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탑사와 차 한 잔
宇玄 김민정
겨울과 차.
어느 사계절 차가 우리들 가까이 있지 않은 적이 있을까만 겨울에 마시는 한 잔의 차는 더 절실하고 고맙고 친근감마저 느끼게 된다. 눈 내리는 겨울날, 다정한 친구를 만나 옛이야기에 젖으며 마시는 한 잔의 차는 얼마나 훈훈하고 흐뭇하고 인생을 인생답게 하는지!
더구나 그것이 우리들의 미각을 일시적으로 산뜻하게 해주는 차가 아니고,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마실 수 있는, 음미할수록 그윽하고 향그러운 차라면 운치는 한층 더 살아날 것이다. 소녀가 자라 여성이 되고, 직장 생활을 하는 숙녀가 되고, 결혼을 하고, 애기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건, 눈 내린 어느 겨울날 우리가 찾아갔던 계룡산 남매탑사에서 마신 한 잔의 차맛이다.
우리가 남매탑사를 찾은 날은 겨울방학 중의 어느 휴일이었다. 그곳에는 마침 친구가 아는 스님이 한 분 계시다기에 그분도 뵐 겸 겨울 산행을 했던 것이다. 버스를 갈아타면서 동학사까지 가서 남매탑사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휴일이었지만 날씨가 추웠는지 등산객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흐릿한 하늘에선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했다. 먼산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골짜기에도 눈은 꽤 많이 덮여 있었다. 앙상한 겨울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적한 산길,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좀 가파른 길이라 미끄러웠다. 눈 때문에 운동화는 폭삭 젖었고,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길 옆의 나뭇가지를 잡으며 걸었다. 겨우 목적지인 탑사에 도착하였다. 안 계시면 어쩔까 염려했으나 스님은 마침 계셨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곳은 절이라기보다 작은 암자였다. 스님도 두 분밖에 안 계셨다. 우리들의 모습이 퍽 추워 보였는지 따뜻한 아랫목에 자리를 권하고 우물에서 물을 떠다가 주전자에 끓이셨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차 대접을 하시겠단다. 조그마한 화롯불에서 차주전자의 물이 끓기 시작했고, 스님은 차통에서 차잎을 꺼내어 찻잔에 넣으셨다. 끓인 물을 그대로 찻잔에 붓는가 생각했더니 웬걸 60도 정도로 물을 식혀야 한단다. 그런 다음이라야 차가 잘 우러나고 차맛도 제대로 난다는 것이다. 물을 부은 다음에도 뚜껑을 덮고 차맛이 우러나기를 기다리며 차잎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차는 처음 마셔보는 설록차였다. 처음이라 차맛은 잘 몰랐지만 차이름은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눈이 쌓인 겨울날 마시면 정말 어울리는 차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얼마후 방문을 열어 놓고 차를 마시며 먼 산을 바라보았는데, 그 곳에는 하얀 눈이 산 가득 쌓여 있었다. 눈발은 어느새 그치고 뉘엿뉘엿한 석양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산중의 겨울은 다섯 달이 넘어요.”
먼 산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씀하시는 그 모습과 차맛이 어쩌면 그리 어울리는지! 그 눈빛 속에는 세속의 욕망도 욕심도 없어 보였다. 차맛은 그 순간, 스님의 눈빛처럼 그저 덤덤하고 담담한 그러면서도 뒷여운이 남는 것이었다.
산중의 겨울은 다섯 달이 넘는다는 말은 일찍 추위가 오고, 늦게까지 눈이 남는 것으로 알 수 있겠지만, 그 말 속에서 또한 산중생활의 고적함,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외롭고 고적할 때 마시는 한 잔의 차, 마음을 가라앉혀 주고 외로움을 덜어주는 친구같은, 연인같은 차일 것이다. 차를 알고, 차를 마시는 사람은 그 차에서 그윽하고 부드럽게 뒷여운이 남는, 한없이 은은한 그 맛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따뜻한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세상에 대한 모든 욕망과 욕심을 씻어 버리고 가금 속을 훈훈하게 하여 끝없는 인간애를 갖게 하고, 또한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있게 하는 것이리라.
그곳엔 스님 두 분이 계셨는데 한 분은 보살상을 그리는 스님이셨다. 제일 그리기 어려운 것이 보살의 얼굴 표정, 온화한 미소란다. 그림이 잘 안 그려질 때는 차를 한 잔 마시면서 구상을 하신다고. 그날 나는 설록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보이는 것은 겨울산의 앙상함과 쌓인 눈, 들리는 것이라곤 산골의 바람소리, 그리고 가끔 산새의 고즈넉한 울음소리, 세상의 고요가 그 자리에 모두 모인 듯 했다. 한 잔의 차 속에서조차 고요가 우러나고 있었다. 참으로 고즈넉한 겨울 하루였다. 우리들의 마음도 이심전심, 무념무상의 상태로 그냥 평화로왔다. 대접받은 것은 한 잔의 차였지만 거기엔 따스함과 고요함과 평화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산중의 겨울은 다섯 달이 넘어요.
차 달이는 스님은 먼 산 보고 말하는데
설산의 햇살 담겨와 놀빛 같은 산다향.
작설차 한 잔 속에 지리산이 다가오고
초의선사 허허한 웃음 일지암도 두둥실
남매탑 애련한 전설도 차향속에 일렁이고. - 남매탑사 -
삶은 늘 고독하지만, 무엇인가 누군가 사랑할 수 있어 그 고독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문득문득 앙상한 나무들이 적나라한 제모습을 드러내듯 나는 누구인가 하고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명상에 잠겨 본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들이 생각하는 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차츰 내 직장, 내 가정속에 푹 파묻혀 세상 사람들과 친구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삶이 우울할 때는 한 잔의 차를 마시고 싶다. 설록차든, 작설차든, 국화차든, 연향차든... 그러면서 잃어가는 주변에 대한 사랑과 옛친구들에 대한 관심을 그윽한 차향기와 함께 회복하고 싶다. (1988. 겨울. 다심(다문화 무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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