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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논문.평설

역동 우탁시조의 재조명

by 시조시인 김민정 2019. 11. 8.

역동 우탁 시조의 재조명

 

김민정(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

 

우탁(禹倬, 1263~1342)1263(원종 4)년 단산현(丹山縣) 금수산 칠성봉 아래(지금의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 우천규(禹天珪)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단양,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 호는 역동(易東)이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역학(易學) 복서(卜筮)에 통달하였으며 처음으로 정주학(程朱學)을 연구, 전수하였다고 한다.

우탁이 남긴 글은 시 3, 시조 2, 서간문 1, 기타 한두 가지의 금석문 등이다. 3편은 5언 율시의 잔월殘月, 7언 율시의 제영호루題瑛湖樓, 수미양구首尾兩句가 빠진 7언 율시의 강행江行이 있고, 시조 2수는 탄로가歎老歌」 「춘산春山등 작자가 분명한 것으로서 국문학사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탁의 시조로 한 수 더 있다고도 하는데 종장이 우탁의 성정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라 여겨져 의문의 소지가 있어 본문에서는 두 수만 다루기로 한다. 서간문인 여혹인서與或人書61자로 된 짧은 글이며, 금석문으로서는 단양丹陽 사인암벽舍人岩壁에 우탁의 글이 새겨져 있다.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고려사등의 사서에 남아 있고, 그 외 비관사稗官史,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유사東國遺事, 동사열전려東史列傳麗,史彙纂등에 부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해사전華海師全 등의 개인문집들인데 그 개인문집으로서는 稼亭文集(이곡李穀),牧隱文集(이색李穡), 耘谷拾遺(원천석元天錫), 陽村集(권근權近), 退溪全書(이황李滉) 등과 그외 東國名賢錄, 東國文獻錄, 東賢師友錄등에 실려 있다.

 

우탁의 강직한 성품에 대해서는 일화가 있다. 1308(충선왕 1)에 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가깝게 지내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우탁이 백의 차림으로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지고 결연히 대궐로 들어가 극력으로 간하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올리는 이러한 상소를 지부상소持斧上疏라고 한다. 이 자리에서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며 상소를 읽어 올리는 신하가 상소를 펴 들고는 감히 읽지를 못하자, 우탁이 낯빛을 엄히 보이며,

"경이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로서 왕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여 이에 이르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 하고 소리를 질러 꾸짖으니 좌우에 있던 대신들이 크게 놀라고 왕도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였다 한다. 이후 예안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이 여러 차례 부르자 성균좨주(成均祭酒)을 역임 후,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동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다가 1343(충혜왕 복위 3)에 예안에서 81세에 사망하여 그의 묘소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지삼리에 있다. 문예에도 조예가 깊어 늙어감을 한탄하며 지은 탄로가(歎老歌)는 시조 문학의 효시이면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시대의 향가 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존 향가 25 수 중 균여전에 전하는 11수가 고려시대 것이다. 그러나 중기로 접어들면서 향가는 차츰 장가(長歌)의 형식으로 발전하여 지식계급에서는 향가에서 변모한 경기체가(景幾體歌), 일반 민중 사이에서는 민요가 유행하여 고려가요를 형성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으로는 동동動動」 「서경별곡西京別曲」 「쌍화점雙花店」 「청산별곡靑山別曲」 「처용가處容歌」 「만전춘滿殿春」 「이상곡履霜曲」 「정석가鄭石歌」 「사모곡思母曲」 「정읍사井邑詞」 「가시리」 「정과정곡鄭瓜亭曲」 「한림별곡翰林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등이 있다.

