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 시조집해설>
긍정과 비판을 통한 휴머니즘의 추구
- 김영철의 '붉은 감기'-
宇玄 김민정(시조시인, 문학박사)
1. 현실긍정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통한 휴머니즘
김영철의 시조집『붉은 감기』를 읽으면, ‘김영철 시인은 현실에 대한 긍정과 비판을 통해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시인이구나.’하고 느끼게 된다. 인간이 지녀야 하는 따뜻한 인간적인 미를 추구하는 시인이다. 시마다 시인 자신의 생활과 밀접한 리얼리즘이 주를 이루면서 메타포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먼저 그의 현실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시조들을 살펴보자. 그의 작품 「개똥벌레」이다.
어둠 내린 캠퍼스에 개똥벌레 모여들어
귀 세운 강의실엔 달빛 파장 엄숙하고
건너 뛴
약관의 푸른 꿈
가슴 안에 덜컹댄다.
사는 법
먼저 배우느라 지름길 돌았지만
자식 같은 학우들과 또래의 스승님과
하나씩 저장하려는 수백 번의 깜박임.
느낌표
가득 채운 은하수행 밤 열차는
늦깎이 새내기라는 선명한 이름을 달고
마지막 터널을 지나
새벽으로 가고 있다.
- 「개똥벌레」전문-
이 작품은 자신의 현재 생활을 시조로 쓴 것이다. 만학을 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적절한 직설과 은유로 표현하고 있으며 긍정적 사유와 겸손함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먼저 강의실에 모여들어 강의를 듣고 있는 자신과 동기들을 ‘개똥벌레’로 은유하고 있다. 첫째 수에서는 ‘귀 세운 강의실엔 달빛 파장 엄숙하고/ 건너 뛴 / 약관의 푸른 꿈/ 가슴 안에 덜컹댄다.’고 표현하며 만학을 하면서 귀를 쫑그리며 열심히, 엄숙하게 강의를 들으며 20대처럼 꿈에 부풀어 설레는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둘째 수에 오면 먹고 살기에 바빠 지름길을 두고도 돌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탓하지 않고, 자식 같은 학우들과 또래의 스승님과 함께 하면서도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과 더불어 생활하고 적응하며, 배운 내용들을 하나씩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다. 감퇴해가는 기억력임에도 불구하고 수 백 번 눈을 깜빡이며 젊은이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성실한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셋째 수에 오면 삶에 대한 긍정적인 모습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느낌표 가득 채운 은하수행 밤 열차는/ 늦깎이 새내기라는 선명한 이름을 달고/ 마지막 터널을 지나/ 새벽으로 가고 있다.’ 그의 삶도, 그의 학업도 이제 어둠의 상징인 마지막 터널을 지나 희망의 상징인 새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시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육성회비 통지서가 춤추는 운동장에
핏기 잃은 은행잎
떼떼이 떨어지고
조숙한 6학년 아이 그림자를 밟고 돈다.
서울행 밤기차에 일곱 빛깔 그려 놓고
준비물 말할 수 있는 전혀 다른 아버지를
꿈꾸는 그네 위에서 의문부호 밀며 간다.
먼 산
소나무 아래 기적 소리 멈춰선 곳
하얗게 떨고 있는 코뚜레를 움켜쥐고
닮은꼴 두 아버지가
우시장을 서성인다.
-「멈춤」전문 -
만학을 하게 된 이유가 가난 때문이었음을 알게 하는 작품이다. 많은 자식들의 학비를 내기란 시골의 가난한 부모로서는 참으로 힘들던 때였다. 조숙해서 힘든 가정 사정을 알기에 ‘육성회비 통지서가 춤추는 운동장에/ 핏기 잃은 은행잎/ 떼떼이 떨어지고/조숙한 6학년 아이 그림자를 밟고 돈다.’고 한다. 차마 육성회비 통지서를 아버지께 가져다 보여드리지 못하고 운동장에 버리는 ‘핏기 잃은 아이의 얼굴’을 은행잎으로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준비물 말할 수 있는 전혀 다른 아버지를’ 꿈꾸어 보기도 한다. 셋째 수에 오면, 육성회비 통지서조차 보여드릴 수 없는 현실의 아버지와 내가 마음속으로 바라며 꿈꾸는 꿈속의 아버지, 닮은꼴 두 사람이 우시장을 서성인다.
