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공간에 대한 최남선과 김기림의 시적 발현 연구<이주열>
목차[국문요약]
Ⅰ. 철도의 지위와 문학적 상관성
Ⅱ. 철도공간에 대한 시적 발현 방식
Ⅲ. 성과와 의의
참고 문헌
[Abstract]
본문요약이 논문은 일제 강점기 철도공간을 문학적으로 발현한 최남선ㆍ김기림 두 시인을 다뤘다. 인간성 상실을 더해가는 기계문명 속에서 철도공간에 대한 시적 발현 방식을 고구한 것이다. 두 사람 간의 시적 발현을 비교ㆍ대조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이들의 상이한 미학적 가치를 가늠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최남선의 경우, 「경부철도가」에서 서구기계문명의 도래를 반기는 긍정적인 모습을 비쳐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지리교육 철도창가」를 엮고 있는 어휘ㆍ문장들과 상당히 닮아 있는 관계로 보다 세분화된 접근이 요구되었다. 기존의 연구들에서는 단순히 두 작품 간 총괄적인 성격만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기차의 빠름을 경탄하는 시구, 철도를 주축으로 한 근대문명을 찬탄하는 시구, 역명을 차례차례 ...
경인선 통학생 그룹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우현 고유섭의 연시조 「경인팔경」은 인천인 자신의 시선과 관점으로 포착된 인천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그의 이 연시조는 〈경인선 기차 통학생 친목회 문예부〉와 같은 젊은 지식청년들의 문학활동과 민족운동의 문학적 반영물이라 할 수 있다.
우현이 「차중동경」의 종장에서 노래한 “차중정어”는 단순한 시어가 아니라 철도와 한국근대문학의 깊은 연관을 입증하는 실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인천을 자주 찾았던 문인들 중에서 김기림은 당시의 경험을 「길에서―제물포 풍경」이란 근사한 시로 되살려 내기도 하였다.
이 같은 문학사적 흐름은 현대에 와서도 끊어질 듯 줄기차게 이어졌는데, 1965년 9월 『월간 철도』에 발표된 미당 서정주의 「경인선 복선 개통의 날」을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축시라는 창작상의 제약으로 인해 다른 미당의 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자본주의가 고도화하고 수도권 지역의 메트로폴리스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경인선 나아가 철도의 등장이 갖는 문화적 의미와 상기 작품들이 갖는 문학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본론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철도는 근대인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 혹은 감각을 변화시켰다. 이전까지 자연적 흐름과 조건에 결박되어 있었던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각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인식체계와 감각을 창출해낸 것이다. 예컨대 철도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평생 자기가 살던 지역(공간)을 떠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며칠씩 걸리던 천리 여행길을 하루나 반나절이면 끝나버리는 여행으로 변화시키는 등 동시대인들을 공간적(자연적) 제약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빠르고 자유로운 공간의 이동을 가능하게 했다. 덧붙여 표준적이고 규칙적인 열차운행시간과 열차운행시간표 또한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균질화하고 통일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둘째, 자연적 풍경의 소멸과 풍경의 산업화 혹은 상업화이다. 열차 운행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동반된 대규모 토목건설―교량 건설·터널 굴착·평탄 작업을 비롯해서 산허리를 절개하는 것 등―이 새로운 산업적 풍경을 만들어냈으며, 심지어 「경인철도회사광고문」, 『조선철도여행안내』, 「인천원족기」등에서 그 일단이 잘 드러나고 있듯이 특정한 풍광을 구경거리 관광 상품으로 개발·상품화하기도 했다.
셋째, 묵독(黙讀)과 같은 새로운 독서 형식의 출현과 문학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주지하듯 기차의 속도가 갈수록 향상되자 여행자들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던 자연적인 풍경들이 순식간에 휘발되어 버리고 승객들은 낯선 사람들과 한 공간에 뒤섞여 장시간 동안 서로 마주 본 상태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답답하고 지루한 여행을 감내해야만 했다. 서양의 경우 이 같은 사정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출판사들이 앞을 다투어 추리소설이나 연애소설 등과 같이 여행자들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가벼운 문학 작품들과 각양각색의 문고본들을 개발·판매하기 시작했다.
