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골소녀에서 문학소녀로!
나는 강원도 산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책을 참 많이 읽었다. 다행히 학교가 가까워 방과후에 책이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달려가 도서실에서 마음껏 책을 빌려다 읽을 수 있었다.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온 이후는 동화책과 만화책을 많이 읽었는데, 오빠가 내가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에 동화책을 좀 보내주겠다고 동화책을 몇 질 사 오는 바람에 안 본 책이 많아 먼저 읽고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읽었다. 중학교시절에는 오빠가 책을 전집으로 사다 주어 한국단편소설전집, 세계문학전집, 세익스피어전집, 헤밍웨이전집, 헤르만헷세 전집 등을 많이 읽었다. 나는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는데 집에 있는 시집과 소설집을 끼고 다니며 읽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인문계로 진학한 친구들과 문학모임인 ‘다운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인문계 친구들은 대학시험 준비로 바빴고, 나는 취직공부하느라 모임을 해체했다.
1981년 《여성중앙》 시조 독자란에 ‘봄비’라는 시조를 별 퇴고도 없이 보냈는데, 박경용 선생님의 호평을 받으며 실려 그때부터 시조창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에 진학해야겠다는 욕구가 강하게 일어 4월 중순에 결심을 하고 4월말까지 깔끔하게 정리했다. 1981년 5월 1일부터 낮에는 종합반 강의를 듣고, 아침저녁에는 영·수 단과를 들으며 공부했다. 7개월간의 짧은 기간이 지나고 수능을 보았다. 내 점수로는 동국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가 가능해 보였다. 성균관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 원서를 넣었는데, 면접은 같은 날이어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성균관대학교가 더 마음에 들어 그리로 향했다. 면접을 보던 날 면접관이던 강신항 교수님께서, 왜 대학에 왔느냐는 질문과 함께 ‘입학하면 할 일이 많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합격가능성 언질을 주셨지만 그래도 발표가 될 때까지 노심초사했다. 합격 발표통지를 받고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자격을 얻은 것 같아 기뻤으나 어머니와 올케언니는 시집을 갈 나이에 대학은 왜 가냐고 성화였다. 오빠만은 나를 격려해 주었다.
2. 나의 늦깎기 대학생활
그렇게 친구들이 대학원을 졸업하던 1982년, 나의 대학생활은 시작되었다. 1학년 때는 교양영어 과목이 많고, 대학교재에 한자가 많아 힘들었다. 한글전용세대라 한문을 중·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8,000자짜리 동아사전을 등하굣길에 앞에서부터 한 번, 뒤에서부터 한 번, 이렇게 두 번을 외운 후에야 대학교재나 신문의 한자를 웬만큼 읽을 수 있게 되어 한자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1학년 때 잠깐 과대표를 했는데 국어국문과 1학년은 79명이나 되었고 1980년 광주사태 후 유난히 대학에서 데모를 많이 하던 1982년도였다. 전경들이 교내에까지 들어와 데모주동자들을 잡아가던 시대였다. 혜화동 성대 교문을 들어서려면 최루탄 가스 때문에 눈물을 줄줄 흘려야 했다. 단 한 명이라도 강의를 원하는 학생이 있으면 진행하겠다는 고집스런 교수님, 수업을 못 하더라도 데모를 하러 나가야 된다고 우기는 우리과 학생들, 공부하기를 원하는 학생 등을 모두 만족시켜 주어야 했다.
“데모를 하면 다칠 수 있으니 하지 말라.”고 말렸더니,
“누나는 광주사태를 몰라서 그래! 이 상황에 어떻게 데모를 안 할 수가 있어!”
라며 평소에 나를 많이 따르며 “누나, 누나” 하던 우리과 학생들은 흥분했다.
“좋아, 그럼 데모를 하되 앞에 서지도 말고, 끝에 서지도 말고 중간에 서서 해라! 다치면 너희들 보호해 줄 사람 아무도 없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어야 했고, 교수님께는 도저히 수업을 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려드리고, 공부하기를 원하는 학생에겐 “조용히 도서실에 가서 공부하라!”고 하여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고 보낸 1년이었다. 2학년이 되자 나를 아끼는 교수님들은 과대표를 하면 다치기 쉬우니 공부만 하라고 조언의 말씀을 해 주셨다. 나도 힘들게 입학한 대학이라 공부만 열심히 하고 싶었다.
