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민정 시조평

상실의 언어와 낭만의 변증법 - 권성훈(문학평론가, 경기대초빙교수)

by 시조시인 김민정 2015. 12. 13.

상실의 언어와 낭만의 변증법

 

 

권성훈(문학평론가, 경기대 초빙교수)

 

1.

 

간혹 ‘상실’이 ‘낭만’으로 출현하기도 한다. 상실은 있던 것이 소멸되어 가는 것이지만 낭만은 소멸된 것을 이상적 감정으로 불러온다. 여기에는 있었던 것의 공간성과 지나간 것의 시간성이 착종되어 있다. 무한성에 버려진 세계 내―유한성에 대한 존재의 소멸을 서정적으로 기억하려는 시도다. 소멸된 장소와 상실된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그 소멸의 바깥에는 ‘연소된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유한한 시간을 건너가며 조금씩 소멸되어 가는 존재 일뿐이다. 시인이 ‘소멸의 시간’ 속에서 건져 올리는 언어에서 존재를 구현하는 방식이 발견된다. 그러나 시인 마다 소멸에 대한 언어적 징후는 다르게 나타난다. 그것은 응시하는 대상에의 시선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통적으로 시적인 것에 가까워질수록 상상은 선명해지며, 언어는 모호해 진다. 그래서 시적인 것을 찾아가는 시인의 시간은 상상에서 발휘되며 언어로 노출된다. 시가 견고한 사유를 거느리고 있을수록 그 과정에서 사색은 길고, 언어는 짧아지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시는 시인이 가진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것을 동원해서 써야하며 그것에서 멀어지면 시인의 수명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

김수영은 “시는 머리로 쓰는 것도,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며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는 이른바 ‘온몸의 시학’을 개진하였다. 온몸의 시학은 ‘시인의 직관과 정서를 상징하는 가슴, 지성과 상상을 상징하는 머리, 이 상반되는 속성을 합쳐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슴과 머리는 인체의 일부로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며 각기 한 몸에 붙어 있지만 ‘정서’와 ‘이성’이라는 측면에서 상이하다. 그렇지만 정서와 이성은 심장과 머리를 이루는 부분이면서 인간 전체성을 일컫는다.

김민정 시는 이른바 온몸으로 소멸되어 가는 시간을 세계 내에서 포착하려고 한다. 그래서 김민정의 ‘가을’은 소멸되어 가는 존재의 또 다른 이름으로 발현된다. 현실에서 상실되어 가는 사물에 대한 유사성을 가진 존재를 통해 시인의 상상력의 통로로 진입하며 그 의미는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가와노 히로시는 “어떤 자극 A가 하나의 목적적 행동을 유발하고, 그 행동 유발 작용이 현실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자극 B가 실제로 그 목적적 행동을 유발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할 경우, A는 기호가 된다. 여기서 B라는 것은 무조건 자극이며, AB가 현존하지 않는 경우에 그것을 대리하는 자극이다.(가와노 히로시진중권 역, 2010, 예술 기호 정보, 중원문화, 34) 이러한 관점에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A라는 기호는 B라는 자극을 통해 실체화되는데, 시의 파생 역시도 B의 자극을 통해 A라는 시니피앙을 생성하게 된다.

 

 

 

2.

 

부드럽게 쏟아지는

청량한 햇살 아래

가을꽃처럼 소슬하게

그리움이 피어나면

, 맑은

 

그대 영혼 같은

가을편지 오실까

 

가을햇살 나뭇잎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산들한 가을바람

호젓하게 불어오면

, 문득

그리운 고향 같은

가을편지 오실까

 

물결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 들려오고

내 사유의 뜨락에도

하얀 달빛 밤새 내리는

, 푸른

종소리 같은

그대편지 오실까

 

「가을편지」전문

 

 

이 시는 ‘상실의 계절’을 표상하는, 가을을 낭만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시인의 낭만은 가을의 소멸을 절망이나 허무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희망이 거세되어 가는 가을의 중심에서 도피의 공간으로서 낭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이면의 세계에서 이상적인 것을 찾아 나선다. 요컨대 각 수마다 가을 이미지로 배치되어 있는 ‘청량한 햇살’ ‘가을꽃’ ‘가을편지’(1), ‘가을햇살’ ‘나뭇잎’ ‘가을바람’(2), ‘물결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3) 등은 가을이 거느리고 있는 시어로서 유미적 색채를 가진다. 또한 가을 이미지를 유발하는 자극제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기표다.

