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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정선 아리랑

by 시조시인 김민정 2008. 9. 26.

                 정선 아리랑 / 宇玄 김민정 

 

 

   내 자신 강원도 삼척 출신이고 정선 가까운 곳에 살았었지만 물레방아로 유명하다는 정선에

실제로 가게 된 것은 대학3학년 겨울방학 때 <민요답사>를 위해서였다.

  그때쯤 시조를 써 오고 있던 나는 민요에 관심을 가졌었고, 고정옥의 ‘조선민요연구’라는

책을 읽으면서 실지 답사를 한 번 해보고 싶었었다. 마침 학과의 <민요연구반>에서 ‘정선아

리랑’ 연구가 3년째로 마무리작업 단계에 있어, 정선에 대한 마지막 답사여행이 될 것 같다

기에 나도 신청을 하고 따라가게 되었다. 정선이라면 삼척에서 가까운 곳이고 그들이 사용하

는 사투리도 비슷하리라 여겨져 나로선 다른 지방보다 친근감이 가는 곳이었다.

  가기 이틀 전쯤엔 전국적으로 눈이 내렸다. 강원도는 예나 지금이나 눈이 많은 곳이라 걱

정을 하면서 청량리역에서 증산행 기차를 탔다. 모두 여행에 대한 가벼운 흥분으로 끼리

끼리 앉아 얘기도 하고, 노래도 들으면서 갔다. 증산에서 다시 정선까지 가는 기차를 갈아타

야했는데, 기차를 타니 차 안에선 그 곳 사람들의 체취가 물씬 풍겨왔다. 오일장을 다녀오는

 그들은 많은 짐들을 가지고 있었고, 차내는 시끌거렸다. 산골 아낙네의 부스스한 머릿결이

며 말씨 속에는 그들만의 순박성이 뚝뚝 흘러넘치고 있었다.  

  오후 2시쯤 정선에 내리니 눈이 쌓여 있었으나 걱정했던 것만큼 많지는 않았다. 정선 읍내

의 군청과 경찰서에 들러 우리가 온 목적을 밝히고 협조를 부탁했다. 정선문화원에도 들렀는

데 그곳에선 여고생들이 정선아리랑을 연습하느라 방학 중인데도 나와 있었다.


  정선의 구명은 무릉도원이 아니냐

  무릉도원은 어디루 가구서 산만 충충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정과 한이 어우러진 구성진 가락, 어찌 들으면 조금은 청승스런 가락이 단발머리 소녀들에

게는 어색하게도 느껴졌지만, 이들의 진지한 모습과 서울의 남․녀 고등학생들의 내용도 잘

 모르는 팝송을 흥얼거리고 있는 모습이 대조되면서 이들의 모습이 훨씬 긍정적이고 신선해

보였다. 

    
  숙소를 정하고, 언덕에 세워진 아리랑비를 보러 갔다. 아리랑비는 정선읍내가 내려다보이

는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저녁식사 후 우리는 세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읍내의 기능보유자

인 김병화씨(이 분은 중학생인 딸도 정선아리랑을 잘 불러 대회에 나가 아버지는 흑백 TV를

타고, 딸은 칼러 TV를 탔다 한다)를 불러 정선아라리 가사를 채록하기로 하고, 두 팀은 읍

내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에 각각 가기로 하였다. 

 

  마을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갔던 곳은 큰 냇물을 따라 가다가 상수도가 있는 곳

을 지나 산비탈에 드문드문 집들이 있는 외딴 곳이었다. 산골의 밤은 고즈넉히 깊어 있었고,

눈이 덮여 온 천지가 하얗게 빛나는데다 달빛까지 은은하여 밤길이었지만 그리 어둡지 않았

고 세상은 고요속에 잠겨 있었다. 눈 덮인 마을은 아늑하고 조용했으며 가까운 물소리와 멀

리서 개짖는 소리가 가끔 들렸을 뿐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눈 덮인 겨울산과 강원도 산

마을 밤의 정경이 우리를 고향에 온 듯이 안온한 마음을 갖게 하여 오래 머물면서 겨울밤

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맑은 공기 속에 싸아한 겨울밤의 추위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한 사

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초행이라 가벼운 흥분과 설렘과 걱정들을 아울러 지니면서 눈길을 조

심스레 걸었다. 

 

  문화원에서 소개해 준 사람을 찾아가는 길이었는데 큰 길가엔 집들도 없어 바로 찾아가고

 있는지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첫 번째 찾아간 산중턱에 위치한 집엔 지난해 정선아리랑제

에서 장원한 사람이 살고 있다는데, 마침 출타중이라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을

찾아갔다. 다시 찾아간 곳은 대여섯 가구가 붙어 있는, 한 길 위쪽 마을이었는데, 찾아간

집주인은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웃 아저씨․아주머니를 불러 모아 주었다. 우리

는 준비한 막걸리와 새우깡 등을 풀어놓고 한 잔씩 돌리면서 녹음기를 준비하고 필기도 함

께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청자에게 질문도 하면서 2시간에 약 150곡 정도를 채록했다. 이

곳 정선에는 매년 5월에 정선아리랑제가 있고, 거기서는 개인별, 단체별 대항이 있다고 한다.

 또한 이곳 사람들은 아라리 한 두 마디씩은 누구라도 할 줄 안단다. 밤 1시가 넘어 돌아오는

 길엔 산골날씨가 얼마나 춥던지 숙소에 올 때까지 모두 입을 다물고 종종걸음을 하였다. 숙

소에 도착한 시간은 밤 2시, 다른 팀들 모두가 걱정하고 있었다.

