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정 시조 해설(2020. 2. 3.)
동화론(同話論)과 화리론(話離論)에 근거한 표현구조와 기제(機制)
-김민정 시인론
노 창 수 (시인·문학평론가)
1. 들어가는 말
시의 대상이 ‘장면’이냐 ‘일’이냐에 따라 화자가 지향하는 태도는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내용이 객관적 사실의 진술이냐 주관적 감정의 표현이냐에 따라 시의 유형이 가름되기도 한다. 물론 시조도 ‘묘사(장면)’와 ‘서술(일)’이라는 ‘표현’(진술)에 따라 작품의 특징이 현현(顯現)된다. 하므로 시조쓰기에 화자 설정은 그를 자유롭게 하거나, 반대로 구속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시를 쓸 때의 고민은, 현실과 문장이 같아야 한다거나 아니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두 개의 메커니즘이 작용하므로 시인의 입장을 망설이게 한다. 독자는, 시인의 생각 추가 닿는 곳, 즉 대상의 가변성에 의해 어떤 하나를 선택·지지하며 작품에 접속한다. 시인은, ‘내 이야기’를 ‘내’가 한 것처럼 쓸 것인가, 아니면 ‘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쓸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나를 ‘나’처럼 이야기하거나 ‘남’처럼 이야기하거나에 그냥 무관심할 수도 있겠지만, 자기 이야기를 함에도 ‘나-남’처럼 쓰는 게 작품이다. 우리의 언어로 이렇듯 ‘나·남’ 간의 소통을 하려면 말의 상상화(想像話)·추상화(抽象話)가 필요하다.
이때 현실과 문장이 같아야 한다는 것은 이른바 ‘문체의 동화론(同話論)’이고, 현실과 문장은 반드시 달라야 한다는 것은 ‘문체의 화리론(話離論)’이다. 즉 ‘동화’란 현실과 같은 화자이고, ‘화리’란 현실과 다른 화자이겠다. 다시 말해 자신이 전적으로 문면(文面)의 화자로 나서서 말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자신은 뒤에 숨고 그럴 듯한 퍼소나를 앞세워 연출하는 방법도 있다.
이런 시각으로 김민정 시인의 작품 가운데 ‘동화론’과 ‘화리론’이 분명한 몇 작품을 골라 이 평설의 마당에 볕을 쏘이고자 한다.
2. 시인 개관과 논의의 방향
그 동안 김민정 시인의 작품집에 수록된 발문들을 검토해 보니, 대저 네 가지 면을 다루었다. (1)‘순수와 화해의 시학’(『지상의 꿈』, 고요아침, 2005), (2)‘열정과 긍정의 미학’(『사랑하고 싶던 날』, 알토란, 2006), (3)‘시원(始原)의 시간으로 통하는 길 위의 시’(『백악기 붉은 기침』, 고요아침, 2014), (4)‘사랑과 기억의 깊이를 노래하는 순간의 미학’(『바다열차』, 책만드는집, 2016) 등이다. 동원된 언어를 보니 ‘순수’, ‘열정’, ‘화해’, ‘긍정’, ‘사랑’, ‘서정’, ‘미학’ 등 대체로 대상과 사물에 대한 긍정과 사랑, 서정의 미학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시인의 온정적 사랑과 열정적인 삶을 반영하는 단어들이겠다. 하지만 시인의 외형적 서정을 보는 일에 치우친 감도 있다. 그래서, 정작 창작 배경이 된 화자와 대상의 심리기제, 그리고 작품의 행간에 있는 내밀구조를 놓쳤다는 생각에서 필자 나름의 평설 방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시조를 보는 눈은 작품을 천착한 후, 심리동인적(心理動因的) 기술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는다. 그게 이 필을 들게 된 동기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다루어온 순수서정시 논의와는 다른 시각에서, 문체의 ‘동화’와 ‘화리’의 방향, 그리고 화자의 심상저변에 깔린 내면적 구조, 나아가 그런 시학을 보이는 단계화된 심리변화의 양상들을 살피는데 이 평설의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김민정 시인은 ‘나래시조문학회’ 회장으로 일한 바 있으며, ‘시조문학진흥회’ 부이사장, ‘한국여성시조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문협 시조분과’ 회장이면서, 현직 국어교사이다. 그는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졸업 이후, 대학 강단과 군부대에서 시조강의와 시조 소개의 활약이 또한 두드러진다. 이렇듯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도 시조관련 문학행사와 작품발표, 세미나 등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마당발’이기도 하다. 그는 1985년 등단 이후, 모두 8권의 시조집, 그리고 저서로 2권의 시조연구와 2권의 시조평설집을 간행한 바 있다.
