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시인론 – 시조시학>
정갈한 정통 서정시학
이경철(문학평론가)
1. 김민정 작품에 대한 기존의 평가
그 동안 여러 평론가들에 의한 김민정 시인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알아본다.
평론가 진순애는,
“흔들지 마 흔들지 마/ 가지 끝에 앉은 고독// 와르르 무너져서/ 네게로 쏟아질라
점점이// 흐르는 불빛/ 불빛 묻고 흐르는 강” (「여인」전문)
김민정의 시조집 『나, 여기에 눈을 뜨네』의 해설에서 “김민정 시조의 수작 중인 하나인 「여인」은 깊은 고독을 승화시킨 여인의 내면이 정갈한 언어감각과 그에 따른 운율미에 의해 압축적으로 내재되어 있어서 빼어나다. 특히 고독을 ‘가지 끝에 앉았다’라거나, ‘와르르 무너져서/ 네게로 쏜아질라’라고 한 점, 나아가 ‘불빛 묻고 흐는 강’이라고 하여 여인이미지를 강물에 잠긴 불빛으로 상징하여 마감한 점이 뛰어나다. 가지 끝에 앉은 고독이란 인간의 고독한 현재를 아주 절실하게 표현한 말로서, ‘가지 끝에 앉은 새’에서 시인은 인간의 고독을 상상했는가 보다. 더욱이 금방이라도 가지 끝에서 ‘네게로’ 쏟아져 내릴 고독한 심사를 애써 견지하며 붙잡아 놓는 김민정의 시적 견제력이 아름답다. 그래서 여인의 강은 고독의 강으로, 사랑의 강으로 바꿀 수 있겠다.”로 평가하고 있다.
정완영 시조시인은,
“청산을/ 넘지 못해/ 물소리로/ 우는 강물,// 강물을/ 건너지 못해/ 바람소리/ 우 는 저 산// 아득히/ 깊고도 푸른 정/ 한 세월을 삽니다” (「어라연 계곡」 전문)
『지상의 꿈』 서문에서 “이 작품은 시인 김민정의 절창絶唱, 그의 시의 절정絶頂이다. 시가 여기 와서는 더할 말을 잊는다. 보여주는 경개景槪에다가, 이기지 못하는 차탄蹉嘆에다가, 들려오는 물소리까지 어우러져 한 폭의 장관을 이룬다. 누가 그린 실경산수가 이만하다 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의 가품佳品이다.”라는 시평을 하였으며, 또한 “시란 말 바깥의 말, ‘언외언言外言’이다. 어떤 사상事像이거나 어떤 상황狀況만 보여주면 될 뿐, 중언부언해서는 안 된다. 시는 하나의 ‘제시提示’일 뿐, 그것을 ‘판독判讀’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이 시인은 잘 알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전재동 시인·교수는,
“이 봄 다시/ 피,겠,어,요/ 그대 깊은 가슴 속에// 뜨거웠던/ 눈맞춤의/ 설레었던/ 그, 날, 처, 럼// 하아얀/ 향기 날리며/ 봄날 가득 메울래요” (매화향기 바람에 날리고 1, 전문)
이 작품을 읽으면 김민정 시인의 참사랑의 품위가 어떠한지를 뜨겁게 만난다. 황진이의 ‘동짓달’이나 정철의 ‘옥이’나 진옥의 ‘철이’등은 에로문학을 연상하게 하지만 김민정의 사랑은 우리 겨레의 전통의식인 ‘은근과 끈기’의 기법이 완연하다. 사랑의 미학이 의지의 얼굴로 앞에 서 있다.
『사랑하고 싶던 날』의 읽고 감동하여 서평을 쓰면서 “그녀의 사랑노래에는 인공조미료가 없다. 청정채소 그것이다. 천년만년 자연의 맛 그대로이다. 그러면서 촌스럽지 않고 얄팍하지 않고 그냥 정겹다. 풋풋하면서도 따뜻하다. 아름답고도 깊이가 있다. 시조의 묘미가 다 살아 있다. 말은 적게 하고 뜻은 깊게 가진다는 것 말이다.”라 평을 하고 있다.
