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소재와 주제 찾기, 그리고 창작을 향한 치열한 도전을!
김민정(시조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오랜만에 《시조문학》 한 권을 훑어보며 여러 시조시인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오랜만에 받아본 《시조문학》은 책이 무척 두껍고 또한 다양한 기획으로, 많은 작품들을 싣고 있어 좋아 보였다. 늘 발표지면이 부족한 시조시인들을 위해 다행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작품활동을 안 하나 보다고 생각했던 여러 시인들의 이름이 보여 무척 반가웠다. 작품이 좋든 나쁘든 일단 이름이 보여야 그 시인이 아직 활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작품도 눈여겨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작품을 읽어본 지가 정말 오래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열심히는 살고 있지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에 매달려 그저 매일 매일 분초를 다투면서 살아가고 있다 보니 정말 중요한 ‘시조 읽기, 시조 쓰기’는 뒷전으로 밀쳐두며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 많이 아쉬운 느낌도 든다.
시조를 쓰면서 어떤 소재를 잡느냐와 제목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제목이 그 작품의 가치 반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제목은 중요하다. 그런데 시인들이 너무 쉽게 제목을 결정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또 작품을 꾸준히 쓸 때 자기다운 소재나 주제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다. 작품에서 성함을 가리고 작품을 읽는다면 어떤 특징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들을 섞어놓고 누구의 작품인지 고르라고 한다면 모르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자기만의 개성과 특징을 잡아 글을 써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 자신도 그렇지 못하면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나 싶기도 하다. 요즘의 내 작품도 그냥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을 읊으면서, 다른 시인들의 작품에 그 시인만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언어도단이란 생각도 든다. 나 자신부터 그런 특징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루고 싶은 작품들은 너무 많고 계간평을 할 수 있는 지면은 한정되어 있어 모든 작품을 다루지 못함을 송구하게 생각하며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먼저 소시집의 작품 중 한 편을 살펴보자.
천년을 건너와서 가지에 잎을 달고
수심의 결을 빚어 밑동에 새기었네
용문사 풍경소리에 비늘 벗는 목어여
누구든 가다 지쳐 기대고 싶을 때면
그늘 밑 끝 가지에 감발을 풀어놓고
풍상에 씻긴 나이테 세어보다 잊었다
-김치복의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사 은행나무는 1962년 12월 7일에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42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14m로 수령은 1,100년으로 추정된다. 가지는 동서로 28.1m, 남북으로 28.4m 정도로 퍼져 있다. 용문사는 649년(진덕여왕)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절을 세운 다음 중국을 왕래하던 스님이 가져다가 심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와의 아들 마의태가자 가나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것이 자랐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이 나무는 은행나무 중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큰 나무로서 조선 세종 때 당상직첩(堂上職牒) 벼슬이 내려졌다 하며, 마을에서는 굉장히 신령시하여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나오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쳤기 때문에 중지하였다는 이야기와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살라버렸으나 나무만은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나리에 큰 이변이 생길 때마다 큰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종이 승하했을 때 커다란 가지 한 개가 부러졌고, 8·15광복, 6·25전쟁, 4·19혁명, 5·16혁명 때도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한다. (백과사전 참조)
이 작품은 용문사 그 은행나무를 소재로 하고 있다. 참으로 많은 시인들이 이 나무를 노래했다. 은행나무의 웅장한 위용과 오래된 연륜은 볼수록, 느낄수록 감탄사가 나올 것이다. 어른들이 팔로 안아도 몇 아름은 되는 둘레에다가 나이테는 1,100개 정도가 될 터이니 세다가 잊을 만도 하다. 하지만 나이테는 시인의 실제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시인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추측이다. 그 오랜 시간을 건너며 살고있는 나무를 보면서 인간의 수명은 100년도 안 됨을 생각하면서 새삼 나무의 웅장한 모습과 이토록 오래 살고있는 나무의 생명역사에 존경의 마음이 들고 그 수명에 겸허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에 지친 영혼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누구든 가다 지쳐 기대고 싶을 때면/ 그늘 밑 끝 가지에 감발을 풀어놓고/ 풍상에 씻긴 나이테 세어보다 잊었다’는 표현을 쓰며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무가 겪었을 비바람과 천둥번개 등을 생각하며 삶에 지쳤을 때 여기 와서 나이테를 세어보다 잊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그 잊음’은 나무의 나이테만 잊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지친 영혼도 잊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오랜 연륜의 나무가 인간에게 안정감과 위로를 줌을 시사하고 있는 작품으로 인간이 자연에게서 배우고 위로받는 모습의 작품이다.