우리가 김구용 교수님께 시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학년 2학기 때였다. 김구용 교수님은 서정주, 박용래, 조지훈, 박두진, 조병화 시인 등의 시를 읽어 가시면서,
“아! 참 좋다! 나는 이렇게 표현 못 해! 참 표현 잘 했어.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며 칭찬을 하시곤 하였다. 시에 대한 냉정한 분석보다 훨씬 더 감동을 주는 명강의였다. 이론을 통한 냉정한 분석 강의야 누군들 못 하겠는가. 다른 시인의 시적 표현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해 주는 인격적인 모습이야 말로 내가 은연중에 배운 김구용 교수님의 시론이었다. 김구용 교수님은 박사학위를 받지 않으신 분이지만 누구도 그 분을 무시하지 않았다. 한문에 대한 조예가 깊으셨고, 붓글씨는 본인만의 필체를 갖고 계셨다.
본인은 “나 같으면 이렇게 표현 못 한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면 철학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시가 너무 어려워서 이렇게 저렇게 엎어보고 뒤집어보면서 해석을 하기도 했다. 선생님 시집을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어서 “선생님 시집, 꼭 읽어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어렵게 부탁을 드려서 겨우 모든 시집을 다 얻거나 복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내게 원고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현대시학』 전봉건 선생님께 시를 매달 2편씩 직송하는 것이었다. 꼭 차비를 1,000원씩 손에 쥐어주시면서 원고봉투를 주시곤 하셨다. 나는 그것을 수업이 끝나는 대로 즉시 전봉건 선생님께 전해 드리곤 하였다. 서대문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서 나무계단이 삐걱거리는 2층으로 올라가면 거기에는 가끔은 손님도 계셨지만, 거의 전봉건 선생님 혼자 낡은 책상에 앉아 원고를 집필하시든가, 교정을 보실 때가 많았다. 나는 원고만 전해 드리고 곧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4학년 때까지 꽤 오래 이런 심부름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1985년 4월 나는 『시조문학』 창간25주년기념 지상백일장에 「예송리 해변에서」라는 작품을 출품했고, 그 작품이 장원이 되어 단 1회로 등단이 인정되었다. 이 말씀을 들으신 교수님께선 『시조문학』이 시조에만 국한된 너무 폭이 좁은 잡지라고 생각하셨는지, 얼른 전봉건 선생님께 편지를 한 통 써 주시면서 『현대시학』에 정완영 선생님의 추천으로 등단을 시키도록 부탁하셨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나를 부르시더니 전봉건 선생님께 직접 전해드리라며 편지를 건네주시는 것이었다.
김구용 교수님은 자존심이 아주 강한 분이라 좀처럼 그런 편지를 쓰지 않고 또 제자들을 함부로 등단시키지 않는 까다로운 분으로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아예 등단 부탁도 드리지 않았는데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동안 나의 시를 지켜보시고, 인정하시고, 나를 무척 아껴주신 것 같아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굴러온 복인데도 나는 사양했다. 한 번만 등단하면 됐지, 두 번, 세 번 등단하는 것은 등단을 시켜준 《시조문학》사에 대한, 추천을 해 주신 심사위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결국 편지를 전하지 않았다. 나의 말씀을 들으시고 김구용 교수님은 고개만 끄덕이시더니 더 이상 채근하지 않으셨다.
김구용 교수님은 원고를 일부러 내게 심부름을 시키셨던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문학작품을 계속 접하게 하고, 그리고 잡지사와도 친하게 지내라는 뜻으로, 나에게 진정한 문학의 길을 걷게 하고 싶으셔서 우편으로 보내도 될 것을 늘 나에게 직송시키셨던 것이다. 그리고 내게 늘 말씀하셨다. “돈에 집착하면 시를 못 쓴다.”고. 그리고 사랑이나 그리움이나 여성들이 많이 쓰는 그런 시는 쓰지 말라고. 여성들의 시 중에서 강은교의 시를 칭찬하시곤 해서 강은교의 『허무집』 등을 나도 열심히 읽었었다.