더듬더듬 하품하며 냉장고 문 여는데
불 꺼진 화장실에 흐느끼는 기척 있다
자욱한
설움을 깔고 몸을 숨긴 어머니.
유난히도 비가 잦아 눅눅하던 그해 여름
아버지 가신 뒤에 화장실 문 자주 잠기고
새하얀
수돗물 소리 밤새도록 떨었다.
휙, 휙 지나가는 화목했던 풍경 뒷길
당신 혼자 내려야할 가을 역이 저기인데
마중 온
무서리 꽃잎만 애써 미소 짓고 있다.
-「가을역, 배웅하다」전문 -
어머니의 삶을 ‘가을역’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자욱한 설움을 깔고 몸을 숨긴 어머니’란 표현도 슬픔을 자식들이 보지 않도록 화장실에 숨어서 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자욱한 안개를 연상시키는 ‘자욱한 설움’이 마음 바탕에 깔려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나타낸다. 둘째 수 종장에서도 ‘새하얀/ 수돗물 소리 밤새도록 떨었다.’ 고 표현하여 어머니의 순백한 눈물을 ‘새하얀/ 수돗물 소리’로 은유하고 있다. 셋째 수에 오면 기차가 달려가듯이 생을 달리며 지나가는 화목했던 풍경 뒷길, 어머니 혼자 감당해야할 삶 또는 혼자 맞아야할 죽음이 ‘가을 역’ 으로 표현된다. ‘애써’라는 말 속에서 설움을 감추며 억지로 미소 짓고 있는 애처로움이 나타난다.
가족 특히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나타나는 것은 이 작품 외에도 「백봉령 안개 밭」에서는 ‘스멀대는 산안개 끝 맨발로 선 어머니/ 네 배부르면 됐다고 연방 손을 내젓는다/ 며칠 후/ 메밥 드시러 오실 힘이나 있는지.’라고 표현되고, 「감또개, 그리고 홍시」에서는 ‘입히지도 먹이지도 가르치지도 못해서/ 낯선 땅 품만 팔다 죽지 꺾인 자식 위해/ 선홍빛 노을을 토해/ 까치밥을 짓고 있다’고 표현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가족의 산소를 다녀오며 쓴 작품으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과 그러한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애틋한 정이 표현된 작품이다. 「기일」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추모의 정이 나타나고 있어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잘 표현되고 있다.
가을 산
다녀와서
홍시처럼 앓는 여인
가슬가슬한
이마 위에
낙엽 타는 냄새가 난다
단풍만 담으라 했는데
불을 안고
왔
는
지
-「붉은 감기」전문
김영철 시조집 제목이기도 한 이 시조는 몇 편 안 되는 단시조 중의 하나이다. 단풍 구경을 다녀온 아내가 감기에 걸린 것일까. ‘단풍만 담으라 했는데/ 불을 안고/ 왔/ 는/ 지’에서처럼 단풍구경을 다녀온 후 아내가 펄펄 열을 내며 감기를 앓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열이 높음을 시인은 ‘가슬가슬한/ 이마 위에/ 낙엽 타는 냄새가 난다’고 표현하고 있다. 짧은 단시조에서 감기를 심하게 앓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홍시’, ‘낙엽 타는 냄새’, ‘불’등의 어휘를 통해 열이 높음을 말하고 있고, 때문에 제목도 ‘붉은 감기’로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그의 궁극적 관심은 인간임을 알 수 있다.