이 기표는 일반적으로 가을을 수식하는 풍경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바탕으로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1수의 경우 “가을꽃처럼 소슬하게/그리움이 피어나면”(중장)에서 “오, 맑은/그대 영혼 같은/가을편지 오실까”(종장) 그리움을 피어올린 것은 ‘가을꽃’이며, 이 가을꽃은 시인의 정서를 자극하여 다시 “가을편지”를 연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2수 중장의 “산들한 가을바람”은 종장의 “가을편지”로 나아가고, 3수 중장의 “내 사유의 뜨락에”는 종장의 “그대편지”로 종결된다. 특히 각 수 종장의 첫음보에 “오, 맑은” “오, 문득” “오, 푸른” 등의 강조를 통해 후반부 귀결되는 의미의 폭을 확장하고 있다. 이렇게 시인의「가을편지」는 가을을 자극하는 이미지 배치를 통해 “그대 영혼 같은” “그리운 고향 같은” “종소리 같은” 발화자의 상실된 그리움을 드러낸다.

 

 

 

파란 하늘

한 자락이

 

사르르 내려온다

 

단풍 물든

산 하나가

파르르 떨려온다

 

,

느린

깨달음 하나

동그랗게 앉는다

 

「가을 종소리」전문

 

 

앞에 시「가을편지」에서 보여주는 “오, 푸른/종소리 같은/그대편지”는 어떻게 오는가? 서신은 자신의 뜻을 ‘감정의 문양’에 새겨서 주고받는 것이지만 대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상이며 환상일 수밖에 없다. 시인은 존재하지 않는 비대상으로부터 오는 편지를 ‘종소리’로서 보여준다.

초장의 “파란 하늘/한 자락이/사르르 내려온다”라고 시작하는, 이 시의 ‘파란하늘’은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의 표피라고 할 수 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심화될수록 한사람을 향한 마음은 점점 커지고 높아진다. 언제나 한곳을 바라보며 흘러가는 구름같이 잠들지 못하고 여러 가지 표정을 지으며 하늘에 길을 낸다. 이처럼 초장에서는 ‘하늘’이라는 그리움이 확장된 은유로 나타나지만 중장에 와서는 그것이 “단풍 물든/산 하나가/파르르 떨려온다”라고 하늘에서 단풍 물든 산으로 전환되면서 구체화된다. 종장에서 화자의 그리움은 단풍 한 잎으로 축소된 은유로서 “참,/느린/깨달음 하나/동그랗게 앉는다” 그것은 오랜 사유 끝에 익어서 떨어지는 ‘깨달음 하나’이면서 가을이 화자에게 쓰는 ‘한 문장의 답신’인 줄 모른다.

 

 

 

바람도 만취인가

갈밭길이 술렁인다

 

높을 대로 높은 하늘

저도 잠시 취하는지

 

흰 구름 몇 송이 뜯어

제 멋대로 널어놨다

 

「가을 뎃생」전문

 

 

 

위「가을 종소리」와 같이 단수로 된 이 시는 가을을 ‘가을 하늘가’라는 하나의 프레임에 잡아두려고 한다. 이 프레임은 회화처럼 정지된 이미지들의 조합과 배치라는 구조 속에서 의미작용을 창출하고 있다. 하늘 밑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바람도 만취인가/갈밭길이 술렁인다” “높을 대로 높은 하늘” 위에는 “흰 구름 몇 송이 뜯어 제 멋대로 널어놨다”라는 하늘가의 정지된 형태를 그대로 ‘사진 한 컷’에 담 듯 ‘시조 한 수’로 옮겨 놓음으로써 시조의 회화적 기능을 되살리고 있다. 시인은 상실되어 가는 가을 한 복판에서 결핍의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깨달음의 소리, 풍경, 느낌 등을 체득하여 회화하면서 동시에 소멸이 낳고 있는 ‘미학적 비애’를 나타내고 있다

 

 

 

3.

