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과 지리산 등정기
김민정(한국문협 시조분과회장, 문학박사)
1. 대청에 서면
흐르는 구름하며 제멋 겨운 나무하며
바람소리 산새소리 데불고 살 줄 아는
설악은 기골장대한 늠름한 사내였네
한 치 키를 더해 본들 여전히 높은 하늘
팔 벌려 안아본들 여전히 넓은 세상
인간은 어느 귀퉁이 자기 성을 쌓고 있나 - 「대청에 서면」 전문
설악산雪嶽山은 겨울이라야 산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눈 쌓인 겨울에 보면 산 능선의 기골이 제대로 드러나 왜 산의 이름이 설악雪嶽인지를 알게 해 준다. 갈비뼈를 드러내듯이 산의 능선을 드러낸 겨울 설악산의 위용은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아니라 남성적인 강인함을 느끼게 한다. 흐르는 구름과 제 멋 겨운 나무와 바람소리, 산새소리 등을 모두 포용하며 서 있는 산은 너그럽고 늠름한 사내대장부를 연상시킨다. 정상인 대청봉에 올라 호연지기를 기르면 자기의 성을 쌓기 위해 아옹다옹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참으로 작아 보인다.
설악산을 수없이 많이 갔지만, 정상인 대청봉까지 등산한 것은 두 번이다. 처음은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인 1977년 친구들과 함께 1박 2일의 코스로 대청봉에 올랐다가 내려오며 중청봉의 산장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몹시 추워서 잠 못들던 기억이 있다.
두 번째는 1997년에 교직원 연수로 다녀왔다. 우리는 짧은 코스를 택하기 위해 오색약수부터 시작했는데, 대청봉까지는 네다섯 시간 코스였다. 오색약수터를 지나 천불동과 설악동으로 이어지는 산행인 것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오색 계곡을 지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중국 실크로드를 여행하고 돌아와서야 중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왜 금수강산이라 하는지 이유를 알았다. 사방 어디에 눈을 주어도 항상 산은 거기에 있고, 산이 우리를 병풍으로 가려주고 보호해 주는 듯하여 언제나 마음이 포근하게 안정된다. 또한 우리의 산은 그 속에 계곡마다 맑은 물을 담고 있다. 눈을 뜨면 언제라도 볼 수 있는 푸른 산, 눈에 익어 다정다감한 한없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세계의 아름다운 곳을 여행하고 오신 분들이 가장 아름다운 건 한국이라고 하시던 말씀들이 실감난다. 정이 들고 눈에 익어서만은 아니다.
설악폭포를 지나면서 시원한 계곡물 소리가 들리고, 산바람도 불어온다. 산의 공기가 주는 알 수 없는 상쾌함,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그것은 산을 찾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충전시켜 준다. 산은 흐르는 구름을 안고, 자기들 멋 대로인 나무와 풀들을 자라게 하고, 가지가지 산새소리, 바람소리도 들으며 묵묵히 서 있다. 한없이 너그러운 사내대장부인 양,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하다. 산의 흙냄새, 나무냄새, 풀냄새를 코로 맡으며, 그 부드러운 흙의 촉감과 맑은 공기를 피부로 느끼며, 푸른 나무와 풀과 맑은 물을 눈으로 보고 새소리 바람소리를 귀로 듣는다. 모든 오감을 동원하여 산의 모습을 보고, 듣고, 느낀다.
1997년 설악산 정상 대청봉에서
맑은 햇빛과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조화를 이루어 한없이 싱그럽고 아름다운 여름날이다. 광물과 식물과 동물과 인간의 자연스러운 교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산이 모든 것을 감싸준다. 포근하다. 아늑하다. 행복하다. 정상인 대청봉에 이르면 낮은 나무들이 우리를 반겨준다. 어느 산이든 정상의 능선부근 나무들은 바람을 맞아 자라지 못하고 낮게낮게 엎드려 있다. 산정에서 부는 바람 앞에서 스스로를 보호하여 살아남기 위한 겸손한 삶의 자세일까? 그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
대청봉에 서니 감회가 새롭다. 20년 전에 올랐던 대청봉, 지금부터 20년 후에 나는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아니면 다시는 오지 못할까? 모든 것은 한 번밖에 실현될 수 없는 일회성이다. 그래서 우리의 매순간은 아주 소중한 것이겠지. 똑같이 반복되는 행동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삶은 똑같지가 않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고, 건강이 다를 수도 있고, 사랑의 강도가 다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변화된 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제의 지속성과 오늘의 변화성 속에 현재의 내가 존재할 것이다.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순간마다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이겠지…….
정상인 대청봉에서 내려다보면 까마득히 속초시가 보이고, 주변의 설악산 능선들이, 바위들이 보인다. 이렇게 대자연 속에서 보면 인간은 참으로 작아 뵈는데, 인간을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아등바등 살고 있을까? 제각각 자기의 성을 쌓기 위해 개미집을 쌓듯 자신들의 영역을 쌓아가고 있는 것일까? 대청봉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팔도 벌려보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늘도 낮아지지 않고, 우주도 여전히 넓다. 나는 넓은 우주 속의 한 작은 티끌인 인간일 뿐이다. 좀 더 겸허하게, 진지하게 살아야지. 그리고 매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겠다.
