을 낸 지는 벌써 16년, 그리고 『사람이 그리운 날엔 기차를 타라』는 수필집을 낸 지도 벌써 14년째다. 그동안도 영동선은 많이 변했고, 나도 많이 변했다. 나는 『영동선의 긴 봄날』이란 시조집 발간 후에도 아버지를 그리는 작품을 여러 편 썼고, 철도행사도 많이 했다.
모든 것은 기록해 놓지 않으면 기억에서 사라진다.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기 위해 그동안의 모습을 기록하기로 한다. 미흡하더라도 흔적을 남긴다면 언젠가는 〈영동선의 역사〉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포리 기찻길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 기차는 다니지 않는다. 2012년 도계역에서 동백산으로 긴 터널이 뚫려 그동안 산굽이를 돌아돌아 가기도 하고 기차가 뒤로 가기도 하던 나한정역, 흥전역, 심포리역, 통리역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선 구간이 되었다.
종로3가역, 경복궁역 등 서울지하철역에 게시된 작품 「심포리 기찻길」
기찻길 아스라이 / 한 굽이씩 돌 때마다//
아카시아 꽃내음이 / 그날처럼 향기롭다//
아버지 / 뒷모습 같은
휘굽어진 고향 철길
돌이끼 곱게 갈아 / 손톱 끝에 물들이고//
새로 깔린 자갈밭을 / 좋아라, 뛰어가면//
지금도 / 내 이름 부르며
아버지가 서 계실까
- 김민정 시조집 『백악기 붉은 기침』에 실린 「심포리 기찻길」 전문
심포리 추추파크 안의 로비중앙에 세워진 「심포리 기찻길」 앞에서 필자
「심포리 기찻길」이란 작품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며 쓴 작품이며 서울지하철역 종로3가역, 경복궁역, 월계역 등에 게재가 되었던 작품이다. 「심포리 기찻길」 이란 작품은 2021~2023년까지 서울지하철역 5곳 정도에 게재된 적이 있고, 또 심포리 관광지 추추파크 건물의 중앙로비에 시비로 게재되었다.
지금 심포리 기찻길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선구간이다. 관광지로 바뀌어 관광열차와 레일바이크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 레일바이크 중에서는 가장 구간도 길고 경사 30도 정도라 바퀴를 열심히 돌리느라 고생할 필요도 없어 편하고, 가면서 보는 풍경도 일품이고 터널도 많아서 스릴도 있고, 터널 속에 여러 가지 장치들도 재미있어 이 레일바이크를 타본 학생들은 가장 멋지고 재미있는 레일바이크라고 좋아하지만 서울에서 먼 거리에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안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심포리 기찻길 봄풍경 사진: 이희탁
무심히 피었다 지는 풀꽃보다 더 무심히
모두가 떠나버린 영동선 철로변에
당신은 / 당신의 무덤 / 홀로 지켜 왔습니다
살아서 못 떠나던 철로변의 인생이라
죽어서도 지키시는 당신의 자리인걸
진달래 / 그걸 알아서 / 서럽도록 핀답니다
시대가 변하고 강산도 변했지요
그러나 여전히 당신의 무덤가엔
봄이면 / 제비꽃, 할미꽃이 / 활짝활짝 핍니다
세월이 좀 더 가면 당신이 계신 자리
우리들의 자리도 그 자리가 아닐까요
열차가 / 사람만 바꿔 태워 / 같은 길을 달리듯이
“김민정 시인은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심포리에서 출생하여 1985년 『시조문학』창간 25주년 기념 지상백일장 장원을 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는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서울시내 중등학교 교사로 교직생활을 하는 시인이다. 위의 시 「철로변 인생」-영동선의 긴 봄날1-은 동학출판사에서 출간한 시집 『영동선의 긴 봄날』 제일 첫머리에 실린 작품으로 시인의 아버지에 대한 삶의 전생(全生)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 속에는 오랫동안 심포리 영동선 철로(鐵路) 곁을 지키다가 돌아가신 삶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김민정 시인은 서울에 살면서 항상 고향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아버지를 기리는 효녀 시인이다. 서울에 살지만 강원도 사람의 순수성을 고스란히 지켜오며 살아온 시인이며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순수 서정 시인이다. 해마다 아버지를 기리는 정이 넘쳐나서 심포리 건널목 근처 밭에 모신 아버지 묘소를 방문하여 그날의 그리운 정을 풀고 가는 시인이기도 하다.”
