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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논문.평설

꼿꼿한 선비정신이 깃든 시 - 예연옥 시평

by 시조시인 김민정 2016. 2. 6.

<시 해설>

 

꼿꼿한 선비정신이 깃든 시

 

김민정(시조시인, 문학박사)

 

 

서예가이며 시조시인인 예연옥 선생이 이번에 시서화집을 출간한다. 오랜 시간 서예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더니 또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시조를 직접 서예로 써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조에 관심을 갖고, 등단을 하여 시조시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가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자신의 시를 자신의 글씨와 그림으로 표현한 시서화집을 준비하고 있다.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그의 시 몇 편을 살펴보고자 한다. 시서화집인 만큼 주로 시서화와 관련된 작품을 더 많이 다루었으며, 비슷한 성향의 작품들로 분류해 보았음을 밝힌다.

 

1

 

시간에 떠밀리는 물살 잠시 가두고

단계 연지(硯池) 맑은 물속에 주름진 하루 담아

뼈마디 꼿꼿이 세우고 젖은 길 걸어간다

 

 

마음의 균형을 잡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비우는 아픔으로 제 몸 곱게 갈아내어

천 년의 흔적 새긴다 묵향 짙은 물소리

                    -「자향먹(慈香墨)」전문

 

 

   그의 「자향먹(慈香墨)」은 먹의 일종인 자향먹에 관한 시조이다. 시인 자신이 서예가이니 서예에 반드시 필요한 ‘문방사우’인 종이, 붓, 먹, 벼루를 늘 가까이 대하며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중에 먹은 나무를 태운 그을음과 아교를 섞어서 만든 것으로 입자가 곱고 단단한 것이 좋다고 한다. 먹을 다루는 묵법(墨法)을 제대로 사용했을 때 비로소 서예라고 할 수 있다.

   먹은 글씨를 쓰는데 필수불가결의 용구로 먹의 좋고 나쁨은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좋은 먹은 붓의 연호든 경호든 관계없이 운필을 매끄럽게 하고 붙거나 껄끄럽거나 막힘이 없게 해 준다. 그래서 역대의 서예가들은 먹의 선택에 매우 주의를 기울였다.

   먹을 갈 때 물은 잡된 것이 없는 맑은 물을 사용해야 한다. 뜨거운 물이나 찻물(茶水)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 뜨거운 물은 먹이 빨리 풀리지만 먹의 입자가 굵게 되며, 찻물을 사용하면 먹의 광택에 손상을 준다. 먹을 갈 때는 무겁게 눌러서 가볍게 밀어야 한다. 먹은 반드시 수직으로 세우고 한 방향으로 갈아야 한다. 먹색의 농담은 사용하는 붓과 쓰려고 하는 서체가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중국 북송의 문인 소동파는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이 사람을 갈아 준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사람이 먹을 갈 때는 세 살 먹은 어린아이 손목처럼 순수하게, 또는 욕심을 내려놓은 칠순 노인의 손목같이 마음을 비운 자세로 먹을 갈아야 한다. 먹은 메마르고 꼿꼿한 몸을 세우고 벼루의 연지에 담긴 맑은 물속에 제 몸을 갈아내는 참으로 힘든 고통의 수행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을 비워낸 후라야 비로소 모든 색의 기본이 되는 먹물이 되어 하얀 화선지 여백 위에 묵향 짙은, 천 년의 흔적을 남긴다.

 

 

   예연옥 시인의 「자향먹(慈香墨)」은 먹에 관한 내용을 시조로 풀어내고 있다. 첫째 수에서 보면 현대는 바쁜 시대이며, 물의 속성은 흘러가는 것인데 그 바쁜 시대 속에 흐름이 속성인 물살을 잠시 가둬놓고 단계에서 난 연적에다 뼈마디 꼿꼿이 세운 먹을 갈고 있는 모습이다. ‘뼈마디 꼿꼿이 세우고 젖은 길 걸어간다’로 표현하고 있는데, 먹에게 젖은 길이란 고난의 길이며 고행의 길이다.