또한 철도는 문학 작품의 내용과 분량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독서 양태마저 바꾸어 놓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도가 일상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기 이전까지 독서는 운율에 맞춰 소리 내서 글을 읽는 이른바 낭독(朗讀)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열차 안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무례한 일이었기 때문에 기차가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정착된 이후에는 책을 조용히 눈으로 읽는 개인주의적 독서, 이른바 묵독의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철도의 등장은 사람들의 인식·생활습관·문학·일상·독서 등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한편 경인선을 기점으로 한 철도의 등장은 이를 철도를 소재로 한 각종의 창가들―「경부철도가」·「경인철도가」·「경의철도가」등―을 비롯해서 김기수의 「일동장유가」(1873),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 김윤경의 「인천원족기」(1917), 최병호의 「인천 원족기」(1918) 등의 기행문, 이해조의 『고목화』(1907)와 『쌍옥적』(1908), 최찬식의 『추월색』(1912), 이광수의 『무정』(1917), 염상섭의 『만세전』(1922), 현진건의 『조선의 얼굴』(1926), 김기림의 시 「심장없는 기차」(1933)와「길에서―제물포 풍경」(1936), 이태준의 「농군」(1939), 이기영의 『두만강』(1954) 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작품 생산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고유섭의 「경인팔경」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듯이 경인선(철도)은 일종의 이동도서실이자 토론의 마당으로서 통학생들 간에 서로 만나고 토론하는 광장이었으며, 지역 문예운동과 민족운동의 한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넷째, 대부분의 경우 철도를 축으로 한 교통수단의 발달은 근대적 자본주의 체제의 완성과 국민국가와 민족의 형성에 기여했다. 요컨대 “철도는 일정한 지역(공간)을 단일한 경제권과 의사소통 공간으로 창조함으로써 고립되어 존재하던 사람들에게 국민적 공동체의식을 심어주었다. 국경으로 구획된 일정한 지리적 공간 안에서 동일한 언어와 경제, 의식을 공유하는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철도는 축복과 동시에 재앙인 양날의 칼로 작용하였다. 전통과 자연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문명의 축복인 동시에 가혹한 수탈을 위한 제국주의적 폭력의 도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인선의 등장이 갖는 문화사적인 의미와 그것이 남긴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경인선은 한국의 근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축도라는 점이다.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근대가 축복이자 저주였듯이 경인선 또한 문명적 축복이면서 제도적 폭력이기도 했던 것이다. 즉 “자연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세계를 막 내리고 인간이 자연 위에 등극하는 세계를 여는” 서막이었다는 점에서는 축복이었지만, 그보다는 일제의 착취와 수탈을 위한 식민지배의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최대의 비극이자 저주이며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경인선은 앞에서 지적한 철도의 역사적·문학적 의미들이 만들어지는 기원이었다는 점이다.
셋째, 비록 작품으로 입증하기에 다소 어려운 점이 있지만, ‘경인선 문학사’의 올바른 구명과 구성을 위해서‘경인기차통학생회 문예부 그룹’의 문인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실증적인 검토와 보완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넷째, 이 글에서는 ‘경인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모든 텍스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경인선을 배경으로 또는 경인선이 계기가 되어 발생하는 유의미한 문화적 사건과 현상들만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다루지 못한 작품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중심과 주변의 문제들 그리고 경인선에 실려 있는 다양한 삶의 모습과 애환들을 형상화하고 있는 현대적인 작품들―즉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인천역이 등장),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 그리고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등―을 다루지 못했고, 이는 차후의 과제로 미루어둘 수밖에 없다.
다섯째, 경인선은 근대 초기의 인천의 모습과 근대문학과의 연관성을 다른 차원에서 파악, 해명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수단이며 대상이라는, 이를테면 인천학의 지평과 외연을 확장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대상이라는 사실이다.
