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達人
백수 정완영(白水 鄭椀永)
신년(乙酉) 벽두, 오는 봄을 어떻게 가늠하나? 하고 눈을 감고 앉았는데 느닷없이 김민정 (金珉廷)시인이 찾아와서 원고뭉치를 내밀면서 시집을 내겠으니 서문을 써 달라는 소청이 아닌가.
내가 이런 청탁에서 손을 뗀 지도 오래 됐고, 또 요즘 시인(詩人)이라는 사람들이 당선이니 추천이니 받은 지 사흘만 되어도 ‘머릿말’이니 ‘시인의 말’이니 하여 자서(自序)를 부치기가 일쑤인 세상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 그만 둘까하다가 요즘 세상에서 이 시인만큼 숫된 사람도 드물거니와 이 시인이 백수론(白水論)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은 문연(文緣)도 있고 해서, 몇 자 서문 아닌 소감을 얹기로 했다.
사진: 선바위와 심포초등학교, 이희탁
사진: 심포리의 선바위, 김진수
기다리던
꽃소식에
마음이 온통 달아
찻잔으로
가는 손길
그도 한참 뜨겁더니
비로소
꽃 한 송이가
내 안에서 벙근다
-「기다리는 마음」전문
시란 말 바깥의 말, 언외언(言外言)이다. 어떤 사상(事像)이거나 어떤 상황(狀況)만 보여주면 될 뿐, 중언부언해서는 안 된다. 시는 하나의 ‘제시(提示)’일뿐, 그것을 ‘판독(判讀)’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가 해야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이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사진: 심포역의 백목련, 홍길순
꽃잎과
꽃잎으로
바람에 떨리우다가
불씨 묻은
재처럼
따뜻한 미련이다가
파문만
사름사름 앉는
깨지 못할 꿈이다가
-「어떤 만남」전문
시를 하는데 있어서 두 번째 요건은 바깥은 서늘하고, 속은 뜨거워야 한다는 말씀인데, 다시 말해서 재를 헤집다가 불씨에 손을 데는 듯 놀라움을 만나야 된다는 이야기인데, /불씨 묻은 재처럼 따뜻한 미련이다가/ 이 중장은 時調人의 警句, 불씨일시 분명하다.
사진: 심포리 대바위산 문필봉,홍성조
청산을
넘지 못해
물소리로
우는 강물,
강물을
건너지 못해
바람소리
우는 저 산
아득히
깊고도 푸른 정
한 세월을 삽니다
-「어라연 계곡」전문
이 작품은 시인 김민정의 절창(絶唱), 그의 시의 절정(絶頂)이다. 시가 여기 와서는 더할 말을 잊는다. 보여주는 경개(景槪)에다가, 이기지 못하는 차탄(蹉嘆)에다가, 들려오는 물소리까지 어우러져 한 폭의 장관을 이룬다. 누가 그린 실경산수가 이만하다 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의 가품(佳品)이다.
사진: 심포리 대바위산 문필봉, 김진수
아버지가 웃으시며
영동선을 가고 있다
가난도 햇살인양
눈부시게 받아 입고
물푸레
나뭇잎처럼
휘적휘적 가고 있다
-가난도 햇살인양,영동선의 긴 봄날 4-
어쩌면 이 한 수 단시조로 아버지가 걸어온 인생살이 뒷모습을 이렇게도 절실하게 그려낼 수 있었는가. 어버이에의 지정(至情)이 염의(染衣)처럼 가슴속에 묻어난다.
사진: 심포리 기찻길, 홍길순
김민정은 강원도인(江原道人), 강원도는 산도(山道), 강원도에서 시조의 달인(達人) 한사람 나와 주기를 간구(懇求)하는 마음에서 두어 자 무사(蕪辭)로 서(序)에 대(代)한다.
2005년, 노백 정완영 지 (老白 鄭椀永 志)
사진: 심포리 기찻길, 201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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