   둘째 수에서는 먹을 가는 사람과 먹이 일심동체가 되어 차분하게 마음의 균형을 잡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먹을 갈고 있다. 먹을 가는 것은 사람이지만, 여기에선 감정이입이 되어 있다. 먹이 자신을 갈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우는 아픔으로 제 몸 곱게 갈아내어’ 즉 시간이 지날수록 먹의 몸체는 점점 짧아지며, 제 몸을 갈아내는 살신성인으로 먹물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천 년의 흔적 새긴다 묵향 짙은 물소리’라고 하여, 그렇게 갈아낸 먹으로 글씨를 써서 그 흔적이 천 년을 흐른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자신을 갈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먹이 먹물로 변신되어 승화된 모습으로 천 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시는 묵에 대한 예찬이며, 천 년이 넘어서도 묵향 그윽한 아름다운 서예작품을 남기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반영된 좋은 작품이다.

 

 

마당가 매화나무 갈필로 뻗은 가지

긴 겨울 매운바람 잔설 감고 뒤척이다

결빙된 시간의 생채기 햇살 풀어 다독인다.

 

 

그리움 너무 깊었나 야윌 대로 야윈 가지

다가가 눈길 주면 오소소 떨리는 꽃눈

겨우내 접어둔 생각 살 터지듯 움이 트고.

 

 

눈 시린 빛살 속에 펼쳐든 화지(畵紙) 한 장

스치듯 번져가는 연둣빛 고운 멍울

내 마른 뜨락 위에도 꽃눈 뜨고 있을까.

                    -「봄뜰에서」전문

 

   예연옥 시인의 사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작품이다.‘마당가 매화나무 갈필로 뻗은 가지’란 멋진 표현 속에서 그의 서예가다운 모습이 나타난다. 그가 서예가이자 시인이기 때문에 ‘갈필’이란 멋진 표현도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문인화에서 즐기는 매화, 매서운 겨울 추위 속에서도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이며 향기 또한 뛰어나기에 시인 묵객들에게 지조 높은 꽃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꽃이다.

봄뜰을 서성이며 매화의 꽃눈을 살펴보는 시인의 마음이 둘째 수에 잘 담겨 있다. ‘결빙된 시간의 상채기 햇살 풀어 다독인다’고 하지만, 아직도 이른 봄 꽃샘의 추위 속에 ‘야윌 대로 야윈 가지 ~ 오소소 떨리는 꽃눈’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접어둔 생각 살 터지듯 움이 트’고 있다. 추위 속에서도 움을 틔우고 있는 매화의 모습을 잘 표현한 부분이다.

   첫째 수와 둘째 수가 마당가 매화의 피는 모습이라면 셋째 수는 화선지 위에 피는 봄이다. 펼쳐 든 화지 한 장 속에 ‘스치듯 번져가는 연둣빛 고운 멍울/ 내 마른 뜨락 위에도 꽃눈 뜨고 있을까.’라며 설의법을 사용하여 ‘이미 꽃눈을 뜨고 있다’는 강조의 효과를 낸다. 꽃눈 뜨는 매화의 향기가 느껴질 듯 다가오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바다 건너 벼랑 끝에 서간 한 장 띄운다

출렁이는 세상 분노 바닷물에 씻기우고

해종일 벼루 벗 삼아 풍진 세월 삭혔나요

 

 

붓 끝에 만 획 실어 일필로 써 내려가듯

고고한 선비 정신 넘볼 수 없겠지만

나 홀로 푸른 세한도 올곧게 부는 바람

 

 

태산 같이 높은 길 파지 가득 쌓다 보면

어느 날 집착 벗고 가는 길 보일까요

애연(愛硯)에 담긴 먹물 위로 대정이 일렁인다

                              -「붓길」전문

 

   이 시는 제주도 대정군에 귀양 갔던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생각하며 쓴 시이다. 예연옥 시인이 서예를 하며 시를 쓰는 만큼 조선시대 서예의 대가 중 한 사람인 추사 김정희를 흠모하며 쓴 이 한 편의 시에는 그의 서예정신, 시인정신이 들어가 있다. 추사가 귀양지에서 그의 붓을 휘둘러 외로움을 달래며 서예의 일가를 이루었던 것처럼 솔샘 예연옥 시인도 이 시대의 서예의 일가를 이루고 싶은 꿈이 깃든 작품이다. 외로운 귀양지에서 붓 끝에 모든 것을 실어 풍진 세월을 삭히고, 자신을 잊지 않고 책을 구해 보내주는 의리 있는 제자 역관 이상적(李尙迪)에게 문인화 세한도를 그려준 추사의 고고한 선비 정신, 그를 흠모하며 그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나 홀로 푸른 세한도 올곧게 부는 바람’이라는 표현을 낳고 있다. 태산 같이 높은 그 길에 이르자면 파지는 또 얼마나 많이 버려야 하는 것일까, 파지를 쌓는 하루하루가 이 시의 표현처럼 ‘어느 날 집착 벗고 가는길’이 보일 것이다.‘애연(愛硯)에 담긴 먹물 위로 대정이 일렁인다’는 표현 속에는 예연옥 시인도 추사와 같은 경지에 이르고자 오늘도 먹물과 애정이 담긴 연(硯)에다 붓을 적시며, 대정에서 외롭게 귀양살이했던 추사를 떠올리는 것이다. 시인의 삶의 길과 연관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다묵실(茶墨室) 문을 열고 봄 햇살 앉힌 자리