Ⅰ.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경인선 그리고 철도
Ⅱ. 경인선의 역사와 문화
Ⅲ. 경인선과 근대문학의 관련 양상
Ⅳ. 남는 문제들 - 철도의 문화적 의미와 과제 (철도와 문학/ 조성연)
“심장 없는 기차”
일본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조선땅은 점점 살기가 어려운 곳이 되어갔다. 땅뙈기 하나 없는 농민은 고율 소작료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얼마 되지도 않는 가재도구를 보따리에 싸서 이고 지고 야반도주 하듯 고향땅을 떠나 멀고먼 이국으로 떠나가야 했다. 그들 중에는 자기 농토를 철도에 빼앗긴 농민도 있었을 것이다. 김기림의 시 「심장 없는 기차」는 그렇게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을 싣고 아무런 감정도 없이 두만강 건너 거친 땅으로 떠나가는 기차의 모습을 슬프도록 처연하게 그리고 있다.
「심장 없는 기차」(1933)
여기는 삼월에도 하늘에서 비가 눈이 되어 내리는 북쪽국경 가까운 동리라오.
남포소리가 산을 울리던 이듬해부터 칠년을 기차는 들의 저편을 날마다 외투를 입은 구장 영감처럼 분주하게 달려댕기오.
가을마다 기차는 그 기다란 몸둥아리에 붙은 수십 개의 입을 벌려서 이 동리 사람들을 하나 둘 하나 둘 삼켜가더니 지금은 마을의 절반이나 텅 비었오.
우리들은 지난밤도 마을에서 십 리나 되는 정거장에서 떠나가는 이, 남아 있는 이, 슬픈 ‘잘 가오’와 ‘잘 있오’를 몇 번이나 불렀오.
기차가 어둠을 뚫고 북으로 뛰어간 뒤에는 검은 철길이 우루루 울었오. 남폿불이 조으는, 시골 정거장에서 우리들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오.
편지는 없으나 바람과 같이 떠도는 말을 들으면 기차는 그들을 두만강 밖에 배앝아 버렸다는데 나오는 기차는 말이 없이 슬그머니 지나만 가버리오. [중략]
기차가 떠난 뒤꼬리면 언덕에 걸터앉아 시들어지는 나의 마음이 땅위에 남고 보-얀 연기기둥이 푸른 하늘에 남소.
잊어버리운 연기는 사냥개처럼 궤도 위를 냄새를 맡으며 돌아댕기오. 나의 마음은 송화강가로 돌아댕기오.
기차여 너의 기관차 화통에서 벌겋게 타는 것은 너의 심장인 줄만 알았더니 그것은 시커먼 석탄이었고나.
김기림은 시 <심장 없는 기차>(1933)에서 "우리들은 지난 밤도 마을에서 십리나 되는 정거장에서 떠나가는 이, 남아 있는 이, 슬픈 "잘 가오"와 "잘 있고"를 몇 번이고 불렀다오. 기차가 어둠을 뚫고 북으로 뛰어간 뒤에는 검은 철길이 우루루 울었오"라고 국경을 넘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렸다. “조선철도는 문명의 이기가 아니었다. 침략과 지배, 수탈과 분열, 탄압과 차별이라는 식민지의 모순을 실어 나르는 슬픈 기관이었다.” 다른 방향에서 보면, 철도는 봉건시대의 굴레를 벗겨내는 촉매가 됐고 전국을 단일한 경제권과 의사소통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신문은 조선반도 전역에서 정보를 수집해 활자화하고 그것을 다시 전국의 독자들에게 배달한다. 신문의 유통 시스템을 담당한 것이 바로 철도와 우편이었다.” “철도를 통해 부산의 풍물과 소문이 멀리 북방의 신의주와 회령까지 빠르게 전파됨으로써 사람들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유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다시 말해 지역적 폐쇄성이 점차 허물어지고 사람들은 공통의 생활감각을 획득하게 된다. 더 나아가 철도는 중세적인 농촌 공동체의 질서를 넘어서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게 했다.”