 

 

기차역은 상행선과 하행선의 양 갈래 길 위에서 만남과 이별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그 길을 오가는 두 분류의 주체들은 기차역에 왔다가 사라진다. 이 곳은 잠시 머물러 있는 시공간이지만 출발지와 종착지 두 가지를 감각적으로 보게 한다. 우리는 ‘기차역의 침묵’을 통해 언어가 차단되어 있더라도 그 표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읽을 수 있다. 특히 많은 시인들에게 기차역은 그리움의 표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철로에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들어올 때 ‘닿음’은 ‘떠남’이 있어야 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은유는 만남과 이별의 연장선에 존재하는 주체들의 일상성을 구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김민정의 시의 기차역은 떠나가는 현재성보다는 떠나온 것들에 관한 기억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철도 앞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주체는 근원적으로 타자로부터, 사회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심지어는 자아로부터 떠나기를 소망하는 지쳐버린 일상 속 현대인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 무대는 삶의 연장선이기 보다는 타자와 세계로부터 억압을 풀고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인식이 강하다. 그렇지만 김민정의 시에서 드러나는 기차역은 현실의 억압을 탈각하고 자유를 드러내는 공간이 아니라 이러한 과거로부터 떠나온 ‘배후의 그리움’을 낭만적으로 추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람을 켜고 있는 색동의 바람개비

온 종일 일렬종대 누구를 맞고 있나

고향역 아리는 눈길 저 너머 언덕을 본다

 

산정보다 높게 앉은 잔설 위 햇살처럼

두고 떠난 옛길들이 얼굴 환히 돌아오고

윤이월 깨무는 속살, 봄의 촉이 트고 있다


「추전역에서」전문

 

 

 

 

이 시 첫수 초장에서 보여지 듯 ‘바람개비’는 살아있음을 ‘돌아감’으로 있게 한다. 바람개비는 바람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그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람개비에게 바람은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발상은 첫 수의 종장에서 ‘고향’에서 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람개비에게 바람은 살아있음의 환유이듯이 시인에게 고향 역시 살아있음의 수사로 파악된다. 따라서 바람개비는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은 고향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온 종일 일렬종대’로 가슴을 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고향을 떠올리면 “산정보다 높게 앉은 잔설 위 햇살처럼” 삶의 추운 겨울에 비취는 햇살이 되고, “두고 떠난 옛길들이 얼굴 환히 돌아”오는, 고향은 잊지 못하는 그리움의 공간으로서 “윤이월 깨무는 속살, 봄의 촉이 트고” 있는 등 살아감을 인식할 수 있는 ‘생명의 근원지’가 아닐 수 없다.

 

 

기찻길 아스라이
한 굽이씩 돌 때마다

 

아카시아 꽃내음이
그날처럼 향기롭다

 

아버지
뒷모습 같은
휘굽어진 고향 철길

 

돌이끼 곱게 갈아
손톱 끝에 물들이고

 

새로 깔린 자갈밭을
좋아라, 뛰어가면

 

지금도
내 이름 부르며
아버지가 서 계실까

 

「심포리 기찻길」전문

 

 

 

 

「추전역에서」에서는 화자를 바람개비에 비유하여 고향을 그리워하며 언제나 떠나온 방향으로 고향을 감각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고향은 체화되지 못한 마음의 고향이면서 관념적인 형태로서 시현하는 ‘발화지점’으로 해석되지만「심포리 기찻길」와서는 ‘발화의 근원적 자리’를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2수로 된 이 시의 초장 “기찻길 아스라이/한 굽이씩 돌 때마다”는 실재하는 기차의 동태일 수도 있고, 화자의 삶에 대한 동선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에게 삶은 지나보면 ‘아스라이’ 보일 수도 있지만 매 순간 ‘한 굽이씩’의 역경을 이기며 달려가고 있는 줄 모른다. 이러한 고단한 삶은 종장에서 “아버지/뒷모습 같은/휘굽어진 고향 철길”로 구체적으로 치환된다. 요컨대 화자에게 아버지는 그리움의 대상이면서 향수가 깃든 고향의 다른 말이다. 화자는 지금도 ‘그날의 아카시아 꽃내음’을 맡으며 “돌이끼 곱게 갈아/손톱끝에 물들이고” 기찻길에 “새로 깔린 자갈밭을/좋아라, 뛰어가”고 싶은 추억을 재현한다. 그것은 2수 종장에서 “지금도/내 이름 부르며/아버지가 서 계실까”라고 각인된 체험을 시적으로 등가시킨다.

