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구용선생님과의 가상 인터뷰)
늙은이가 유심히 읽을
-박 재화 (시인)
박재화_선생님 가신 지가 벌써 스물두 해나 되네요. 그곳에서, 그토록 그리워하셨던 부모님,형님들, ‘싸마’(유모)랑 반갑게 만나 잘 지내실 줄 믿습니다. 이 대담은 선생님의 문학보다는 예술원회원도 마다하신 선생님의 개결한 삶과 인간적 면모에 초점을 맞춰 진행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먼저, 선생님은 아끼는 후배나 제자들의 손을 꼭 잡고 ‘내 웬수를 갚아달라’ 말씀하시던 걸로 유명한데요. 한데, 어찌 그리 악력이 세신지요?(웃음)
김구용_그래요? 그렇게까진 생각지 않았는데... 하긴 1972년 제가 큰 수술을 받고 난 다음날인가 회진 오신 집도의 손을 붙잡고 감사하다며 인사했을 때 그분이 ‘수술 받은 환자의 손힘이 왜 이리 세냐?’고 깜짝 놀란 적은 있습니다. 영아들의 손아귀 힘이 엄청 세듯이 제가 뭔가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던 모양이지요?(웃음) 암튼 시를 발표할 때마다 무언가 2% 부족한 것 같이 느껴졌고, 그 불만을 쉽사리 해소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반성 차원에서 다른 분에게 절실하게 당부하는, 일종의 보상작용() 아니었나 모르겠습니다.
박재화_선생님은 경북 상주 출생이시지만 일찍부터 금강산에서 자라셨다면서요?
김구용_예. 원래 고향은 경남인데 아버님께서 여기저기 옮겨 사셨기에... 저는 1922년 2월 상주 수봉리 백화산() 자락에서 태어났습니다만, 몸이 약해 세 살 때부터 금강산의 절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아주 절에 의탁한 건 아니고, 유모의 보살핌 아래 그저 부처님의 가피를 바랐던 거지요. 대구, 서울, 수원의 보통학교를 옮겨 다니면서도 건강을 추스르기 위하여 중간중간 금강산에서 보냈습니다. 마하연 뒤 병풍처럼 두른 중향성을 아침저녁 바라보던 그 시절이 잊히질 않는군요.
박재화_그럼 문학공부는 계룡산에서 본격적으로 하신 건가요?
김구용_아버님께서 부유하신 편인데다 자식들을 전폭적으로 뒷받침해주신 덕에 소년시절부터 마음껏 책을 사서 읽고, 자유롭게 사색하며 자랐어요. 몸이 허약해서 요양도 해야 했고, 또한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한 스무 해 계룡산에 은둔하면서 독서와 습작을 계속했습니다. 물론 6·25전란 중 부산에 머물기도 했습니다만, 부모님이 공주 봉황산 기슭에 묻혀 계신 까닭에 계룡산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동학사 일대는 선비의 서재처럼 깊숙하고도 아늑한 맛이 있어 더욱 좋았지요.
박재화_선생님은 근엄하고 진지하신 데다 스님 같은 인상이셔서 속인들이 항용 겪는 해프닝이나 우스개 같은 건 없으셨지요?
김구용_아이쿠, 그건 오해올시다. 제가 깡마른데다 어눌해서 그러신 모양인데, 알고 보면 별 우스운 일도 많았지요. 뭣보다도, 스님들에게 불경을 가르친 게 영 어색하고, 우습다 하겠습니다. 절에서 오래 공밥 얻어먹기 미안하여 노장스님 뜻을 따르다보니 그리 된 것이긴 하지만. 그리고 후배나 제자들을 여럿 중매했는데 거의 성사되지 않은 걸 보면 이상하긴 합니다. 시를 쓰면서 소설가(김동리)를 통해 등단한 것도 그렇고... 부산 피난시절엔 어렵사리 군경원호처 기자로 일했는데, 노총각이면서도 처자가 있어야 월급을 더 받는다고 해서 주위의 권유대로 ‘결혼했고 자식도 둘’이라 거짓말한 적도 있습니다. 두고두고 찜찜했지요. 한 때는 여성이 남성을 사랑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남자라는 게 괜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납고 모자란 존재잖아요(웃음). 나중 일입니다만, 교수로 봉직하는 동안 신통하게도 학기 중엔 앓지 않다가 방학 때면 앓곤 하여 스스로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박재화_김구선생님을 존경하시어, 직접 찾아 뵈웠다면서요?