철도는 봉건적 전통사상을 흔들어 놓았다. 최남선의 <경부철도가>에서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우리 내외 외국인 같이 탔으나/내외 친소 다 같이 익혀 지내니/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라는 일본식 창가처럼 엄격했던 신분의 장벽과 남녀가 유별하던 전통사회의 내외법을 흔들었다. 그 대신 새로운 불평등을 등장시켰다. 그것은 조선 민족에 대한 차별과 자본주의적 계급에 따른 객차의 구분이었다. “기차는 남녀가 유별하던 전통사회의 ‘내외법’을 흔들었다. 기차에는 남자칸, 여자칸이 따로 없었다. 외간 남자와 여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야 했다. 항간에서는 ‘기차놈, 빠르기는 하다마는 내외법을 모르는 상놈이구나!’하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사회적 지위와 재산에 따라 객차는 1등칸, 2등칸, 3등칸으로 나뉜다. 부자와 빈자들은 다른 칸에 올라탐으로써 서로 부딪칠 일이 별로 없었다. 요금에 따라 칸과 이용시설이 뚜렷이 구분되었다. 신분 대신 경제력이라는 새로운 차별이 생겨난 것이다.” 박천홍의 이 책은 근대의 여명기에서 타자에 의해 이루어진 근대화가 얼마나 혹독하고 고통스러웠는지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박천홍>
고작 시속 20~30㎞의 이 열차에 대해 <독립신문>의 기자는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바라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달리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며 충격을 감추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철도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철도는 식민지 백성의 삶을 덮친 양날의 칼이었다. 식민지 철도의 레일 위에는 선연한 핏자국이 서려 있었다. 일본 통치자들은 철도가 조선 식민지 경영, 대륙침략의 핵심임을 일찌감치 알아챘다. 그들은 1885년 무렵부터 밀정을 파견해 서울과 부산 사이를 측량했으며 그것을 기초로 부설한 경부・경인 철도는 일본의 군대와 상품, 일본으로 가져갈 식량과 천연자원을 부지런히 실어날랐다. 당시 아이들은 “양귀는 화륜선을 타고 오고 왜귀는 철차타고 몰려든다”는 동요를 불렀다. 일본은 대륙침략의 병참로를 만들기 위해 경부선과 경의선을 무리하게 서둘러 건설하면서 부근 농민들과 부녀자들, 어린아이들까지 강제동원했다. 이들은 아무 보수도 받지 못했으며 채찍을 맞으며 선로를 놓았다. 토지를 철길에 빼앗긴 농민들은 빈농이 돼 떠돌거나 간도로 떠났다.
김기림은 시 <심장 없는 기차>(1933)에서 “우리들은 지난 밤도 마을에서 십리나 되는 정거장에서 떠나가는 이, 남아 있는 이, 슬픈 ‘잘 가오’와 ‘잘 있고’를 몇 번이고 불렀다오. 기차가 어둠을 뚫고 북으로 뛰어간 뒤에는 검은 철길이 우루루 울었오”라고 국경을 넘는 간도 이민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부패했던 왕조시대를 벗어나는 촉매가 됐고 산업 발전의 수단이었으며, 전국을 단일한 경제권과 의사소통 공간으로 바꿔놓아 상상의 국민 공동체 의식을 심어줬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적 민족주의도 철도를 통해 오갔다. 또 일상의 곳곳을 파고들어 바꿨다. 해와 달의 운행에 맞춰 살았던 사람들은 기차시간표와 역앞 시계탑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시간, 한치의 낭비도 허용되지 않는 문명과 속도의 강박증에 훈육됐다. 최남선이 일본 창가형식의 <경부철도가>에서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우리 내외 외국인 같이 탔으나/내외 친소 다 같이 익혀 지내니/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라고 쓴 것처럼 기차 안에 남녀노소 내외국인이 섞여앉게 되면서 엄격했던 신분의 장벽과 남녀가 유별하던 전통사회의 내외법을 흔들었다. 승차권만 있으면 신분이나 남녀와 관계없이 누구나 탈 수 있지만, 대신 1등칸, 2등칸, 3등칸으로 나뉘는 계급질서가 도착한 것이다.
1935년 이상은 수필 <첫 번째 방랑자>에서 “경성 신의주 6시간 하고도 이십분, 스피이드업한 국제열차”라고 쓰고 있다. 이태준도 산문 <만주기행>에서 “그때(조선시대)는 고작 말을 탔을 것이다. 일행 불과 60, 70리였을 것이다. 이제 누워 야행천리를 하면서 생각하기에는 아득한 전설이 아닌가!”라고 감탄을 토해냈다. 봉건질서 흔들리고 계급질서 자리잡아 기차 안에서 봉건질서도 흔들렸다.