푹푹 삶는
차 안으로 하얀 손을 내민다
꽁꽁 얼린 물수건과
반쯤 얼린 생수병
녹여서
하나가 되자는
아내의 부탁이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물병도 땀을 흘린다
비워지는 공간만큼
채워가는 느낌표들
어느덧
같아진 융점에
두 가슴이 닿아 있다
-「중화中和」전문 -
더운 여름날 운전을 하는 남편을 위해 꽁꽁 얼려놓은 물병을 건네주는 아내, ‘녹여서 하나가 되자는/ 아내의 부탁이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물병도 땀을 흘린다.’ 그때쯤이면 시인 자신도 목이 마르고 힘들 것이다. 녹여진 물을 마시며, 안으로는 감사의 마음이 채워지고, ‘어느덧/ 같아진 융점에/ 두 가슴이 닿아 있다’고 한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러한 아내에 대한 남편의 고마운 마음이 닿아 두 마음이 하나가 되고 있다. 늘 사이좋게 함께 다니는 시인의 모습에서, 그리고 함께 글을 쓰는 모습에서 부부의 다정함을 알 수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 모습이 더욱 여실하게 드러난다. 이 외에도 「아내라는 집」에서는 ‘조그만/ 내 집 안에/ 집 하나가/ 또 있다’며 ‘초롱불/ 포근히 밝힌/ 고향 언덕의/ 오두막집’으로 아내를 표현한다. 두 작품에서 남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본다. 이렇게 김영철의 시에서는 따뜻한 인간적인 모습, 휴머니즘이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
2. 현실비판과 연민을 통한 휴머니즘
아파트에 사는 것은 모두가 입이 없다
너는 나를 몰라야 하고 커튼은 안개 빛이다
여닫는
엘리베이터의 해찰궂은 쇳소리뿐.
비단옷과 가죽신에 기꺼이 목을 바쳐
냄새 없는 똥을 누며 엉너리 노리개로
오로지
임금을 위해 거세당한 어린 내시.
꼬리로 대답하고 눈으로만 말하는
개집 같은 궁전에는 초인종이 개소리다
그들도
그들의 안에서 울부짖는 꿈을 꾼다.
- 「벙어리 루루」전문 -
김영철 시인은 긍정적인 사고를 가졌지만, 꽤 많은 작품에서 현실비판적이고 현실고발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벙어리 루루」는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파트에서 짖지 못하게 성대를 수술하고 비단옷을 만들어 입히고 가죽신을 신게 하며 자신들의 노리개로 삼는 오만한 인간에 대한 비판, 현실고발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주인을 위하여 목소리를 제거당한 개를 ‘오로지/ 임금을 위해 거세당한 어린 내시’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도/ 그들의 안에서 울부짖는 꿈을 꾼다.’고 한다. 개에게도 그들의 자유가 있을 것인데, 그것을 인간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고, 인간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장식을 해 놓고는 그것이 애완견에 대한 애정인양 착각하며 살고 있는 인간들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개집 같은 궁전에는 초인종이 개소리다’로 표현되고 있다.
강냉이는 넘어지고
어선은 동사凍死했다
추워서 못 참겠다고
감자들이 운다
얼마나 아픈지 아느냐고
촌스럽게 운다
물을 팔아 쌀을 사고
산을 팔아 집을 짓고
영화라도 한 편 보려면 산소마저 팔아야 할까
순수와 청정계곡이 지쳐 쓰러지기 전에
- 「바우의 눈물」 전문-
이 작품에서 「바우의 눈물」이란 제목의 ‘바우’는 즉 강원도를 상징하는 ‘감자바우’를 뜻한다. 폭우와 폭풍으로 옥수수들이 쓰러지고, 동해안의 어선은 얼어 죽었다고 한다. 겨울의 폭설과 추위로 바다에 배를 띄워 고기를 잡지 못함을 말함이다. ‘추워서 못 참겠다고/ 감자들이 운다’고 한다. 감자란 강원도 사람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감자와 강냉이가 강원도의 상징이기도 한데, 그러한 식량과 바다의 생선까지 수확할 수 없는 강원도의 아픔과 생활고가 피부에 와 닿는 작품이다.