다음으로 ‘시조로 감상하는 우리의 국가유산 (3) 자연유산 편’을 살펴본다.
임진년 왜군침략 쓰라린 역사 안고
재무장 조선수군 승리 다진 두룡포구
우뚝 선 거대한 객사 호국정신 우러난다
장대석 기단 위에 아름드리 기둥 세워
우람한 팔작지붕 학의 날개 펼친 기상
그 위용 바라만 봐도 절로 힘이 솟는다
바다를 내려 보며 삼도수군 호령한 곳
출동의 나팔소리 천지를 진동하니
삼백년 통제영시대 얼씬도 못한 왜수군
은하수 끌어다가 병기 씻어 간수하는
평화를 염원하며 그 이름을 지었도다
세병관 웅장한 기품 나라사랑 일깨운다
-강기재, 「세병관」 전문
역사적 국가유산을 소재로 쓴 작품 중의 하나다. 세병관은 제6대 삼도(충청, 전라, 경상) 수군통제사 이경준이 1604년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겨온 이듬해인 1605년에 세운 객사로 2002년 10월 14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305호로 지정되었다. 1604년(선조 37년) 완공한 조선 삼도수군 통제영 본영(三道水軍 統制營 本營)의 중심건물이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3도(충청, 경상, 전라) 수군을 총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멀리 남해를 바라보며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애국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국가유산을 소재로 작품을 쓰도록 하기 위해 마련한 장이라 생각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했던가.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는 건, 그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으려는 것이다. 화려한 과거의 역사만 찬양한다든가, 아니면 초라한 역사라고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그 역사성이 주는 교훈을 발판삼아 더 나은, 앞으로는 후회하지 않을 역사를 만드는데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세병관을 쓴 시인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바다를 지키기 위해 만든 이곳에서 ‘세병관 웅장한 기품 나라사랑 일깨운다’며 나라사랑의 마음을 독자에게 일깨우고 다지고 있다.
머나먼 쪽빛 바다 말갛게 일어난다
석부작 피워내듯 층층이 쌓인 전설
백미로 남는 남해안 한려수도 그린다
물보라 터진 해변 자개빛 띄운 전복
억겁의 시간 새긴 짙푸른 십자 동굴
이낀 낀 풍란과 석란 섬과 섬 잇는 걸까
비 오고 바람 치고 금이 간 가로세로
그 틈새 혼을 담듯 사자바위 촛대바위
승경의 병풍 바위결 물이랑도 멈춘다
하늘에 구름 풀고 수평선 만나는 곳
바다와 한 몸이 된 웅장한 어장 가득
힘 빠진 바다 금강산 몽환 족적 새기다
-김도연, 「거제 해금강」 전문
이 작품은 거제 해금강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읊음으로써 또한 나라사랑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머나먼 쪽빛 바다 말갛게 일어난다/ 석부작 피워내듯 층층이 쌓인 전설/ 백미로 남는 남해안 한려수도 그린다’며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하여 독자에게 펼치고 있다. 풍란과 석란이 자라는 아름다운 다도해의 섬과 섬이 맞닿아 있는 모습, 잔잔하고 고운 파도들이 아름다운 푸르고 맑은 물결, 이 아름다운 자연도 우리가 훼손 없이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연유산임에 틀림없다. 좀 더 넓은 차원에서는 지구를 훼손하지 않고, 맑고 아름다운 다도해를 보호하고 아껴서 후대의 인간에게 물려주는 것이 지금 지구에 살고있는 인간들의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의 자연사랑의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는 작품이다.