경인선: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에 개통
레일 위로 펼쳐지는 근대의 풍경
오마이뉴스|입력 2003.09.19 12:08|수정 2003.09.19 12:08
"철도는 자연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세계를 막 내리고 인간이 자연 위에 등극하는 세계를 열었다. 인간은 증기기관차와 함께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세계와 결별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를 향해 질주했다. 마르크스가 간파했듯 철도는 가장 미개한 민족까지도 문명 속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식민지 철도의 레일 위에는 선연한 핏자국이 서려 있었다. 우리에게 철도는 근대의 축복이 아니라 제도적 폭력의 서막이었다.”(책을 시작하며)
▲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박천홍>
ⓒ2003 yes24
서평전문지 <출판저널> 편집장이었던 박천홍이 내놓은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은 복기(復碁)하듯이 레일 위를 따라 역사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 책은 철도가 그려놓은 오욕과 수치의 한국 근대사의 풍경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귀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오가는 기차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유년의 기억처럼 박천홍은 오래된 사진 속 풍경을 하나씩 조심스레 호명한다. “1899년(광무3) 9월 18일 오전 9시. ‘고요한 아침의 나라’조선에 철마(鐵馬)가 길고 날카로운 일성을 토해냈다.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인철도의 첫 기적소리였다. 이 낯선 문명의 소리는 이 땅에 근대의 새벽을 알리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식민지의 어둠을 예고하는 불길한 소리이기도 했다.” 근대 문명을 알리는 기적 소리는 일제의 가혹한 폭력적 수탈이 시작됨을 알리는 핏빛 내일의 서막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대륙침략의 병참로를 건설하기 위해 한반도의 등뼈에 강철레일을 심었다. 레일이 깔리는 곳마다 조선 민중은 피폐하고 유리걸식 해야하는 삶으로 내몰렸다. 농민들과 부녀자들, 어린아이들까지 강제 동원되어 채찍으로 혹사당했다. 소년이 철도 위에서 놀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살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는 “양귀(佯鬼)는 화륜선을 타고 오고 왜귀(倭鬼)는 철차를 타고 몰려든다”는 동요가 나돌았을 정도다.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를 보면, “온전한 땅이 없고, 기력이 남아 있는 사람이 없으며, 열 집에 아홉 집은 텅 비었고, 천릿길에 닭과 돼지가 멸종했다"는 참혹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일제의 수탈을 피해 조국을 등지고 간도로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김기림은 시 <심장 없는 기차>(1933)에서 "우리들은 지난 밤도 마을에서 십리나 되는 정거장에서 떠나가는 이, 남아 있는 이, 슬픈 "잘 가오"와 "잘 있고"를 몇 번이고 불렀다오. 기차가 어둠을 뚫고 북으로 뛰어간 뒤에는 검은 철길이 우루루 울었오"라고 국경을 넘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렸다. “조선철도는 문명의 이기가 아니었다. 침략과 지배, 수탈과 분열, 탄압과 차별이라는 식민지의 모순을 실어 나르는 슬픈 기관이었다.” 다른 방향에서 보면, 철도는 봉건시대의 굴레를 벗겨내는 촉매가 됐고 전국을 단일한 경제권과 의사소통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신문은 조선반도 전역에서 정보를 수집해 활자화하고 그것을 다시 전국의 독자들에게 배달한다. 신문의 유통 시스템을 담당한 것이 바로 철도와 우편이었다.” “철도를 통해 부산의 풍물과 소문이 멀리 북방의 신의주와 회령까지 빠르게 전파됨으로써 사람들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유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다시 말해 지역적 폐쇄성이 점차 허물어지고 사람들은 공통의 생활감각을 획득하게 된다. 