‘물을 팔아 쌀을 사고/ 산을 팔아 집을 짓고’ 그리하여 식수로 물을 팔고, 산은 골프장 등으로 팔아넘기며 살아간다. 둘째 수 중장에 오면 ‘영화라도 한 편 보려면 산소마저 팔아야 할까’라고 풍자 섞인 자조가 나타난다. 폭우와 한파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그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정계곡과 산을 팔아 물과 산을 사라지게 하고 있음을 안타까와하는, 청정계곡을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시인의 비판과 고발정신이 나타나고 있는 작품이다.
열일곱 뜨거운 피
꽃으로 누운 장릉에서 임도 그랬을 한양 하늘 조심스레 올려다 본다 여전히 왕위쟁탈전 중인 아우성이 애달프다
-「영월의 하늘은 여전히 핏빛이다」셋째 수-
영월 단종어소를 바라보며 쓴 이 작품도 풍자가 들어 있다. ‘임도 그랬을 한양 하늘 조심스레 올려다 본다/ 여전히 왕위쟁탈전 중인 아우성이 애달프다’고 한다. 단종을 생각하며 세조가 왕위찬탈을 위해 그랬듯이, 지금도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쟁탈전이 바쁜 정계를 질타하는 소리다. 진정으로 국민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마음만이 앞서가는 정치인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시골 5일 장날에 앳돼 보이는 여인이
검지도 희지도 않은 갓난아이 안고 있다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옹알이가 뜨겁다
눈먼 나라 수렁에서 역마살을 물려받아
사랑을 알기도 전 차갑고 낯선 땅으로
가난의 속죄양 되어 몸을 던진 하 티 홍*
햇살의 눈금을 재고 반사체로 돌아온
이른 아침 연잎 위의 해맑은 몸짓이다
한 송이 꽃으로 환생한 다문화의 물방울
*베트남 여인의 이름.
-「신 심청전」전문 -
김영철 시인의 시조 주제나 소재는 다양하다. 이것은 김영철 시인에게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시화(詩化)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위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요즘 유행하는 다문화 가족에 대한 내용이다. 단 한 편 밖에 없긴 하지만, 다문화 가정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라 볼 수 있다. 「신 심청전」이란 제목이 암시하듯이 가난한 베트남 여인이 돈에 팔려 한국에 시집을 왔음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작품이다.
베트남 신부의 가난한 가정 때문에 사랑을 알기도 전에 차갑고 낯선 땅인 한국에 왔을 것이고, 한국인 남편과 베트남 신부 사이에서 난 아이가,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옹알이’를 한다고 한다. 옹알이야 말이 되기 전의 말이라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한 표현을 쓴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연민의 감정, 측은지심 때문일 것이다. 먼 한국에 시집온 베트남 여인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그만큼 따스하고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셋째 수에서는 ‘햇살의 눈금을 재고 반사체로 돌아온/ 이른 아침 연잎 위의 해맑은 몸짓이다/ 한 송이 꽃으로 환생한 다문화의 물방울’이라고 하며 그녀의 모습을 싱그럽게 표현하고 있다. 심청이 연꽃으로 환생하였듯이 베트남 여인을 아름답게 환생한 꽃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심청이로 보고 있다. 다문화가정, 이국 여인에 대한 연민을 극복하여 사랑스런 모습으로 승화시키는 인간적 따스함이 느껴진다.
1.
12년 전 동짓달 가난한 집에 시집 와서
머슴같이 일만 하다 뼈마디 다 삭았는가
폐차장 구석진 자리를 맴 그리는 눈망울
발이 되고 별이 되어 온몸으로 함께한
네가 있어 따뜻했고 너로 하여 견딘 날들
소슬한 시간을 건너는 작은 어깨 흔들린다
2.
