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향기
김민정(시조시인, 문학박사)
교정을 돌아오는
쑥꾹새 울음 속에
잊혀진 얼굴들이
초저녁 별로 뜨고
달근히
씹히는 추억
살 깊은 칡뿌리란다
- 「옛교정에 서면」 전문
며칠 전 강원도 상생프로그램 개발 및 홍보팀에 초대되어 태백, 삼척, 동해 지역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프로그램 중 하나인 동해산타열차 타기 안에는 몇 년 전 오트레인 기차에 게재되었던 시조 「영동선의 긴 봄날 1」이 다시 게재되었다기에 그것도 보고 싶었고, 고향 심포리 기찻길을 이용한 추추파크의 레일바이크 체험도 흥미를 끌어 참가하게 되었다. 버스로 서울을 출발하여 통리역에서 레일바이크를 탔다. 7.7Km의 산악형 레일바이크는 경사가 30도쯤 되어서 다리를 힘들게 움직이지 않아도 잘 굴러가는 레일바이크다. 12개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터널 안은 공룡도 날아다니고 음악도 있어, 눈과 귀가 즐겁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아름다운 미인폭포가 있는 높은터라는 절경이 눈앞에 펼쳐지니 더욱 좋다. 국내에서 가장 재미있는 레일바이크 체험을 끝내고 태백에 와서는 365세이프타운 안전테마파크에서 산불진화체험과 태풍체험 등을 했다. 그리고 철암역에서 묵호역까지 1시간 20분 동안 <동해산타열차>를 탔다. 동해산타열차는 깔끔하게 위생적으로 정돈된 4칸의 객실이 있었다. 가족이나 연인끼리 타기 좋은 칸이 있고, 그냥 혼자서 시를 감상하고 사색하기 좋은 칸이 있고, 간식이나 간단한 요기 등을 즐길 수 있는 식당 칸도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1~2시간 안에 단풍이 물드는 아름다운 강원도의 산과 가슴이 탁 트이는 푸른 동해, 두 가지를 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가을산의 아름다운 단풍을 보니 어릴 때의 고향 운동회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내가 다니던 심포초등학교는 1년에 한 번 가을운동회가 있었다. 가을 행사 중에 가장 큰 행사였고 나에게는 몹시 기다려지는 날이기도 했다. 가을소풍은 전체 학년이 가기도 하고, 학년별로 따로 가기도 하였지만, 운동회는 전 학년이 모여서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 응원도 요란하게 했던 것이다. 가을이 오면 매일 오후에 남아 무용연습도 하고, 마스게임연습도 하고, 오자미 연습도 하고, 줄다리기 연습도 하고, 릴레이연습도 한다. 그러다 운동횟날 진짜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빨리달리기, 장애물달리기, 학부모 함께 달리기, 선생님과 함께 달리기 시합 등에서 거의 1등을 빼 놓지 않고 했다. 상으로 주로 1등은 공책 3권, 2등은 2권, 3등은 1권을 주었다. 단체상으로는 백군, 청군으로 나누어서 하던 오자미 경기, 기마전 경기, 전교생 릴레이 등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상을 탈 때도 있고, 못 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운동회가 끝나면 내 책상위에는 상으로 받은 공책 등 학용품이 수북이 쌓였다.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거의 1년 내내 상이란 큰 도장이 찍힌 공책에다 수업시간마다 필기를 했었다. 때문에 초등학교 때는 공책이나 연필 등 문구류를 별로 사서 쓰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추억이 담긴 내 고향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에 위치한 심포초등학교. 나와 친구들은 학교의 쉬는 시간에는 모여서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줄넘기, 공기놀이, 땅따먹기, 공놀이, 자치기, 옥래(돌차기), 오자미 던지기 놀이 등을 하였는데 계절마다 놀이가 달라졌고, 아이들은 계절에 맞는 놀이를 잘도 찾아내어 전교에 유행시키며 참 신나게 놀았었다. 한 팀이 하기 시작하면 곧 유행이 되었다. 저녁에도 우리는 어두워지기 전까지, 어른들이 잘 시간이라고 큰 소리로 부를 때까지 학교운동장에서, 가까운 건널목 근처 동네에서 시끄럽게 놀았다. 건널목 주변에서도 놀고, 학교와 집 사이의 길가에 있는 큰 산소에서도 뒹굴고 놀았는데, 동네이고 너무나 익숙해서인지 산소란 느낌이나 무서움도 없이 그냥 놀이터처럼 생각하며 놀았다. 숨박꼭질을 할 때는 남의 집 보리밭, 콩밭, 옥수수 밭에도 숨었다. 자치기를 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맞추거나 남의 집 호박에 꽂히기도 하여 혼나기도 하고, 땅따먹기를 하다가 친구와 말다툼도 하고, 아직 피지 않은 호박꽃에다가 개똥벌레를 잡아넣어 호롱불이라고 가지고 다니기도 하고, 개똥벌레를 잡아 반짝이는 부분을 눈 위에다 붙이고 풀숲에 숨어 있다가 친구들이 개똥벌레인 줄 알고 잡으러 오면 놀래주기도 하였다. 여름저녁이면 모깃불을 피워놓고 돗자리에 누워 견우와 직녀 이야기나 옛날이야기를 어머니께 듣기도 하고,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기도 하였고 가을저녁이면 은하수 길게 흐르는 모습을 보면서 별을 하나둘 세다가 잠들기도 하였다.
가을 운동횟날 상으로 받았던 공책과 연필의 기억이 생생한 심포초등학교는 탄광촌의 석탄개발이 중단되면서 아이들은 하나둘씩 전학을 가고 학생이 줄어들어 천 명 가까운 학생들이 졸업했던 학교는 폐교가 되었다. 그 동안 졸업생들이 모여 추억을 생각하며 몇 번 운동회 등을 하기도 하였다. 몇 년 전 삼척시에서 이곳에 탄광촌 주민을 위한 관광지 개발을 하느라 <유리나라>라는 테마공원을 만들었다. 졸업생들 흔적을 기릴 유례비 하나 없이 졸업생들의 수많은 추억이 깃든 옛날 초등학교 건물을 철거하였고 운동장 자리쯤에는 현대식 건물인 유리테마건물이 들어섰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자주 가던 미인폭포 부근도 관광지로 새롭게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아름답고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기를 바란다.
요즘은 초등학교 운동횟날 학교에서 어떤 선물을 주는지 궁금하다. 예전에는 학교가기 전날 밤에 내일 쓸 연필까지 칼로 예쁘게 깎아서 필통에 넣어두고 잠들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지금도 연필을 쓰는 학생들이 더러 있지만, 요즘은 주로 샤프를 쓰든가, 아니면 볼펜으로 글씨를 쓴다. 옛날처럼 공책에다 꼬박꼬박 글씨를 쓰지도 않고 책에다 그대로 글씨를 쓰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요즘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문구류도 많이 달라지고 있고, 또 학생들이 필요한 문구류를 학교에서 일괄 구입해서 수업시간 나누어 주는 경우가 많다. 학생복지가 발달하여 학생들은 문구류 등 준비물 없이 학교에 오는 경우가 많으니 참 편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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