문무학 교수는,
“색안경을/ 벗어놓고/ 세상을 볼 일이다// 스쳐가는/ 바람의 말도/ 새겨들을 일이 다// 생각을/ 되새김하여/ 가다듬을 일이다” (「시인」 전문)
『사랑하고 싶던 날』 해설에서 그는 “「시인」의 초장은 시각을, 중장은 청각을, 종장은 동작 이미지를 동원한 촉각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시가 감각을 통해 이미지를 제시하는 일은 기본적이지만 그 활용이 그리 만만한 건 아니다. 그래서 김민정 시인을 이미지스트로 부르게 한다. 이 작품은 또한 시인이 견지해야 할 정신적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메시지를 중심으로 볼 때 시인은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며, 모든 사물을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세밀한 관찰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섣부른 생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인식하고 있다.”며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시상을 엮어가는 김민정의 시는 대체로 우아미를 창출하고 있다. 따뜻하고 긍정적인 세계관과 시조에 대한 열정이 현대시조 100주년에 100편의 단시조를 꽃으로 피워올렸다. 그 꽃밭에서 나는 향기는 우아하다"며 김민정의 시조를 ‘열정과 긍정의 미학’으로 평가하고 있다.
황치복 교수는
“기찻길 아스라이/ 한 굽이씩 돌 때마다// 아카시아 꽃내음이/ 그날처럼 향기롭다 / 아버지/ 뒷모습 같은/ 휘굽어진 고향 철길// 돌이끼 곱게 갈아/ 손톱끝에 물들 이고// 새로 깔린 자갈밭을/ 좋아라, 뛰어가면// 지금도/ 내 이름 부르며/ 아버지 가 서 계실까” (「심포리 기찻길」, 전문)
『백악기 붉은 기침』 해설에서 “시원始原의 시간으로 통하는 길 위의 시”라며 「심포리 기찻길」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심포리는 시인이 태어난 고향 마을이다. 고향으로 뻗어 있는 기찻길은 과거의 시간으로 뻗어 있는 길이다. 그래서 시적 자아는 “아카시아 꽃내음”이라는 향기를 감각하면서도 현재의 그것이 아니라 과거의 향기를 상기한다. 시인이 굳이 “그날처럼 향기롭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심포리로 향하는 기찻길이 과거로의 여행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심포리의 기찻길은 “휘굽어진 고향 철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기찻길이 휘굽어졌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휘굽어진 기찻길은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고단하고 쓸쓸한 정서를 야기하기도 하지만, 좀 더 주목되는 점은 그것이 휘굽어졌기 때문에 기차가 나아갈수록 숨겨두었던 풍경들을 조금씩 펼쳐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직선으로 뻗어있는 길은 미래로 향하는 곧은 길이라면 휘굽어진 길은 과거로 향하는 순환적인 길의 형상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휘굽어진 기찻길을 돌아서면 시적 자아가 지나온 유년의 시간이 펼쳐진다. “돌이끼 곱게 갈아/ 손톱 끝에 물들이”는 행동이나 “새로 깔린 자갈밭을/ 좋아라, 뛰어가는” 행동은 시적 자아가 유년시절의 그때로 돌아가 있음을 알려주는 표현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유년시절로 돌아가 시적 자아는 다정했던 아버지를 찾는다. 