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작가,작품론에 대하여
宇玄 김민정
먼저 장인수씨가 발표하는 김승옥의 작가와 그의 소설에 대해 살펴보고 비판해 보고자 한다.
먼저 그의 김승옥론에는 주석이 하나도 달려 있지 않다. 모든 것을 개인적인 관점에서 김승옥 소설에 대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뜻인지 궁금하다.
또 그는 1쪽에서 “4월의 혁명과 5월의 쿠데타를 겪은 뒤에 비로소 <산문시대>가 등장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혁명과 쿠데타의 어휘의 차이는 무엇인지 궁금하고, 또한 그때부터 <산문시대>가 시작되었다면 그 전에는 산문이 없었다는 뜻인지 활동이 미약했다는 뜻인지도 분명하지가 않다. 그때부터 산문이 많이 나타났다는 의미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명징성이 없다.
환멸의 어둠과 어둠의 환멸에 대한 것이 김승옥 소설의 이해라면, 김승옥은 시대에 대한 환멸감 때문에 소설을 썼다는 뜻인가? 더욱 검은 어둠밖에 없었던 시대의식에 동참하기 위해서? 김승옥이 시대에게서 받은 원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궁금하다.
그는 김승옥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김승옥 작품의 특징이 첫째는 아비찾기/아비되기, 둘째는 자살, 셋째는 악마화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얼마나 타당성을 갖는 것일까? 그러한 것들이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논리성으로 전개가 되어야 하는데 이 글속에는 그렇지 못한 요소와 면이 많은 것 같다. 그는 「무진기행」에서 “희중의 아내는 오히려 무언가 잃게 하기 위해 남편을 무진으로 내 몬다.”고 했는데 과연 잃게 하기 위한 것인가? 오히려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자아발견의 시간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과거를 돌아보았을 뿐, 그 후의 시간들이 행동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희중은 도대체 몇 번이나 ‘마지막으로 한 번’무책임을 긍정했을 것인가.” 그렇다. 그는 그 후에도 아마 계속적 반복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또 한번 부끄러운 자신을 남겨두고 오는 행위가 자존심을 잃는 행위라면 앞서의 주장도 타당성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숙과의 행위가 진정한 아비되기의 행위라는 것은 얼마나 긍정될 것인가?
“김승옥 소설들에서 ‘자살’은 인물들의 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이것은 가장 비의지적인 행위인 현실에 대한 판단 지연, 모색의 지연을 함축하고 있는 논리와 구별할 수 없었다.”에서는 작가가 주인공들을 자살하게 하는 것은 결국 작가의 비의지적인 행위인 현실에 대한 판단 지연, 모색의 지연을 함축한다고 보는 것인지?
대담하게 여러 가지 해석한 것은 좋은 데 독자들이 조금더 수긍할 수 있도록 객관성, 타당성을 가져 주었으면 싶다.
'천승세 소설 연구'
宇玄 김민정
천승세 소설에 대한 김학현의 ‘세계 변모에 대한 장외적 대응’을 살펴보고 비판해 보고자 한다.
김학현은 천승세를 ‘잃어버린 세대’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로 “세대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문단 상황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자신의 세대를 잃어버린 작가이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쓴 작품들이 그 시대정신이나 의식을 깊이 반영하지 않았다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의 소설이 과거의 이야기나 역사물을 다룬 이야기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작가의식이 들어가기 마련이고, 현대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할 경우 그 주인공의 의식속에는 현대감각이나 의식이 들어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그 시대의 다른 소설가군과 다르다고 하여 감히 ‘잃어버린 세대’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평론가의 자만이라 여겨진다. 천승세 같은 경우 그가 쓰는 소재라든가, 아니면 주인공들이 60년대에 유행하던 지식인들이나 도시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다고 하여 어떻게 세대를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시대 다른 작가군과 틀린 개성을 가졌던 것에 촛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올바른 비평이란 그 소설속에서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더욱 보충해석해 주는 것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평가가 작가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3쪽에서 “소설의 구조는 작가의 시대 인식 방법이며 따라서 그 작가의 정체성을 살피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천승세도 60년대 다른 소설가들이 보여주는 소설의 구조와 같은 격자소설의 구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왜 그러한 구조가 시대를 반영한다고 보는가? 그것에 대한 설명은 없다. 떳떳이 자기를 내세울 수 없는 시대적 상황 때문이란 말인지, 아니면 또다른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러한 격자구조 때문에 3인칭이 1인칭 소설이 내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그렇다면 1인칭 소설이 주는 효과는 어떤 것인가?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60년대 소설의 특징이라고 본다면, 천승세의 소설 「화당리 솟례」「맨발」등도 세대 감각이 들어난다고 필자도 보고 있어서 ‘잃어진 세대’라는 논지와는 맞지 않는다.
60년대 분열과 갈등, 혼란과 타락이라는 사회사적 문제에 있어서의 순수지향과 원초적 감성을 통한 화해지향이라는 데에 천승세의 작가적 위치가 있다는 말에는 이해가 되지만 50년대와 70년대의 단절적으로 나타난 작가라는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곧 이어 그를 60년대 주류와는 다른 방식으로 50년대와 70년대의 가교 역할을 해낸 작가라고 했는데 모순은 아닌지.
박상륭 소설 연구
-금기와 불연속의 초월형식을 읽고-
宇玄 김민정
먼저 김미정씨의 박상륭 소설 연구를 읽고 문제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먼저 박상륭의 소설을 읽으면서 제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많았다. 보통 소설에서는 제목이 소재나 주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아겔다마」나 「쿠마장」등 제목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한데 소설을 다 읽고도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것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면 좋겠다.
박상륭의 소설이 비일상성의 소설이라고 하여 하나의 추상 구도로 이해하고 있고, 또한 구체적 시공간을 배제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배경설정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는가.
또한 그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구체화되지 않은 세계의 모습, 일반 명사화된 인물들, 인과관계없이 내뱉는 듯 보이는 모호한 말들이나 행동들이 작품 내용과 교호하면서 그로테스크함을 근원적으로 촉발시킨다고 했는데, 이러한 그로테스크함으로 작가가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공포심리학을 기대하기 위해서인가? 추리소설같은 효과를 얻기 위해서인가 궁금하다.
「아겔다마」에 묘사된 예수의 죽음이 기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의 역설적 표현이지만, 박상륭에게 있어서는 유다와 역할이 바뀌는 거짓 메시아적 의미로 정의된다고 했는데, 작가는 그리스도가 신이 아니었으며 유다가 오히려 신의 예정 나에서 희생양이 되었음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가 괴로워하고, 결국 예수의 죽음을 인류의 구원으로 보고 있는 기독교의 해석을 부정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도 볼 수 있는가.
「쿠마장」에서는 항아리(독)를 팔면서 또 항아리에다 장사를 지내는 장의사 영감과 소년이 등장하고 한번 갔던 장에는 절대로 다시 안 가는 장타령꾼이 화자로 등장하고 있다. 영감은 모두의 칭송을 받는 살아있는 신기라고 하지만 앉은뱅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몇 명의 죽음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주위의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자살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방관자 또는 방조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을 허무주의와 살신이라 볼 수 있는지 작가의 죽음에 대한 의식을 더 깊이 다루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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