3. 겸허·온유한 시조를 위한 질서화와 그 고구(考究)
‘겸허, 겸손, 겸애’ 등의 ‘겸(謙)’자 돌림은 김민정 시인에게 붙일 수 있는 바, 스스로 낮은 자세를 견지하여 파생된 닉네임이다. 이러한 정신 가짐은 작품에서도 자주 확인되는데, 겸허·겸애적 표현이 전 작품의 1/5을 차지할 정도로 많다. 그의 시조에는 외형적 겸손함 보다는 내적 심리구조에 더욱 겸허·겸애 정신을 드러냄으로서 시적 대상과 화자를 유기적으로 탄탄하게 하기도 한다.
우선 겸허·겸애를 동반한 그의 내면은 시적 대상으로부터 순수한 시심을 유도해내고 이를 변주해 보인다. 시인은 이런 시스템을 2005년의 시집 『지상의 꿈』 이후부터 이미 자신의 틀로 구축한 듯하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이른바 겸손·겸애적 내용 구성의 한 틀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겸허·겸애의 정서가 작품을 어떻게 질서화 하는지 다음 작품들을 살피며 좇아가 보기로 한다.
물소리를 읽겠다고
물가에 앉았다가
물소리를 쓰겠다고
절벽 아래 귀를 열고
사무쳐 와글거리는
내 소리만 들었다
-「들었다」 전문
이 작품은 「들었다」는 제목에 “와글거리는 내 소리만”이란 내면적 한계(限界)로 결구(結構)한다. 이게 그의 한 특징으로 “~소리만”과 같은 ‘자아 좁히기’의 겸허·겸애 현상을 그린다. 시적 대상과 화자 사이의 이런 겸허·겸애의 위상은 이외 여러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컨대, 「반구정 아래」(“조금 더 높은 곳 바라 끌어안은 맘입니다”), 「수선화와 올빼미」(“늦도록 잠 못드는 나, 거들떠도 안 보네요”), 「이후」(“수줍음 여미어가며 발자국 세어가며”), 「빈그릇」(“언제나 나는 이렇게 채운 것을 비운다”), 「꽃섶에서」(“소슬히 구름꽃 피우고 깨금발로 가는 봄날”) 등에서 그렇다.
「들었다」는 일견, ‘메타시조’로도 읽을 수 있다. 자신의 시적 태도로 “물소리”를 “읽”고 “쓰겠다”는 다짐을 하는 까닭이다. 그는 “절벽 아래”로 가 “귀를 열”었지만, 정작 “내 소리만” 듣고 온 일을 생각한다. 해서, 필자는 자신의 창작 태도를 반성하는 ‘메타시조’라고 본다. 하지만 이는 겉에 드러난 창작의 반추일 뿐이다. 그 안에는 “내 소리”, 즉 내심은 “물소리”를 듣지 못한데 대한 안타까운 현실을 역시 겸손해하듯 말하는 데 있다. 작품은 3단 구성으로 즉 [물소리-읽기], [물소리-쓰기], [물소리-듣기]로 연속되어 있다. 이는 국어과의 ‘표현·이해 과정’에서 가장 기초적인 [읽기, 쓰기, 듣기]의 기능 영역을 시조에 함의한 경우로도 볼 수 있다.
다음 작품도 마찬가지의 겸허·겸애의 서정을 기본으로 다룬다. 그래, 자아의 내면에 자리한 ‘수석 다듬기’를 통해, “오롯하다”란 그 수석 앞의 겸허가 사유하는 과정에 깊이 작용한다.