낙동강 휘돌아가 병산 품에 안기어서
일곱 칸 기둥 사이 산과 하늘 이어지면
저절로 소란한 마음도 잠잠하게 갈앉는다
흙길에 배롱꽃이 나긋하게 미소 짓고
낮은 문 몸 낮춰 들면 무심례 배어드니
누각에 홀로 서 있으면 가슴이 활짝 열린다
서애의 뜻이 깃든 입교당 바라보면
글 읽는 소리들이 바람에 실려온다
여전히 천년의 결 속에 산과 강이 푸르다
-김태균, 「병산서원 만대루에 올라」 전문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하회마을 가까이 있는 병산서원은 바로 앞의 낙동강과 그 강가를 둘러싼 병풍바위가 아름다운 곳이다. 병산서원은 우리 전통 건축양식인 자연속에서 틔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자연 속에 녹아들어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자연 속에 녹아든 병산서원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건물이 자연과 어떻게 어우러져야 하는지를 무언으로 보여주는 곳이며 조선시대 우의정까지 오른 서애 류성룡이 살았던 곳이다. 류성룡은 국난을 내다보고 정읍 현감으로 있던 무명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천거한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2년 전이다. 그가 없었다며 이순신도 없었을 것이고, 조선의 명운도 달라졌을 것이다. 서원을 짓는 까닭은 두 가지로 후학을 가르치는 것과 사당에 모신 스승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 한다. 병산서원은 1572년 풍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왔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7년에 다시 지어졌다. 병산서원은 철종 때인 1863년 사액서원(왕이 현판과 특혜를 주어 지정한 서원)이 되고, 1978년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 들어서면 마음부터 평온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것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낙동강 휘돌아가 병산 품에 안기어서/ 일곱 칸 기둥 사이 산과 하늘 이어지면/ 저절로 소란한 마음도 잠잠하게 갈앉는다’고 병풍처럼 막아선 절벽과 강물이 있어 무척 아늑하며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곳이다. 이것을 시인은 ‘흙길에 배롱꽃이 나긋하게 미소 짓고’라며 노래한다. 배롱나무는
나목(裸木)으로 인식되어 여인이 머무는 안채에는 심지 않았지만, 사내들에게는 속을 숨기지 않는 강직한 선비 정신을 의미했다. 이 나무는 무상한 세월 속에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시류에 휩쓸리지 않던 결연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아무튼 역사적인 곳에서 옛 선인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자연유산을 통해 애국심을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러한 작품을 읽으며 김상옥의 작품을 잠깐 생각해 보았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그의 작품 중에 신라의 정신에서 민족정신을 찾고자 신라의 유물과 유적으로 시조작품을 많이 썼던 그의 애국정신을 떠올려 보았다. 우리의 자연유산을 살펴보며 그러한 것을 소재로 작품을 쓰는 것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나라를 생각하며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이라 생각된다. 다음에는 단시조단에서 몇 작품을 살펴 보자.
가을 끝 뛰어내려
만공(滿空) 여행 떠난다
갈애(渴愛)와 온갖 번뇌(煩惱)
꼭지 끊고 떨어진다
황금빛 모과의 해탈
선명상(禪瞑想)의 벽을 연다.
-박헌오, 「모과 한 알」 전문
모과 한 알에서 느끼는 감상은 깊다. 단시조라 단순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내용은 단순하지 않다. 가을이라 익을대로 익은 모과가 가득한 공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던 갈등과 애정 온갖 번뇌, 그러한 것들을 모두 끊고 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황금빛 모과의 해탈인 것이다. 선의 명상인 것이며 비로소 벽을 열고 해탈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많은 의미와 깨달음을 담고 있는 시조다. 잘 익어 떨어진 모과 한 알에서 우주의 해탈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은 깊고 예리하다.
