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이 한몸을 이룬 시
박몽구
김민정은 그 동안 '영동선'을 소재로 한 일련의 시조 작품들을 통해, 이 땅의 민초들이 온몸을 바쳐 지켜온 우리 강토와 역사의 면면들을 추적, 형상화해 온 시인이다. 영동선은 일제시대 수탈을 위해 일본인들이 만들었고, 그 속을 살다간 사람들은 근대사의 한 단면이다. 그는 서사가 많지 않은 우리 시조 문학사 가운데서 영동선과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엮어낸 민초들의 유장한 드라마를 통해서 참다운 역사의 길과 인간상을 모색해온 보기 드문 시인이다. 시인은 인생막장, 막장인생의 현실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불꽃의 희망을 이뤄내는 강인한 광부의 존재를 열악한 삶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생명력을 잃지 않는 민족혼을 그려내는 데 열정을 쏟아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이번 시집 『백악기 붉은 기침』은 그간 김민정이 줄기차게 천착해온 영동선을 둘러싼 민초들의 드라마가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몽골여행 등에서 만난 동질성의 체험이 더해져 있고, 시어들은 더욱 촘촘하게 직조되어 있다. 이와 함께 깔끔한 서정적 이미지를 더하여 새로운 진경을 선보이고 있다.
바람을 켜고 있는 색동의 바람개비
온 종일 일렬종대 누구를 맞고 있나
고향역 아리는 눈길 저 너머 언덕을 본다
산정보다 높게 앉은 잔설 위 햇살처럼
두고 떠난 옛길들이 얼굴 환히 돌아오고
윤이월 깨무는 속살, 봄의 촉이 트고 있다
-「추전역에서」전문
위의 시의 제재인 '추전역'은 태백선에 있는 조그마한 역으로 우리나라에 있는 역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석탄산업이 활발하던 시절에는 인근에 있는 사북, 태백역과 더불어 활기를 띤 역이었지만 지금은 일반열차는 서지 않는 곳이며 O-트레인열차와 겨울의 눈꽃열차가 정차하는 관광열차만이 정차하는 곳이다. 화자는 서두에서 '바람을 켜고 있는 색동의 바람개비'라고 묘사함으로써, 탄차들이 오가고 사람들로 붐비던 시절의 기억을 환기하고 있다.
'색동'과 '바람개비'라는 사물언어의 대치를 통해 많은 말들을 함축하고 있다. 둘째 수의 결구에서 '두고 떠난 옛길들이 얼굴 환히 돌아오고// 윤이월 깨무는 속살, 봄의 촉이 트고 있다'라고 제시함으로써 겉으로의 화려함을 넘어 스스로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윤이월'은 태백지역에 유난히 더디 오는 봄을 상징하고, '봄의 촉'은 온갖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민초들의 의지를 상징한다.
이번 시집에서 김민정은 단단하게 함축된 이미지를 구사하는 한편 깔끔한 서정으로 읽는 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또한 그의 정신적 고향인 강원도 산간 마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자연을 소재로 도입함으로써 그만의 공간을 확고하게 형성하고 있다.
살아서 이루고픈 꿈이 무엇이길래
이미 죽은 가지 끝이 뭐라고 말을 한다
그 말을 받아쓰느라 바람결이 움찔한다
내 생의 발자국에 우기가 지나간다
사막을 건너느라 부르튼 시간의 발
죽어도 여기 보란 듯, 그 맨발을 내보인다
- 「주목 앞에서」전문
주목은 주로 강원도 고산지대 등에서 어려운 자연조건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이라는 전치사가 분을 정도로 줄기찬 생명력을 자랑하는 나무이다. 첫수에서 화자는 '이미 죽은 가지 끝이 뭐라고 말을 한다// 그 말을 받아쓰느라 바람결이 움찔한다'고 그 같은 주목의 생명력을 환기하고 있다. 바람결마저 그 같은 주목의 생명력 앞에서는 받아쓰듯 움찔한다고 말함으로써,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켜가는 산간지대의 귀빈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주목은 혹독한 겨울에도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생명력을 이어가는 태백산맥 일대의 민초들을 환유한다. '내 생의 발자국에 우기가 지나간다'는 대목은 화자 개인의 위기를 넘어, 태백을 둘러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맞고 있는 난관의 제유적 표현이다. '사막', '죽어도' 등의 시어를 통하여 그 같은 고난이 정점에 달해 있는 상황을 암시한다. 하지만 화자는 맨발이란 시어를 통하여 죽어도 천 년을 제자리를 지키는 주목의 덕목을 상기시키면서, 석탄시대의 화려함은 사라졌어도 태백인들의 삶은 면면이 이어져 나갈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다.