고향의 철길, 유년 시절, 아버지 등의 기표들은 모두 기찻길이 단순히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이동을 위한 것임을 강조해주고 있다. 심포리 기찻길을 따라 여행을 하는 것은 연어의 회귀 같은 근원으로 거슬러 오르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연두빛 발을 담근 오십천은 더 푸르고/ 바위도 앉은 채로 놓여있는 누각에는/ 한 천 년 받쳐 든 시간 망울망울 부푼다// 양지귀 물들이는 산수유 눈을 뜨고/ 첫마 음 못 다한 말 홍매화 옅은 기침/ 파릇한 햇살 속에서 숨바꼭질 한창이다// 돌을 찧어 구멍 내며 소원을 빌었다던/ 옛사람 그 손길이 뜰에 아직 남았는데/ 절반은 눈물꽃 맺혀 그렁그렁 피어있다// 하늘 향해 돛을 단 관동별곡 가사 터엔/ 송강의 푸른 노래 봄볕 속에 새순 돋고/ 오십천 아침을 연다 햇살무늬 반짝인다” (「죽서루 편지」, 전문)
봄날 시인은 죽서루에 올라 그 경관을 조망하면서 감회를 노래하고 있지만, 시인이 묘사하는 이미지들이 또한 자연의 풍경 묘사에 그치지는 않는다. 이 시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첫째 수 종장에서 “한 천 년 받쳐 든 시간 망울망울 부푼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죽서루라는 누각을 보고 있지만 사실은 시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시인이 보고 있는 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조응(照應) 또는 상응(相應)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천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죽서루의 누각에 봄이 오자 “산수유는 눈을 뜨고”, 홍매화는 “옅은 기침”을 한다. 또한 “돌을 찧어 구멍 내며 소원을 빌”던 “옛사람 그 손길”은 현재에도 여전히 뜰에 남아 있으며, 과거에 만들어졌던 그 구멍은 현재 “눈물꽃 맺혀 그렁그렁 피어있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면서 서로 조응하고 있는 현상은 넷째 수에서 절정에 이른다. 즉 “송강의 푸른 노래”가 “봄볕 속에 새순”으로 돋아나고 있다. 송강의 관동별곡이라는 가사를 “푸른 노래”라고 표현하는 대목도 예사로운 것은 아니지만, 송강의 가사가 봄볕 속에서 새순으로 돋아난다는 표현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경지라고 하겠다. 과거의 시간이 오늘날 싹이 트고, 꽃이 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지엽 교수는,
『백악기 붉은 기침』의 표4에서 “김민정의 이번 시집은 백악기나 빗살무늬 토기의 원시적 상상력이 금강산과 사막의 역사적・실존적 상상력과 만나고 있다. 연어처럼 아득한 모천을 거슬러 오르기도 하고, 허난설헌이나 낙타, 주목이 되기도 하지만 몽돌과 가을 종소리와 굴렁쇠의 둥긂을 지향한다. 오랜 세월 벼린 날들이 반짝거리고 있다. 55편의 정제된 저 탄력의 힘살! 팽팽하다. 빛저운 노래, 가편의 절구들이여. 드디어 한 시인의 길을 확 열어 제꼈다.” 고 평하였다.