수시로 일렁이는 맨 몸의 저 파도처럼
뱉어 논 울음의 씨 자근자근 밟다가,
여울진 물무늬인양 나도 따라 여울지다
더 없는 고요 속에 꽃으로 오기까지
쓰다듬고 더듬어서 돌의 뼈를 볼 때까지
한 치를 넘지 못하는 그 생각의 안과 밖
-「오롯하다」 전문
필자가 알기로, ‘수석’은 김민정 시인의 오랜 취미생활을 넘어 명실 공히 전문가 수준에 이르렀다고까지 본다. 하면, 맞는지 모르겠다. 좌대 위에 묵묵히 앉아있는 수석으로부터 일어나는 화자의 움직임이란 한 심성수련과정의 상호교류하는 장(場)처럼 내면의 두 정서가 겹쳐와 작품 안에 투영된다. “일렁이다”, “밟다”, “여울지다”와 같은 동사들처럼 말이다. 한데, 그게 “맨몸, 울음의 씨, 물무늬”의 명사로 앞의 동사들이 인과적으로 기능하도록 도와준다. 즉 [맨몸-일렁이다], [울음의 씨-밟다], [물무늬-여울지다]로 이어지는 단계가 그렇다.
다음으로 둘째 수에 “오다, “보다, 넘지 못하다”의 동사에 걸리는 명사는 “고요 속의 꽃, 돌의 뼈, 생각의 안과 밖” 등 명사구로 전언되는 게 스스로 동사와 결합한다. 즉 [고요 속의 꽃-오다], [돌의 뼈-보다], [생각의 안과 밖-한 치를 넘지 못하다] 등으로부터 이미지 발전경로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시조의 제목이자 수석의 자세를 드러낸 “오롯하다”는 말에서 풍기듯 하나의 자존감 또는 우월감으로 존재하는 수석상(壽石像)을 활유한다. 그 뉘앙스가 어렵게 탐석·채석해온 귀석(貴石)일시 분명함도 알게 한다. 이를 통하여 오롯한 수석 앞에 겸허히 선 한 시인 상(像)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첫째수 [물무늬→여울지다]와 둘째수 [생각의 안과 밖→한 치를 넘지 못하다]에 드러난 바대로 화자의 한계는 그 겸허함에 의해 가려진다.
4. ‘창밖-창안’ 그 보이는 자와의 묵시적 교신(交信)
김민정 시인에게 붙은 닉네임 그 ‘열정시인’답게 그는 매체를 망라하여 작품을 발표한다. 특히 《나래시조》 지면에는 단골로 작품을 소개해 왔다. 이렇듯 그의 시조들은 목하 다양하게 현시(顯示) 중이다. 수석시조(壽石,水石時調)와 같은 전문가적 일가견도 있어 어쩜 기획평설로 엮었을 법은 했지만 지금까지 편집되지 않고 있다. 하면, 다음 작품은 수석 소재의 기 발표작과 조금은 색다르다고 여겨 하나의 ‘자동기술’류의 묘사라는 시각으로 보려한다.
화자는 “창과 창 사이”로 비쳐 보이는 한 여자의 표정을 따라간다. 그건 시선산책(視線散策)의 유유함이겠다. 그러다 마주친 눈길이 “무색해”하듯 “속내를 들키”기도 하고, “더러”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그런 나머지 그만 서로 잠잠해져버린다. 화자(관찰자)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여자의 표정을 따라가는데, 예의 ‘자동기술’로 그의 심리 상태를 전언한다. 그는 두 여자를 보며 ‘자기의식’과 ‘상대의식’의 ‘여자’를 나란히 비교한다. 바라보는 창과 비쳐 보이는 창은 두 여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의식상황을 엿보는 심리적 경영(鏡映)에 빠진다. 화자가 보는 여자는 “시시각각 변하”고,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가는 다시금 “멀어”지는 것이다. 시조 속의 여자는 여유롭듯, 흔들리듯 아름다운 프로필을 지녔다. 하므로 화자가 자주 훔쳐볼만한 대상이리라.