교수님이나 웃어른께 언제나 겸손한 나였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만 하지 않는 아집이 있어 사랑시를 많이 썼더니 어느 날엔가는 사랑시든, 어떤 시든 열심히만 쓰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시인은 모름지기 문단사가 아닌 문학사에 남아야 한다고. 문단 모임에 많이 쫓아다니지 말라고도 하셨다.
문학을 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아니 외로울 때라야만 문학다운 문학이 나오는지도 모른다. 혼자서 깊은 생각에 잠겨야 하고, 다른 작품을 많이 읽고 작품에 대해 끝없이 고뇌하고 다듬고 고치면서 새롭게 창작해야 하는……. 문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이며, 고독한 작업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하기 힘든 일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혼자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교수님은 그걸 내게 강조하시며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돈에 집착하면 시를 놓치게 된다는 것도 단단히 주지시키신 셈이다.
나는 강의 시간이 아닌 김구용 교수님과의 개인시간을 통해 문학에 대해, 창작 태도에 대해 제대로 배웠던 것이다.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정도(正道)임을 믿는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이 게처럼 옆걸음만 쳐온 날들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정도(正道)로 가야겠다. 문학다운 작품을 써서 문단사가 아닌 문학사에 남는 작품을 써야겠다.
내 결혼식날은 장대비가 쏟아졌는데, 그 속에서도 우리과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거의 참석을 하였고, 시조시인들도 꽤 오셨다. 김구용 교수님은 폐백실까지 따라오셔서 “아! 신부 예쁘다, 아! 신부 참 예쁘다!”를 연발하시며 나의 앞날을 축복해 주셨다.
대학 4년 동안 강의실 나의 자리는 늘 제일 앞자리 가운데였다. 그래서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누가 늦게 오는지 전혀 모른다. 모든 교수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교수님과 눈빛을 마주치며 단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강의를 듣곤 했었다.
고전문학의 최진원 교수님은 나의 시조를 무척 좋아하셨다. 「을숙도」, 「예송리 해변에서」 등을 특히 칭찬하셨다. 국어학을 전공하시던 강신항 교수님은 박물관장을 하시면서 강의도 하셨다. 연구실에 계실 때가 많아 박물관장실을 나에게 지키도록 하셨다. 남편의 지도교수였던 강신항 교수님은 우리들의 결혼주례를 서 주시기도 하셨다. 또 국어학을 전공하신 이등용 교수님은 내게 순위고사 공부를 하도록 종용하시고 도와주셨다. 김시업 교수님 덕분에 ‘정선아리랑’ 등의 민요와 참여시도 많이 읽은 편이다. 김학성 교수님은 고전을 전공하신 분으로 석사 지도교수였다. 덕분에 신라향가 등 고전문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농담이나 유머를 잘 사용하시던 평론가 윤병로 교수님은 내게 성균문학상을 주시기도 했다. 조건상 교수님은 소설을 잘 쓰셨고 대학원 석사 입학 때는 내게 장학금을 주시기도 하셨다. 또 구수한 말씀의 박양규 교수님의 강의로 문법이해가 깊어졌고, 강우식 교수님은 박사과정의 지도교수님이셨고 빨리 논문을 쓸 수 있도록 많은 조언을 해 주셨다. 나의 대학시절은 이렇게 여러 교수님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행복한 생활이었다.
최진원, 김구용, 윤병로 교수님은 이미 돌아가셨다. 성대행문회 동문들은 봄이면 박종화교수님 산소를 찾았고, 가을이면 김구용 교수님의 산소를 찾는다. 교수님은 제자들이 청출어람의 작품을 쓰길 원하셨는데……. 나 자신을 반성해 본다. 나를 아껴주시고 문학을 하도록 격려해주신 김구용 교수님과 그 외의 다른 교수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앞으로 최선을 다하며 노력하리라는 다짐을 지금, 여기서 새롭게 해 본다.
