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그리운 날엔 기차를 타라 4
4. 심포리 기찻길(4) - 영동선에 잠들다
김민정(시조시인, 한국문인협회부이사장)
대바위산 가물가물 / 아지랑이 피워내면
두메산골 심포에도 / 봄은 다시 찾아오고
건널목 / 오랍뜰에는 / 옥수수와 감자 심고
호랑나비 떼 지으며 / 그리움을 피워내면
올망졸망 육남매를 / 꽃 가꾸듯 가꾸면서
깊은 산 / 곤드레 나물 / 봄 한 철이 깊었네
-「건널목을 지키며-영동선의 긴 봄날 20」 전문
대바위산 사진: 김진수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철도복을 입은 분이 아버지, 앞줄 오른쪽이 어머니
아버지가 선로반에 들어가 일을 시작한 것은 만주 이민을 다녀오시고 난 후의 일이라 생각되지만, 몇 년도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렇게 철로를 놓는 일부터 시작하여 철로를 돌보는 일을 하면서 선로반에 들어가 일을 하던 어느 날 누군가 철로 위에 돌멩이를 얹어 놓아 운반차에 앉은 채 그것을 치우려고 몸을 기울이다가 철로 위에 떨어져 다리를 다치고 3년이나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읍내병원에서 겉만 다친 줄 알고 겉을 계속 치료하였는데 낫다가 또 고름이 생기고, 낫다가 다시 고름이 생겨 나중에 삼척도립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3센티 정도의 부러진 뼈가 살 속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수술을 받고 한쪽 다리뼈를 3센티 정도 잘라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빨리 낫고 싶어서 누군가가 가르쳐준 옻나무의 옻을 상처에 처방했다가 온몸에 옻이 퍼져 죽을 뻔한 고비도 있었으며, 병원치료를 끝내고도 한쪽 다리를 3cm정도 절단하게 되어 절뚝이며 여생을 보내야 했다. 때문에 아버지는 선로반을 떠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건널목지기가 되어 심심산골 심포리(深浦里)의 건널목을 지키며 가난하고 외롭고 힘든 삶을 이어갔다.
많이 배운 것도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였지만, 형부의 말씀에 의하면 법 없어도 살 만큼 꼿꼿하고 착한 분들이었다. 남에게 피해 가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분들이었고, 정직하라는 것과 뒤에서 남의 험담이나 흉을 봐서는 안 된다고 어린 우리들에게 누누이 교육하신 분들이다. 때문에 동네에서도 인심을 잃지 않았고, 가난하지만 곧은 심성으로 6남매를 키우셨다. 강원도 깊은 산골 곤드레나물 같은, 진국의 삶이었다.
심포리 건널목에서 필자
건널목 바로 맞은편 기찻길 옆에 살면서 기차가 시간마다 오르내려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우리집 식구들과 나는 잠을 잘 잤다. “기찻길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라는 노래가 자주 떠오르는 건, 꼭 어린 날의 나를 위해 지은 동요 같아서다.
오두막 옆 기찻길에서 외손녀를 안고 있는 어머니
산들이 여미며 여미며/ 틔워놓은 가장자리//
골짝마다 내려앉은/ 하늘빛이 발끝에 채고//
어룽진/ 어머님 모습 위에/ 나지막한 한숨소리//
보득솔 가지 위로/ 햇살이 졸다 가면//
하릴없이 밤 재촉는/ 부엉이 울음소리//
포근히/ 감싸 안으며/ 달로 떠서 웃는 고개
「심포고개 - 영동선의 긴 봄날 62」 전문
나한정 고개가 보이는 나한정 기찻길 사진: 이희탁
나한정에서 심포리로 오르자면 인적 없는 고갯길이 있다. 수시로 도계장을 다녀오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때로 그 산길을 밤에 걸어오다가 도깨비불처럼 보이는 산짐승의 사나운 눈빛도 만나고, 때로는 험한 산길 위에서 돌을 굴려 내리기도 하던 이상한 불빛에 놀라 혼비백산 땀에 흠뻑 젖어 집에 도착한 적도 몇 번 있었다. 도계장을 자주 가시던 어머니는 이 고개로 걸어올 때가 많았는데, 나는 자주 이 고개에서 어머니 마중을 하기도 하였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어머니가 기찻길로 힘들게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오실 때쯤에는 언제나 마중을 가곤 하였다.
교정을 돌아오는 / 쑥꾹새 울음 속에
잊혀진 얼굴들이 / 초저녁 별로 뜨고
달근히 / 씹히는 추억 / 살 깊은 칡뿌리란다 - 「옛 교정에 서면」 전문
탄광촌의 붐이 일었는지,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1967년에는 심포분교에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바깥심포리, 즉 심포리 2반인 우리 동네에다가 새 건물을 짓고 심포국민학교라 부르게 되었다. 그때부터 학교가 집에서 2~3분의 가까운 거리라서 나는 참 편하게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하교 후에도 심심하면 학교에 달려가서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도서실에 있는 어린이 잡지책을 빌려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어깨동무》라는 잡지 등과 동화책도 많이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독서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내가 국어선생이 된 까닭도 거기에서 연유한 것 같기도 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이셨던 최종철 선생님은 우리에게 늘 짧은 시간에라도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그 선생님께 3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보내드렸었다.