“하늘의 벅찬 숨결/ 그대로 땅이 받아// 홀로된 꽃대궁도/ 꽃씨를 받아둔다// 순 간은 모두 꽃이다/ 네 남루도 그렇다” (「꽃, 그 순간」전문)
김민정 시인의 이번 시집 『백악기 붉은 기침』은 이전의 시집과 달리 어느 작품을 붙잡아도 긴장감이 느껴진다. 확실히 작품이 달라졌다. 빈틈없는 직조력, 내면과 깊이를 꿰뚫는 투시력, 삶의 아픔과 고뇌를 보는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꽃, 그 순간」에서 초장에서는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간명하게 잡아낸다. 하늘의 호흡과 숨결을 땅이 그대로 두말없이 이어 받는 것이라는데 묘사(description)가 아니고 진술(statement)이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도 울림이 있다. 사고적思考的, 고백적告白的, 해석적解釋的이다. 진술이 갖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중장에서는 이를 이어받아 구체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홀로된 꽃대궁도/ 꽃씨를 받아둔다”는 것은 가시적可視的, 제시적提示的, 감각적感覺的이다. 하늘의 모습을 땅이 이어받는 실제의 모습이다. “홀로된 꽃대궁”은 소외받은 한미한 존재를 일컫는다. 그러한 보잘것없는 존재들도 “꽃씨를 받아”둔다는 것이다. “꽃씨”는 다음을 기약하는 생명의 결정체니 이생이 비록 아픔이나 고통 속에 좌절한 삶이었더라도 다음 생은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이기를 염원하는 마음 때문이다. 볼품 없는 것이 땅의 일이지만 “씨앗”의 하늘 모습을 이어받고 싶은 것이다. 종장에서는 “순간은 모두 꽃이다”라는 진술적 표현으로 다시 긴장을 유도한다. 살아가는 모순 순간이 꽃이라는 것이다. 실체의 꽃이 져도, 빈 뜰이어도 꽃이라는 것이다. 모슨 순간이 꽃이고 “네 남루” 또한 그러하니 “남루”가 결코 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난이 어찌 흠이 되고 왜소함이 어찌 결함이 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꽃, 그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진술과 이를 이어받는 묘사가 두 번 반복됨으로써 시상을 집적해 나가는 치밀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시에 있어서 묘사(description)와 진술(statement)은 매우 중요한 두 축이다. 묘사에 치중한 시는 산뜻해서 보기는 좋지만 깊은 맛이 덜하기 마련이다. 묘사는 언어를 회화적인 방향으로 명료화시키지만 진술은 언어를 사고의 깊이로 체험화시킨다. 좋은 시는 묘사와 진술의 절묘한 조화에서 탄생됨은 물론이다.
“겨운 삶 등에 지고 모래밭을 타박이며/ 얼마나 느린 발길로 너는 걸어 왔을까/ 시간은 모래바람 속, 온 길이 다 묻힌다// 너를 통해 흘러왔을 나의 강을 바라보며/ 뜨거운 고도 향해 휘파람을 불어가며/ 혹처럼 굽은 생애가 신기루로 흐른다// 오랜 어둠을 깨며 멀어지는 밤 같은/ 한 생애 푸른 비단을 펼쳐놓은 저 달빛/ 속눈썹 짙게 젖어든 외로운 등이 휜다” (「낙타」전문)
원시적 상상력의 탄탄함이 보이는 작품들과 더불어 실존적 상상력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상당수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존재적 성찰과 연결될 때 인간 실존의 문제로 투영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점은 「낙타」와 같은 작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시인은 「낙타」를 통하여 낙타가 지닐 수밖에 없는 외로움을 밀도 있게 나타낸다. 그 외로움에 대한 자각은 달빛에 “푸른 비단”처럼 드러나면서 감각적으로 세미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이 인식은 “겨운 삶 등에”진 모래밭의 현실과 맞닥뜨리고 있다. “시간은 모래바람 속, 온 길이 다 묻”는 인고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인 셈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첨예한 인식이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과 만날 때 작품은 실존의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낙타가 사막의 현실을 살아남기 위해 가질 수밖에 없는 “혹처럼 굽은 생애”를 생각하며 달빛 아래 “외로운 등”을 휘는 시적자아의 고뇌가 고즈넉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유성호 교수는,
『바다열차』해설에서 “그녀는 단수 형식 안에 가지런히 배열된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순간의 미학’을 매우 인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김민정 시인은 운율 자체를 무화하고 산문을 지향해 가는 우리 시대에 맞서 가장 함축적이고 음악적인 운율을 구현하고 있는 단수 미학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며 그녀의 단시조의 품격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지상의 길이란 길/ 한꺼번에 몰려온다// 제 뼛속 의미들을/ 깎아내고 깎아낸 길 // 지나온/ 날들의 저편,/ 직립으로 서 있는 나” ( 「벼랑 앞에」 전문)
“눈 씻고 귀 닫으며/ 한밤을 비운 날은// 내 발목을 움켜쥐던 수많은 이정표들이 // 어둠을 마름질하며/ 제 길을 열어간다” ( 「지샐 녘」 전문)
‘벼랑 앞’이라는 공간과 ‘지샐 녘’이라는 시간은 소멸의 징후를 가득 머금고 있지만, 김민정 시인은 그러한 시공간에서 오히려 역설적 생성을 꿈꾼다. 왜냐하면 “제 뼛속 의미들을/깎아내고 깎아낸 길”처럼 벼랑은 “지나온/날들의 저편”에 서 있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거기 직립으로 서 있는 ‘나’야말로 벼랑의 형상으로 가파르게 서 있는 존재론적 위의(威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해거름의 시간에 “내 발목을 움켜쥐던 수많은 이정표”들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어둠을 마름질하며” 열어가는 길이 자신의 길임을 선언한다.