더 나아가 철도는 중세적인 농촌 공동체의 질서를 넘어서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게 했다.” 철도는 봉건적 전통사상을 흔들어 놓았다. 최남선의 <경부철도가>에서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우리 내외 외국인 같이 탔으나/내외 친소 다 같이 익혀 지내니/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라는 일본식 창가처럼 엄격했던 신분의 장벽과 남녀가 유별하던 전통사회의 내외법을 흔들었다. 그 대신 새로운 불평등을 등장시켰다. 그것은 조선 민족에 대한 차별과 자본주의적 계급에 따른 객차의 구분이었다. “기차는 남녀가 유별하던 전통사회의 ‘내외법’을 흔들었다. 기차에는 남자칸, 여자칸이 따로 없었다. 외간 남자와 여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야 했다. 항간에서는 ‘기차놈, 빠르기는 하다마는 내외법을 모르는 상놈이구나!’하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사회적 지위와 재산에 따라 객차는 1등칸, 2등칸, 3등칸으로 나뉜다. 부자와 빈자들은 다른 칸에 올라탐으로써 서로 부딪칠 일이 별로 없었다. 요금에 따라 칸과 이용시설이 뚜렷이 구분되었다. 신분 대신 경제력이라는 새로운 차별이 생겨난 것이다.” 박천홍의 이 책은 근대의 여명기에서 타자에 의해 이루어진 근대화가 얼마나 혹독하고 고통스러웠는지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조선 민중의 삶을 깔아뭉개며 심어진 저 레일 위에 서린 참혹한 역사의 그늘을 독자들은 만날 수 있다. 기차의 역사책이자 잔인한 근대의 풍경은 저자의 말처럼, “오욕과 수치의 연대기”리는 사실을 되짚으며 읽어나가야 한다. 이 책 속에 들어있는 당대의 시, 소설, 신문기사, 역사적 사료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근대의 풍경을 상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철도에 대한 기록을 처음으로 남긴 김기수의 <일동기유>를 비롯해서 손정목의 <일제 강점기 도시사회상 연구>, 이상의 장편소설 <12월 12일>, 염상섭의 <만세전>, 이기영의 <두만강>,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울리히 백의 <위험사회> 등과 주인공의 철도 자살이 인상적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에 이르기까지 실증적인 사료와 철학, 사회학 분야의 서적과 문학작품을 망라하여 철도로 인해 근대적 시간으로 편입된 모습들을 살펴보고 있다.”(출판사 리뷰)
철도에서 비롯된 근대의 풍경 속으로 진입… 기적소리는 한반도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철도의 등장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도 근대도 없었을 것이다. 철도는 인터넷도 넘볼 수 없는 거대한 기술 혁명이었다. 철도를 따라 한곳에 매여 있던 인간은 공간의 장벽을 넘었고, 자본주의가 생산한 상품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 이동했으며, 서구는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다. 그리고 서구를 표절한 일본은 조선을 식민화했다. 박천홍 <출판저널> 전 편집장이 내놓은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산처럼 펴냄)은 철도라는 근대의 상징을 통해 한반도가 강제로 떠안은 근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해석한다. 철도공무원의 아들로 어린 시절 전라남도 순천 기찻길 근처에 살면서 오가는 기차를 바라보곤 했다는 지은이가 철도를 소재로 사료와 소설, 수필, 회고록, 역사서, 당시의 사진들을 솜씨 좋게 엮어낸 이 개성 있는 근대사는 풍성하고 매혹적이다. 근대 문명의 축복에 핏자국 서려 “1899년 9월18일 오전 9시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철마가 길고 날카로운 일성을 토해냈다.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인철도의 첫 기적소리였다. 이 낯선 문명의 소리는 이 땅에 근대의 새벽을 알리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식민지의 어둠을 예고하는 불길한 소리이기도 했다.” 