3. 교직 34년과 병행한 나의 문학
나는 등단하던 해 가을 결혼도 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순위고사 공부를 계속하느라, 또 1987년부터는 교직에 근무하면서 두 딸을 낳고 기르느라 시조를 쓰지 못했다. 등단 13년 만인 1998년에 첫 시조집을 출간하자, 모두 “절필 한 줄 알았다.”며 축하해 주셨다. 그 후 개인시조집 13권, 엮음시조집 5권, 수필집 1권, 평설집 2권, 논문집 2권까지 23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또 <시가 있는 병영> 등 국방일보에 7년 6개월 동안 시해설을 썼고, 전국교차로신문에 월2회 <아름다운 사회 컬럼>을 쓰면서 계속 다른 시인의 시조를 소개했다.
국어교사로 재직하면서 제27대 한국문협 시조분과 회장으로 선출되어 나는 임기 4년 동안 영문번역시조집 『해돋이』, 스페인번역시조집 『시조, 꽃 피다』, 영어·아랍어번역시조집 『시조 축제』 등 3권을 발간하여 시조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외국에 있는 문학창의도시, 국제펜회원국 중에서 중요한 곳을 골라서 보냈고, 또 미의회도서관 등 유명도서관, 그리고 국내의 대사관, 영사관 등에도 보내어 한국의 전통적인 정형시인 시조를 널리 알리려 노력한 결과 많은 국가에서 시조를 알게 되었다. 많은 대사관에서 답장을 주었으며, 쿠웨이트대사관 등에서는 만찬에 초청하여 시조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기도 했다. 또 남미국가들에게도 퍼져서 멕시코의 유명잡지 등에도 시조가 실리게도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최초의 시조집 『꽃, 그 순간』을 번역 발간하여 베트남 국민들에게도 호평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번역붐이 일어 많은 개인시조집들이 독일어·프랑스어로도 번역되고 출판되고 있다.
또 『교과서에 실어도 좋을 단시조』와 『교과서에 실어도 좋을 연시조』 2권을 발간하여 교과서에 시조가 많이 실리기를 바랐다. 나를 믿고 선출해 준 문인들께 보답하는 길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혜택이 돌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4. 나의 문학관과 앞으로의 문학
나에게 있어 문학은 어떤 존재일까? 그것은 무조건 옳다고 믿고 섬기는 하나의 종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제삼자가 보면 자기도취, 자기위안, 또는 이기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문학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쓸 것인가? 문학은 종교가 아니고, 철학도 아니며, 도덕도 아니다. 문학은 문학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문학에서 추구하는 것은 진(眞)이며, 선(善)이며, 미(美)이다. 문학은 인간다운 진실을 추구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착함을 추구하고, 감동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종교를 초월하고, 철학을 초월하고, 도덕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그것은 어느 것에도 속박되어서는 안 되는 자유인의 표상, 자유 정신의 표상이어야 한다. 종교, 철학, 도덕, 권력, 재력, 시간,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만이 어느 것에도 구애됨이 없고, 어느 것에도 속박됨이 없는 자유로운 문학정신이 나타날 것이며 문학다운 문학이 창작될 것이다.
내가 쓰는 한 편의 시 속에는 나의 모든 사유와 생활이 담겨 있을 것이다.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나타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초월하고 싶은 자유정신이 녹아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 허난설헌의 작품보다도 황진이의 작품을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면 그것은 황진이의 작품이 더 진솔하고 속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껏 그렇게 작품을 써 왔지만, 앞으로도 나는 자유로운 정신 속에서, 쉽고 간결한 언어로 진솔하게 작품을 쓰려고 한다.
어떤 형식으로 쓸 것인가. 시의 형식에는 자유시와 정형시가 있다. 시를 쓰기 시작하던 고등학교 시절, 나는 자유시를 썼었다. 대학초기에도 자유시를 썼던 적이 있다. 그러나 시조를 창작하게 되면서 자유시는 거의 쓰지 않고 있다. 마냥 풀어 헤쳐진 자유시보다 조금은 틀이 정해진 정형시 속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현대시조 속에서도 사설시조를 쓰고 있는 경우가 있고 그것을 자유로운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자유시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후기의 사설시조를 서구의 자유시가 들어오기 전, 우리 스스로의 자유시 태동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쓰는 시들은 대체로 3장 6구 12음보의 정형에 어긋남이 거의 없는 작품들이다. 형식에서 어긋난다면 그것은 이미 시조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정형시인 우리의 시조는 12음보만 잘 맞춘다면 한 음보 안에서 한두 글자가 많거나 적어도 자연스러운 시조작품이 된다. 자수를 잘 맞추면서도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 다만 얼마나 적절한 낱말을 그 자리에 앉혀야, 말은 짧고 뜻은 긴 언단의장(言短意長)의 문장이 될까하고 고민해야 하는 문학이다. 시조시인은 정말로 언어의 조련사가 되어야 하고, 군더더기의 말은 과감하게 생략할 줄 아는 결단력도 지녀야 한다.