이처럼 김민정 시편들은 끝없이 우리의 현재형을 탈환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일상과 역사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게 한다. 매우 정제된 미학적 정예주의를 통해 자신만의 아름다운 존재 전환을 꿈꾸면서, 그녀는 예민한 감각과 사유로 불모의 세상과 맞서고 있다. 또한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의 마디들을 힘주어 보듬으면서, 깊은 기억을 통한 서정시의 치유 기능을 한껏 증폭하고 있다. 이 모두가 불모와 폐허를 넘어, 어떤 근원적 질서에 대한 열망과 매혹을 그녀만의 시선으로 담아낸 고유한 내면 풍경이 아닐까 한다. 그 점에서 우리는 김민정 시편이 삶의 역설적 생성의 순간을 노래한 실체임을, 그리고 거듭 사랑과 기억의 깊이를 노래한 미학적 고투의 산물임을 알아가게 된다.
2. 현재진행형의 정갈한 정통 서정시학
“비 내려도/ 바람 불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 되어// 언제든 어디서든/ 그대 향해
활활 타오를// 가슴에/ 불잉걸 하나/ 간직하며/ 살고 싶은,” (「불꽃이고 싶은」 전 문)
김민정 시인의 위 시를 읽었을 때 참 정갈하구나 느꼈었다. 단숨에 터져 나온, 한 문장도 채 안 되는 단시조에 군더더기 없이 간절하게 할 말 다해놓고 있으니. 제목만으로 보았을 땐 주체할 수 없는 정념의 불꽃인가 했더니 가슴속에 깊이 간직한 잉걸불이었으니. 그런 잉걸불로 어떤 대상을 만나든 활활 타오르는 사랑을 정갈한 언어로 나누려하고 있으니.
“바람을 켜고 있는 색동의 바람개비// 온종일 일렬종대 누구를 맞고 있나// 고향역 아리는 눈길 저 너머 언덕을 본다// 산정보다 높게 앉은 잔설 위 햇살처럼// 두고 떠난 옛길들이 얼굴 환히 돌아오고// 윤이월 깨무는 속살, 봄의 촉이 트고 있다” (「추전역에서」 전문)
시인의 고향 인근 기차역을 그린 두 수로 된 연시조이다. 추전역은 태백 산간 속에 있는 우리나라에선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역. 그래선지 적지 않은 시인들이 쓸쓸하고 황량한 그 역을 소재로 시를 써오고 있다.
그런 시들에 비해 위 시는 북풍한설 몰아치는 윤이월 추전역 풍경인데도 매몰차지 않고 따스하다. 시인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잉걸불 온기가 따스하게 전해오는 시이다. 그런 온기는 다름 아닌 시의 핵인 서정의 온기일 것.