산을 내려오면서 소청봉, 중청봉, 귀때기청봉, 공룡능선, 화채능선이 보이고 울산바위도 보인다.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잘 생긴 바위들이 생동감과 역동감을 느끼게 한다. 설악산은 여름보다는 겨울에 보아야 그 능선들이 제대로 살아나 기골이 장대하게 느껴진다. 능선의 모습들이 더 뚜렷하게 살아나기 때문에 겨울의 설악산을 보아야 이름이 왜 설악雪嶽인지를 알게 되며 우리 조상들이 그 특징에 맞는 이름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색약수에서 대청봉을 지나 공룡능선에서 진부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모습이 겨울이라야 더 선명하게 보인다.
희운각을 거쳐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앙폭산장을 만나고 양폭에서 천불동 계곡을 지나 비선대의 길에 이르면 우리나라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이렇게 아름다운 내 나라 내 국토도 다 여행하지 못하고 외국여행을 다닌다는 게 조금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곳이다. 내려다보이는 까마득한 계곡이 한없이 아름답다. 눈 앞에 펼쳐지는 기암괴석과 여름의 짙은 녹음과 계곡물소리가 모든 세상시름을 잊게 한다. 절벽과 계곡이 알맞게 어우러진 천불동 계곡은 진실로 선경이요, 신선들이 사는 골짜기에 와 있는 느낌이다. 아니 내가 신선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자칫 미끄러울 수 있는 철계단을 내려오면서 이런 경치를 볼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주고 다리를 만들어 준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한다.
천불동 계곡의 물은 너무도 맑다. 물은 흐르는 장소에 따라 만나는 사물에 따라 양에 따라 소리도, 모양도, 색깔도, 이름도 다르다.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어 폭포소리를 내기도 하고, 골짜기를 만나면 졸졸 거리기도 하고, 넓고 깊은 물이 되면 소리 없이 흐르기도 한다. 많이 모여 흐를 때는 짙은 색깔을 띄기도 하고, 바위 등에 부딪치면 흰 피를 연상하도록 하얀 모습으로 흐르기도 하고, 투명하고 조용하게 물속의 모습들을 다 비추면서 흐르기도 한다. 그래서 도교道敎에서는 가장 높은 선善의 경지를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라고 했던가. 가장 좋은 삶은 물처럼 깨끗하고 자연스럽게 동화되며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산은 하늘을 우러러 스스로 높아지고, 바다는 물을 받아들여 스스로 깊어진다고 했던가. 자연은 늘 인간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고 겸허하게 만드는 영원한 스승이라 느끼며 설악산을 내려온다.
2. 지리산 연가
1996년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산이 산을 부르고/ 인간이 인간을 부르는
넉넉한 그대 품에/ 안기고 안기는 건
구름 뿐 아니었더라/ 바람 뿐이 아니더라
산이 높아 골도 깊은/ 그대 자락을 도는 안개
무성한 푸른 숨결/ 물소리로 와 앉으면
하늘엔 별들이 뜨고/ 지상엔 사랑 뜨네
사무침을 불러 모아/ 우렁우렁 산이 울면
한도 풀고 설움도 풀어/ 섬진강을 흘려 놓는
지리산 자락자락을/ 휘감는 그대 사랑 - 「지리산 연가」 전문
설악산이 기골이 살아나는 남성적인 산이라면 지리산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 안는 여성적인 산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에 걸쳐있는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을 때 경상도 쪽은 해가 나는 청명한 날씨인데, 전라도 쪽은 짙은 안개가 낀 흐린 날씨라 그 대조가 너무나 신비하게 느껴진 적이 있다. 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날씨가 완전히 달랐다.
지리산을 오르면서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청준의 『서편제』라는 소설과 김지하의 「지리산」이라는 시와 또 영화 『남부군』을 생각했다. 그리고 원래 이름이 ‘직전리’인데 6.25때의 동족상잔 이후 ‘피아골’로 불린다는 한 맺힌 골짜기도 생각했다. 동학혁명, 여순반란, 빨치산, 6.25 등의 단어와 함께 생각나는 산, 수많은 우리의 역사와 문학 속에 등장하는 지리산은 기쁨보다는 슬픔과 한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근래 우리 역사의 격동기와 운명을 함께한 산이 바로 지리산이기 때문이다. 웅장하고 넉넉해 모든 것을 포용할 듯한 산, 그 속에서 인간도 시비를 가리기 전에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타이르며 앉아 있는 듯한 산이 바로 지리산이다.
몽답청산각불로夢踏靑山脚不勞 영입청수의불습影入靑水衣不濕 (꿈에 청산을 오르나 다리는 피로하지 않고, 그림자 물속에 들어가도 옷이 젖지 않네)의 경지로 살아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경상도 하동을 바라보며 나는 박경리의 『토지』속 주인공 최서희를 생각했다.