몸살 앓던 춘란 꽃대 앞섶 봉긋 여미고

겨우내 지쳤나 보다 가슴 가득 바람 인다

                       -「봄편지」셋째 수

 

   화자는 봄을 빨리 맞고 싶어 자신의 다묵실(茶墨室) 문을 열고 봄햇살을 앉힌다. 추위 속에서도 꽃대를 올리느라 힘들었던 난의 꽃대도 앞섶 봉긋 여미듯이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다. 시인은 이것을 보고 ‘겨우내 지쳤나 보다 가슴 가득 바람 인다’며 봄을 빨리 맞이하고픈 화자의 심정을 춘란이 봄을 기다리느라 지쳤던 듯이 표현한다. 춘란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순백의 봄을 꿈꾸는

기다림의 텃밭에

삼동(三冬)의 아픔 딛고

가지마다 벙근 꽃대

화폭 위

한 하늘 열어

지상을 다 덮는

꽃잎

      -「매화를 치다」 전문

 

 

   이 작품에서는 문인화 중 매화를 그리고 있는 시인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화폭 위/ 한 하늘 열어/ 지상을 다 덮는/ 꽃잎’ 순백의 봄, 순수한 봄날에 삼동의 긴 겨울의 고난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매화, 그 모습을 그리고 있는 그의 화폭. 그는 매화를 그리고 있고, 그 매화는 푸른 하늘을 열어 놓고 지상을 다 덮는 꽃잎이 된다. 지상은 온통 매화 꽃밭이다. 매화향기 난분분한 봄날이 코끝으로 다가온다. 시상이 잘 정돈된 한 편의 단시조이다.

 

 

2

 

 

양동마을 입구 지나 경사진 언덕 오르면

대문 안 사랑 누마루 서백당(書百堂) 편액 글씨

‘참을 인 하루 백번 쓰라’ 골격으로 집을 짓고

 

 

고택 마당 향나무 밑동 옹이 속에는

비바람 버텨내고 키워 올린 용트림

육백년 내력 간직한 품격으로 서 있다

 

 

하늘 활짝 열린 안채 대청마루 지나서

눈부신 햇살 앉은 정갈한 장독대엔

종부의 손길 맵짠 격 대물림으로 환하다

                      -「격(格)」전문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의 양동마을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통마을이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풍수지리적으로 아주 좋은 지형에 속한다고 꼽았다. 서백당(書百堂)은 원래 이름이 서인백(書忍百)이었다고 한다. 서인백의 유래를 보면 어느 해 중국에 9대가 한 집안에 살았는데 왕이 이곳을 지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어찌 9대가 이리 한집에 살 수 있었냐고 물으니 그는 붓과 종이를 들고 오더니 참을 인자를 100번 쓴 다음 임금에게 이러면 안 될 것이 없다면서 빙긋이 웃었다 한다.

   서백당은 월성(현 경주)손씨 손소(1433~1484)가 처가 입향을 하면서 이곳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곳이 월성 손씨의 종택이다. 종택의 종손은 문중을 위하여 자신은 버려야하는 무거운 자리다. 이곳 서백당은 혈이 모이는 지점으로 3명의 현인이 배출될 곳이라 하는데 손소가 지관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서백당을 지었다.