첫 수 초장, 중장에서 시인은 추전역 풍경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쭉 늘어서서 바람에 돌아가고 있는 색동바람개비 풍경을. 그 바람개비는 부는 바람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개비 스스로 돌아가며 오히려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그대로 바람개비와 하나가 돼가고 있다. 시인이 켜는 바람이고 시인의 가슴속에서 돌아가는 바람개비이기에 누구를 맞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추전역, 고향과 하나 돼가는 마음이기에 시인은 “아리는 눈길”로 고향을,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곳, 잔설 위의 햇살이며 옛길이며 저만치 오는 봄 등의 세계에는 시간이 오로지 현재진행형으로만 있다. “두고 떠난 옛길”이나 고향의 과거가 아니다. 그런 과거와 함께 언 속살들을 녹이며 봄의 촉을 틔우며 환하게 돌아오고 있는 미래도 포함한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게 시인은 고향 추전역과 한 몸이 되어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추억과 예감으로 한순간에 현재화시키고 있다.
동일성의 시학과 순간성의 시학, 이 서정의 양대 시학이 고향역을 과거에만 매몰되지 않고 따스하게 현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예민한 감각에 의한 이미지의 구체화로. 이 시의 대단원인 “윤이월 깨무는 속살, 봄의 촉이 트고 있다”는 절창을 보시라.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단숨에 추억과 예감을 현재진행형으로 공감각화 시켜놓고 있지 않은가.
“달빛 한 사발을/ 누가 건져 올리는가// 차르르/ 물소리가/ 봄밤을 다 적신다// 짧아도/ 너무 짧았던/ 그 밤에 스친,/ 눈빛” (「홍매」 전문)
온 몸의 감각, 공감각으로 봄밤과 매화와 시인 자신을 구체화해놓고 있는 근작 단시조이다. 초장에서는 시각, 중장에서는 청각, 종장에서는 촉각으로. 오감(五感) 중 어느 두 가지 이상이 결합된 공감각이면 대상과 한 몸으로 어우러지는 살가움이 그대로 살아나게 된다. 위 시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은 붉은 매화꽃인가, 봄밤인가, 아니면 시인 자신인가. 그 셋 다 한 몸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서로가 서로를 스친 너무도 짧았던 그 눈빛에는 그러나 그 셋의 비밀스런 내력들이 다 들어 있지 않은가. 해서 난 김 시인을 서정시학에 정통한 정갈한 시인으로 봐왔던 것이다. 무엇보다 시조의 정형 율격과 구조에 실어 인간 심성의 고향이며 시의 고향인 서정을 튼실하고 소담스럽게 지켜내는 시인으로 봐왔다.
“모든 그리운 것은 보내지 못하는가/ 빗방울이 솔잎가지 후두둑, 적시는 날/ 기차 는 스위치백으로 산허리를 감아든다// 수국 피듯 탐스럽게 증기를 뿜어내며/ 어린 날의 갈래머리 리본처럼 나풀대며/ 심포리, 메아리 되어 나는 늘 돌아온다” (신작 「추억 일 번지」 전문)
“기찻길 아스라이/ 한 굽이씩 돌 때마다// 아카시아 꽃내음이/ 그날처럼 향기롭다// 아버지/ 뒷모습 같은/ 휘굽어진 고향 철길” (「심포리 기찻길」부분)에서처럼 시인은 아버지가 철도공무원으로 일했던 고향의 그 기차와 철길을 즐겨 시화하고 있어 ‘철도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앞서 살폈듯 고도가 높은 곳으로 가파르게 오르는 철길이어서 기차가 힘이 부쳐 곧바로 오르지 못하고 앞뒤로 지그재그로 오르는 것을 스위치백이라 한다. 나 또한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에서 공중도시 마추픽추로 가며 안데스 산록을 스위치백으로 넘는 기차를 타고 달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오고가는 시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김 시인은 떠나기 싫어 주춤거리는 듯 하는 스위치백에서 첫 수 초장부터 “모든 그리운 것은 보내지 못하는가” 물으며 ‘그리움’을 잡아내고 있다. 시는 물론이요 모든 예술, 심지어 우리네 삶의 알파요 오메가인 그리움을. 우주에 만연해 있어 언제든 홀연 느끼나 잡으려면 잡히지 않은 그 그리움이란 추상을 빗방울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로 구체적으로 잡아내고 있다.