나와 친구들은 학교의 쉬는 시간이나 하교 후에도 모여서 술래잡기, 고무줄하기, 줄넘기, 공기하기, 땅따먹기, 공놀이, 자치기, 오재미놀이 등을 하였는데 계절마다 놀이가 달라졌고, 아이들은 계절에 맞는 놀이를 잘도 찾아내었다. 한 팀이 하기 시작하면 곧 유행이 되었다. 저녁에도 우리는 어두워지기 전까지, 어른들이 저녁 먹으라고, 또는 잘 시간이라고 큰 소리로 부를 때까지 동네에서 시끄럽게 놀았다. 건널목 주변에서도 놀고, 집 가까이 길가에 있는 산소에 가서 뒹굴고도 놀았는데, 산소에 대한 무서움도 없이 그냥 놀이터처럼 생각하고 놀았다.
숨박꼭질을 할 때는 남의 집 보리밭, 콩밭, 옥수수 밭에도 숨었다. 자치기를 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맞추거나 남의 집 호박에 꽂히기도 하여 혼나기도 하고, 땅따먹기를 하다가 친구와 싸우기도 하고, 호박꽃에다가 개똥벌레를 잡아넣어 호롱불이라고 가지고 다니기도 하고, 개똥벌레를 잡아 반짝이는 부분을 눈에다가 붙이고 풀숲에 숨어 있다가 친구들이 개똥벌레인 줄 알고 잡으러 오면 놀래켜 주기도 하였다. 여름저녁이면 모깃불을 피워놓고 돗자리, 또는 가마니를 여러 장 덧대어 놓고 누워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기도 하고, 가을저녁이면 은하수 길게 흐르는 모습을 보면서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하였다. 앞 시조의 배경이 되기도 한 심포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었다가 헐리고 지금은 도계유리나라 건물이 세워졌다.
심포초등학교 모습 사진: 홍성덕
긴 겨울/ 물소리가/ 깨어나고 있을 무렵//
아버진 가랑가랑/ 삶을 앓아 누우시며//
고단한/ 삶의 종착역/ 다가가고 있었다
봄날도/ 한창이던/ 사월도 중순 무렵//
간이역 불빛 같던/ 희미한 한 생애가//
영동선/ 긴 철로 위에/ 기적(汽笛)으로 누우셨다
「영동선에 잠들다 - 영동선의 긴 봄날 77」 전문
아버지 산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예전 우리 마을 어른들 중 지관을 약간 볼 줄 아시는 분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산소 자리를 보아주실 때, 우리집 밭이었던 약간 언덕진 곳의 위치가 참 좋다고 했다. 거기서 보면 앞이 탁 트여 멀리 도계읍이 내려다보이는 장소였다. 그 분 말씀이 그곳에 산소를 쓰면 자손은 잘될 수 있으나 마을이 망할 수 있다고 했다. 마을이 망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우리는 아버님 산소자리를 차선의 자리를 택했다. 그래서 영동선 철로변의 하루종일 그늘이 들지 않고 바람도 별로 없는 곳으로 잡았다. 그곳에서 보면 잘 생긴 대바위산의 문필봉이 정면으로 보이는, 밭가의 아늑하고 따뜻한 장소였다. 우리식구들은 별 불만없이 그곳을 받아들여 아버지의 산소를 만들었던 것이다.
아버님 산소에서 친지들
오빠와 아버님 산소를 찾던 날
증조부 대의 조상들은 강원도 양양에서 그곳 유지로 잘 살았고, 그곳에 가면 지금도 태백준령 능선 부근 산꼭대기에 산소들을 만들어 동해바다가 멀리 보인다. 산소터는 아주 좋아보였는데, 조상들은 이 높은 곳에 어떻게 상여를 운반했을까 궁금했다. 지금 빈몸으로 찾아와도 힘든 곳인데 그 옛날 상여를 메고 어떻게 여기까지 운반했을까 마냥 궁금했다. 산소에 제단이나 비석도 세우지 않았다. 아니 처음에는 만들어 세웠다가 자손이 귀해진다하여 제단도 비석도 다 파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산비탈에 파 버린 비석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인 나의 아버지 산소에도 그것을 만들지 않아 산소는 마냥 소박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년 후 우리집 식구들은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때 서울에서 생활하던 오빠가 나의 중학진학을 위해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봄에 서울로 식구들을 이사시켰다. 그리고 몇 년 후, 고향을 방문했더니 예전 아버지 산소를 쓰면 자손이 잘 된다고 하던 그 터엔 교회가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별로 없는데, 썰렁한 교회만이 우뚝 서 있었다.
아버님 산소에서 외손녀(최혜빈, 최유빈)
아버님 산소 옆의 6남매(언니 4명, 오빠 1명)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일수록 겉으로 보이는 물면보다 안으로 더 많은 깊은 흐름을 간직하듯이, 일상의 잔잔한 이야기를 통해 행간을 흐르는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고향 오십천 물굽이가 강을 이루고 마침내 바다로 흘러 동해가 되듯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큰 이야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썼던 작품이 『영동선의 긴 봄날』과 『사람이 그리운 날엔 기차를 타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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