젊고 예쁜 인연 만나 알콩달콩 살더라도
용서하고 눈 감아 주라
홀아비보단 나을 테니
새것이 좋기는 하겠지만
그대만큼 편할까?
-「겨울 애마」 전문
「겨울 애마」란 작품도 12년이나 된 폐차 위기에 놓인 낡은 차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어 주변의 사물을 사람 대하듯 하는 따뜻한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그동안 정든 차를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듯 ‘발이 되고 별이 되어 온몸으로 함께한/ 네가 있어 따뜻했고 너로 하여 견딘 날들/ 소슬한 시간을 건너는 작은 어깨 흔들린다.’며 그동안 아끼던 차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폐차해야하는 미안함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사물을 감사와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그곳에선
언제나 안개가 흘러나온다
그림자들 소곤대는 어둠으로 자욱한 밤
가슴을
방망이질 하며 도깨비 불 쫓아온다
가끔
하늘 끝으로 사다리가 걸리지만
감히
그 안쪽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서리는 절도가 되고
꿈은 쉬어버렸다
-「떠난 것에 대한 명상 -원두막」전문-
예전 어린 시절의 원두막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곳에선 언제나 안개가 흘러나온다’고 한다. 아련한 추억들이, 그리움이 안개처럼 흘러나옴을 말하고 있다. ‘그림자들 소곤대는 어둠으로 자욱한 밤’ 아이들이 소근대며 모여 가슴을 두근거리며 참외서리, 수박서리를 하던 곳, 도깨비불이 쫓아올 듯 하고…. 그 모든 것이 과거가 되고 떠나버린 추억이 됨을 안타까와하는 내용이 둘째 수에 나타난다.
‘가끔/ 하늘 끝으로 사다리가 걸리지만/ 감히/ 그 안쪽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서리는 절도가 되고/ 꿈은 쉬어버렸다’고 한다. 예전의 서리는 가끔은 임자에게 들켜 혼도 났지만, 그것으로 끝났던 어린 날의 낭만은 사라지고, 지금은 남의 것을 서리하면 절도로 낙인찍히고, 그러한 낭만적인 꿈도 가치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떠난 것에 대한 향수와 함께 인간적인 미를 느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깔려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타닥타닥 장작불 소리 춤추는 정지에 앉아
쿤내나는 짠지에다 밥 한 덩이 물에 말고
움메나 허기졌으면 자식 온 것도 모를까.
얼푸 눈물 닦아내고 헛기침을 토하는데
화들짝 놀란 노모 수저를 떨어뜨리고
해던나 어루만지듯 잡은 손이 아프다.
날씨는 매콤한데 긴긴 밤 어찌하우야
감재떡 봉다리에 당신 체취 담겼지만
자주는 올 수도 없는 길, 한숨만 두고 가우야.
얼어붙은 시멘트 접힌 날개 다시 펴고 발 묶인 고깃배들 은빛 꿈에 술렁이면 언젠간 떠나지 않을 소원 하나 되뇌면서.
- 「옥시끼」전문
위의 작품에선 어머니를 찾은 시인의 모습과 그것도 모르고 장작불이 타는 부엌에서 냄새나는 짠지(짜가운 김치)에 겨울 밥 한술을 말아먹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한 시인의 애잔함이 나타나고, 금방 또 이별하며 와야하는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구수하고, 순박한 강원도 사투리가 많이 나온다. 옥시끼(옥수수), 정지(부엌), 쿤내(구린내), 움메나(얼마나), 얼푸(얼른), 언나(어린아이), 감재떡(감자떡), 봉다리(봉지), 가우야(갑니다)등의 사투리가 등장하여 사투리가 갖는 정겨움이 나타난다. 강원도 사투리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아 일반인들이 들으면 잘 모르는 단어들이 많은데 위에 쓰인 단어들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투리를 통해 강원도 사람들만의 습관, 태도, 마음 등을 알 수 있고 정이 깊으면서도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고 촌스럽게 보이는 강원도말의 특징도 알 수 있다. 아래의 두 작품에서도 강원도의 향토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개미취, 도토리묵, 감자전, 수수부꾸미
동동주 한 사발에 배불뚝이 되었지만
깡마른 수숫대 앞에서 알싸해진 눈시울.
