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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조평

원시적 상상력의 탄력과 실존적 상상력의 빛살 - 『백악기 붉은 기침서평』서평(이지엽)

by 시조시인 김민정 2014. 11. 2.

원시적 상상력의 탄력과 실존적 상상력의 빛살

-김민정 시인의 작품론

 

                                                  이지엽 (시인 ․ 경기대학교 국문과 교수)

 

이번 김민정의 시집 『백악기 붉은 기침』표4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김민정 시인의 이번 시집은 백악기나 빗살무늬 토기의 원시적 상상력이 금강과 사막의 역사적․ 실존적 상상력이 만나고 있다. 연어처럼 아득한 모천을 거슬러 오르기도 하고 허난설헌이나 낙타, 주목이 되기도 하지만 몽돌과 가을 종소리와 굴렁쇠의 둥긂을 지향한다. 오랜 세월 벼린 날들이 반짝거리고 있다. 55편의 정제된 저 탄력의 힘살! 팽팽하다. 빛저운 노래, 가편의 절구들이여. 드디어 한 시인의 길을 확 열어 재꼈다.

말하자면 시적 상상력의 탁월함을 얘기한 셈인데 이 상상력의 근간은 시적 대상을 내면화하고 직조하는 능력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탄력의 힘살이 팽팽하게 느껴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치밀한 구성에서 연유한다. 시인도 시인의 말에서 이 작품들이 2005년에서부터 10년 동안 쓴 작품으로 “시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작품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시의 본질”을 운위할 때 시의 구성을 논외로 하기 힘들며, 시의 구성은 주지하다시피 시적 대상을 내면화하고 직조하는 능력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시적 상상력은 원시적 상상력과 역사적․ 실존적 상상력으로 두 가지 방향에서 시도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 글에서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한다.

1. 내면과 깊이의 직조력

하늘의 벅찬 숨결

그대로 땅이 받아

홀로된 꽃대궁도

꽃씨를 받아둔다

순간은 모두 꽃이다

네 남루도 그렇다

-「꽃, 그 순간」전문

김민정 시인의 이번 시집 『백악기 붉은 기침』은 이전의 시집과 달리 어느 작품을 붙잡아도 긴장감이 느껴진다. 확실히 작품이 달라졌다. 빈틈없는 직조력, 내면과 깊이를 꿰뚫는 투시력, 삶의 아픔과 고뇌를 보는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꽃, 그 순간」에서 첫수에서는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간명하게 잡아낸다. 하늘의 호흡과 숨결을 땅이 그대로 두말없이 이어 받는 것이라는데 묘사(description)가 아니고 진술(statement)이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도 울림이 있다. 사고적思考的, 고백적告白的, 해석적解釋的이다. 진술이 갖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수는 이를 이어 받아 구체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홀로된 꽃대궁도/ 꽃씨를 받아둔다”는 것은 가시적可視的, 제시적提示的, 감각적感覺的이다. 하늘의 모습을 땅이 이어받는 실제의 모습이다. “홀로된 꽃대궁”은 소외받은 한미한 존재를 일컫는다. 그러한 보잘것없는 존재들도 “꽃씨를 받아”둔다는 것이다. “꽃씨”는 다음을 기약하는 생명의 결정체니 이생이 비록 아픔이나 고통 속에 좌절한 삶이었더라도 다음 생은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이기를 염원하는 마음 때문이다. 볼품 없는 것이 땅의 일이지만 “씨앗”의 하늘 모습을 이어받고 싶은 것이다. 종장 첫수에서는 다시 “순간은 모두 꽃이다”라는 진술적 표현으로 다시 긴장을 유도한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꽃이라는 것이다. 실체의 꽃이 져도, 빈 뜰이어도 꽃이라는 것이다. 모든 순간이 꽃이고 “네 남루” 또한 그러하니 “남루”가 결코 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난이 어찌 흠이 되고 왜소함이 어찌 결함이 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꽃, 그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진술과 이를 이어받는 묘사가 두 번 반복됨으로써 시상을 집적해나가는 치밀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시에 있어서 묘사(description)와 진술(statement)은 매우 중요한 두 축이다. 묘사에 치중한 시는 산뜻해서 보기는 좋지만 깊은 맛이 덜하기 마련이다. 묘사는 언어를 회화적인 방향으로 명료화시키지만 진술은 언어를 사고의 깊이로 체험화시킨다. 좋은 시는 묘사와 진술의 절묘한 조화에서 탄생됨은 물론이다.