    「격(格)」이란 제목의 이 작품은 양동마을 서백당을 소재로 쓴 작품이다.‘참을 인 하루 백번 쓰라’는 편액 글씨를 그대로 인용한 이 시는 이 집이 어떤 집인지 알게 한다. 시인은 이 집을 둘러보며 이 집의 품격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월성 손씨의 종가인 서백당, 하루에 참을 인자 백번을 써야 이 집 주인으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일까. 시인은 ‘고택 마당 향나무 밑동 옹이 속에는/ 비바람 버텨내고 키워 올린 용트림/ 육백년 내력 간직한 품격으로 서 있다’며 이 고택 마당의 550년이 된 향나무를 찬양하고 있다. 이 집을 지을 때 손소가 직접 심었다는 나무다. 셋째 수에 오면 종가를 지키고 있는 정갈한 장독대에 눈이 미치고, ‘종부의 손길 맵짠 격 대물림으로 환하다’고 표현 했다.

   첫째 수에는 인내심을 지니고 사는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말하고 있고, 둘째 수에는 고택마당에 있는 향나무의 품격을 말하고 있고, 셋째 수에는 종갓집 며느리인 종부의 살림솜씨를 정갈한 장독대에서 찾으며 종부의 품격을 말하고 있는 작품으로, 양동마을 서백당의 모습을 한 편의 시조로 잘 빚어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눈꽃이 피고 지는 마음의 생채기엔

 

 

뒤척이는 그리움만 벼랑 끝 혼불 지피고

 

 

제 안에

벙근 꽃대 한 촉

 

 

아리다,

그윽한 향기

               -「한란(寒蘭)」 전문

 

   한란(寒蘭)은 추울 때 피기 때문에 한란이라고 하며 청초하고 우아한 모습이 아름답다. ‘허난설헌’을 ‘한란(寒蘭)’에 비유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눈꽃이 피고 지는 마음의 생채기엔/ 뒤척이는 그리움만 벼랑 끝 혼불 지피고/ 제 안에/ 벙근 꽃대 한 촉/ 아리다,/ 그윽한 향기’란 표현으로 생전에 자식 두 명을 잃고, 자신마저 27세에 요절한 조선시대의 여류시인이며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누나였던 허난설헌을 노래하고 있다. 어린 두 자녀까지 생전에 잃고 시름에 잠겼던 그녀는 일찍 요절하고, 재혼한 남편 때문에 죽어서도 시집에서 괄시를 받았었지만, 허난설헌은 얼마 전 그 남편 집안에서 임야를 한국도로공사에 기증한 덕분에 그 집안의 묘소를 한국도로공사에서 경기도의 야산에 꾸며주었는데, 앞쪽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면서 두 자녀의 무덤은 그녀의 무덤 옆에 작게 만들고 또 시비까지 세워줌으로써 그의 문명이 빛을 보게 되었다. 비록 생전에 자식까지 잃고, 남편의 사랑도 별로 받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높게 평가되고 있으니, 그녀의 문학적 영향이 ‘제 안에/ 벙근 꽃대 한 촉/ 아리다,/ 그윽한 향기’였음을 예연옥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정갈하게 먹을 갈아 예서체로 쓴‘정암정(禎庵亭)’

아파트 현관 입구 현판 걸어 놓으시고

아버지, 가을강처럼 낮게낮게 흐르신다

 

 

한 굽이 돌아가는 스산한 갈바람이

문틈 사이로 들어와 숨겨둔 아픔 들추고

지나온 흔적 지운다 그 잎 무성하던 날

 

 

빈 서재 책상 위엔 퇴고 하시던 시편들

한 생애 안부를 묻듯 서간(書簡) 한 장 써 놓고

아버지 큰그림자 끌고 떠날 채비 숨차다

                        - 「가을편지 3」전문

 

   식솔이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몇 편의 시조에서 나타난다. 그 중 한 편인 이 작품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두드러진다.‘정갈하게 먹을 갈아 예서체로 쓴 ‘정암정(禎庵亭)’/ 아파트 현관 입구 현판 걸어 놓으시고/ 아버지, 가을강처럼 낮게낮게 흐르신다’고 시인의 아버지도 서예를 하시고 시도 쓰신 분인 듯, 그래서 당신이 사시는 현관 입구에 ‘정암정’이란 현판까지 걸어두신 듯 하다. 첫 수 종장 ‘아버지, 가을강처럼 낮게낮게 흐르신다’, 둘째 수 종장 ‘지나온 흔적 지운다 그 잎 무성하던 날’, 셋째 수 종장 ‘아버지 큰그림자 끌고 떠날 채비 숨차다’에서 잎 무성하던 날들의 아버지가, 가을강처럼 낮게낮게 흐르시며 곧 이승을 떠날 준비를 하고 계시는 모습이 상상된다. 이 작품에서는 시인 아버님의 지난 날을 상기하며, 서예가이며 시인이신 아버지의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과 애잔함이 있기에 독자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봄강」,「옷장정리」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드러난다.