인생의 어디쯤서
천리 밖의 눈보라
하현달도 못 지운 그날 번진 낙묵 한 점
산 첩첩
쉼표, 마침표
차마
읽지 못하겠네
-신웅순, 「편지-묵서재 일기 22」 전문
글을 쓴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시조 창작 뿐 아니라 다른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자신의 글에 대해 생각한다. ‘하현달도 못 지운 그날 번진 낙묵 한 점’이라며 자신의 쓴 글에 대해 돌아보는 것이다. 모든 순간에 다 좋은 글, 좋은 작품만 쓸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 시인으로서, 글을 쓰는 이로서 느끼는 부끄러움이나 부담감 같은 것이다. 그래서 갈수록 글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산 첩첩/ 쉼표, 마침표/ 차마/ 읽지 못하겠네’라며 자신이 쓴 글에 대해, 또는 현재 쓰는 글에 대해 함부로 읽지 못하는, 잘못이 있을까 염려해 보는 조심스런 마음을 드러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또한 시인의 겸손을 표현한 작품이라 좋아 보인다.
낙엽질 땐 너 또한 못견디게 아팠구나
의연히 서 있기에 괜찮은 줄 알았더니
해마다 아픈 이별을 나이테로 새겼네
-천옥희, 「흔적」 전문
「흔적」이란 작품은 해마다 잎이 떨어져도 나무는 의연하게만 서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때마다 한 살씩 더 먹으며 그 아픔을 나이테로 새기며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나무에 감정이입을 하여 떨어지는 잎을 보내며 마음이 아팠을 나무를 생각한다. 사물의 마음까지 헤아려 보는 것, 사물에 대해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지니는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한층 성숙해 감을 의미하며 사물에 대한 천착을 의미한다. 삼라만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이고 시인의 세계를 넓혀가는 일이기도 하다. 지상시화전에서 단시조 한 편을 살펴보자.
장마로 사흘 씻은
밤하늘이 뽀오얗다
모처럼 뒤척이는
달빛향기 절창이다
어둠도
휘어져 버린
한밤중의 멜로디
-하도감, 「달빛 소나타」 전문
무척 깔끔하며 표현력이 뛰어난 단시조이다. 장마가 사흘 동안 내리고 난 후의 하늘은 얼마나 맑을 것인가. 그 맑은 밤하늘에 달이 뜬 중장의 표현이 뛰어나다. ‘모처럼 뒤척이는 달빛향기 절창이다’이라고 한다. 달빛에다 향기를 입히고 있다. 달빛은 시각이고, 향기는 후각이다. ‘달빛향기’라는 시어는 공감각인 언어로 표현되고 있으며, ‘달빛향기 절창이다’이라는 표현 속에는 시각+후각+청각이 모두 들어있어 감각적 표현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종장에서의 ‘어둠도/ 휘어져 버린’이란 표현도 뛰어나다. 빛의 굴절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짧은 단시조지만 표현력이 뛰어난 작품이라 신선하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멜로디/ 소나타’ 등 외국어나 외래어를 섞어 쓴 점이다.
그리고 작품들이 많이 실린 겨울시조단을 살펴보자.
물소리 뭇 새소리 자연의 숨소리로
지친 몸 생기 받아 피를 맑게 돌리려고
편백 숲
천연향 마시며
에코 힐링 즐긴다
한적한 벤치에서 한 박자 숨 고를 때
어디서 들려온다, 은은한 목탁소리
어느 새
불상 앞 찾아
합장한 나, 누구인가.