영산홍
꽃빛보다
더 붉게 타올랐지
비온 후
산허리 감도는
안개처럼 피어났지
하동땅
최서희 눈썹보다도
한 뼘쯤은 더 짙게 – 「그대 그리운 날은」전문
『현대문학』이란 월간지에 연재되던 소설 『토지』를 고등학교 시절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지리산 자락의 하동 최참판댁 최서희, 박경리는 『토지』속의 주인공인 그녀에게서 어떤 여인상을 원했던 것일까?
1969년 9월 『현대문학』에서 1부 연재가 시작되어 1994년 문화일보에서 5부가 완결되기까지 25년간의 긴 여정 끝에 대한민국의 대하소설 『토지』는 완성되었다. 단순히 분량으로만 따져도 원고지 분량으로 총 3만 1천 매, 페이지 수로는 약 9,000페이지(나남출판사 본)에 이르는 실로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 대작이다.
『토지』에는 8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최서희는 가장 전형적인 요소를 가진 주인공이면서도 일반적인 주인공과는 많이 다르다.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와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며, 양반이고 부잣집인 최참판의 외동딸로 태어나 금이야 옥이야 곱게 길러졌고, 사치스러우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고귀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외적인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었음에도 그녀는 어릴 적 구천이와 집을 나간 어머니 별당아씨의 부재로 모정이 결핍되었으며, 아버지 최치수에게서도 별로 정을 받지 못하고 자라 부정도 결핍되어 있다. 그녀의 성격은 아버지 최치수의 성격을 닮아 오만하고 냉정한 성격과 자신에 대한 도전을 용납지 않는 강한 자존심과 뜻한 바는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강한 집념과 원한은 아귀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반드시 갚아야 하는 독한 성격의 소유자다.
또한 최서희는 사랑에 있어서도 결단력이 대한한 여자로 그려진다. 서희와 남편 길상은 주인과 종의 관계였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길상과의 결혼을 결심한 서희였지만, 길상이는 그런 주변의 시선과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서희를 멀리하게 된다. 신분의 차이로 갈등이 생겼을 때 뜻밖에도 자존심이 강한 서희는 “난 길상이랑 둘이 멀리 도망갈 생각까지 했단 말이다.”라며 길상이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자존심보다 사랑이 중요함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후 용정 가던 마차가 전복이 되어 길상이 다친 서희를 병간호하면서 둘의 관계는 급속이 가까워져 결혼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최서희는 양반의 신분으로 종과 혼인한 것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내내 껄끄럽게 생각하고, 길상 역시 이런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해 괴로워한다. 비록 앞서가는 사상을 가졌을지라도 현실에의 적응은 그렇게 만만치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조준구에 대한 복수가 마무리되고 고향 집으로 돌아올 때 길상은 만주에 남게 되고 서희 혼자서만 돌아오게 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고 싶은 심리가 나타나고, 길상은 독립운동을 통해서 이런 자격지심을 극복하려 한다.
최서희를 생각할 때면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가 떠오른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톨스토이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철도역에서 자살하는 것으로 끝난다. 고관의 부인이었던 안타카레리나는 일에만 몰두하는 늙은 남편과 단조롭고 틀에 박힌 결혼생활이 싫어 그녀를 사랑하는 젊고 잘 생기고 부자인 청년과 재혼하였고 새 남편은 그녀를 사랑하지만, 두고 온 아들에 대한 그리움(모정)과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수근거린다고 생각하며 계속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자살을 한다.
이런 안나카레리나에 비한다면 『토지』속의 최서희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돌보아주고 자기를 잘 알고 친구처럼 지내면서도 머슴이었던 길상을 남편으로 택했지만, 세상의 이목을 꿋꿋하게 헤쳐나가는 지혜롭고 당찬 여인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의 삶을 그녀는 선택했던 것이다. 자칫 인생이 버거워질 때는 불행한 인생으로 끝날 수도 있다.
“모조리 다아 잡아가라지. 하지만, 나는 안 될 걸. 우리집은 망하지 않아. 여긴 최씨 최참판댁이야! 홍가 것도 조가 것도 아냐! 아니란 말이야. 만의 일이라도 그리 된다면 봉순아! 땅이든 집이든 다 불 속에 처넣어 버릴 테야. 난 그렇게 할 수 있어. 찢어죽이고 말려죽일 테야. 내가 받은 수모를 하난들 잊은 줄 아느냐?”
라는 말 속에는 자존심 강한 그녀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젊은 시절 조준구에게 빼앗긴 최참판댁의 재산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평사리 저택을 회수하는 모습은 지혜로움이었으며, 젊은 시절 고향땅에 돌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친일을 했지만 고향땅에 돌아와서는 음으로 양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그녀는 역사의 격동기, 한 집안의 파란만장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도 가장 없는 집의 중심이 되어 기개와 절개를 잃지 않는 강단 있는 여인으로, 또한 최씨 가문을 이끌어가는 자애롭고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결국 박경리가 이상으로 삼았던 여인상은 『토지』를 통해 보여준 아름답고, 지혜롭고, 자애로우면서도 강인한 최서희 같은 당차고 줏대 강한 여인이 아니었을까. 지리산을 내려오는 동안 내내 최서희의 그 강인함을 조금이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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