- 김민정, 「철로변 인생」 전문 (박영교시인, 영주시민신문 2008년 6월 게재)
심포리 기찻길 여름풍경 사진: 김영롱
심포리 기찻길 가을풍경 사진: 김보현
심포리 기찻길 겨울풍경 사진: 김보현
심포리(深浦里)는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깊은개로 불리던 마을이며 내가 태어나고 초등학교 시절까지 자란 나의 고향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골이 깊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 한다. 최민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꽃 피는 봄이 오면’의 촬영지 도계에서도 10리쯤 떨어진 오지이다. 집 옆은 바로 기차길이었고, 이 심포리 기찻길은 우리나라 철도 중에서 유일하게 스위치백 철도구간으로 철길이 지그재그로 되어 있는 곳이기도 해서 차가 거꾸로 가던 곳이었고, 또 한 때 강삭철도(인크라인) 구간이 있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철도의 역사에 있어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의 기찻길의 모습을 지니고 있던 곳이다. 기찻길과 5미터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집이 있었고, 어린 시절 나는 그 집에서 수시로 지나다니던 기찻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한 때 아버지가 말단 공무원으로 철도에 약간 근무를 했었고, 그 인연으로 아버지에 관한 시조와 수필을 썼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철도시인> 명명을 한국철도공사로부터 받기도 했다.
한국철도공사 부산경남본부로부터 철도시인 공로패 받음
70~80년, 아니 지금은 수명이 길어져 100년을 산다고 해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의 삶이란 무구한 시간의 역사에서 보면 대단히 짧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희로애락을 만나며 살아간다. 때로는 기쁨도 슬픔도 절망도 희망도 만나며 즐거움과 괴로움도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권력을 지니며 사는 삶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삶도 있다. 부자로 살 수도 있고,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 인간의 힘으로 선택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 우리는 운명을 믿고, 신을 찾고 종교를 만드는지도 모른다.
영동선 철로의 역사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다른 철로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독 내 고향 심포리의 기찻길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는 듯해서 고향의 기찻길을 보고 있으면 가난한 내 어린 날을 보듯이 마음이 애틋해진다.
자욱한 안개 속에 / 보슬비가 내리면
굴뚝 옆에 앉아서 / 생솔 연기 맡으며
십 리 밖 기적소리에도 / 마음은 그네를 타고
여덟 시 화물차가 / 덜컹대고 꼬릴 틀면
책보를 둘러메고 / 오 리 길을 달음질쳐
단발의 어린 소녀가 / 나폴대며 가고 있다
철로변 아이의 꿈이 / 노을처럼 깔리던 곳
재잘대며 넘나들던 / 기찻굴 등 오솔길엔
마타리 꽃잎이 하나 / 추억처럼 피고 있다
「철로변 아이의 꿈」 전문(『영동선의 긴 봄날』에 수록)
도계초등학교 심포분교가 있던 마을인 안심포리 사진: 김보현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집에서 기찻길을 따라 오 리쯤 되는 안심포리라는 곳에 학교가 있어서 언니를 따라서 다녔다. 그곳은 도계초등학교 심포분교였다. 시계가 없던 시골에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오로지 기차였다. 8시가 되면 나한정 역이나 흥전역에서 화물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우리 마을로 올라오는데, 그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서둘러 책보를 둘러메고 안심포리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어쩌다 짧은 단발머리를 언니께 묶어달라고 하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떼를 쓰며 몇 번씩 다시 묶는 날은 기차가 집 옆을 통과해 버린다. 그때부터는 마음이 급해져서 지각하지 않으려고 기차를 좇아 달음박질치기 시작한다. 내가 달리기를 잘 하는 건 순전히 그 덕분인지도 모른다.
학교까지 가려면 세 갈래 길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길은 기찻길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기찻굴 등을 따라가서 다시 기찻길과 만나서 가는 길이었고, 셋째는 기찻굴 등으로 가다가 더 높은 언덕을 넘어서 학교건물 뒤로 이어진 길이다.
