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 천불동의 막고굴
김민정(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상임이사)
지평선은 가이없고 푸나무도 없는 이곳
혜초가 더듬어간 사막의 열기 속에
천 번을 꼽는 손가락 소원마다 꽃을 단다
앉고 서고 모로 누운 부처님 납의衲衣 그늘
어쭙잖은 내 속말을 가려 덮어 주시는지
보일 듯 보이지 않게 눈을 뜨고 계시네
- 졸시조, 「천불동에 무릎 꿇고 – 돈황 막고굴」 전문
우루무치에서 돈황을 가는 길에 트루판이 있다. 중국의 트루판은 옛날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주요 오아시스 국가의 하나이다. 이곳은 옛날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이 활약했던 곳이고, 고국을 떠난 수많은 우리의 스님들이 지나간 곳이기도 하다. 『왕오천축국전』의 저자인 신라승 혜초도 바닷길로 천축(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이곳을 지나갔다.
투르판은 위구르말로 ‘파인 땅’이다. -154미터의 투르판 분지는 아주 오랜 옛날 바다였으나 지각운동으로 중국에서 표고가 가장 낮고 가장 더운 육지안에서 바다보다 낮은 분지가 됐다. 이곳은 ‘화로 도시’, ‘바람의 도시’ ‘포도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또한 소설 「서유기」에 등장하는 ‘화염산’으로도 유명하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높이 800미터 둘레는 40킬로미터의 붉은 황토의 화염산이 투르판 분지 안에 우뚝 솟아 있다. 투르판분지는 여름이면 40도가 넘는데 이 ‘불타는 듯한 산’은 2, 3도가 더 높다. 한 번도 비나 눈이 내린 적이 없는 붉은 산. 바람이 많은 이곳의 흙먼지는 봄철, 타클라마칸과 고비사막의 모래먼지와 함께 우리나라에까지 날아와 황사현상을 일으키는 장본인이다. 이곳 화염산 기슭 남쪽 계곡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있다. 입구에는 소설‘서유기’의 현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의 입상이 있다. 영화 ‘서유기’를 촬영한 곳이다.
우루무치에서 42시간을 기차로 달려 유원역에 도착,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지붕에다 짐을 싣고 밧줄로 묶은 후, 사막을 달려 2시간 반을 지나자 돈황에 도착했단다. 돈황은 비단길의 요충지로서 천산북로와 천산남로의 교차로에 있으며 이 여행의 핵심이었다.
우리는 돈황의 천불동(막고굴)을 가기 위해 투어를 이용했다. 즉석에서 팀이 이루어지는 마이크로관광버스였다. 관람료는 갑과 을로 나누며, 갑은 75원에 동굴 30개, 을은 25원에 동굴 12개를 관람할 수 있다. 우리는 투어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을’을 택했다.
처음에 본 130호 석굴의 부처님 좌상의 높이는 30미터쯤 되었는데 발하나의 길이가 4~5미터쯤 되는 것 같다. 석굴의 겉은 사암으로 자갈과 모래로 되었으며, 부처님은 나무로 심을 만들고 겉은 진흙에다 짚을 섞어 이겨바른 것이었다. 벽면도 진흙과 짚을 이겨 바르고 평평히 다져 회칠을 한 다음 그림을 그렸다. 천장과 사면벽이 모두 벽화로 되어 있어 신기했다. 약 4세기경부터 1000여 년 동안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해당되지만 외부와의 접촉이 없어서일까? 아직도 색상이 무척 선명하다. 아마도 19세기까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개발이 잘 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부처님의 형태와 표정도 가지가지다. 부처님의 입적하실 때 모습인지, 와불(옆으로 누워있는 부처)도 무척 재미있다. 우리나라 석굴암의 부처님처럼 화강암을 깎아 만든 것도 아니고, 8등신의 섬세한 구성도 아니라서 만드는 데 힘은 덜 들었겠지만 대단한 집념으로 만들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계속 만들어졌기에 하나의 돌산에 이토록 많은 부처님동굴이 있는 것이다.
1000개의 부처님 동굴이 있다고 천불동이란 이름이 붙었으나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492개라 한다. 이민족의 침략을 피해 이곳에 와 살면서 그들의 평화를 염원하느라 이토록 많은 부처님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우리의 신라승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인도여행기)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사막 가운데의 깎아 세운 듯한 작은 절벽에 있는 동굴이라 문화의 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어두컴컴한 굴속에 전등조차 설치되지 않아 어두워서 자세히 구경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사전지식이 없던 우리는 손전등조차 준비하지 않았기에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비치는 손전등을 따라가며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전등이 있으면 훼손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사막 속이라 전기를 끌어오기 어려워서인지 불빛이 없어, 구경하기 힘들었만 그래서일까? 그림의 색상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곳 벽그림에서 보면 여자의 얼굴은 한결같이 둥글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미인은 어른들이 복스럽게 생긴 얼굴이라고 믿는 둥근 얼굴이다. 부처님들은 대체로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는 편이었지만, 어떤 동굴에서는 벽화를 떼어간 모습도 보이고, 이교도들의 짓인지 부처님의 얼굴이 짓이겨지고 팔이 망가지기도 했다. 내 종교가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하다는 걸 그들은 몰랐을까? 부처님 코를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이 중국인에게도 있는 것일까? 코가 갈려 나간 부처님도 많았다. 그 많은 부처님상을 보면서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과 소원이 성취되기를 갈구하는)을 헤아려 본 귀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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