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우려낸 차 한 잔의 맛
김민정 (시조시인, 문학박사)
움 돋는 그리움을 송두리째 뽑아다가
아홉 번 덖고 비벼 차 한 잔 우려내면
찻잔도 귀를 닦고서 물소리를 듣는다
차향을 다소곳이 두 손 모아 받쳐 들면
목젖이 아리도록 가슴 한 편 젖어드는
그 뿌리 알만도 하다 눈물에 닿은 것을
-「민들레 차를 우리며」 전문
나는 민들레 차를 마셔본 적이 없다. 왠지 차이름만 들어도 쓸 것 같다. 민들레는 씀바귀과라서 그것으로 만든 차이니 맛은 얼마나 쌉싸롬할까?
그 차 속에는 송두리째 뽑아온 움 돋는 그리움도 녹아 있고, 아홉 번 덖고 비빈 인내도 숨어 있다. 우려낸 찻물을 따르면 찻잔도 그걸 알고 귀를 닦고서 경건하게 물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 ‘차향을 다소곳이 두 손 모아 받쳐 들면/ 목젖이 아리도록 가슴 한 편 젖어드는/ 그 뿌리 알만도 하다 눈물에 닿은 것을’이란 표현 속에서 아홉 번 덖고 비벼 차향을 내기까지 기쁨보다 인내와 슬픔이 더 많았기에 그 뿌리가 눈물에 닿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도 그러할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정기영 시인의 시조와 삶이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민들레가 아닌 인생을 우려낸 한 잔의 차.
말 없어도 내 다 안다 네 마음 붉은 것을
야무진 봄 꿈꾸며 엄동 견딘 그 속내도
결국은 온몸 태워낼 숨 막히는 그 절정도
– 「동백꽃」 전문
정기영 시인의 사물에 대한 깊은 천착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한 송이 뜨겁게 피어날 동백을 보며 시인은 그 붉은 동백의 마음을 읽고 있다. 한 송이 붉은 꽃을 피우기 위해 엄동을 견뎌내는 동백꽃의 속내를 들여다보며 ‘말 없어도 내 다 안다 네 마음 붉은 것을/ 야무진 봄 꿈꾸며 엄동 견딘 그 속내도/ 결국은 온몸 태워낼 숨 막히는 그 절정도‘라는 표현으로 온 열정으로 자신의 몸을 사르며 만개하여 자신의 절정을 보여줄 아름다운 동백꽃의 개화를 기다린다. 아니 시인은 그러기를 축원하며 확신하고 있다. 동백꽃을 사람에 비유하여 표현한 작품으로도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분명 가작佳作이다.
하늘색 가슴 풀어 구름으로 쓰는 편지
행간에는 구구절절 구절초 피워놓고
장마다 고운 사연을 흘림체로 쓰고 있다
섬돌 및 귀뚜라미 울음도 동봉하고
코스모스 간질이는 실바람 곁들여도
뭔가가 빠진 것 같아 살펴보는 구월 편지 - 「구월 편지」 전문
이 작품을 읽고 있으면, 마음속에 구월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름다운 가을하늘과 새털구름과 구절초가 다가온다. 구월에 쓰는 편지엔 이 모든 것이 사연 속에 구구절절이 들어가 있을 것 같다. 장마다 아름다운 가을의 사연들로 가득찰 것 같다. 더구나 섬돌 및 귀뚜라미 울음도 동봉하고 코스모스 간질이는 실바람도 곁들인다면 아름다운 한 통의 구월 편지가 완성될 것 같다. 그런데 이 모든 아름다운 가을의 모습을 담았는데도, 둘째 수 종장에서 ‘뭔가가 빠진 것 같아 살펴보는 구월 편지’라고 한다. 여기에 이 작품의 묘미가 있다.
가을에 느끼는 허허로움 같은 것일까? 아니면 이런 자연의 묘사나 아름다움을 말하고 전해줘도 정작 인간의 사랑이 곁들이지 않으면 허전하다는 뜻일까? 사랑한다는 말을 쑥스러워 전하지 못해 뭔가 빠진 것 같다는 뜻일까? 아름다운 가을의 서정과 함께 독자로 하여 많은 상상을 하게 하는 수작이다.