기찻굴은 빠르긴 한데 컴컴하고 중간에서 기차를 만날까 봐 무서워서 잘 안 다녔다. 기찻굴 등으로 가는 길에는 어린애기 무덤이 참 많았다. 애기무덤은 어른의 무덤 같은 정식 무덤이 아니라 항아리에 애기를 넣고 그 위에 돌을 얹어 돌무덤을 만든 것이다. 어쩌다 날이 흐리거나 비라도 추적거리는 날에는 우리는 무서워 삼삼오오 짝을 지어 더 많이, 더 크게 떠들면서 그 길을 오고 갔다. 또 하나의 길은 서낭당이 있는 길이다. 큰 엄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가끔 그곳에서 동네굿을 하기 때문에 헝겊쪼가리들이 많이 붙어 있었으며 그곳을 지나자면 귀신이 붙을 것 같아 조금 무서웠다. 어쩌다가 청소를 하게 되거나 아니면 친구들과 싸워 혼자 오게 될 때는 등하굣길이 무서워서 빨리 통과하기 위해 뜀박질로 그곳을 오가곤 했다.
아카시아꽃이 피어 있는 심포리 기찻길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오면서 기찻길가 아카시아 나무가 많은 곳에서, 점심시간에 안 먹고 놔둔 점심도시락을 먹곤 하였다. 보리쌀을 많이 넣은 밥에다가 고추장이나 열무김치, 아니면 고추장에다가 풋고추 몇 개가 반찬의 전부였지만, 누구도 투덜대지 않았다. 도시락에 고추장과 열무김치를 넣고 흔들면 자연스럽게 비빔밥이 되어 우리는 둘러앉아 즐겁게 재잘대며 먹곤 하였다. 그리고는 아카시아 꽃을 따다가 끝부분의 꿀을 빨아먹기도 하고, 아카시아 줄기에서 잎을 훑어내고 줄기만 남겨가지고는 서로의 머리를 말기 시작한다. 친구의 어깨에 기대거나 친구의 다리를 베고 누우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아카시아 줄기로 그렇게 머리를 한참 메어 두면, 신기하게도 머리들이 곱슬곱슬한 퍼머머리가 되곤하였다. 물론 머리를 감으면 금방 풀리지만 그대로 두면 2~3일씩은 간다.
철길가 둑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생명력이 강하고 뿌리가 질긴 아카시아 나무를 참 많이 심었는데, 그 꽃들은 향기가 진해 5월쯤이면 철길은 아주 향기롭다. 하굣길이 심심한 우리들은 아카시아 잎줄기를 여러 장 따 가지고 가위바위보를 하여 이긴 사람이 아카시아 잎을 한 장씩 떼어버리는 내기를 하면서 집까지 오곤하였다. 또 기차가 어디쯤 오는가 하고 철로에다 귀를 대어 보기도 하고, 철로에서 떨어지지 않고 오래 걷기 내기를 하면서 걷기도 하였다.
돌 때(돌봉숭아)가 낀 돌을 찾아 물을 약가 축여서 작은 돌로 긁기 시작하면 돌때가 모아진다. 그것을 손톱에 대고 얼마 동안 비닐로 감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손톱에는 돌봉숭아의 붉은 물이 든다. 또 길가의 호박넝쿨이라도 발견하면 피지 않은 호박꽃(수꽃)의 봉오리를 따다가 봉오리속 꽃술을 손톱에 문지른다. 그러면 또 금방 주황빛의 물이 손톱에 든다. 이렇게 꽃봉숭아가 아닌 것으로도 손톱에 물을 들이기도 하며 놀았다.
산길을 넘어오다가 도라지꽃이 발견되면 달려가 꺾어왔다. 보라색 도라지꽃에다가 길가에 흔한 개미를 한 마리 잡아넣고 꽃을 오므리고 한참 있으면 입구를 찾으려고 우왕좌왕하는 개미에서 나오는 페르몬 때문인지 도라지꽃은 울긋불긋 물이 들고, 우리는 그것을 보며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또 마타리 꽃도 산에 많이 피었는데, 흰색과 노란색 두 가지가 있었으며, 심심하면 그것도 꺾어들고 집에 왔다.
철길가를 지나오다가 보면 작은 바위들이 있는 낮은 구릉이 있는데, 그 곳에는 뱀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도 무서워서 돌을 던져 뱀을 쫓든가, 아니면 주변에 뱀이 있는가 살피면서 그곳을 뛰어서 통과하곤 하였다. 어떤 날은 몇 마리씩 떼지어 혀를 날름거리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어서 혼비백산 집으로 달려온 적도 있다. 원수 갚은 뱀의 동화를 많이 읽어서인지 무서워서 뱀을 죽일 생각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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