“톡, 톡, 톡/가을 햇살로/문자 보내오”는 「구절초 벌초」에는 할아버지의 정감어린 모습이 오밀조밀하게 잘 짜여있고,「주목 앞에서」에서는 “사막을 건너느라 부르튼 시간의” 맨발을 밀도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길이 춤춘다」에서는 “길 끝에 나풀거리는 저 노랗고 흰 나비 떼”에서 보듯 순간적인 착상이 빛나면서도 잘 정제되어 시상이 안정적이고 「폭포와 시」에서는 “단 한 번 직활강直滑降으로/ 내려 뛰는 저 단애斷崖”의 기운찬 직필의 묘사도 좋지만내 몸의 관절마다/푸른 별이 돋는다”는 진술적 표현들도 시선을 잡아끈다.

2. 원시적 상상력의 탄력

김민정 시인의 시편들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원시적 상상력의 탄탄함이 보이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는 점인데 시집 표제가 나오는 다음의 시에서도 이러한 면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바람 타고 날던 익룡

이곳 미처 몰랐을까

백악기 붉은 기침

이제 막 터져올 듯

오래된 미래 같은 곳

푸드득 활개친다

-「심포 협곡」첫수

시인은 「심포 협곡」을 백악기 시대로 끌고 가버린다. 심포협곡은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곳으로 트래킹 코스로 개발되고 있는 곳이다. 겨울에는 설경에 매료되기도 하는 이곳은 국내에 하나 밖에 없는 통리역과 도계구간의 지그재그 철도(스위치백) 폐선구간 16.5km를 활용하여 인크라인 트레인(스위스형 산악열차)과 스위치백 트레인(증기기관차) 등의 철도 체험시설들이 들어서고 있기도 하다. “백악기 붉은 기침”은 그러면 어떠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백악기는 중생대를 셋으로 나눈 것 중 마지막 시대로서, 약 1억 3,500만 년 전부터 6,500만 년 전까지의 기간을 말하는데 말하자면 까마득히 먼 생명의 시원을 담고 있는 성소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붉은 기침”은 직접적으로는 동이 트는 모습을 이미지화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보다 웅혼한 모습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잠속에 들었다가 이제 막 잠깨는 모습을 시각적 이미지로 잡아내고 있는데 마치 금방이라도 그 기침소리가 들려올 듯 선명하다. 그러기에 그곳은 수천만 년 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서도 “오래된 미래 같은 곳”이며, 아득한 과거와 미지의 미래가 공존하는 곳이다. 까마득한 과거가 “푸드득 활개”치며 살아있는 곳이다.

육천 년 전의 얘기를 “눈길 덥석 잡아끄는” 「빗살무늬 토기」에서도 시인은 “물결로 바람으로 잎맥으로 생선뼈로/신석기 생의 무늬 나긋나긋 굽는 동안/못 이룬 사랑도 몇 닢 얹어놓고 싶었을까”라고 얘기하며 바로 옆에서 본 듯 못 이룬 사랑의 감정을 정감 있게 풀어낸다.

몽촌의 봄기별이 꽃 피듯 건너오는

붉어진 배롱나무 기대어선 선사시대

투명한 살결만 같은 그 내력을 읽는다

-(중략)