머무는 것은 없다 시시각각 변한다
알면서도 사랑하고 알면서도 흔들리는
어쩌다
눈을 피해도
속내를 들켜버린
카페 유리문에 옆모습을 다 드러낸
한 여자의 긴 머리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누구를
기다리는 듯
양볼 더러 붉어지는
강물이 소리없이 다가왔다 멀어지고
빛나는 눈썹 위로 아슬히, 푸른 이마
한동안
마주보다가
그만 서로 무색해진
-「창과 창 사이」 전문
사실 이 시조는 ‘의식의 흐름’ 말고도, 구도 면에서 시각화, 영상화가 돋보이기도 한다. 영상의 출발 시점은 묘사, 그리고 이후의 진술로 발전된다. 묘사는 정지된 대상에 가하는 필력이고, 진술은 움직이는 대상에의 변환기술이다. 이를 근간으로 대상과 장면에 대해 시인은 자의식적 묘사와 진술로 그 옷을 입힌다. 시인은 시문(詩文)의 자동기술을 통해 독자의 추이 또는 전이가(轉移價)를 높이기도 한다. 이 작품은 여자의 흔들림에 대해 진술하지만, 사실은 정지된 실루엣을 배면에다 깔았다. 화자는, 창 사이로 보게 되는 여자를 “알면서도 사랑하는” 관계라는 걸 점묘(點描)해 보인다. 그 흔들림이란 곧 떨리는 사랑의 감정일 수도 있을 터이다. 그게, “카페 유리문”을 통해 “옆모습”을 보이는 여자, 그 “긴 머리채가 미세하게” 흩날리는 여자, “빛나는 눈썹 위로 아슬히 푸른 이마”를 가진 여자라는 최고 미적 대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독자는 마치 한 폭 그림을 보듯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하나의 모델에 대한 데생처럼 그리는 대목엔 생동하는 점사법(漸寫法)도 보인다. 창문에 비쳐 등장한 여자에 대한 관찰자적 방점은 셋째 수에 가 있다. 즉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빛나는 눈썹”처럼 발하는 시의 눈은, “아슬히 푸른 이마”를 보는 즐거운 ‘기미(機微)’를 보임으로서 독자에게 일으키는 시각미의 준동 또한 크다. 하여, 이 작품은 이지적 품격과 관조적 심리를 동시에 인식하도록 한다. 창을 통하여 본, 그리고 그 창에 비친 여자의 옆모습은, 종장에다 그 이미지 층을 누적시킴으로서 상(像)은 더욱 분명해진다. 시의 자동기술적 호흡을 규칙적으로 유도하는 대목 즉, (1)어쩌다 눈을 피해도 속내를 들켜버린 모습, (2)누구를 기다리는 듯 양볼 더 붉어지는 모습, (3)한 동안 마주 보다가 그만 서로 무색해진 모습 등은 각각 차례화 된, 그래서 화자와 여자가 암묵적으로 교환하는 눈짓, 그게 호응관계로 점층되는 것이다. 이 시조는 그런 자동기술의 수순에서도 다소 논리성을 견지한다.
로젠블레트(Louise Rosenblatt)는 읽기를 ‘거래이론(transactional theory)’을 바탕으로한 ‘반응중심이론(reponse-based theory)’을 수용론에서 빌려와 설명한 바 있다. 그의 ‘거래이론’이란 독자의 호소력과 영향력에 상호 길항(拮抗)하며 가독성(可讀性)을 높여주는 한 방법이다. 그래, 시의 효용도를 살리는 일종의 교육채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반응중심’의 수용체제는 [독자↔작품] 간의 상관도에 대해 맥락적 관점에서 보는 ‘경영기제’(經營機制)이기도 하다. 이른바 ‘신비평주의’의 ‘수용이론’과 맥을 같이하기도 하지만, ‘문학판의 최종 인식틀’이란 점에서 벌써 설득력을 얻은 바도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창과 창 사이”에 낀 두 여자의 의식에 대한 심리적 경영(鏡映)에 터한 자동기술법으로 화자와 여자의 심리적, 암묵적 교신이 전반에 흐른다.
5. 서정시조가 꿈꿀 시인의 정서적 도안
고대 그리스의 최초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Archilochus, BC680~645년경)와 사포(Psappho, BC610~580년경) 이후 서정시를 정의하거나 창작하는 ‘시학’은 수없이 많았다. 미국의 비평가이자 시인인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1895~1972)은 일찍이 서정시를 “한 순간의 감정을 노출시키기 위해 꾸려낸 하나의 도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서정시는 운율상 음량과 서로 균형을 이루며 형성된 정서”라고 정의했다. 그는 때로 사람의 격한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힘”도 작용하여, 생에 “어떤 일이 고통스럽고 억제할 수 없는 일일지라도 일단 그걸 취하게 되면 정돈된 균제미로 향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서정시는 사람들의 정서를 감싸주며 안정감을 갖도록 하는 치유기능이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이제, 이런 서정시의 관점에서 다음 몇 편을 살펴보겠다.