천제단을 찾아들면 바람마저 숙연하다
엎드린 바위 뒤로 나무들도 키 낮추고
한 발짝 먼저 온 눈은 무릎 꿇고 앉았다 - 「태백산에서는 소원도 하얗다」 셋째 수
「태백산에서는 소원도 하얗다」는 제목으로 눈 쌓인 태백산을 소재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난히 눈이 많고, 기온이 낮은 태백시에 우뚝 솟아 있는 태백산. 정상에는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는 천제단이 있다. 천제단을 받들고 있기에 바람으로 몸을 씻어 나무들조차 정갈한 것일까? 화자는 눈 쌓인 태백산을 등산하며 그곳의 정상인 천제단에서 바위, 나무, 눈의 겸손함을 본다. 그것은 곧 시인 자신이 자연 앞에 경건함과 겸허함의 표현이다.
정처 없이 와서 보니 척박한 땅이었다
노랗게 피울 꿈을 버릴 순 없었기에
수십 길 지하 갱도를 홀씨처럼 날았다.
땀으로 질척대던 장화속도 견디었다
쪼개낸 폐석 더미 돌 틈도 괜찮더라
어디든 앉은 자리에 꽃 한 송이 피운다면 - 「탄광촌의 민들레」 전문
「탄광촌의 민들레」 는 민들레의 질기고 강하고 소박한 모습을 상징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한 줌 보잘 것 없는 흙만 있어도 감사하다는 듯 꽃을 피우는 민들레, 탄광촌의 민들레도 예외는 아니다. 검은 내가 흐르고, 검은 석탄이 있는 수십 길 지하 갱도를 홀씨로 날며, 질척이던 장화속도 견뎌내며, 석탄을 찾느라 쪼개낸 폐석더미 돌 틈에서도 꽃 한 송이 피워낼 수 있는 그 강한 생명력과 의지력, 그리고 꽃만 필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는 그 소탈함과 달관이 이 시의 핵이다.
화자의 생도 그렇다. 이 작품의 화자는 민들레의 모습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있다. ‘쪼개낸 폐석 더미 돌틈도 괜찮더라’고 이미 화자는 민들레에게 자신을 동화시켜 민들레가 자신인 양 표현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어쩌다 탄광촌에 발을 들이게 된 화자, 그리고 그곳에 동화되면서 그 척박한 속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꽃을 피워내는 민들레 같은 강인한 삶을 스스로에게 바라고 있다.
맞서고 싶은 날엔 풀밭으로 나가 보라
날 세운 풀잎들이 바람에 눕는 걸 보라
거슬러 맞서지 않는 저 유연한 저항을
흔들리기 싫은 날도 풀밭에 나가 보라
흔들리고 난 후엔 의연한 풀잎을 보라
바람은 스쳐 지날 뿐 머물지 않는 것을 - 「풀잎처럼」 전문
이 작품을 읽으면 그의 유연한 삶이 보이는 듯하다. 삶의 방정식은 어느 것이 옳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지만, 이 시를 읽으면 늘 친절하며 겸손하여 적이 없는 그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맞서고 싶은 날이 왜 없겠는가, 날 서는 때가 왜 없겠는가. 그래도 거슬러 맞서지 않는 유연한 저항, 유연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음을 이 시조는 보여준다. 누군들 자기 뜻대로 살고 싶지 않으랴! 그렇게 흔들리기 싫은 날에도 풀밭에 나가 보고, ‘흔들리고 난 후엔 의연한 풀잎을 보라/ 바람은 스쳐 지날 뿐 머물지 않는 것을’ 이라고 한다. 자연에서 삶의 방식과 지혜를 배우라는 뜻이다.
정기영의 시조집은 그 동안 내가 받아든 여타의 시조집과 느낌이 달랐다. 한 편 한 편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문학적 효과를 위해 기교를 부리지 않은 삶의 이야기와 느낌이 들어있는 천의무봉이다. 한 편 한 편 가볍거나 구태의연하지 않고 진솔함과 신선감이 있는 좋은 작품들이다. 앞으로 더욱 아름다운 작품으로 독자를 기쁘게 할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첫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2015 가을에
宇玄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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