-김은자, 「자아를 찾아」 전문
‘물소리 뭇 새소리 자연의 숨소리로/ 지친 몸 생기 받아 피를 맑게 돌리려고/ 편백 숲/ 천연향 마시며/ 에코 힐링 즐긴다’며 시인은 지친 몸에 생기를 받으려고 자연을 찾는다. 자연은 인간에게 언제나 고마운 존재로 지친 우리에게 생기를 넣어주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다. 자연에의 배척이 아니라, 자연의 품에서 지친 삶을 치유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들어 있는 자연친화적 작품이다. 둘째 수에 오면 그러한 자연과 함께 목탁소리에 끌리어 어느새 불상 앞에 와서 합장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찾고 싶어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불교에서 최고의 경지는 자아를 찾는 것이고, 자아를 찾고나서는 그 자아마저도 잊어버리고 놓아버리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삶의 분주함에서 자아를 놓치며 잊고 살다가 이제 나이가 들어 삶의 분주함에서 해방되며 자아를 찾아가는 길에 있는 것이다. ‘나란 무엇인가, 누구인가’라며 자아를 찾아가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은 자아를 찾으면 자아의 존재성을 인식하고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좀 더 나아간다면 그 자아에서조차 해방되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탈의 경지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자아를 찾아가는 길은 결국은 삶에서의 분주함이나 긴장감의 해탈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기에 여유로움을 찾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이다.
창문을 닫으란다 새벽바람 차다고
가을로 접어들어 새벽에 당긴 이불
머잖아 옷깃 세우며 춥다 소리 하겠네
뜨거워 찾아들던 그늘은 단풍 들고
인생사 굽이굽이 계절이 말해 주네
가을은 두 번째 맞는 봄날이 아니던가
지나간 사계절이 그나마 그리워요
올겨울 한파 걱정 또 다른 기후 재난
자연이 경고하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김일영, 「가는 세월」 전문
우리는 삶에 바빠 계절의 흐름조차 잊으며 살 때가 많다. 매일매일 반복의 일상을 살지만, 계절의 변화에는 민감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가을로 접어든 상황이다. 아침저녁 기온이 내려가고 있는 가을 날씨, 여름에는 열어놓고 자던 창문을 가을이라 새벽바람이 차니 닫으라고 한다. ‘가을은 두 번째 맞는 봄날이 아니던가’라며 가을조차 고마운 마음으로 맞는 시인의 따스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셋째 수에 오면 지나간 계절에 대한 고마움의 마음이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갈수록 한파가 많아지고, 기후 재난이 심해지는 걸 자연이 주는 경고라고 시인은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자연이 주는 재난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자연을 더 이상 파괴하지 말고 보호해서 자연이 주는 재난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합장한 천년세월 불심 젖은 도솔천
속진을 불사르듯 핏빛으로 번져간다,
다비 길 붉은 융단에 가을 햇살 점화되어
홍엽을 지르밟고 천변을 건너서면
번뇌로 신음하는 중생들 가슴속에
잔잔한 염불소리가 우수처럼 젖는다
세속의 옷을 벗자, 흩날리는 갈새처럼
이욕에 얽힌 욕망 가지치듯 잘라내고
세간 속 아픈 영혼일랑 노을처럼 사르자
-노재연, 「선운사, 가을에 젖다」
고창 선운사는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라는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로 유명한 곳이다. 노재연 시인은 그런 선운사의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선운사, 가을에 젖다」라는 작품에서는 첫수에서는 선운사의 가을 단풍의 모습을 보여준다. 불길처럼 붉게 타오르는 단풍을 ‘합장한 천년세월 불심 젖은 도솔천/ 속진을 불사르듯 핏빛으로 번져간다,/ 다비 길 붉은 융단에 가을 햇살 점화되어’로 표현하고 있다. 마치 속세의 모든 지저분한 것을 태우려는 듯 핏빛으로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비식을 치루듯이 붉은 융단에 가을 햇살이 점화를 하듯, 단풍에 내려앉은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둘째 수에 오면 그렇게 붉은 잎들을 지르밟으며 천변을 건너서면 번뇌로 시달리는 중생들의 가슴 속에 잔잔한 염불소리가 우수처럼 젖는다고 한다. 