겨우내 웅크리고
참고 또 기다렸어
흙덩이가 바실바실
몸 틀기를 기다렸어
정수리
힘을 꽉, 주고
오늘을 기다렸어
한 며칠 뜬 눈으로
잠까지 설쳐가며
드디어 떡잎 두 장
쏘옥, 밀어냈지
세상에
명함 내밀고
헤헤, 웃는 패랭이
-「탈출」 전문
‘탈출’이란 기존 질서나 외피로부터 세계와 껍질을 부수고 뛰쳐나오는 일이다. 시조의 주인공 “패랭이”는 기다림 뒤에 얻는 바, 강한 생명력의 층계를 쌓아가고 있다. 그런 기초체력으로 “떡잎 두 장”에 온 힘을 쏟아 “쏘옥 밀어내”듯 “탈출”을 구동시킨다. 이런 탈출을 감행하기까지 패랭이가 기다린 것은 “겨우내” 얼었던 “흙덩이” 속에서 바야흐로 “바실바실 몸 틀기를” 시작하는 그 봄이다. 그걸 종내 “기다렸”던 대로 누릴 만한 “패랭이”의 보람이리라. 그 뿌듯함을 기대하며 때 맞춰 “정수리”에 “힘을 꽉 주고” 그가 탈출(탄생)을 성공시킨다. 즉 출산과 성취를 한 번에 이루어내는 것이다. 여기에 ‘탄생’과 ‘성취’는 같은 도반(道伴)이지만 사실은 각기 다른 이데올로기를 향하기도 한다. 전자는 존재론적이고 후자는 가치론적인 게 그러하다. 이에 걸맞게 작품의 구성 또한 첫째수와 둘째수 양 천칭에 실린 중심과 같은 안정감을 유지하도록 한다. 즉 (1)탈출할 날을 기다리는 패랭이꽃(존재론적), 그리고 (2)“세상”을 향해 “명함 내밀고” 웃는 패랭이꽃(가치론적)으로 차례화하는 단계를 밟는다. 세상을 향한 여러 생명체가 유지되는 건 그냥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작품은 ‘존재성’과 ‘가치성’을 병치시킴으로서 균형적인 생명체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그런 시적 메타를 주어 생태적 보편주의를 실천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은 바쁜 도시의 복잡한 아침 생활이지만, 반대로 그것을 밀쳐두고 잔잔한 톤으로 이야기하는 한가함을 보인다.
비바람 눈보라에 수백 년 할퀸 자국
인수봉 어깨쯤에, 새 한 마리 앉아 있다
바위도 늙어 가냐고
부리 쪼며 말을 건다
어둠을 걷어내며 부챗살을 펴고 있는
장엄한 아침빛이 서울을 품어줄 때
자잘한 세상일들이
그 품에서 다 녹는다
-「서울 아침」 전문
사람의 최고가치 인정에는 그가 지닌 서정시다운 습윤(濕潤)과 정서의 도포(塗布)도 함께 일어나기 마련이다. 김민정 시인의 특성, 그러니까 온유함으로 빚어낸 이 작품은 “인수봉”의 “새”와 “부챗살”의 정담이 “아침빛”의 서정적 동인으로 작용하여 빚어진다. “바위”에게 “말을 거”는 [소통]과 “세상일”을 “품안에 다 녹”이는 그 [포용]의 의인법을 구사한다. 하여, 환경론자들이 비판 일색으로 말한 건조한 이 도시를 정작 서울시민인 그는 촉촉한 습윤의 도시로 도포하는 것이다. 사실 “서울 아침”이란 러시아워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기계적 일상에 더 익숙해 있다. 함에도 시인은 서정의 습윤과 도포라는 서정시적 기운을 불어넣어 인정의 도시로 바꾼다. 이런 전환의 구동력은 이 작품 외에도, 「탑, 앙코르와트」(“정성껏 다섯 손가락 펼쳐드는 나를 본다”), 「장군, 길을 나서다」(“어둠의 장막 걷어 수평선에 걸쳐 놓고”), 「해남 고구마」(“정겨운 그 사람 손길이 알알이 안겨든다”), 「고지를 꿈꾸다」(“의식이 빠져나간 몸을 문득 돌아본다”) 등이 있다.
