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시조문학상 작품론>
사진 설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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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인, 필자는 그를 시조를 지키는 '투사'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것은 김민정 시인이 시조에 바치는 열정이 뜨겁기 때문이다. 시
독자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시조는 소비자가 없는 상품과 같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조를 독자에게로 연결시키는 통로에 관한 관심도 크게 기울여야 한다. 상품이 나빠서가 아니라 좋은 상품이 있는 줄 몰라서 소비되지 않는다면 알려야 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민정 시인은 그런 일에 매우 열심이다. 창작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조를 학문적으로 탐구하여 박사 학위를 수득하기도
했다. 따라서 김민정 시인은 이론으로도 무장이 된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메일을 통해서 시조를 알리는 일이나, '국방일보'에 시조를 해설하고 있는 활동 등은 시조단에 아주 의미 있는 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시조를 온몸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 해 현대시조 100주년이 되던 해 단시조 100편을 묶어 '사랑하고 싶던 날'이라는 시조집을 내기도 했다. 시조단에서
이런 저런 행사가 열려 현대시조 100주년의 의미를 살폈다. 그렇지만 한 시인이 현대시조 100년의 의미를 살려내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김민정 시인이 그 작업을 거뜬히 해냈다. 이렇게 시조를 알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일에 대해 시조시인들이 그에게 박수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조시인의 본령은 시조를 창작하는 일, 그 일에서도 김민정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좋은 작품을 창작하고 있는
김민정 시인은 시인이 견제해야할 정신적 자세를 시조 3장에 갈무리하고 있다. 이 작품의 초장에 '색안경을 벗어놓고 세상을 볼
이 작품의 제목은 '도솔암 적요'다. 전국에 '도솔암'이란 이름을 가진 암자가 여럿 있지만 이 작품에서의 암자는 전북 고창
단수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글은 짧아도 그 의미는 길다. 동양시학에서 말하는 언단의장(言短意長)을 잘 살려냈다.
초장은 상황의 제시다. 핵심 시어는 '댓돌'이다. '댓돌'은 무엇인가? 댓돌은 집채의 낙숫물이 떨어지는 곳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이란 뜻과 '섬돌'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섬돌의 의미다. 그 댓돌은 안과 밖의 경계가 되는 곳이며 방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을 벗어두는 곳이다.
중장은 그 댓돌 위에 무엇이 있는가를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흰 고무신을 신고 온 그 누군가가 그 방에 있다는 것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암자의 방안에는 그 흰 고무신의 주인인 어느 스님이 앉아있을 것이다. 문맥으로야 흰 고무신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 고무신의 주인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도솔암에서 수행을 하는 스님이 그 흰 고무신의 주인이라면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시의 화자가 느끼는 감정일 뿐이다. 스님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수행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암자는 적적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와 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흰 고무신 한 켤레'가 그것이다. 그것이 적요다.
종장은 때를 가르킨다. '그리움/ 뒷짐지고서/ 눈만 내리 감은 날'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뒷짐'이란 시어에 관심을 쏟지않을 수 없는데 '뒷짐'은 사전적으로 '두 손을 등 뒤로 젖혀 마주 잡은 것'을 가리키는 데 매우 여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움'을 뒷짐진다는 것은 대단히 초연한 자세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을 수사하는 '눈만 내리 감은 날'과 연결되면, 현실을 초월한 그 어느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구조를 분석한다면 '언제, 어디서, 무엇을'로 요약될 수 있다. 그것이 초장, 중장, 종장으로 연결되지 않고 종장, 초장, 중장의 순으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는 도치법이 활용되었다. 만약 이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그 자리를 옮겨 놓는다면 "그리움 뒷짐지고서 눈만 내리 감은 날/ 마애석불 홀로 앉은 도솔암 댓돌 위에/ 흰 고무신 한 켤레 누구를 기다리나"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 수의 시조 속에 도솔암 적요를 다 담아내고 있으니 어찌 3장 6구 시조 한 수가 작거나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특히 이 작품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감각하기 어려운 적요를 '댓돌 위에 놓인 흰 고무신 한 켤레'로 표현한 것이다.
초장과 중장을 거쳐 드러나는 이 이미지의 제시가 아니라면 이 작품은 독자의 가슴에 가닿지 못할 것이다. 댓돌 -고무신- 뒷짐이라는 시어들이 초 중 종장에 배치되면서 도솔암의 적요를 우리 눈 앞에 그려주는 것이다. 그 절간의 적요가 우리를 사색의 숲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수작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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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도솔암 적요'를 읽으면 이 작품과 어울릴 듯한 그의 '찻잔 속의 바다'가 떠온른다.
실선으로 뜨다가
점선으로 잠기다가
밀물이 되었다가
썰물이 되었다가
저 혼자
잠 드는 바다
수평선이 부시다
-「찻잔 속의 바다」 전문
시인의 위대함은 새로운 사유를 만드는 것이다. 일상의 논리로는 해석되지 않는 그 무엇이지만 그렇게 사유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일상적 논리로 찻잔 속에 바다가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김민정의 이 작품에서 우리는 '아니야'라고 강하게 부정할 수가 없다. 이른바 시적 논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그 찻잔을 유심히 바라본다면 실선으로 점선으로 뜨고 잠기고 밀물이 되고 썰물이 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수평선은 어쩌면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녹였을 테고 그쯤엔 수평선이 부실만도 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찻잔 속에서 바다를 보아낸다면 이 시인은 그 무엇에서라도 시를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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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자세를 똑 바로 견지하겠다는 각오가 단단하고, 창작 외에 시조 이론의 탐구, 시조 알리기 등에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있는 그에게 투사라는 말을 어찌 아낄 수 있으랴. 그리고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작품 창작에서도 '적요'의 이미지를 흰 고무신 한 켤레 놓인 댓돌로 제시할 수 있으며, 찻잔 속에서 바다를 보아내는 시인이다.
짧음을 길게 활용하고, 좁음을 또한 넓게 활용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김민정 시인에게서 시조의 한 줄기 빛을 기대해도 좋으리라. 「함께 가는 길」을 읽으며 이 글을 맺는다.
긴 길이면
더 좋겠다
너와 함께 가는 길은
만남과 이별 잦은 우리들의 생애에서
아직도
익숙지 못해
숨 고르지 못한 나는
- 「함께 가는 길」전문
<『나래시조』 82호, 2007년 여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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