 

 

부석사 가는 길에 차창 밖 머문 눈길

가을빛 짙어가는 사과나무 가지 끝엔

천년 전

말씀들인가,

알알이 맺힌 붉은 경(經)

 

 

난전에 앉은 가을이 내 발걸음 따라와

오르던 백팔계단에 짐 잠시 내려놓고

봉황산

중턱 사이로

사과향 솔솔 뿌리고

 

 

무량수전 앞마당 화사석으로 들어가

마음 속 소망 하나 화엄 심지 돋우고

마을로

내려가는 길

미래불로 환하다

              -「과등(果燈)」전문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린 것을 하나의 등불로 보고 있다. 시인의 참신하고 재미있는 발상이다. 첫째 수에는 ‘천년 전/ 말씀들인가,/ 알알이 맺힌 붉은 경(經)’으로 보고 있는 발상이 참신하고 재미있다. 둘째 수에는 ‘난전에 앉은 가을이 내 발걸음 따라와/ 오르던 백팔계단에 짐 잠시 내려놓고/ 봉황산/ 중턱 사이로/ 사과향 솔솔 뿌리고’ 역시 ‘가을’을 의인화한 부분이 참신하게 느껴진다. 셋째 수에 오면 ‘무량수전 앞마당 화사석으로 들어가/ 마음 속 소망 하나 화엄 심지 돋우고’ 부분은 사실적인 표현이지만, ‘마을로/ 내려가는 길/ 미래불로 환하다’며 사과가 달린 모습을 하나의 ‘과등(果燈)’으로, ‘미래불’로 표현한 부분은 참신함이 뛰어난 부분이다. 이 작품은 제목 ‘과등(果燈)’부터 참신함이 느껴지는 좋은 작품이다.

 

 

바람에 뒤척이는 생각 잠시 내려놓고

메마른 밭이랑에 촉촉한 봄비 내리듯

다관에 따르는 물소리

무딘 감성 씻는다

 

 

빛바랜 삶의 행간 다시 돌아온 봄날

겹겹이 쌓인 그리움 찻물에 우려내는

활짝 핀 유백색 꽃잎

그 향기 은은하다

          -「목련차」둘째, 셋째 수

 

   여타의 시인들처럼 예연옥 시인의 작품은 자신 주변의 이야기이고, 자신의 이야기이다. 시인 자신이 차를 즐기며 다도를 즐기고 있으며, 이러한 시도 쓰게 된 것이다. ‘목련’ 꽃잎으로 만든 차를 즐기고 있는 봄날의 모습이다. ‘바람에 뒤척이는 생각 잠시 내려놓고/ 메마른 밭이랑에 촉촉한 봄비 내리듯/ 다관에 따르는 물소리/ 무딘 감성 씻는다’ 에서 잡다하고 번잡한 생각들을 ‘바람에 뒤척이는 생각’이라는 표현과 까칠해진 일상을 ‘메마른 밭이랑’이라 표현한 점은 메타포가 뛰어나다. 또 ‘겹겹이 쌓인 그리움 찻물에 우려내는’는 이란 표현도 좋다. 그리움이 찻물 속에 녹아나는 느낌을 독자들이 받기 때문이다. ‘활짝 핀 유백색 꽃잎/ 그 향기 은은하다’는 사실적 표현으로 목련꽃잎이 잔 가득 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진흙 속 연잎 위로 갈바람 서성인다

 

 

뜨거운 여름 끝에

 

 

뼈 마른 대궁 세우고

 

 

촘촘히

 

 

영글은 씨방

 

 

파란 하늘 품는다

                 - 「연」전문

 

 

   제목은 「연」이지만, 연이 지고 난 후의 씨방을 노래하고 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연꽃, 그 연잎 위로 갈바람이 서성일 때쯤이면 ‘뜨거운 여름 끝에/ 뼈 마른 대궁 세우고/ 촘촘히/ 영글은 씨방/ 파란 하늘 품는다’는 표현 속에는 연꽃도 아름답지만, 꽃이 지고 난 후의 씨방을 아름답게 보는 시인의 눈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보는 사람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미추가 결정된다고 볼 때 피어 있는 꽃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꽃이 지고 난 후의 열매까지도, 그 씨방까지도 관찰하여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예연옥 시인의 예리한 눈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3

