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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비 내리는 날

by 시조시인 김민정 2008. 9. 25.

 

 

 

비 내리는 날 / 宇玄 김민정

 

 

   오늘 같은 날은 글을 쓰고 싶어진다. 아니 옛 추억에 잠기거나 감미로운 음악이 듣고 싶어진다. 밖은 지난 밤 소나기로 아직 젖어 있고 아직도 날은 채 개지 않고 안개가 자욱한 오전. 늦은 아침을 먹고 식탁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그리고 창문을 열고 미루나무에 맺혀있는 빗방울을 내다보다가,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지금도 그리운 지난 날의 얼굴들을 생각해 본다. 해야 할 공부, 써야할 원고가 있지만 잠시 잊어본다.

 

   젊은 날, 비를 맞으며 했던 여행을 생각해 본다. 그때는 젊음이 있었다. 두려울 것도,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여행이 가고 싶으면 간단한 핸드백만 하나 들고 첫새벽에 집을 나와 첫기차 또는 첫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내가 가고 싶은 행선지까지 가곤 했다. 비에 젖은 집들, 그리고 들판, 숲까지도 비에 젖어 풀잎들과 나뭇잎들은 더욱 싱그럽게 생명을 나부끼고 푸르름에 한껏 젖어 있었다. 새벽강에는 가득히 안개가 피어오르고, 부지런한 사람들만 들녘에서 비옷을 입고 일을 하고 있을 뿐, 도시의 사람들은 아직 단잠에 취해 있을 시간이다. 평소엔 잠꾸러기지만 여행할 때는 유난히 잠이 없다. 유난히 신경히 날카로와서인지, 집을 떠난 설레는 마음 때문인지 갈 때부터 올 때까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곤 한다.  

 

 

 

   버스가 산모롱이를 돌아갈 때면 비에 젖은 산나리꽃, 산도라지꽃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진다. 푸른 숲속에서 주황빛 또는 보라색 꽃이 군데군데 빗방울을 굴리며 피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꽃가게에 무더기로 진열된 인공재배의 꽃이 아니라 향기도 진한 산속의 꽃이라서인지 색깔도 더욱 선명하고 예쁘다.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피어 야생화는 청순한 이미지를 준다. 자연적 생명과 신비가 부드럽게 스며오는 듯한 모습에서 청순한 아가씨를 보듯 기분이 상쾌해진다. 차창으로 스미는 바람도 한껏 시원하다. 여행을 할 때면 나는 잠시 현실을 잊고, 마냥 행복한 여인이 된다. 그리고 한없이 마음이 열려온다. 사랑은 아름답고, 인생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며 마음도 좀 더 겸손해진다.   

 

   어느 산비탈엔가는 보라색꽃이 핀 감자밭을 볼 수 있다. 아, 저건 강원도 산골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어. 자주 감자였지. 흰 감자에 비해 조금은 애리고 또 달콤한 자주 감자의 맛. 어느 새 나는 서울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가. 감자라면 그저 시장에 흔하게 쌓인 흰감자를 연상하며, 자주감자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강원도 산골 내 고향의 감자는 흰감자는 아니었다. 약간 붉은 색이 도는 감자와 드물게 자주색 감자가 섞여 있었지. 아마 어른들이 별미로 조금씩 섞어 심으셨던 것 같다. 흰색 꽃이 피는 흰감자와 보라색 꽃이 피는 자주감자. 그 꽃이 문득 아름답게 느껴진다.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답게 다가오듯, 어렸을 때 무심히 보았던 모든 것이 향수가 되어 다가온다. 어린 날의 추억. 비가 오는 날에는 빗속에서 감자를 캐다 껍질을 벗기고 쪄 먹기도 했었는데, 감자껍질을 벗기는 건 낡은 놋숫가락이었다. 숫가락 끝은 칼날처럼 날카로왔는데 잘 안들면 가끔 숫돌이나 부엌벽에 아니면 돌끝에다 약간씩 갈아쓰기도 했다. 놋숫가락으로 감자껍질을 벗기는 것은 그때 그곳의 생활이었으며, 차라리 칼로 깎는 것보다 빨랐고, 칼로 반듯하고 매끄럽게 깎은 감자보다 더 맛이 있어 어린 마음에도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다.

 

   해가 제일 긴 날인 하지가 되면 하지감자가 나오는데, 이 날 처음으로 감자를 캐다가 맛을 보곤 했다. 햇감자를 먹을 수 있는 날이라 그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감자꽃과 꽃열매를 보면서 땅속뿌리에 올망졸망 달려있을 감자를 상상하며 즐거워하고 그 감자가 빨리 자라기를 바라곤 했었다. 논이 별로 없어 쌀농사를 지을 수 없는 강원도 산골사람에게 감자는 귀중한 식량이 되기도 했지만 군것질 거리가 달리 없었던 산골 아이들에겐 햇감자는 별미였고 기다려지는 간식거리였다.

 

   먹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뿌리에 주렁주렁 달린 감자를 캐는 재미도 어린 나에게는 매력적이었다. 수북하게 흙을 돋우어 북을 준 감자골에서 감자순 옆을 조심스럽게 파 뿌리를 상하지 않게 하면서 감자의 자란 상태를 보고 먹을 만큼 자란 감자를 따 내고 나서 다시 흙을 덮어주는 일은 그런 대로 재미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뿌리를 상하게 한다고 잘 시키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졸라 그런 일을 하게 되면 참으로 신이 났었다. 

 

   세월은 흐른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분량으로 주어지지만 사람에 따라 쓰는 방법이 다르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은 그리워진다. 끝없는 추억 속에 잠기다 보면 기차는 어느 새 목적지에 닿고, 나는 내릴 준비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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