누구의 입김으로 창밖이 흐려지나
그 누구 발자국이 가슴을 찍고 있나
나 몰래 다녀가시는 까무룩한 새 그림자
예고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낯선 별조각이 이마에 부딪힐 때
혼곤한 어둠을 접듯 늦저녁의 새 울음
가지 끝 동박새가 목을 자꾸 갸웃댄다
고즈넉이 젖은 뜰에 홀로 환한 저 매화꽃
목청을 가라앉히며 제 부리를 묻는 새
-「손님」 전문
작품에서 “손님”이란 “새”로 표상된다. 새는 첫째수에서 “나 몰래 다녀가시는 까무룩한 새 그림자”로 그려진다. 둘째수에서는 “예고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손님” 즉 “새 울음” 신호가 등장한다. 그리고 셋째수에서는 “홀로 환한 매화꽃”에 “목청을 가라앉히며 제 부리를 묻는 새”로 앞의 새가 재 치환된다.
하여, 이 시조는 각 이미지를 연결고리 삼아 각 수(首)로 이어지는데, (1)“까무룩한 새 그림자”, (2)“늦저녁 새 울음”, (3)“제 부리 묻는 새” 등이 그것이다. 소재 역시 차례로 바뀌는 바, [새 그림자→새 울음→새 부리]로 이어지는 이동이 그것이다. “손님”으로서의 “새”가 ‘그림자, 울음, 부리’로부터 실증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이와 연계된 새의 존재는 ‘까무룩한, 늦저녁의, 묻는’ 등의 수식어에 힘을 받아 더 명징한 묘사로 이어가 덤에 이른다.
6. 사물에서 메타시조로 향한 자아 성찰
다음 「깨를 볶다가」는 두 수로 제안되었지만, 실은 “깨”의 존재와 관련 양상을 더 드러내기 위하여 각 세 장면으로 분할해 보인다. 그게 주부로서 “깨를 볶다가” 시에 접근한 생각을 표출하는 과정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이다. 그걸 (1)깨의 원래 자연적 모양, (2)볶은 깨의 모양과 향, (3)시인의 시혼 희망 등을 병치시키는 구조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깨”는 “물기가 촉촉이 밴 몸”이다. 그게 초·중·종장으로 이어져 (1)(2)(3)의 구조와 유사한 항 즉 (1′)(2′)(3′)으로 발전한다.
이를 부연하면, (1′)깨는 “홀쭉하고 납작하다”〈깨의 모양 : 존재 양상〉. 하지만 사람들에게 “깨”란 대체로 볶는다는 걸 전제로 이름 붙여진다. 그래 “달궈서 뜨거워진 큰 냄비에 쏟아놓”으면, 깨는 (2′)“살이 올라 고소”해진다〈깨의 가치 : 존재 효용〉. 결국 시인의 “시혼도 저리 볶으면” 시의 맛이 “고소함”은 물론 깨처럼 (3′)“통통하게 살”이 “오를까”〈시인의 시혼 : 성취 기대〉 하고 조심스럽게 시인으로서 지향을 보인다. 주부의 모습으로 “깨를 볶다가” 시인의 희망으로 되돌아오는 그 “깨”와 “시혼”을 천연스럽게 연결한다. 더 나아가 ‘볶은 깨’와 ‘볶은 시혼’의 효용성을 한 자리에 놓는다. 이는 ‘주부’와 ‘시인’을 겸하는 그의 일상에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향에서 부쳐온
참깨 한 봉지를
돌과 뉘를 고른 후에
물을 부어 씻어본다
물기가
촉촉이 밴 몸
홀쭉하고 납작하다
달궈서 뜨거워진
큰 냄비에 쏟아놓자
토도록, 살이 올라
고소함이 가득하다
시혼(詩魂)도
저리 볶으면,
통통하게 살 오를까
-「깨를 볶다가」 전문
이제, 작품을 좀더 ‘메타시조’ 쪽으로 살피는 앵글을 이동해보자. “고향에서 부쳐온 참깨 한 봉지”는 원재료, 그러니까 원고에 쓸 (1′′)[원소재]이다. 이에 대해 “달궈서 뜨거워진 큰 냄비”에 담긴 볶은 깨는 시인에 의해 가공된 (2′′)[창작품]이다. 그리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 고소함”이 풍기는 효과는 장차 예견되는 (3′′)[독자반응]일 법하다. 이러한 메타시조법의 구성엔 아마도 ‘김민정표’라는 라벨을 붙여도 좋을 듯하다. 이게 요리, 세탁, 청소 등 여성으로서의 일상을 견디면서도 시심과 시혼의 지구력을 잃지 않는 시인의 진구(振救)한 모습이며 이를 작품화한 연유일 듯하다.
이제, 메타시조법의 본격태에 해당하는 다음 작품을 깊이 살펴보려고 한다.