고작 시속 20~30㎞의 이 열차에 대해 <독립신문>의 기자는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바라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달리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며 충격을 감추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철도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철도는 식민지 백성의 삶을 덮친 양날의 칼이었다. 식민지 철도의 레일 위에는 선연한 핏자국이 서려 있었다. 일본 통치자들은 철도가 조선 식민지 경영, 대륙침략의 핵심임을 일찌감치 알아챘다. 그들은 1885년 무렵부터 밀정을 파견해 서울과 부산 사이를 측량했으며 그것을 기초로 부설한 경부・경인 철도는 일본의 군대와 상품, 일본으로 가져갈 식량과 천연자원을 부지런히 실어날랐다. 당시 아이들은 “양귀는 화륜선을 타고 오고 왜귀는 철차타고 몰려든다”는 동요를 불렀다. 일본은 대륙침략의 병참로를 만들기 위해 경부선과 경의선을 무리하게 서둘러 건설하면서 부근 농민들과 부녀자들, 어린아이들까지 강제동원했다. 이들은 아무 보수도 받지 못했으며 채찍을 맞으며 선로를 놓았다. 토지를 철길에 빼앗긴 농민들은 빈농이 돼 떠돌거나 간도로 떠났다. 김기림은 시 <심장 없는 기차>(1933)에서 “우리들은 지난 밤도 마을에서 십리나 되는 정거장에서 떠나가는 이, 남아 있는 이, 슬픈 ‘잘 가오’와 ‘잘 있고’를 몇번이고 불렀다오. 기차가 어둠을 뚫고 북으로 뛰어간 뒤에는 검은 철길이 우루루 울었오”라고 국경을 넘는 간도 이민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부패했던 왕조시대를 벗어나는 촉매가 됐고 산업 발전의 수단이었으며, 전국을 단일한 경제권과 의사소통 공간으로 바꿔놓아 상상의 국민 공동체 의식을 심어줬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적 민족주의도 철도를 통해 오갔다. 또 일상의 곳곳을 파고들어 바꿨다. 해와 달의 운행에 맞춰 살았던 사람들은 기차시간표와 역앞 시계탑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시간, 한치의 낭비도 허용되지 않는 문명과 속도의 강박증에 훈육됐다. 1935년 이상은 수필 <첫 번째 방랑자>에서 “경성 신의주 6시간 하고도 이십분, 스피이드업한 국제열차”라고 쓰고 있다. 이태준도 산문 <만주기행>에서 “그때(조선시대)는 고작 말을 탔을 것이다. 일행 불과 60, 70리였을 것이다. 이제 누워 야행천리를 하면서 생각하기에는 아득한 전설이 아닌가!”라고 감탄을 토해냈다. 봉건질서 흔들리고 계급질서 자리잡아 기차 안에서 봉건질서도 흔들렸다. 최남선이 일본 창가형식의 <경부철도가>에서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우리 내외 외국인 같이 탔으나/내외 친소 다 같이 익혀 지내니/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라고 쓴 것처럼 기차 안에 남녀노소 내외국인이 섞여앉게 되면서 엄격했던 신분의 장벽과 남녀가 유별하던 전통사회의 내외법을 흔들었다. 승차권만 있으면 신분이나 남녀와 관계없이 누구나 탈 수 있지만, 대신 1등칸, 2등칸, 3등칸으로 나뉘는 계급질서가 도착한 것이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길에서 - 제물포 풍경
김기림
기차
모닥불 붉음을
죽음보다도 더 사랑하는 금벌레처럼
기차는
노을이 타는 서쪽 하늘 밑으로 빨려갑니다
인천역
'메이드 인 아메리카' 의
성냥개비나
사공의 '포케트' 에 있는 까닭에
바다의 비린내를 다물었습니다.
조수
오후 두 시......
머언 바다의 잔디밭에서
바람은 갑자기 잠을 깨어서는
휘파람을 불며
검은 조수 떼를 모아가지고
항구로 돌아옵니다.
밤 항구
부끄럼 많은 보석장사 아가씨
어둠속에 숨어서야
루비 사파이어 에머랄드
그의 보석 바구니를 살그머니 뒤집는다.
(1936년-조광)
1965년 9월 18일 경인선이 단선 시대를 마감하고 주안역과 영등포역 간 복선으로 태어났다. 철도청에서 발행하는 잡지 '철도'의 1965년 9월호에 보면 경인선 복선 개통을 축하하는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축시 '경인선 복선 개통의 날에'가 실려 있다. 축시라는 한계로 인해 작품의 완성도나 미당의 작품 연구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평범한 작품이지만, 철도사와 관련하여 잠깐 기억할 필요가 있겠고 당시에는 일급시인을 동원하여 경인선 복선 개통을 축하할 만큼 그것은 큰 국가적 역사(役事)였다.