짧은 형식을 지닌 시조는 신라의 향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향가가 4구체, 8구체, 10구체의 짧은 정형시 형태였기 때문이며 고려 초기에도 향가가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변형을 하면서 중기에 시조의 형태로 나타나다가 고려말에 현대와 같은 형식으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한글이 없던 시대에 창작되어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던 작품들이 수백 년이 지난 후에 가집에 수록될 때는 변형도 많이 있을 수 있고, 소실된 작품도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조의 율격이 완성된 현대시조와 같은 형태의 시조에 대해서는 시조의 발생과 형성에 관한 두 가지 큰 이설이 있다고 보고 고려 말기설16세기 전후설이 있다고 보고 있다. ‘고려말엽설이 전래되어 오는 가집(歌集)들을 일단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실려진 작품과 기록을 연구, 검토하여 얻은 결론이라면, 16세기설의 경우는 가집의 사실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한글창제 이전의 작품들로부터 상당한 시기까지의 작품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제로 하여 도출된 결론이다. 따라서, 16세기설의 논지는,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는 작품이나 기록을 표적으로 시조의 형성시기를 가늠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또한 무리가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한글창제 전의 구비문학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에 앞 논문의 주장처럼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한글 창제가 1443년에 있었고, 반포가 1446년에 있었기에 그 이후에 기록된 작품으로 시조의 발생연대를 따진다면 그 전에 있었던 작품들은 시조로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오늘날 남아 전하는 고려말의 시조시인은 우탁(禹倬이조년(李兆年이존오(李存吾최영(崔瑩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방원(李芳遠) 등이 있다. 또 그 형식이 완성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조로 우탁의 탄로가 2수를 들고 있다. 우탁의 시조는 김천택이 만든 청구영언에 들어 있으며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시조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시조문학의 백미로 꼽히고 있는데 이것을 부정하는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글자가 없던 시대에 우리말로 시를 지었어도 그것은 한문으로 옮겨졌거나 아니면 구전으로 전해왔다. 고려속요나 민요가 전해왔듯이 말이다. 따라서 당시의 시조 작품은 오늘날의 유행가처럼 주변 사람들부터 공유되어 전해졌을 것이다. 특히 우탁은 많은 제자들로부터 존숭 받는 인물이었고 그가 즐겨 읊었던 시가라면 당연히 가문이나 한 고을의 유풍으로써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한문을 숭상하고 전용하던 시대에서 우탁 같은 유학자가 우리말로 시가를 지었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자존심과 자주정신이 강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말의 순수한 미적 표현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작동기였던 우리말의 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아 만든다는 자주정신,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을 가엾게 생각한 애민정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하고자 한 실용정신과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1342년에 돌아가신 우탁선생님은 100년쯤 후에 한글이 창제(1443)되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문자와 말이 달라 불편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가엾게 생각하고 그들과 공감하는 시를 읊조리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한 생각을 그도 하고 있어 아니면 정도전과의 정적관계에 있었음으로 영달한 자손들이 줄줄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가문의 유풍에 관한 자료들뿐만 아니라 일반 문적들도 깡그리 소실되고 말았던 당시의 상황에서 구전으로 남겨야 오래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내다본 선견지명이 있어서였을까? 순수한 우리말로 지었던 우탁의 작품들이 구전으로 전승되어 수백 년이 지난 후 시가집에 등재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그의 탁월한 식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탁의 영향으로 영남지방의 사대부 시조문학이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말에는 원의 풍속이 스며들어 종래의 미풍양속을 침범하여 인륜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사회질서와 규범이 혼미하였다. 불교의 병폐 또한 심하여 국교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우탁은 이러한 병폐를 개선하고자 여러 차례 상소를 시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우탁은 정도구현(正道具現)이 불가능 한 때임을 알고, 안동 예안(禮安)에 은거하여 가문(家門)을 열고 후학 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이러한 후학양성의 길은 곧 영남지방에서의 학문과 문학의 길을 트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이현보와 이황이 같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나왔으며, 이 둘은 시조문학사적으로 가장 이른 시기에 시조를 창작했던 시인들로 알려져 있다. 우탁이 최초로 시조를 짓고 그것이 영남시조문학의 출발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퇴계가 우탁을 존경했으며 그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시조문학 또한 기꺼이 수용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白髮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白髮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탄로가嘆老歌내용이다. 우탁선생이 말년에 늙음을 한탄하며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최장수는 시적 표현이 매우 참신하여 감각적이다. 세월(늙는 길)과 늙음(백발)을 구상화(具象化)한 공감각적(共感覺的) 이미지를 통해 늙음에의 안타까운 심정이 간결하고도 선명하게 표현되었다. 소박한 표현으로 어떻게 보면, 회화적(繪畵的)인 느낌까지 준다. 그러나 잘 음미해 보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늙음, 나아가 인생무상을 달관(達觀)한 경지를 엿보게 한다. <춘향전>에 나오는 백발가(白髮歌)오는 백발 막으려고 우수에 도끼 들고, 좌수에 가시 들고, 오는 백발 두드리며, 가는 홍안(紅顔) 절로 가고, 백발은 스스로 돌아와, 귀 밑에 살 잡히고 검은 머리 백발되니라는 구절은 이 시조가 널리 회자(膾炙)되어 전승되는 가운데 잡가화(雜歌化)한 것이 아닌가 한다.’ - 최장수 : <고전문학>(교학사.1988)고 설명하고 있다.

우탁은 당시 원나라를 통하여 정주학에 관한 서적이 들어 왔을 때 이를 해득할 사람이 없자, 한 달 동안 연구 끝에 해득하고 후진들을 가르쳤다 한다. 그래서 역동이란 호가 주어졌다. 이 시조는 만년에 예안현에 은거하여 후진들의 교육에 힘쓰는 한편, 새로 들어온 주자학의 연찬에 더욱 정진하려 하였으나 어느덧 백발이 되어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늙음을 안타까워해서 읊은 시조라고 한다.