 

 

 

무심히 피었다 지는

풀꽃보다 더 무심히

 

모두가 떠나 버린

영동선 철로변에

 

당신은

당신의 자리

홀로 지켜 왔습니다

 

살아서 못 떠나던

철로변의 인생이라

 

죽어서도 지키시는

당신의 자리인 걸

 

진달래

그걸 알아서

서럽도록 핀답니다

 

시대가 변하고

강산도 변했지요

 

그러나 여전히

당신의 무덤가엔

 

봄이면

제비꽃, 할미꽃이

활짝활짝 핍니다

 

세월이 좀더 가면

당신이 계신 자리

 

우리들의 자리도

그 자리가 아닐까요

 

 

열차가

사람만 바꿔 태워

같은 길을 달리듯이…

 

「영동선의 긴 봄날1―철로변 인생」전문

 

 

 

 

이 시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결핍의 표면’을 보여준다. 시인은 이 표면을 ‘서정의 문장’으로 닦아내면서 불완전한 주체의 정서를 회복하려고 한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상실을 경험한 주체는 “무심히 피었다 지는/풀꽃보다 더 무심히” 자신의 존재를 거시적인 입장에서 탐문한다. 여기서 “모두가 떠나 버린/영동선 철로변”은 보는 것이며, “살아서 못 떠나던/철로변의 인생”과 “죽어서도 지키시는/당신의 자리”는, 보이는 것이다. 보는 것은 ‘사실적인 것’이지만 보이는 것은 ‘상상적인 것’으로써 1차적인 체험이 언어의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성찰로서 생성된 것이다. 가속도가 붙은 시인의 상상력은 “진달래/그걸 알아서/서럽도록” 투사되면서 시대와 강산이 변해도 “봄이면/제비꽃, 할미꽃이/활짝활짝 핍니다”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에너제틱하게 바뀐다. 그리고 “세월이 좀더 가면/당신이 계신 자리” 즉 ‘당신의 무덤가’라는 선험적인 죽음의식으로 종착되며 “우리들의 자리도/그 자리가 아닐까요”라는 근원적인 물음은 이미 대답을 함의하고 있다.

 

 

4.

 

기다리던

꽃소식에

마음이 온통 달아

 

찻잔으로

가는 손길

그도 한참 뜨겁더니

 

비로소

꽃 한 송이가

내 안에서 벙근다

 

「기다리는 마음」

 

 

꽃은 ‘시간의 반복’과 ‘계절의 순환’ 속에서 피어난다. 꽃의 출현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있음은 다시 없음으로 향한다. 시인은 사라진 것을 그리움의 언어로서 묶고 기록하고 보존한다. 시인에게 그리움 없는 기다림과 기다림 없는 그리움을 상상할 수 없다. 그리움과 기다림은 실존하는 존재 내면에 깃들어 있는 영혼의 의지가 스며있다. 이 시에 나타난 ‘꽃’은 여기 없었던 것이 현현되는 것으로서 실존하지 않았던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꽃이라는 상대가 있기까지 시인의 그리움은 대상에게 깃들여 있는 영혼이며,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해서 나온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꽃소식”에서 ‘꽃’이 온 것이 아니다. 이 소식은 “마음이 온통 달아”있는 시인의 기다림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찻잔으로/가는 손길”처럼 자신도 모르는 정신의 움직임이다. ‘꽃 한 송이’는 ‘체화된 꽃의 몸’이 되지만 이것을 피어나게 하는 것은 ‘내 안에서 벙그는’ 마음이다. 이러한 작용은「마음 한 장」에서 확대되기도 하지만 축소되기도 한다. 마음은 향기도 빛깔도 없지만 이것을 “펼치면/온 우주를/다 덮고도 남지요”라는 시인의 역설적 발상은, 확대은유가 되기도 하지만 “오므리면/손바닥보다/작은 것이 되지요” 축소은유가 된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천하를 얻은 사람도 “마음과/마음 사이에서/웃고 울며 살지요” 소박한 심상을 통한 세계에 대한 시인의 통찰은 바로 깨달음의 민낯을 방출한다. 이것은 현실의 파편화되고 분열된 세계를 ‘마음 하나’로 무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마음 하나로 보는 시인의 세계는 이상적인 세계로의 진입을 염원하는 시적 해석이면서 ‘인간 전체성’을 이해하려는 ‘윤리적 성취’일 수 밖에 없다.