-「백봉령 안개 밭」둘째 수 -
하마/ 무쇠솥에는/ 하얀 김이 풀풀 대고
옥시끼/ 서로 먹으러/ 달려드는 언나들은
세상에/ 마카 뺏기고/ 사람 그리운/ 외딴섬
-「백봉령, 서학골의 밤」전문 -
이 작품들에는 주로 강원도에서 나는 소재들 개미취, 도토리묵, 감자전, 수수부꾸미 등과 사투리인 하마(벌써), 옥시끼(옥수수), 언나(어린아이), 마카(모두) 등의 사투리가 구수하게 들어 있어 향토성을 느끼게 하며 읽는 독자로 하여금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강원도, 그 중에서도 특히 삼척지방 사투리가 주로 쓰이고 있다.
3. 애향심과 애국심을 통한 휴머니즘
출렁이는 파도 위
걸터앉은 달빛 되어
흔들림에 몸을 맡긴 옛날로 가는 기차
맨발로
돼지 오줌보 차며
손 흔드는 동무들
기적소리 초가를 덮고
칭얼대는 호롱불 아래
낡고
서러운 자장가
힘없이 멈춰지면
아득히
비릿한 젖 냄새눈초리에 걸린다
-「추암으로 가는 바다 열차」전문 -
위의 작품은 동해시 ‘바다 열차’가 소재가 되고 있다. 기차를 타고 달리면서 푸른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인기 있는 테마 기차 여행 중 하나를 소재로 하여 쓰고 있다. 바다가 가까이 보이는 바다 열차를 타면 ‘출렁이는 파도 위/ 걸터앉은 달빛 되’는 경지가 된다. 신선이 따로 없어 보인다. 화자는 그 속에서 예전의 고향친구를, 고향을, 어머니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 외, 동해의 아름다운 곳 10곳을 노래한 「동해 10경」, 삼척 두타산의 무릉계곡을 노래한 「무릉반석」, 추암의 촛대바위를 소재로 한「촛대바위」등의 작품을 통해서는 보편적 인간이 갖는 애향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1막.
때는 2022년 10월 3일 낮 열두 시 한바탕 휘모리장단 지축을 뒤흔들고 철조망 걷힌 길 따라 얼싸안은 두 하늘
풍산개 노래하고 진돗개 춤을 추며 꽃 구름 입 맞추는 양강도 운동장엔 미고사* 장터 열리고 팔도 사투리 다 모였다
2막.
화톳불 곁 너비아니 펼쳐놓은 한강 둔치
하늘만 한 가마솥 그득 술적심 끓여가며
살가운 평양 처녀에 장가드는 서울 총각
3막.
깊게 파인 상처 위에 소통의 꽃이 핀다 너와 나는 사라지고 우리라는 광야에 다시는 슬프지 않을 문실문실한 무궁화
*미고사 : MBC에서 캠페인을 벌였던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의 줄임말.