첫 수가 스위치백으로 오르는 기차를 그렸다면 둘째 수는 기차가 내뿜는 증기를 그리고 있다. 초장에서는 뽀글뽀글 피어오르는 수국처럼, 중장에서는 어린 날 머리에 꽂던 리본처럼 증기를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그런 증기를 내뿜는 기차와 시인은 한 몸이 돼가고 있다.
그러다 마침내 종장에서는 ‘심포리,’라는 고향 이름을 소환하며 기차와 일치가 되고 있다. 나는 이 ‘심포리’를 고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음, 소리로 읽고 싶다. 기차가 울리는 기적 소리 같은 소리, 메아리로. 시인과 고향과 기차와 과거와 미래가 현재진행형으로 어우러져 울려나오는 ‘심포니’로 듣고 싶다. 이렇게 시인은 제목처럼 ‘추억 일 번지’로서 과거 고향역을 다루면서도 언제든 현재진행형이다.
“택배로 방금 받은/ 고구마 한 상자에// 반가운 궁금증이/ 활짝, 피는 오후// 정 겨운 그 사람 손길/ 알알이 안겨든다// 초이렛달 내려보는/ 베란다 모퉁이에// 반 듯하게 자리 잡고/ 고향생각 하는 듯이// 달 속에 넉넉한 얼굴로/ 가만, 웃는 그 사람” ( 신작 「해남 고구마」 전문)
일상 속에서 우러난 생활시이다. 첫 수에서는 택배로 온 고구마 한 상자를 받은 반가움을 꾸밈없이 펴고 있다. 그런 반가운 마음에 모든 대상들이, 언어들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고구마’도 ‘궁금증’도 ‘오후’도 아연, 반갑게 활짝 살아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그런 고구마가 확연 의인화되고 있다. 반듯하게 앉아 고향생각을 하고 있다며. 그런 고구마는 다시 고구마를 내려다보는 달과 고구마를 보낸 ‘그 사람’과 일치되며 모든 것들이 한 몸으로 어우러지고 있다. 초장에서 보인 시인의 정겨움, 반가움이 이렇게 구체든, 추상이든 모든 대상과 언어를 펄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시는 본래 삼라만상이 한데 어우러져 생명과 생동감을 구가하는 원시 애니미즘의 동화, 신화의 세계를 오늘에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신화학자 루이스 긴즈버그는 “어린이들과 시인만이 여전히 너와 나와 우주는 살아 있는 하나라는 활물론(活物論)적 애니미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활물론적인, 유기론적인 시세계는 앞서 언급한 서정시학의 요체인 동일성의 시학과 순간성의 시학으로도 설명 가능할 것이다.
“구름이 서로 모여/ 부끄럽다 가려준다// 나목의 가슴 윤곽/ 그 아래 둔부까지// 골짜기 깊은 계곡물/ 감추고 또 감춘다// 제 가슴 엷게 펴서/ 온 산을 쓰다듬다// 한번 힐끗, 돌아보는/ 유연한 저 몸짓들// 끝끝내 울음을 참는/ 내 모습이 거기 있 다” (신작 「저녁 무렵」전문)
산그림자 내리고 땅거미가 깔리는 저녁 무렵의 박모(薄暮), 그런 엷은 어둠에 깔리는 서러운 심경까지 읊은 두 수로 된 연시조이다. 이 시를 이끌고 있는 것은 활물론적 상상력이요 서정시학이다.
첫 수를 보시라. ‘구름’도, ‘나목’도, ‘계곡물’도, 심지어는 ‘부끄럽다’는 말까지도 다 의인화돼 섹시하게 펄펄 살아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둘째 수에서는 그렇게 살아있는 대자연 속으로 시인도 은근히 끼어들고 있지 않은가. 저물녘 울고 싶은 쓸쓸한 심상과 하나 되어 대자연 속으로 그대로 빨려들고 있지 않은가.