 

하늘의 벅찬 숨결

그대로 땅이 받아

 

홀로된 꽃대궁도

꽃씨를 받아 둔다

 

순간은 모두 꽃이다

네 남루도 그렇다

 

「꽃, 그 순간」

 

김민정 시인에게 꽃은 그리움을 피어 올리는 ‘언어의 정령’이다. 그는 실체화되지 않은 대상에 영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즉 미생의 세계를 선험적으로 알고 있다. 말하자면 씨를 뿌리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과정을 누구보다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꽃이 피는 순간을 포착하여 시인의 정서를 투과시켜 시적언어로 생성한다. 따라서 그에게 꽃은 세계를 사유하는 ‘인식의 사유체’라고 할 것이다. 인식의 사유체는 세계를 길들여진 현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의 이면을 직관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닐까. 물론 여기에는 시인만의 시적 상상이 언어의 토양이 되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시선―내―없음’이지만 ‘시선―외―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시인의 가득 찬 상상으로서 존재 이면을 볼 수 있게 된다. 그에게 상상은 ‘하늘의 벅찬 숨결’이며 그에게 시는 ‘그대로 땅이 받아’ 쓴 상상력으로 가득 찬 언어의 세계에서 불러오는 것임이 틀림없어 보인다.「꽃, 그 순간」과 같이 “홀로된 꽃대궁도” 다음을 준비하는 ‘꽃씨’는 시인으로 하여금 축척되어진 발효물이 되는 바, 이 “순간은 모두 꽃”이라는 시의 발화 가능성을 안고 있는, 토양이 되는 것이다.

 

 

진한 커피

한 모금,

네 생각을 마시다

 

궁금함을 삼킨다

 

그리움을 삼킨다

 

영롱한

사리 한 방울

내 안에서 커간다

 

「커피 한 모금」

 

상실은 체험에서 파생되며 의식의 세계에서 증폭된다. 결핍이 많다는 것은 상실의 자리가 크다는 의미로 풀이 된다. 김민정에게 시는 상실의 자리를 서정적으로 그려내는데, 서정성이 외부에서 내부로 향할수록 ‘낭만의 진폭’이 비례적으로 커진다. 그것은 휘발된 대상의 여백을 메우려고 초장에서 보여주는 ‘커피’ ‘한 모금’ ‘네 생각’처럼 상실의 대상을 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대상을 중장에 불러와 “궁금함을 삼킨다/그리움을 삼킨다”에서처럼 그것을 즐기며, 추억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결핍은 상실의 대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실의에 던져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실감을 되풀이 할수록 “영롱한/사리 한 방울/내 안에서”에서 자란다는 것이다.

「커피 한 모금」에서 김민정의 시는 앞서 본 ‘꽃의 출현’같이 없음에서 있음으로, 혹은 있음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그리움의 언어로 묶고 기록하고 보존한다. 그것은 ‘상실의 계절’을 표상하는 가을로부터 낭만적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시인의 낭만은 가을의 소멸을 절망이나 허무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며, 희망이 거세되어 가는 가을의 중심에서 도피의 공간으로 낭만성을 추구하지 않고, 사물 이면의 세계에서 이상적인 것을 찾아 나선다. 또한 기차역에서는 타자와 세계로부터의 억압을 탈각하고 자유를 드러내는 공간이 아니라 이러한 과거로부터 떠나온 ‘배후의 그리움’을 낭만적으로 추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민정은 ‘상실된 장소’에서 ‘연소된 기억’을 ‘변증적 언어’로 전이하여 건져낸다. 따라서 주체가 감당하고 있는 ‘소멸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자극 받아온 “영롱한/사리 한 방울”같은 ‘상처의 문양’을 발견하게 해 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