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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조평

김민정 시조론 - 여백이 밀집보다 더 충만스러울 때가 있다<정휘립>

by 시조시인 김민정 2008. 11. 12.

여백이 밀집보다 더 충만스러울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충만은 순치를 거부한다


 

정 휘 립

 

 

 

너절한 문학적 치장을 단념하고 소박한 단순성을 승부수로 내걸며

서정적 시심의 그늘 아래를 가만가만 거니는

작법 또한 버릴 수 없는 현대시조의 한 부면이다.

그 점에 있어서 김민정이 눈에 띈다.

 

 

                                                  무심히 피었다 지는/ 풀꽃보다 더 무심히//
                                        모두가 떠나버린/ 영동선 철로변에//
                                        당신은/ 당신의 무덤/ 홀로 지켜 왔습니다//
                                        살아서 못 떠나던/ 철로변의 인생이라 //
                                        죽어서도 지키시는/ 당신의 자리인 걸//
                                        진달래/ 그걸 알아서/ <서럽도록> 핀답니다//
                                        시대가 변하고/ 강산도 변했지요//
                                        그러나 여전히/ 당신의 무덤가엔//
                                        봄이면/ 제비꽃, 할미꽃이/ 활짝활짝 핍니다//
                                        세월이 좀더 가면/ 당신이 계신 자리// 
                                        우리들의 자리도/ 그 자리가 아닐까요//
                                        열차가/ 사람만 바꿔 태워/ 같은 길을 달리듯이//
 
                                        - 김민정, <철로변 인생-영동선의 긴 봄날 1> 전문
                                         (시집 《영동선의 긴 봄날》(동학사, 2008)에서)
 
        
 
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위 작품으로 대표되는 이 시집의 바탕은 단순한 사부곡思父曲의
저서 자체가 아닌, <상실감과 본능적인 보상심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시인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 철도라는 교통수단이 갖는 서민적 삶의 애환을
풀어내면서, 소위 '로드 무비road movie'의 구도를 긴 호흡으로
시종일관하는데, 이 힘의 원천은 비록 약세弱勢하긴 하지만, 상실감의 보상이라는
강한 내적 욕구이다. 나로선 이 시인을 대면해 본 적 없지만,
그가 내면에 포란한 집념과 승부욕은 여간 뜨겁지 않을 듯 싶다.
 
 
인용시만 놓고 보았을 경우, 가족애의 애틋함으로 기법적 단순성을 누른
시인 특유의 맑은 정감이 들꽃 빛깔처럼 번져나는데,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4단계  
구조가 돋보인다. 굵은 글씨가 보여주듯이, 피고 지는 세태의 무상함에도
아랑곳없이 피어나는 철로변 무덤가의 진달래는 아버지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을
증폭시킨다. 덧없이 지나간 것들에 대한 향수를 표층적으로, 그리고
아버지의 자리에 후손들도 결국 가게 되리라는 동양적 순환 사고를 심층적으로 드리운
테마는 곧 '영동선'으로 철도를 대표하는 제유법提喩法의 산물이며,
그 철도는 인생살이 여정 자체에 대한 환유적 상징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이 압축미학의 면에서 느슨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하고픈 말을 다해야 직성이 풀리는 무의식적 서사 경향 때문이다. 만일
위 작품에서 셋째 연을 제除한다면, 시적 긴축미가 훨씬 생생해진다.
둘째 수의 종장이 이미 다음 연의 내용을 응축하여 다 말함으로써 전轉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실상 셋째 연은 불필요한 부연에 불과하다. 독자에 따라서는,
김민정 전매특허의 '풀어쓰기'가 회고적 독백의 퇴행성을 위험한 담보로
설정하면서 오히려 친근감의 서정이라는 이윤을 벌어들인다고 할 수도 있겠다.

<정신과 표현, 2008년 11,12월호>


Clarinet : Acker Bi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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