불타오르듯 화려한 가을단풍의 풍경에서, 번뇌로 신음하는 인간에게로 시선과 관심이 옮아온다. 그리고 셋째 수에 오면 세속의 옷을 벗자고 한다. ‘이욕에 얽힌 욕망 가지치듯 잘라내고/ 세간 속 아픈 영혼일랑 노을처럼 사르자’고 한다. 첫수에서 화려한 단풍을 노래한 듯 하나 그곳에서도 단풍을 보며 다비식을 생각하듯, 셋째 수 종장에서 노을처럼 사르자고 한다. 결국 이 작품은 선운사의 그 화려한 단풍을 보면서 다비식을 생각하고 세간 속 아픈 영혼도 단풍처럼 노을처럼 사루고 싶어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선운사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에 젖은 것이 아니라, 속세의 고뇌나 아픔을 사르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차표를 사 놓고도 친구 차에 함께 타고 얘기꽃 나누면서 즐겁게 귀가하다 얼음판 미끄러져 온 차에 들이받힌 모모 씨
누구의 실수인가 수작인가 희롱인가
우연의 함정인가 필연에의 배신인가
무저항 권능의 횡포인가 덧없음의 본인가
순리의 반란인가 운명론의 저주인가
가면 쓴 역린이가 설렘에의 몽니인가
만인의 온갖 물음표 넘어 썰물져 간 소실점
어디로 굴러가니 한 끗 가를 주사위야
깬 꿈에 등 떠밀려 새길 떠난 창백한 넋
삶의 답 찾는 이들에게
나를 보라 하리까
-모상철, 「원초적 문답-한 부조리 이야기 앞뒤」 전문
이 작품을 보면 삶이란 참으로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부 네 수로 된 작품인데, 첫수는 초중장 구별없이 쓰고 있고, 중장은 두 수를 초장, 중장, 종장은 나누되 둘째 수와 셋째 수를 나누지 않고 붙여 쓰고 있다. 또 넷째 수에서는 행간을 한 칸씩 띄우고 있다. 한 작품 속에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조라는 형태의 단순성에서 자유시처럼 하여 단순한 형태에서 오는 지루함 등을 없애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또한 작품 속에서 하나의 의문을 독자에게 던져 주고 있는 작품이다. 과연 삶에는 운명이 있는 것인지, 그렇게밖에 될 수 없는 어떤 필연이 있는 것인지, 우리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인지를 궁금해 한다.
‘어디로 굴러가니 한 끗 가를 주사위야’라며 인간의 운명을 가를 것들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궁금해 한다. 그것을 알 이는 누구일까. 톨스토이의 작품처럼 신만이 아는 것일까. 독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 많은 우리말을 몇 글자에 다 담을까
첫 가닥을 잡아내려 날 새는 줄 모르신다
끝없이 말의 행간을 곱곱씹는 성심(誠心)이여
노력도 불가하고 천재로도 부족턴가
씨줄은 갈고 닦고 날줄에는 공을 쏟던
한마음 백성 사랑에 하늘 감동 보탰으리
기역(ㄱ)은 첫 글자요 히읗(ㅎ)은 끝 글자로
자·모음에 초·중·종성 나누시고 합하더니
별 보석 스물여덟 자, 벌린 입 못 다무네
백성 모두 깨우쳐서 제 몫 맘껏 누리라니
선진국도 후진국도 환장하는 정음 깃발
AI도 흠뻑 빠졌네, 펄럭이는 태극 문양
-이석규, 「훈민정음의 깃발」 전문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을 예찬한 작품이다. 한글은 실로 우수한 글자임이 분명하다. 발음하는 대로 다 쓸 수 있는 글자이다. 그리고 가장 적은 스물 네자로 모든 글을 만들어 쓸 수 있다. 배우기 쉬워 한나절이면 다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글자가 세계에 널리 퍼져 한글이 많이 쓰이고 세계공용어로도 쓰이면 정말 좋을 것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문장이 담긴, 세종이 직접 지은 글인 <예의>와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자모음의 원리와 용법을 상세히 밝힌 글인 <해례>로 나누어져 있다. 이렇게 창제자와 창제 이유 그리고 창제원리가 명확하게 밝혀진 문자는 세계에서 훈민정음 하나 뿐이라고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의 독창성, 과학적인 면모,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진 기록이란 점을 인정받아 1997년 10월 유네스크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훈민정음은 언문, 가갸글 등으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 때 한글학자인 주시경 선생님 “오직 하나의 큰 글”이란 의미로 ‘한글’이라는 이름을 탄생시켰다 한다. 이러한 한글에 대해 시인은 이 시조에서 그 우수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며 찬양하고 있다.