 
 

 

  이튿날은 팀을 새롭게 네 팀으로 구성하여 나는 남면 선평리란 곳에 가게 되었다. 산골 버

스길을 얼마쯤 가서 내린 곳은 첫눈에 경치가 아름다운 아담한 마을이었다. 먼저 구멍가게에

 들러 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이장님을 찾아가 우리가 온 목적을 말했다. 부녀회에도 알려

저녁밥을 먹은 후, 부녀 한 팀, 노인 한 팀을 만들어 남학생들은 노인팀을 맡고 나는 부녀팀

을 맡기로 했다. 겨우 한 번의 경험뿐이고 혼자라서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열대여

섯분이 모인 걸 보고 아차 싶었지만 호기심을 갖고 모이신 분들에게 몇 분만 남고 돌아가라

고 할 수도 없어 그냥 시작했고, 모두 열심히 해 주셔서 그런대로 2~3시간 채록할 수 있었

다. 채록하기에 가장 좋은 인원은 대여섯명이라 한다. 선평리 사람들은 ‘정선아라리’의 발

생지가 이곳에서 1Km쯤 떨어진 ‘거칠현’이라고 주장한다. 고려말 유신들이 조선의 새 정권

을 피해 이곳에 와 살았고 그들이 부른 노래가 정선아리랑비에도 새겨진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억수 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라는 노래이다. 만수산은 개성에 있는 산이며 검은 구름은 새로운 정치 세력인 조선을 말한다

고 한다. 또 그때 고려의 칠현이 숨어살았다하여‘거칠현’이라 한단다. 정선아라리(이곳 정선

람들은 ‘아리랑’이라 하지 않고 ‘아라리’라 한다)의 연원이 그렇게까지 올라갔는지 알 수

없고, 또 일설에 ‘아우라지’라는 곳이 발생지라고도 하니, 정선아리랑 발생지는 정확하지가

않은 것 같다. 이튿날은 거칠현 골짜기에서 할머니 두 분의 노래를 더 채록했다.



 

 

  3박 4일의 여행을 통해 정선아리랑이라는 민요를 채록하면서 느꼈던 것은 시조나 시에서

 느끼는 관념성이 별로 없고 그들의 자연스런 생활에서 우러나는 감정이 진솔하게 표현되

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현재의 생활이 아닌 일제시대, 개화시대, 더 이전 시대의 것도

있었지만 그것은 전해 내려오는 것이고, 현재에도 즉석에서 노래가 생성된다는 점에 짧은

정선아리랑의 매력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정선아리랑에는 짧은 것만 있는 것

이 아니고 약간 호흡을 빠르게 하는 사설조의 ‘엮음아라리’도 있다. ‘엮음아라리’는

사설시조가 연상될 만큼 형태가 비슷했다.


  우리집의 서방님은 잘났든지 못났든지

  얽어매고 찍어매고 곰배팔이 장기다리

  노가지나무 지게위에 엽전 석 냥 짊어지고

  강릉 삼척에 소금 사러 가셨는데

  백봉령 굽이굽이로 부디 잘 다녀 오세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엮음아라리)

 

정선아라리 내용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가사들이 참 많다. 어느 것을 봐도 그들의 생활이 

진솔하게 드러나는 내용들이며, 생활과 직결된 애환이며, 풍자며, 해학이라는 점에 친밀한

느낌이 들고, 그 감동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사절치기 강냉이밥은 오글박작 끓는데

  그대당신은 으두루 갈라구 신발단속을 하오.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주기 임의 맛만 같다면

  고것만 뜯어 먹어두 봄한철 나지. (*곤드레, 딱주기: 산나물 이름)


  시어머니 돌아가시니 안방이 널러 좋더니

  꽁보리방아 물주느니는 시어머이 생각나네.


  오라버니 장개는 올해 못가면 환갑에 엄쳐 가시고

  검둥송아지 톡톡 팔아서 날 시집 보내 주게. 

 

  정선에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집 저 멍텅구리는 날 안고 돌줄 왜 몰라.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 주게

  싸릿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아우라지: 두 냇물이 합치는 곳)

   

  지금은 그렇지도 않겠지만 예전 정선은 동서남북 사방이 성마령, 백봉령 등의 높은 령으로

되어 있어 이곳에 한 번 들어오면 다시 나가기 힘들다고 하여 자물쇠 형국이라 했다고도 한다.

얼마 전에도 이곳 국민학교에 여교사가 부임해 왔다가 한 달도 안 되어 무서워 못살겠다고 사

표를 내고 갔다고 한다. 이러한 심심산골에 살고있지만 이들에겐 하루하루 안일무사주의인 도

시인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강한 자존심과 현실인식이 노래 밑바탕에 깔려 정선아리랑에 그대

로 반영되고 있으니 오히려 이들의 삶이 더 건강한 삶이 아닐까 생각된다.

 

  답사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갈 때의 분위기와는 달리 그동안 배운 ‘정선아리랑’

을 흥얼거렸고 TV에 나오는 유치한 유행가 가락에 비할게 아니라고 미소했다. 또 언제부터인

우리과에는 유행가 대신 ‘정선아리랑, 진주난봉가, 이어도타령’등의 민요가 불려지게 되

었고 무엇이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가를 생각했다.

 

  요즘 ‘대학가요제’니 ‘강변가요제’니 하면서 기타나 메고 서구적인 펑크머리나 영어가

겨진 이상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볼 때, 몇 년 전의 민요답사 여행에서의 감동이

각나서 이 글을 적게 되었다.

  문화적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 도시의 젊은이들이 과연 정선산골의 사람들보다 의식이 깨어

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특히 요즘도 정선지방에서 불려지고 있는 다음 노래를 들으면

욱 그렇다.


  사발그릇은 깨어지면 두 세쪽이 나고요

  휴전선은 깨어지면 한 덩어리가 된다.  (1987. 2월호. 원예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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