-「맛있는 상상 4」전문 -
앞으로 10년 후의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맛있게 상상해 본 작품이다. 남북이 통일되어 북한의 풍산개와 남한의 진돗개가 서로 만나 춤을 추고 팔도의 사투리가 다 모이며 평양처녀에 장가드는 서울총각을 상상한다. 소통의 꽃이 피고 너와 나가 아닌 우리가 되어 다시는 분단이 없는, 더 이상 슬프지 않을 무궁화도 피어난다. 구성도 1막, 2막, 3막으로 하여 차차로 진행되는 남북의 화합, 그야말로 맛있는, 즐거운 상상이다. 남북통일을 바라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통일을 바라는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에다가 제목을 「맛있는 상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이목을 끈다. 김영철 시인은 제목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시인임을 알 수 있다. 제목을 보고 작품을 읽고 싶다고 느낄 수 있는 만큼, 제목은 시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이 시인은 잘 파악하고 있다.
남북의 현실에 대한 작품 「하늘을 향해 쏘아라」에서는 ‘너희가 하면 평화고 내가 쏘면 도발인가’, ‘사람을 향하지 말고 창공을 점령하라/ 지금보다 만 배나 큰/ 하나 된 한반도에/ 별빛이 재잘거리는 천상낙원 꿈꾸며’라며 역시 통일된 한반도를 꿈꾸고 있으며, 「봄을 위한 변주곡」에서도 ‘도드라진 핏줄 따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스멀대는 소통의 꿈 깊숙이 간직한 채/ 희망찬 연둣빛 나팔 조심스레 불며 간다.’라고 하여 통일에 대한 희망을 말하고 있다.
목우사자木偶獅子 포효하는 아스라한 동쪽 끝
우산국 품에 안긴 독도여 안녕하신가
영걸의 쩌렁쩌렁한 호령소리 뜨겁구나.
천오백 년 전에도 부국강병 꿈을 꾸던
실직주* 해변 따라 바퀴는 굴러간다
시퍼런 김이사부 눈빛 질곡의 역사 휘감고.
심심하면 건드려 보는 섬나라 억지 근성 저놈들의 입에다 재갈을 물려 놓을안중근, 안용복 또 납신다, 샛바람이 통쾌하다.
최종덕, 조준기 숨결 김성도로 이어지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용왕님도 우리 편
팔천만 가슴 위의 성, 독도여! 활개를 펴라.
*실직주: 강원도 삼척의 옛 지명
-「레일바이크의 눈」전문 -
독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낸 「레일바이크의 눈」이다. ‘우산국 품에 안긴 독도여 안녕하신가/ 영걸의 쩌렁쩌렁한 호령소리 뜨겁구나.’라며 독도를 향한 호탕한 마음을 드러낸다. 옛 삼척지명이었던 ‘실직주 해변 따라 바퀴는 굴러간다/ 시퍼런 김이사부 눈빛 질곡의 역사 휘감고’라며 신라시대부터 독도는 대한의 국토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일본은 독도를 심심하면 건드려 보며 자기들의 땅이라고 우긴다. 일제시대의 안중근 의사, 조선시대의 안용복이 헛소리하는 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러 나타난다는 것이고, 이러한 상상으로 통쾌함을 맛본다. 독도에다 주소를 옮겨 살던 최종덕, 조준기, 그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용왕이 우리 편이라며, 팔천만 한국인의 가슴 위의 성, 독도가 활개를 펴기를 바라는 작품이다. 그의 다른 작품 「독도 다방, 조준기」에서도 독도에 대한 사랑이 드러난다. 조국 통일을 바라는 것도, 독도에 대한 사랑도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조국애를 표현한 작품들에서도 휴머니즘이 나타난다.
4.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휴머니즘
따라오란 말인지
한쪽 눈을 깜박인다
나이테를 잠시 잊고 헐떡이는 붉은 상상
앞에 선 예쁜 승용차가 45˚ C 처녀이다.
싱싱하던 예각의 꿈
배꼽만큼 작아지고
인자함이 더 서러운 수긍의 직각이다
45도,
온도도
각도도
가장 푸른 생生의 마루.