펄펄 끓는 흰 눈발이
자작나무 숲에 얹혀
귀 대이고 부푼 고요 적막의 성을 쌓아
거대한 신운의 무게 말문의 벽 허문다
작은 길 오솔길에 숨어든 작은 짐승
새끼들 건사한 채
속삭이는 뜨거운 사랑
겨울숲 까마득한 벼량 뚝뚝 꺾인 실가지
바람이 거센 밤은 꿍꿍 산이 울었다
눈보라 뿌연 비상 나무 끝에 맺는 흰꽃
저 깊은
화엄의 썰물
태어나는 돌부처
- 「겨울숲 인상」전문
김민정의 이번 작품집에서는 그의 시선이 영동선을 벗어나 한층 넓어진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위에 든 작품은 그 같은 면들을 잘 확인시켜 준다. 지역을 한정하지 않은 채 우리 국토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겨울숲'이 제재로 채택되어 있다. 기법 면에서도 명징한 묘사와 아이러니가 어우러져 깊이를 더하고 있다. 서두에 제시된 '펄펄 끓는 흰 눈발'은 역설적 표현으로 삶에 겨울이 닥칠수록 굴하지 않고 더욱 줄기찬 생명력을 보여주는 민초들을 상징한다. 화자는 그같이 차가운 겨울을 뜨겁게 살아가는 것은 '새끼들 건사한 채/ 속삭이는 뜨거운 사랑'을 지켜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 같은 이타행의 완수를 위해 벼랑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생명력을 '겨울숲 까마득한 벼랑 뚝뚝 꺾인 실가지'는 인간살이의 참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눈보라 뿌연 비상 나무 끝에 맺는 흰꽃'은 그 같은 어려움을 이기고 개화한 사람살이의 상징이다. 화자는 이같이 겨울숲이 어려움을 견뎌내는 모습을 가리켜 '화엄'이자 '돌부처'로 은유하고 있다. 사람살이가 이겨내는 어려움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의 완성이라는 아이러니가 잘 형상화된 작품이다. 세 수로 나누면서도 적절한 행 가름을 통하여 더 많은 말들을 함축하고 있는 실험정신에도 주목이 간다.
살아생전 그 사랑은
아득도 하였거니
붓자루 쥔 손도 놓고
꽃송이로 저문 그대
잔디 빛
푸른 슬픔에
온 들녘이 환합니다
하늘도 품을 열어
가랑비를 흩뿌리고
그 비에 젖는 시비
고즈넉한 저녁 한 때
물안개 피는 발자국
점점이 머뭅니다
-「붓자루 놓고 - 허난설헌」전문
허난설헌을 제재로 하여 이타적 여성상의 형상화로까지 넓혀진 시인의 시각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화자는 '붓자로 쥔 손도 놓고/ 꽃송이로 저문 그대'라고 언술함으로써 허난설헌은 비록 자신의 삶을 채 다 펴보지 못한 채 갔지만, 뒷사람에게 '꽃'이 되었다는 인식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아이러니의 미학은 이 작품의 한 축이 되고 있다. '푸른 슬픔에/ 온 들녘이 환합니다', '그 비에 젖는 시비…물안개/ 피는 발작국' 등의 구절을 통하여 허난설헌이 몸소 겪어낸 삶의 고통은 그것으로 저물기보다, 뒤에 오는 이들에게 밝은 사표가 되어 새롭게 피어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직접적인 언술을 넘어 명징한 이미지의 제시로 대체해 가는 수사가 시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돈황 명사산鳴砂山에
모여 사는 바람 있다
잔양殘陽이 능선 위로
저미듯 스며들 때
발자국 남기지 않는
길목을 따라 간다
아랫녘은 푹푹 빠져
발목이 다 잠겨도
바람들이 다져놓은
언덕으로 오를수록
단단한 울음의 뼈가
문양으로 드러난다
- 「모래울음을 찾아」 전문
이번 시집에서는 몽골이나 고비사막 등 시인의 해외 오지여행에서 얻은 체험이 바탕이 된 시편들을 다수 만날 수 있다. 비록 외국 체험이기는 하지만, 어려움을 넘어 인간다움을 향해 가는 공통의 언어를 읽을 수 있다. 위의 시는 중국 동부의 사막 지대 한가운데 자리잡은 '돈황' 체험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화자는 '발자국 남기지 않는/ 길목을 따라 간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역사마저 기록할 틈이 없이 벅찬 삶을 꾸려가야 했던 사막 유목민의 삶에 주목하고 있다. 나아가 '바람들이 다져놓은/ 언덕으로 오를수록// 단단한 울음의 뼈가 문양으로 드러난다'라고 결구함으로써 그같이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김이 없이 헌신한 인간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사막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꾸려가는 삶을 '울음의 뼈'로 환유하는 한편 그 대척점에 아름다운 '문양'을 둠으로써, 우리 눈에 보이는 역사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민초들의 땀과 눈물이라는 인식을 함축하고 있다.
김민정은 이번 시집에서 '영동선' 주변의 사람들을 넘어 한층 확장된 시각으로 묵묵히 역사의 저변을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는 결코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이 민초들이 이루는 드라마를 그려나가는 한편, 명징한 이미지를 동반한 서정으로 뒷받침함으로써 그만의 시조 세계를 구축해 보이고 있다. 그가 만나는 자연은 언제나 사람살이의 모습과 단단한 환유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자연에서 사람살이의 철리를 읽어내는 데 있어 독특한 일가를 이루고 있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법이 없이 풍부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사물언어를 두루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도 이번 시집은 그의 시세계에 새로움을 더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이 한 몸을 이루는 그의 시세계가 심화되기를 기대한다.
(박몽구(시인, 시와문화 발행인), 《시조시학 2014 겨울호》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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