햇살 따라 얼키설키 엮어가는 역사의 장

그 속에 피던 사랑 배롱꽃에 어리는지

이 아침 한강변 어귀 옛사람의 숨결 깊다

-「움집의 내력」첫수와 셋째수

「움집의 내력」에서도 선사시대의 주거지인 움집에 대한 “투명한 살결”을 읽어낸다. 도시 공간에 자리잡은 몽촌토성은 “흘러가는 시간 속을 흘러”와서 존재하는 현재적 공간이다. 선사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의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은 “붉어진 배롱나무”다. 배롱나무의 나무껍질이 주는 “투명한 살결”은 선사인들의 순결한 영혼을 닮았고 그 속에 피던 사랑이 오늘 이 도시의 “아침 한강변 어귀”에도 울려난다는 것이다.「심포 협곡」에서 수천만 전의 신화적 모티프가 오늘의 현장에서 활개치며 살아나듯 「움집의 내력」에서도 옛사람의 숨결이 오늘의 삶에 얼비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문학이 지리멸렬해가는 시점에 원시적 상상력은 그것 자체가 갖는 의미가 상당하다. 이에 대한 가치를 폄하하기 일쑤이고 심지어는 아예 이에 대해 창작하는 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가 더 편리해지고 풍요해질수록 우리 뿌리에 대한 갈증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원시의 것이나 신화 원형을 그대로 복원하고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시는 논픽션이 아닌 전논리(前論理)며, 동시에 오늘의 호흡을 담고 있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민정 시인의 시쓰기는 이러한 시 창작의 정도(正道)를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3. 실존적 상상력의 빛살

원시적 상상력의 탄탄함이 보이는 작품들과 더불어 실존적 상상력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상당수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존재적 성찰과 연결될 때 인간 실존의 문제로 투영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점은 「낙타」와 같은 작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겨운 삶 등에 지고 모래밭을 타박이며

얼마나 느린 발길로 너는 걸어 왔을까

시간은 모래바람 속, 온 길이 다 묻힌다

너를 통해 흘러왔을 나의 강을 바라보며

뜨거운 고도 향해 휘파람을 불어가며

혹처럼 굽은 생애가 신기루로 흐른다

오랜 어둠을 깨며 멀어지는 밤 같은

한 생애 푸른 비단을 펼쳐놓은 저 달빛

속눈썹 짙게 젖어든 외로운 등이 휜다

-「낙타」전문

시인은 「낙타」를 통하여 낙타가 지닐 수밖에 없는 외로움을 밀도 있게 나타낸다. 그 외로움에 대한 자각은 달빛에 “푸른 비단”처럼 드러나면서 감각적으로 세미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이 인식은 “겨운 삶 등에”진 모래밭의 현실과 맞닥뜨리고 있다. “시간은 모래바람 속, 온 길이 다 묻”는 인고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인 셈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첨예한 인식이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과 만날 때 작품은 실존의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낙타가 사막의 현실을 살아남기 위해 가질 수밖에 없는 “혹처럼 굽은 생애”를 생각하며 달빛 아래 “외로운 등”을 휘는 시적자아의 고뇌가 고즈넉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한 때는 물이 흘렀을

건천을 지나가며

내 생도 지고 가는

목마른 낙타 등에

사막을 가로질러 온

낮달 저만 드높다

길이 자꾸 늘어지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힘들게 해도 여기에서도 시적자아는 “죽비로 치는 햇살 /온 몸으로 견뎌내며/시간을 되감아”나아가고 있다. 거침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공존하는 “모랫바람 비단길”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주어진 길인지도 모른다.

“비무장지대” “상팔담” “만물상”등 잊혀진 조국의 강토를 그리고 있는 「금강시편」“역사는 승자의 몫 패자는 말이 없다”면서 “산자락에 수런대는 궁예의 옛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억새이야기」에서도 시인의 이러한 실존의식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이번 김민정 시인의 『백악기 붉은 기침』에서는 빈틈없는 직조력, 내면과 깊이를 꿰뚫는 투시력, 삶의 아픔과 고뇌를 보는 힘이 느껴진다. 묘사(description)와 진술(statement)의 어울림을 통하여 시각적이면서도 울림을 동반하는 깊고 좋은 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원시적 상상력의 탄탄함이 보이는 작품들과 더불어 실존적 상상력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상당수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존재적 성찰과 연결될 때 인간 실존의 문제로 투영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많은 시집들이 발간되지만 정말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집은 그리 많지 않다. 올해 들어 가장 의미 있는 정형시집을 꼽으라면 필자는 김민정 시인의『백악기 붉은 기침』을 꼽을 것이다. 한 매듭을 이루었으니 생의 고뇌와 자유가 더욱 농익는 더 높고 원숙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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