전생을 불 속에다 오롯이 던져놓고
해맑게 바라보는 넉넉한 미소에는
아픔을 겪어야 아는
삶의 얘기 숨었다.
시련을 벼리다가 우주를 보았는가
굴레를 벗어놓고 표연히 돌아서서
숫눈길 곡선을 따라
적멸의 길 찾는가.
시간이 흐르는데 무엇이 영원하랴
깊이를 알 수 없는 둥그런 가슴에는
비우고 다시 비워서
무심만이 가득할라.
-임만규, 백자(白磁) 전문
임만규의 「백자(白磁)」 첫수에서는 백자를 불 속에서 구워지는 고통 속에서도 해맑게 바라보는 넉넉한 미소를 지닌 것으로 아픔을 겪어야 아는 삶의 얘기가 숨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뜨거운 불 속에서 구워지는 시련을 견디다가 우주를 보았느냐고 묻는다. 광활한 우주에서 어떤 굴레를 벗어놓고 표연히 돌아서서 곡선의 길을 따라 적멸의 고요한 길을 찾느냐고 묻는다. 지금 화자는 백자를 들여다보며, 그 둥근 모습에서 우주를 생각해 보고, 적멸을 느끼고 있다. 또한 셋째 수에서는 흐르는 세월 속에서 무엇이 영원할 것이냐고 자문한다. 영원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둥그런 가슴은 백자의 가슴도 될 수 있고 화자의 가슴도 될 수 있고, 독자의 가슴도 될 수 있다. 그곳을 비우고 다시 비워서 무심만이 가득하리라고, 아니 가득한 것 아니냐고 궁금해 한다. 첫째 수에는 백자의 둥굶이 불속에서 고통스러웠을 지난 날을 바라보며 해맑은 미소를 보이는 것으로 아픔을 겪어야 아는 삶의 이야기와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그 백자가 불 속에서 구워지는 시련을 당하면서 우주를 보았느냐고 질문한다. 즉 고통 속에서 하나의 새로운 우주를 보게 되는 것이고 고요한 적멸의 길을 걸을 수 길을 발견한다고 본 것이다. 셋째 수에 오면 그러나 흐르는 시간 앞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우고 다시 비워서 무심만이 거기에 가득하리라고 생각한다. 고통도 욕망도 모두 비워낸 무심함, 즉 깨끗함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백자를 표현하고 있다.
비탈에 터를 잡고 계절의 전령인 듯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대자연 순리 앞에서 작별 인사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것도 억새꽃과 같아서
모진 풍파 속을 인내로 버티면서
자존감 굵은 힘줄을 키우면서 가는거다
-전현하, 「억새꽃을 보며」 전문
「억새꽃을 보며」라는 작품은 우리들의 평범한 일생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삶이란 비탈길에서 온몸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대자연 순리 앞에서 작별인사를 하면서…. ‘우리가 사는 것도 억새꽃과 같아서/ 모진 풍파 속을 인내로 버티면서/ 자존감 굵은 힘줄을 키우면서 가는거다’라고 한다. 그렇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세상이란 풍파 속을 헤치며 견디며 현재를 살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주 속에서, 세상 속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가는 것이다. 지구별에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 후세에 기억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후세가 기억해 준다고 해서 좋은 점은 무엇일까. 가끔은 그 모든 것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 독자는 그러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것이다.
몇 몇의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더 언급하고 싶은 작품들이 있었으나 지면의 문제가 있어 여기서 마감한다. 시간이 있다면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었겠지만 그렇지 못해 미안한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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