“끝끝내 울음을 참는/내 모습이 거기 있다”고 울음을 참으면서도 그런 저물녘 대자연 심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반가움, 고마움으로 모든 대상 세계와 정을 통하려는 통정(通情)의 적극적 자세가 있어 가능한 것이다. 그래 모두에 살핀 시「불꽃이고 싶은」에서 시인은 가슴속에 언제든지 그대 향해 활활 타오를 잉걸불 한 톨 지니고 있다하지 않았겠는가.
“어깨 위에 내려앉는 깃털의 이 가벼움/ 잼잼잼 오므렸다, 다시 펴고 잼잼잼/ 가깝 게 스며들수록 한 뼘씩 멀어집니다// 흩날리다, 비껴가다 함박눈이 쌓입니다/ 지나 온 길의 흔적 다 덮어주겠다고/ 자꾸만 따라오면서 발자국을 지우면서// 그러다 꺼내보는 숨겨둔 그 얼굴이/ 한 방울 눈물로도 금세 녹아내릴 듯이/ 내 눈 속 그 렁그렁한 눈부처가 됩니다” (신작「첫눈 세레나데」전문)
눈이 내려 쌓이는 모습과 시인의 심경을 나란히 읊어나가고 있는 작품이다. 첫 수 초장부터 “어깨 위에 내려앉는 깃털의 이 가벼움”이라며 상당히 감각적이면서도 역동적으로 눈을 묘사하며 눈과 하나가 돼가고 있다. 흩날렸다 쏟아졌다 하며 내리는 눈을 손바닥을 오므렸다 펴는 잼잼잼으로 보는 천진스런 시선으로 눈에 다가가고 있다.
그러다 이내 종장에서는 시인과 눈과의 거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원래 한 몸이었다 이젠 나눠진 너와 나의 어쩔 수 없는 거리, 그 거리가 그리움을 낳고 그 그리움이 다시 하나 되고픈 서정을 낳는 게 아니던가.
둘째 수에서는 눈이 내려 쌓이는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지나온 발자국, 지나온 길의 흔적을 자꾸 지워가며 쌓이는 눈. 그런 과거, 추억을 다 지우면서 눈은 내리지만 마지막 수에 오면 지난 길, 지난 시간은 결코 지워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수 초장 “그러다 꺼내보는 숨겨둔 그 얼굴”은 앞 수에서 눈이 덮어버린 “지나온 길의 흔적” 아닐 것이다. ‘그 얼굴’은 또 다름 아닌 시인의 가슴 속에서 묻어둔 잉걸불 불씨 아닐 것인가. 그 불씨가 마지막 종장에서는 “내 눈 속 그렁그렁한 눈부처” 형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니 그렁그렁한 눈물로 맺히고 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의 고향. 울긋불긋 꽃대궐 속에서 만물과 한 치의 거리도 없이 어울리던 그 유년의 유토피아 세계를 우리들 모두는 개인적 신화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 개인적 신화세계를 오늘의 현실에서도 ‘눈부처’로, ‘눈물’ 등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서정 시인이란 족속이다.
서정이란 무엇인가. 너와 나의 외로운 마음이 겹쳐지는 순간의 살가운 정 아니겠는가. 그 순간에 너와 나의 비밀스런 내력들도 하나로 포개지며 아연 현재진행형으로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고.
이것이 그 난해하고도 구구절절한 동일성과 순간성이라는 서정시학의 핵이요, 살아있는 느낌 아니겠는가. 그것의 구체화로서 서정시의 관건은 그러므로 너와 나 사이의 틈, 거리에 있다. 소위 ‘심미적 거리’의 조정이 서정시 성패의 관건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유념하며 계속 창작에 임할 때 더욱 생생하고 절절한 서정의 세계로 김민정의 작품은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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