-섹시한 45도 7625-
처음 이 시조의 제목을 보며 ‘섹시한 45도 7625’가 무엇을 뜻하는가 궁금했었다. 시조를 읽으면서 다름 아닌 차 번호였음을 알게 되었다. 김영철 시인의 ‘시조 제목달기’가 심상치 않음을 이 작품에서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섹시한 45도?’, 모두의 흥미를 끌게 한다. 모든 것을 시조의 소재로 소화시키는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새로 구입한 예쁜 승용차를 앞에 놓고 예쁜 처녀를 보듯 ‘나이테를 잠시 잊고 헐떡이는 붉은 상상’이라며 설레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불 꺼진 주유소 앞
고요한 횡단보도
존 롤스*와 마이클 샌델**이
격론을 벌이는 시각
신호는 저 홀로 붉고 두 가슴이 다툰다.
환경과
인류를 위한 에너지 절약인가
정의와
양심을 위해 법을 지킬 것인가
51의 민주주의 꽃과
49의 폐허 사이.
* <정의론>을 쓴 미국의 철학자.
**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하버드대학교 교수.
-「4시51분49초」전문 -
정의란 개념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그만큼 이 정의라는 개념이 매우 포괄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여러 철학자들은 이 정의를 서로 다른 것으로 규정하며 서로의 논리에서 허점을 찾고 자신의 논리를 고수하기에 바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란 적당한 자격을 가진 자에게 맞는 것을 주는 것", 제레미 벤담은 "정의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하는 것", 애덤 스미스는 "정의는 자율성 안에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 존 롤스는 "정의는 평등"이라고 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도이치민족이 정의고 정의를 퍼트리는 길은 유태인과 집시를 몰아내는 일이라 하였고, 미국은 정의의 이름으로 베트남과 가자지구의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기도 하였으니 정의란 참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정의는 사회이념이 될 수도, 다른 세력을 비방하기 위한 무기일 수도 있다. 도덕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경제학과도 관련이 있고, 환경과도 관련이 있는 용어다. 그렇다면 정의는 모두를 위한 정의(Justice For All)가 될 수 있는가?
정의는 모두에게 이로운 것일 수는 없고 누군가 피해자가 발생한다. 때문에 우리는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 즉 최대다수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51의 행복을 위해 49의 상대적 소수파를 배척해도 되는 것인가하는 것도 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타이틀 속에 사는 우리에게 정의란 과연 무엇인지, 자기 양심이나 도덕적 자유에 맡겨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은 새벽 신호등 앞에서 순간적으로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는 모습을 ‘신호는 저 홀로 붉고 두 가슴이 다툰다.’고 표현하고 있다. 아무도 지나지 않는 횡단보도 앞에서 ‘갈까, 말까’ 망설이는 누구나 한 번 쯤은 경험했을 일상의 사소한 갈등의 문제를 인류의 큰 주제로 결부시키고 있어 이 시인의 시적 역량을 알게하는 수작(秀作)이다. 사소한 일상에서 현대감각이 가미된 사회적 주제를 끌어낸 능력이 탁월해 보이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했다는 것에 이 작품의 가치가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 이 시인의 앞으로의 시조를 기대해 봐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콩 메주 골라서
고춧가루 범벅을 하고
천일염에 간 맞춘 시간을 함께 재워
빛
고운 숙성을 기다리는
향기 깊은
시조
한
수
향기 깊은 시조를 빚고 싶은 시인으로서의 마음이 잘 표현된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정형시인 시조를 신토불이의 작품으로 빚어내고 싶은 그의 마음이 있으므로 김영철 시인의 시조가 기대된다.
그는 앞에서 소개한 여러 작품을 통해, 또 소개하지 못한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다툼이 아닌 화합, 인간적인 따스함을 추구하는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그의 시조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적인 따스함을 지닌 인간적인 삶이다. 현실긍정이나 현실비판을 통해 그의 시조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휴머니즘인 것이다. 김영철 시인이 더욱 아름다운 좋은 작품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김영철 시인의 시조향기가 시공을 넘어 멀리 멀리 퍼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는다.
2012.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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