초장·중장·종장에 다 무겁고 비중 있는 낱말들만 써도 안 되고 적절히 풀어주고 적절히 조일 줄도 알아야 한다. 초장·중장에서 풀어주고 종장에서는 조이면서 하고 싶은 핵심적인 말을 하는 것이 시조작품의 묘미이다. 시조는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작품이다. 초장과 중장에서는 경치를 읊고, 종장에서 자기감정을 읊어야 좋은 시조, 시조다운 시조가 된다.
작품창작은 느낌과 감동이 우선이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느낌과 감동이 있어야 영감이 떠오른다. 그 영감들을 놓치지 않고 문장으로 가다듬을 때,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시는 이론보다 먼저, 감성이다.
나는 어떤 내용을 시조로 쓰고 있는가. 내가 쓰는 시조는 대체로 서정시다. 생활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희로애락이다. 생활 속의 잡다한 생각, 감정, 번뇌들이 시조의 주제가 되고 있다. 아름다움을 감탄하고, 만남을 기뻐하고, 이별을 슬퍼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나는 노래하고 있다. 사랑, 이별, 그리움, 슬픔, 기쁨 등 순간마다 바뀌는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해 보고 싶다. 시조에 있어 ‘사랑’이나 ‘그리움’이란 낱말은 특별한 새로움은 없다. 하지만 이 낱말만큼 많이 쓰인 낱말은 없을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남녀가 존재하는 한 이 말만큼 많이 쓰일 낱말도 없다. 때문에 사랑이나 그리움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가 될 것이다.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나 조선시대 황진이보다 더 멋진 사랑시를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랑시조를 썼다. 그리하여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노래’가 탄생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랑의 시조는 자칫 흔하고 가치 없는 시조가 될 수 있다. 시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다 써보는 주제가 ‘사랑’이라서, 아주 뛰어난 작품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 그래서 아주 강렬하거나 애절하거나 진솔하거나 아름답거나 할 때만이 ‘사랑의 시’로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만인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될 수 있다. 나는 사랑을 주제로 한 아름다운 작품, 사람들의 사랑을 오래 받을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작품을 탄생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내 시조의 소재가 ‘사랑’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영동선의 긴 봄날』은 연작 서정서사시조집이고, 때로는 사회적 주제를 다루기도 한다. 철도시조, 수석시조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소재와 주제든 내 것으로 소화하여 내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다른 시인과의 변별화 작업을 통해 나만의 개성, 나만의 특성을 살리고 싶다. 좀 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열정적으로 인생을 사랑하고 주변을 사랑하며 내가 만나는 인연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반영으로써 작품을 쓸 것이다. 하지만 문학의 내용이 내 삶을 100% 반영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문학이므로, 나의 삶과 나의 상상력이 함께 만들어 내는 가상공간에서 나는 자유롭게 유영하고 싶다.
앞으로의 나의 문학세계는 어떠할까. 나는 지금까지 사랑시조, 철도시조, 수석시조 등 소재를 정한 시조를 많이 썼다.
나는 그 동안 시조시인으로서 개인시조집 12권을 국내에서 출간했고, 1권은 베트남 시인이 번역하여 베트남에서 출간하기도 했다. 시조의 저변확대와 해외에 알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시조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요즘 나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여러 문학을 접하는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보니 너무 좁은 시선을 가진 게 아닌가 반성을 하게 된다. 많은 문학적 요소를 받아들이고 창작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통섭의 문학인으로서 성장해 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으로 여러 문학을 섭렵하면서 좀 더 넓고 깊은 문학을 할 수 있는, 폭 넓은 문학인으로 내 자신이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너에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와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염려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카르페 디엠을 마음에 새기면서, 언제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나는 오늘도 살고 있고 문학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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