예나 지금이나 철도부설은 생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큰일이었으며, 생각지도 못한 자잘한 문화적 이벤트들을 만들어내는 문화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걸음이 문제를 해결한다."
철도 시발지에서 대륙철도의 완성을 꿈꾸며......
단절에서 소통으로, 패쇄에서 개방으로, 분단에서 통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힘을 가진 철도를 통해서 이 땅의 미래를 꿈꿔 본다. 잠시 이어졌다 다시 끊어진 남북철도! 이 땅에 철도가 처음에 노량에서 출발하였다면 이제는 이 곳 노량에서 회령(함경북도)으로, 또 다시 동토의 땅 시베리아를 거쳐 유라시아 대륙으로 끝없이 달리는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근대사의 첫 장은 철도에서 열리고
숨쉬는 우리들의 동맥위에 빛남을
그러나 아!
이 기점에서 나는 달리고 싶노니
신의주로, 원산으로 휴전선 넘어
녹이 쓴 철도위로 달려가고 싶노니
그리하여 우리들의 역사 위에
새 신랑처럼 몸단장 곱게 하고
잠자리떼의 경쾌한 리듬으로 달려가고 싶노니......
노량진역
조선조 당시 노들나루라 불린 노량진에 1899년 최초로 철도가 놓이면서 역이 세워지고,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경인선 철도가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노량진 ~ 제물포간 33.2km 에 달하는 경인선에 마침내 이 땅의 개화의 상징인 철마가 뽀얀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경인선 개통은 우리 교통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아울러 이 곳 노량진은 한국 철도사의 첫 장을 기록하는 철도기점으로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역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전 9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뢰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연기는 반공에 솟아 올라......”
지금도 노량진역 사육신공원 주변에는 그 날의 감회를 기리기 위해 1975년 9월 18일 “철도시발지”라는 기념비를 세우고 서정주 시인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한강철교
1965년 9월 18일 복선으로 개통
세계를 향해 날개짓을 하고 있다. 감동에서 행복으로 이어주는 국민철도
로 말미암아 한반도 철도의 상징이요, 모태가 되는 그 출발 선상에서 시
국민의 생활수준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해 줄 것이며, 수도권의 교통문화를 바꾸겠다는 새로운 각오와 야심으로 비상할 준비를 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 한반도를 연결하는 대륙철도의 완성을 꿈꾸며, 레일을 따라 통일된 한반도를 시작으로 광활한 만주와 시베리아 벌판을 넘고, 바이칼호와 고비사막, 그리고 우랄산맥을 넘어 유럽으로 가는 그 날까지 기적소리 울리며 달리고 또 달릴 것이다.
1899년 9월 18일 철도 역사의 장이 열리고
경인간 33.2km의 철로가 뚫린 그 날로부터
76주년 철마라 불리우던 증기시대를 거쳐
디젤기관이 철길을 누비더니 이어 전철의
막이 휘날리며 철도가 반석위에 오른 오늘을
못내 그날의 감격을 함께 되새기며
유서 깊은 철도 효시의 요람지
여기 한강 마루에 이 기념비를 세워 기려
새 모습의 철도를 기리리라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의 휘호와 서정주 시인이 쓴 비문
鐵道始發地
1899년 9월 18일 鐵道 歷史의 章이 열리고 京仁 33.2km의 鐵道가 뚫린 그 날로부터 76週年 鐵馬라 불리우던 蒸氣時代를 거쳐 디젤 機關이 鐵길을 누비더니 이어 電鐵의 幕이 휘날리며 鐵道가 盤石위에 오른 오늘은 못내 그 날의 感激을 함께 되새기며 由緖깊은 鐵道 嚆矢의 搖籃地 여기 漢江 마루에 이 記念碑를 세워 기리 새 모습의 鐵道를 기리리라.
(후면)
揮毫 : 國務總理 金鍾必
글 : 詩人 徐廷杜
建立 : 鐵道廳長 李東和
1975.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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