 

 

지하철역 입구를 빠져나오는 바람이

 

 

걷기좋은길 안으로 얼쑤 추임새 넣고

 

 

무국적

 

 

음악에 맞춰

 

 

문화가 춤을 춘다

      -「홍대입구 역- 풍경 2」전문

 

  「홍대입구 역- 풍경 2」은 홍대입구역 앞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시는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들 삶의 모습, 삶의 주변 모습을 표현해 보여주는 것이다. 홍대입구역의 활기 넘치는 모습을 표현한 이 작품은 ‘지하철역 입구를 빠져나오는 바람이/ 걷기좋은길 안으로 얼쑤 추임새 넣고/ 무국적/ 음악에 맞춰/ 문화가 춤을 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전에 종로와 명동거리가 젊은이들의 거리로 대변되었던 때가 있었듯이, 요즘은 홍대입구역 부근이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

   휴일이면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즐기는 거리가 되었고, 다문화 시대인 만큼 이곳에서 음악이든, 춤이든 국적을 가리지 않고 신나게 판을 벌이곤 하는데 이것을 예연옥 시인은 ‘무국적/ 음악에 맞춰/ 문화가 춤을 춘다’고 예리하게 읽어 내고 있다. 시인은 꼿꼿하고 고풍스러운 옛 문화에만 집착하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현대감각도 충분히 인지하고 소화해 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어느 연대가 남긴 이름 모를 왕릉인가

버려진 한 시대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역사의 쓰레기 공원

하늘 계단 오른다

 

 

만 가지 슬픔 삭힌 가을 햇살 등에 업고

척박한 땅 딛고서 은빛으로 야윈 억새

잊혀진 바람을 불러

깃발처럼 나부낀다

 

 

왕후가 행차 하는지 문이 열렸다 닫히고

화관무 태평무에 어깨춤 들썩들썩

새 왕조 도래하는지

억새꽃 춤을 춘다

                     -「난지도」전문

 

 

   예연옥 시조에서 발견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정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쓰레기들이 나올 것인가. 쓰레기를 모아서 버린 곳이 난지도이며 그렇게 버린 쓰레기 위에 흙을 덮고 억새공원으로 가꾸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을 ‘어느 연대가 남긴 이름 모를 왕릉인가/ 버려진 한 시대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역사의 쓰레기 공원/ 하늘 계단 오른다’며 쓰레기가 모여 산처럼 된 곳을 왕릉의 봉분에 비유하고 있다. 쓰레기란 것이 이미 쓸모없게 된 모든 것이므로 ‘버려진 한 시대’로 시인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고스란히 품고 있기에 ‘역사의 쓰레기 공원’인 것이다. ‘만 가지 슬픔 삭힌 가을 햇살 등에 업고/ 척박한 땅 딛고서 은빛으로 야윈 억새/ 잊혀진 바람을 불러/ 깃발처럼 나부낀다’란 표현 속에는 비록 쓰레기가 묻혀 있는 공원이긴 하지만, 슬픔을 안으로 삭힌 가을 햇살을 등에 업고, 척박한 땅을 딛고 아름답게 피어 은빛으로 나부끼는 갈대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둘째 수의 ‘은빛으로 야윈 억새’는 셋째 수에 오면 어느 새 ‘새 왕조 도래하는 지/ 억새꽃 춤을 춘다’며 아름답게 나부끼는 억새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첫째, 둘째 수에서 보이던 난지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긍정적으로 바뀐 모습을 볼 수 있다. 쓰레기가 묻힌 공원이란 이미지가 많은 세월이 지나고, 우리가 버린 그 쓰레기들이 썩어 밑거름이 되어 새로운 생물을 키워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시의 행간에 내재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이번에 첫 시집을 시서화집으로 출간하는 예연옥 시인께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평범한 시집 한 권 묶기도 어렵거늘, 시서화집을 엮고 또한 서화 작품으로 전시까지 기획하신다니, 그 열정에 감탄과 박수를 보낸다. 아름다운 시서화집이 나오기를, 그리고 멋진 전시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촌평이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2016년 입춘일에

우현(宇玄)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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