가시와 막대를 들고 백발을 막으려 하는 것이 장난스러워 희화(戱畵)와 같은 느낌이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늙음이라는 천리(天理)를 달관한 경지임을 알 수 있다.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늙음이 오면 내려치려고 할 만큼 우탁이 어리석은 만용의 소유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온갖 방법도 소용없이 늙음은 자기가 막지 못한 허다한 지름길로 어느 새 들어와 있더라고. 늙음이라는 추상적인 인생길을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길로 전환시키고,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고, 인간이 세월을 거역하려는 것에 대한 익살스런 표현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한계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게 시간의 흐름은 안타까운 일이고, 또한 늙음은 늙는 것은 만인이 싫어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늙음을 가시로 막고, 백발을 막대로 막겠다는 발상의 재미있는 표현에 누구나 감탄하고 웃음을 자아낸다. 어느 장사도 가고 오는 세월을 막지 못하고 백발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늙고 무기력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진시황제도 늙지 않는 약,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그 많은 선남선녀를 동쪽으로 보냈을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시조화했다는 점에서 이 시조가 공감대를 형성하며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춘향전의 '오는 백발 막으려고 우수에 도끼 들고, 좌수에 가시 들고, 오는 백발 두드리며 가는 홍안(紅顔)……' 의 부분은 이미 이 시조가 널리 회자되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인용하고 변용하여 패러디한 작품을 쓰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래 작품도 맥락을 같이 한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 듯 불고 간데없다

적은 덧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리고져

 

귀 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가 하노라

 

화자는 봄산의 눈을 녹인 따뜻한 바람을 잠깐 동안 빌려다가 자신의 머리 위에 불게 하여 해묵은 서리를 녹이고 싶다고 한다. 자신의 흰 머리를 다시 검게 해서 젊음을 되찾고 싶은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춘산''해묵은 서리'를 각각 '젊음''백발'에 비유했다. '춘산'은 청춘, '해묵은 서리'는 화자의 백발을 의미한다. 얼마나 솔직하면서도 속되지 않은 기발한 표현인가. 여기에 이 시조의 맛과 멋이 있다. '봄산에 부는 봄바람(젊음-봄을 가져다 주는 바람)을 머리 위에 불게 하여, 그 바람이 산에 쌓인 눈(지난 세월)을 녹여 봄을 부르듯 자신의 젊음을 되찾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탄로가에 포함되지만 늙어감에 대해 체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긍정적이며, 젊고 늙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의지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인생에 대해 달관적인 경지와 여유까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래서 인생의 허무의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긍정적 자세가 엿보이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달관과 여유가 나타나는 시조는 인생의 경험이 많은 지긋한 나이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사인암에서 바둑판까지 만들어 바둑을 두면서 구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또한 바둑판의 규칙적인 판을 보면서 시조의 정형틀을 생각하여 향가와는 다른 형식의 최초의 완성된 형태의 시조를 창작한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우탁의 시조에 대해서는 그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시조라는 점에는 학계의 이의가 없는 듯하다. 고려가 망하기 50년 전에 타계한 그가 남긴 작품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시조의 발생을 고려말로 보고 있다. 지금과 음절의 형태가 거의 변함이 없어서 향가로부터 변형을 조금씩 거쳐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 보지만 지금으로선 그것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그의 작품이 구전되어 오다가 기록되어 지금까지 남았던 것은 그를 추앙하는 제자도 많고 존숭받던 유명한 학자였던 것과 또 하나는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구전으로 구전으로 전해져서 책에 수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탁의 시조가 현재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그의 시조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시조 창작의 방법애서도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와 소재를 찾아 시조를 쓰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시조를 쓴다면 시조는 더욱 발전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역동 우탁으로부터 시작한 시조가 지금 국내를 넘어 세계를 향해 가고 있어 감회가 새롭다. 지난 621일에는 조계사 불교문화예술공연장에서 시조의 세계화를 위한 초청 강연회를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에서 주관하여 시조의 세계화에 강연을 미국의 하버대 명예교수인 맥캔교수의 강연으로 들었으며 시조의 세계화를 위한 몇 가지 제언()한국시조인협회 이사장이며 경기대교수인 이지엽교수의 강연으로 들었다.

그리고 작고문인을 포함한 현대시조시인들의 작품 303편을 모아 한국현대시조전집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1015일 출간예정이다. 국제펜에 등재된 154개국와 세계 문학창의도시 28곳 중에서 선정하여 보내어 시조를 세계에 널리 홍보할 예정이다. 국가차원에서 해야 그 효력이 더욱 크리라 생각되므로 앞으로 정부와 지자체, 경제계, 교육계 등에서 우리의 전통문학인 시조에 관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하여 시조가 한국의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도 당당하게 등재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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