김구용_예. 1946년 봄 선생께서 공주에 오셨을 때지요. 종일 기다려 저녁에서야 그분과 이시영선생의 시국강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선생께서 묵으시는 동명여관으로 갔지요. 수행경찰관에게 편지 전달을 부탁하고 답장을 받아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기다렸습니다. 실은 편지란 게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붓글씨 한 폭 써주시면 보배로 삼겠습니다. 먹물, 붓, 종이도 준비해왔습니다’란 거였어요. 다행히 허락이 떨어져서 방에 들어갔는데, 제가 절을 올리자 백범선생이 맞절을 해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은 저에 관해 자상히 물으시곤 제가 불교를 믿는다 하니 임정시절 중국인 친구의 삼매 체험담도 들려주셨어요. 제가 먹물과 종이를 꺼내려 하자, 당신께선 글씨를 서서 여관에 맡겨놓을 테니 나중 찾아가라시곤 다른 얘기를 계속하십디다. 다음날 여관으로 가니 선생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 첫머리인 함허선사의 서설 한 구절을 써 놓으셨더라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불경이라서 뛸 듯이 기뻤고, 감읍하며 받아왔습니다.
박재화_선생님께선 ‘정약용의 저서와 김정희의 예술이 없었다면 이 강산이 참으로 적막했을 것’이라 하셨는데요...?
김구용_암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지 않겠습니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다산 선생은 오랜 유배의 고통 속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방대한 저작을 남기셨는데, 이로써 조선의 학문과 정책의 완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은, 우리가 과연 그분의 위대성을 일찍 알아보고 그 학문을 제대로 연구하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다산선생의 비석은 광복후 미국사람이 세웠고, 추사선생의 비석은 왜정때 일본사람이 세웠으니, 말 다했지요.
박재화_완당 김정희선생에 관해서 좀 더 말씀해주십시오.
김구용_한마디로 완당은 선을 문학과 글씨로 작품화하신 분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추사의 저술이나 방대한 서예작품을 제대로 파악 못한 채 일부는 외국에 팔려가거나 이리저리 유실되고, 심지어 가짜도 심심찮게 나도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추사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글씨는 완전히 새로운, 그리고 진실로 서예다운 서예로 자리잡았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완당의 진면목을 이해하려면 그분의 수많은 별호들-노가, 시불, 병거사, 만화 등-을 훑어보는 것이 첩경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제가 직접 완당의 진상을 뵌 적 있는데, 관골 언저리에 마마를 앓으신 자국이 엿보이더라고요.
박재화_‘구용 김영탁’ 하면 시 외에 불경과 고문과 서도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이번엔 그 우뚝한 붓글씨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김구용_여러분들이 좋아해주시는 것뿐이지 내세울 만한 글씨는 아닙니다. 어쨌거나 붓글씨는 특히 심화여서 쓰는 사람의 마음씨와 정성이 그 글씨에 나타나게 돼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모쪼록 국문 붓글씨를 고도로 예술화시켜달라는 것입니다. 한글 글씨는 한문 글자보다 현대 조형예술과 통하는 점이 많습니다. 한글은 선, 원, 굴곡과 속력이 있어서 얼마든지 심상 구성이 가능하면서도 우리 고유의 전통미를 발휘할 수 있지요.
박재화_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후배 시인들이 어떤 시를 쓰기를 바라시나요?
김구용_제가 평소 강조하던 바가 ‘예술의 힘은 거짓에 있다’ ‘기적은 예술에 있어서는 상식’ ‘문학 하려면 독해야 한다’...는 거였는데, 부디 이 점을 명심하고 창작에 매진하셔서, 인생을 여러모로 겪은 노인이 유심히 읽을 시를 써주셨으면 합니다(웃음)
박재화_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만드신 행문회 회원들과 후학들에게도 한 말씀 해주시지요.
김구용_뭐, 잘들 알아서 하실 텐데... 암튼 문인으로서 각자 고독한 가시발길을 걸을 수밖에 없지만, 그런 가운데 서로 보듬으면서 인정 넘치는 교류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피난지 부산에서 많은 문인들이 극한절망 절대비참 속에서도 참으로 눈물겹게 뜨거운 우의를 나눴단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언젠가 재화씨가 우리집에 왔다가 내가 없으니까 역시 헛걸음한 강우식시인을 돈암동 태극당 앞에서 만나선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대화하던 장면, 고정욱작가를 업고 월탄선생묘소를 오르내리던 장면, 백담사의 내 시비 제막식을 마치고 귀경하는 차 안에서 홍성란시인과 장시간 도란도란 얘기하던 장면 등이 떠오르네요. 또 김민정시인이 가족들과 함께 우리 나들이에 참석하곤 하여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던 광경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다들 그런 태도를 간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민정 시조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삶, 나의 문학 / 한국시학 2024 여름호(70호) (2) | 2024.08.10 |
---|---|
김민정 제1회 박양균문학상 수상 (0) | 2024.01.16 |
<펄펄펄, 꽃잎>시조집 시조평/ 대상에 숨겨진 '보물'찾기 - 견자로서의 김민정 시인, 그의 시세계 / 조규익 (0) | 2023.06.06 |
<펄펄펄, 꽃잎> 시조집 - 김민정 시조론 / 유종인 (문학평론가) (3) | 2023.06.06 |
정갈한 정통 서정시학 - 김민정 시인론 (이경철, 문학평론가) (1) | 2022.09.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