때로는 잔잔하게 가끔은 급물살로
이완과 긴장 사이 수도 없이 오고가다
마침내 종착점 닿는 우리들의 사랑 같은
네 마음과 내 마음을 한 조각씩 포갰을 때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려지는 그 순간이
빛나는 합일(合一)이라고, 불가분(不可分)의 힘이라고
절반의 생각 속에 그 절반의 행위 속에
웃음에 스며드는 눈물이 일렁일 때
발꿈치 다시 들고서 한 걸음씩 내딛는다
-「미완(未完)의 시」 전문
앞서 「깨를 볶다가」가 깨 볶기를 통하여 ‘메타시’를 응용강(應用講)했다면, 「미완의 시」는 ‘메타시’를 직강(直講)하는 정도쯤이겠다. 대저 문장표현의 기본이란 서두에 언급한대로 ‘서사’, ‘묘사’로 구성되고 시조는 거기에 ‘음보’를 더한다. 「미완의 시」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이다. 왜냐하면 시인에 의해 추가 가동성이 발휘될 하나의 과정물(過程物)인 이유에서이다. 이 구성적 문장의 예고대로 이 시조는, ‘서사’(초장)와 ‘묘사’(중장), 그리고 ‘음보’(종장)와 관련 구성을 한다. 즉 초장에서 (1)“때로는 잔잔하게 가끔은 급물살로”, (2)“네 마음과 내 마음을 한 조각씩 포갰을 때”, (3)“절반의 생각 속에 그 절반의 행위”는 ‘서사’와 관련되는 문장들이다. 중장에서 (1´)“이완과 긴장 사이 수도 없이 오고가다”, (2´)“한 치 오차 없이 그려지는 그 순간이”, (3´)“웃음에 스며드는 눈물이 일렁일 때”는 ‘묘사’와 관련되는 문장이다. 그리고 종장에서 (1´´)“마침내 종착점 닿는 우리들의 사랑 같은”, (2´´)“빛나는 합일이라고, 불가분의 힘이라고”, (3´´)“발꿈치 다시 들고서 한 걸음씩 내딛는다”에서 보듯이 ‘음보’와 관련되는 시조문장이자 그 호흡법이다. 「미완의 시」가 거의 완벽한 메타시적 구성을 하는 건, 시 쓰기에 시인 스스로가 늘 “미완”이라는 겸손함을 달고 있는 까닭이다.
7. 나오는 말
시조가 작품으로서 존립 또는 성립하는 조건이란 우선 ‘재미’와 ‘구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재미’는 스토리텔링하는 [방법], 그리고 ‘구조’는 초·중·종장 각 역할에 버틸 힘의 [기능], 그게 건강해야 한다. 그래 좋은 시조는 [재미→방법] & [구조→기능]의 조건으로 무한 수렴을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김민정 시인의 작품에 스토리텔링의 [구조-분석] 틀을 설정하고 그가 성취한 바를 피력했다. 그는 현재 다양한 시조문학 단체에서 활동영역을 확장하는 중으로 작품 활동 또한 왕성하다.
대체로 시는 화자의 지향 태도에 따라 묘사(장면)와 서술(일) 면에서 구분된다. 이 글에서도 시인의 시적 대상이 ‘장면’과 ‘일’에 대한 시인과 화자의 창작심리에 비중을 두고 살폈다. 그는 겸허·온유한 시조를 쓰기 위해, ‘장면’과 ‘일’을 섞어 쓰는 경향을 보인다. 그만큼 습작과 발표 연혁 또한 많다. 그의 작품 경향을 분석한 바, ⑴보이는(또는 보여지는) 타자와 자아의 묵시적 교신을 하는 심리기제, 그리고 ⑵시의 호소력을 다시 겨냥하는 생태성 지향, ⑶대상과 사물 인식에 대한 자아성찰 등이 돋보였다. 시조쓰기 문체에 ‘동화론’과 ‘화리론’ 중 주로 동화론에 더 가까운 창작 습관이란 점도 이 마무리에 밝힐 차례가 되었다. 그의 시법(詩法)에서 자연스러운 흐름, 거기에다 겸허·겸애의 자아와 생태성을 결합한 시학으로 우리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나누어준다. 앞으로 동화론, 또는 화리론을 겨냥한 시조 속의 퍼소나에게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을 기대하며 개발하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시조집 상재와 더불어 한국문단 중심에서 늘 건필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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